은밀한 거래
거짓말이야. 아닐 수도 있고.
“당신은 실수한 거야. 큰 실수를 한 거야.”
루시네는 입에 물린 재갈을 빼자 비명을 지르거나 우는 대신 나지막한 어조로 을러댔다.
“그 애를 진정시킬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는데 당신이 다 망쳤어! 우린 도망쳐야 해. 여기를 떠나야 한다고. 그 애가 언제 올지 몰라.”
두려움에 젖었으면서도 한편으로 독기 어린 목소리였다.
“그 애가 누구지?”
메칼로가 묻자 루시네는 벌거벗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야티.”
그녀가 두려운 신의 이름을 말하는 것처럼 속삭였다.
“하야티 말이야. 당신들이 찾고 있는 괴물.”
“그 아이에 대해 말해 봐라.”
“차라리 모르는 게 좋을걸! 알고 나면 밤마다 잠들기 전에 그 아이가 너를 절대로 모르길 기도할 거야. 세상 반대편에 있기를, 꿈에서도 만나지 않기를.”
루시네가 이를 갈며 말했으나 메칼로는 빙긋 웃었다.
“내가 자기 전에 하는 일은 기도와 거리가 먼데, 덕분에 경건한 생활을 할 수 있을지 확인해 보자고.”
루시네는 그의 태연한 얼굴을 얄미운 듯 쏘아본 다음 입을 열었다.
“그 애 이름은 하야티이고, 열네 살 먹은 사내아이였어.”
“사내아이였다?”
“그래. 그랬었지. 작년까지만 해도 그랬어. 조용하고 예민하고, 이상한 능력이 있어서 더 그렇게 느껴졌는지 몰라도 음침한 구석이 있는 것 말고는 어린아이에 불과했어. 하야티라는 이름 말고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다들 그 애가 영주님의 자식이라고 수군거렸어. 부인의 태도로 봐서 사생아는 아니고, 무슨 이유가 있어 남들 모르게 키우고 있는 거라고······.”
루시네가 하야티를 처음 만난 것은 6년 전이었다. 그녀는 형제가 많은 가난한 집안의 네 번째 딸이었고 부모는 먼 곳에서 하녀를 구하러 왔다는 남자에게 돈주머니를 받고 딸을 넘겼다.
“사람들은 그 남자가 포주라고 했고 아마 부모님도 그렇게 생각했을 거야. 어쩔 수 없었지. 찢어지게 가난한데 입 하나를 더는데다 돈까지 받을 수 있었으니까. 그런 집은 우리 말고도 많았어. 나는 그때까지도 동물들을 불러 모으는 재주밖에 없는 시메트라의 신자였어. 부모님은 나를 양치기한테 시집보내야 하겠다고 농담하시곤 했지.”
루시네도 막연하게 그런 미래를 꿈꾸고 있었다. 그녀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미래였다.
“금기를 지키는 것도 능력이 도움이 되어서라기보다는 밤중에 심부름을 하지 않아도 되고 일찍 잘 수 있는 핑계니까 그랬던 거고. 그런 처지였으니까 달리 쓸 데도 없고, 창녀가 되면 굶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막상 와보니 정말로 하녀더라고. 운이 좋다고 생각했어. 영주님의 별장에서 살게 되다니. 이곳에서는 하녀들도 깨끗한 옷을 입고 매일 세 끼를 다 먹더라고.”
그러나 막상 일을 시작하자 이상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내가 하는 일은 별 거 없었어. 별장에 사는 어린애 수발을 드는 거였지. 말수도 없고 잘 웃지도 않는 사내아이였는데 하루 종일 집안에 틀어박혀 책을 읽거나 기르는 동물들과 놀거나 하는 게 다였어.”
소년이 키우는 짐승은 많았다. 고양이가 세 마리, 개가 다섯 마리, 그 외에 수많은 새를 키웠다. 방마다 새장이 걸려있을 정도였다. 물론 그것들을 보살피는 것은 모두 하인들의 몫이었다.
“밖으로 나갈 때도 꼭 개를 한두 마리 데리고 다녔어. 그래서 나는 그 애가 동물을 정말 좋아하는구나 생각했지. 그런데 아니었어.”
루시네는 말하다 말고 문득 몸을 떨었다. 그녀가 몸을 움츠리고 가련한 얼굴을 하고 있어도 메칼로는 벗은 몸을 가려주거나 묶인 것을 풀어주지 않았다. 루시네는 그가 꿈쩍하지 않자 포기하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별장에 온지 네 달째 되는 어느 날이었는데, 무슨 일인지 몰라도 영주님이나 마님이 오랫동안 별장에 찾아오지 않아 하야티가 점점 예민해지던 참이었어. 평소보다 짜증이 늘고 계속해서 기분이 나쁜 채로 있는데 기르던 강아지 한 마리가 장난으로 하야티의 발목을 물었던 거야. 자국만 조금 날 정도로 살짝 물었는데도 하야티가 소리를 지르면서 화를 냈어.”
항상 조용한 아이여서 화를 냈을 때 루시네는 조금 놀랐다. 그녀가 어서 달래줘야겠다고 생각하며 다가가는 순간 다시는 보기 싫은 광경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강아지의 몸이 산산조각 나버린 것이다.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튀었다. 하야티의 온 몸이 붉게 얼룩졌다. 루시네는 하야티를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강아지 때문에 놀라서가 아니었다. 소년 때문이었다.
강아지의 피와 살점으로 얼룩진 소년이 아무 것도 입지 않은 알몸이었던 것이다. 강아지가 발목을 물었던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아침에 입혀준 옷과 양말을 모두 갖추고 있었는데.
그런데 소년은 지금 갓 태어난 것처럼 벌거벗은 채로 흰 몸에서 붉은 피를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런 소년의 발치에 옷이 펼쳐진 것을 루시네는 보았다. 그것은 정말로 기묘한 광경이었다. 옷은 소년의 몸이 연기가 되어 빠져나간 것처럼 몸에 입혀졌던 모습 그대로 결합된 채 바닥에 놓여 있었다.
루시네는 조금 전 본 광경을 저도 모르게 떠올렸다. 너무 놀란 나머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는 채로 기겁을 했지만 강아지가 산산조각 나서 터지는 그 순간에 소년은 알몸인 채로 바로 그 한가운데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강아지 몸이 터지면서 그 안에서 하야티가 나온 것처럼 말이야.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는 건 알아. 정말로 눈 깜짝할 순간이었으니까 내가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었어. 하지만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어. 그런 일이 벌어지니까 다른 개들이 놀라서 컹컹 짖었고 그러자 하야티는 다시 개를 노려보더니······.”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개였다. 그 개의 몸이 갑자기 부풀었다. 팽팽하게 부풀다 못해 찢어지는 순간 다시 한 번 피와 살점이 날았다. 뭉개진 내장이 쏟아지고 조각난 가죽이 흩어지며 방안이 온통 붉게 얼룩졌다.
“난 제정신이 아니었어. 도망치고 싶었지만 몸이 꼼짝도 안했으니까 어떻게든 하야티를 진정시켜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지. 그러려면 짐승들이 조용해야 했어. 동물에게 말이 통할 리가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제발 조용히 해달라고 애원했어. 아니 애원하려고 했지. 입을 열었는데 말 대신 이상한 소리가 나왔어.”
사람의 것이라고도 짐승의 것이라고도 할 수 없는 기묘한 소리였다. 그것만으로도 놀랐는데 더 놀라운 일이 생겼다. 갑자기 방안의 모든 동물들이 조용해진 것이다. 동물뿐만이 아니었다. 하야티까지도 얌전해져서 무기력하게 주저앉았다.
“그때부터 가능했던 거야. 동물들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건.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는 나도 몰라. 살고 싶은 마음이 기적을 일으킨 걸 수도 있고, 신의 자비로운 변덕일 수도 있고······.”
“그것이 각인이다. 시메트라의 각인자는 본래의 능력을 강화하는 권능을 받지. 너는 시메트라의 각인자였던 거다. 그렇게 나이가 든 후에 발현하다니 드문 일이지만, 각인의 발현이 늦는 것은 좋은 일이지. 그만큼 오랫동안 평온하고 두려움 없는 삶을 살았다는 뜻이니까.”
메칼로의 말에 루시네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런······그럴 리가······하! 그런 말도 안 되는······.”
더듬거리며 부정하던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좋긴 뭐가······ 그렇게 가난하고······ 쓸모없는 아이들만 우글거리고······ 아버지는 많은 가족들을 위해 죽도록 일만하고······ 어머니는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허드렛일이나 하면서······침대도 없이 바닥에서 자고 걸핏하면 굶고······그런 게······.”
하지만 그리웠다는 것만은 그녀도 부정할 수 없었다. 좋은 옷을 입고 잘 먹고 침대에서 잠을 잘 때마다, 이런 것을 누리지 못한 형제들이 떠올랐던 것이다. 두려울 때, 모든 것을 팽개치고 달아나고 싶을 때 그녀가 기억하는 도피처도 지금으로서는 어떻게 찾아가야 할지도 모를 집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오고 나서야 그녀도 알게 되었다. 그동안 그녀가 생각했던 두려운 일이나 걱정거리 따위는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세상에 가득한 위험의 그림자에도 미치지 못했다는 것을. 가족들과 함께 있을 때는 전혀 몰랐다.
루시네는 묶였던 몸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움직일 수 있게 되었지만 꼼짝하지 않았다. 고개를 들었다가 우는 모습이 들키기는 싫었다. 울음소리를 참느라 일그러진 얼굴이 꼴 보기 싫은 모양일 거라고 생각했다가, 이 순간에도 저런 남자에게 밉게 보이기 싫어하는 자신을 마음속으로 비웃었다.
‘저런 잔인한 남자에게······.’
그러나 그 남자가 모포를 가져와 덮어주자 루시네는 그것을 머리끝까지 끌어당기고 입을 틀어막으며 울었다.
자신을 위한 울음이었다. 결코 돌아오지 않을 어린 시절을 위한 울음이기도 했고, 세상에 혼자 동떨어지고 살아남기 위해 뒤 돌아보지 않고 걸어야 했던 소녀를 위한 울음이기도 했으며, 한 순간 나락에 떨어져버린 지금의 자신을 위해서기도 했다.
메칼로는 그녀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
숨을 꺽꺽거리게 될 때까지 울고 나서, 루시네는 모포를 머리까지 뒤집어쓴 채로 일어나 앉았다.
“이제 다시 질문해도 될까?”
메칼로가 아무렇지 않게 묻자 루시네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밤새 물어보라고. 그러다 때를 놓쳐서 하야티가 돌아오면 우린 모두 죽은 목숨이니까.”
“그 아이에 대해서는 너 말고도 대비책이 있겠지? 네가 오기 전에도 비슷한 일은 생겼을 거라고 보는데. 그런데도 죽이지 않고 키웠다면 그 아이의 힘을 피할 방법이 있다는 거지.”
“동물들이야.”
루시네가 내뱉듯 말했다.
“그래서 동물들을 잔뜩 키웠던 거야. 그 끔찍한 일은 하야티의 가장 가까운 대상에게만 일어나니까 어디를 가든 항상 동물들을 데리고 다니게 했어. 그러면 하야티가 갑자기 화를 내더라도 그 동물이 먼저 죽을 테니까.”
루시네의 입술이 냉소를 머금고 비틀어졌다.
“그래서 마님은 그 애를 보러 올 때마다 품안에 고양이를 안고 있었지. 고양이를 사이에 두고서가 아니면 하야티를 안아주지도 만지지도 않았어. 자기가 낳은 아이일 텐데 말이야. 그런 짓을 안 하는 사람은 영주님뿐이었어. 영주님은 정말로 하야티를 사랑하셨거든.”
“그들은 어떻게 되었지?”
메칼로의 그 질문에 곧잘 대꾸하던 루시네의 입이 갑자기 달라붙었다. 잠시 후에 그녀가 다시 입을 뗐다.
“몰라. 영주님도 마님도 얼굴을 못 본지 오래 되었어. 목소리는 가끔 듣지만······. 두 분 모두 방에서 절대로 안 나오고 음식도 용변도 방안에서 해결해. 매일 음식을 가져다주는데 그릇이 비어있으니까 먹는 줄은 알지만 안은 들어가본 적이 없어.”
“하야티가 그러라고 했나?”
“아니. 영주님이······.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어. 하야티 말고는 누구도 못 들어가. 굳이 들어가고 싶어 하는 사람도 없고. 하야티가 뭔가 한 것 같지만 그 꼴을 누가 보려고 하겠어.”
“뭔가 했다는 것은, 이를 테면?”
“몰라!”
루시네가 나직이 외쳤다.
“사람들을 데려다 뭐에 쓰는지 나도 몰라.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니까 데려다 주는 거라고.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화를 낼 테고 그러면 감당할 수가 없잖아.”
“이곳을 떠나는 방법도 있잖나.”
메칼로의 냉정한 말에 루시네는 얼굴을 붉혔다.
“잘하는 짓이 아니라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시키는 대로만 하면 이곳에서 뭐든 마음대로······. 우리도 언제까지나 이렇게 살 생각은 아니었어. 적당히 재물을 모아서 도망갈 생각이었다고. 그런데 일이 너무 커져버렸어. 잡아온 아이 중 하나가 도망쳐서 마을까지 가는 바람에, 마을 사람들이 이곳의 일을 모두 알아버렸던 거야.”
“마을 사람들은?”
“하야티가 모두 데려갔어.”
“순순히 따라가게 만든 사람은 너겠지. 어디로 데려갔나.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정확한 위치는 몰라. 거기 다녀온 사람 말로는 바다가 가까운 산속의 탄광이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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