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적(形跡)
거짓말이야. 아닐 수도 있고.
어디선가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바다가 가까운 거라고 생각해도 지금 보이는 것은 숲뿐이다. 아니 하나 더, 시커멓게 보이는 탄광 입구도 있었다.
“지키는 사람은 없소.”
입구 주변을 뚫어지게 보던 에셀이 나직이 말했다.
“안에는 몇 명이나 있을까.”
지드가 중얼거렸다.
“가보지 않으면 모르지.”
에셀이 대꾸하더니 먼저 걸음을 옮겼다. 도둑답게 그는 발소리도 없이 걸었다. 지드가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이 탄광을 발견한 것은 어둡기 전이었다. 생각보다 늦은 셈이다. 도중에 잠시 길을 잃기도 했고, 목적지가 가까워진 뒤로는 길을 벗어나 이동해서이기도 하다. 혹시 납치범 일행과 마주치게 될지도 몰라 한 일이었지만 탄광 주변에는 인적이 없었다.
대신 약간 떨어진 곳에서 일꾼들의 숙소로 쓰였음직한 건물 몇 채를 발견했다. 사용 안 한지 오래되어 부서져가는 중이었지만 그 중 하나는 새로 수리한 흔적이 있었다. 에셀이 거기에 세 명의 남자가 자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안에도 누군가 있을지 모르니 대낮에 들어가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해 밤이 되도록 기다린 것이다.
그들은 준비해 온 등에 불을 붙여 들고 탄광 안으로 들어갔다. 누군가 깨어있다면 불을 보고 단박에 침입자를 알아차리겠지만 에셀은 자신만만했다. 그는 사람이 가장 깊이 잠드는 시각을 알고 있었다. 그때가 지금이었다.
에셀이 앞장서서 굴속으로 들어가자 지드는 그의 그림자를 밟으며 걸었다. 폐광이 된지 오래였을 텐데도 최근에 사람이 오간 흔적을 금세 찾을 수 있었다.
좁은 통로를 따라 잠시 걷던 그들은 이내 넓은 공간과 마주쳤다. 등불의 빛으로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갱이 무너지지 않도록 나무로 버텨놓았던 통로와 달리 넓은 공간의 벽은 새카만 바위로 이루어져 있었다.
광장 같은 공간으로 들어서자 바닥 한가운데에 물이 고인 것과 벽을 따라 몇 개의 광구가 있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고요한 가운데 웅덩이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이따금 울렸다.
“잘못 들어가면 길을 잃겠는걸.”
광구 입구들을 돌아보며 지드가 중얼거렸다.
“이쪽부터.”
에셀이 그 가운데 하나를 가리켰다. 여느 광구와 다를 바 없었으나 가까이 가자 지드도 다른 점을 알아차렸다. 그가 인상을 쓰며 코와 입을 가렸다. 입구 안쪽으로 고기 썩는 냄새가 독하게 고여 있었다.
“산 사람이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지드의 말을 무시하고 에셀이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갈수록 냄새는 더욱 심해졌다. 지드는 이러다 질식해 쓰러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에셀의 뒷모습을 힐끗거렸다. 그러나 아르반 인 도둑의 걸음은 오히려 빨라졌다.
좁고 긴 통로가 이어졌다가 이윽고 막다른 곳이 나타났다. 앞은 가로막혔지만 아래로 뚫려 있었다. 광부들이 딛고 내려갈 수 있도록 사다리가 만들어졌으나 그것을 이용할 사람은 이제 없을 것이다. 구멍 아래로 등을 늘어뜨린 에셀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고개를 늘이고 함께 아래를 내려다본 지드도 마찬가지였다.
“우웁!”
지드가 입을 틀어막으며 몸을 돌이켰다가 곧바로 토악질을 했다. 음식을 먹은 지 오래 된 뱃속이 고통스럽게 꿀렁거릴 뿐 침과 신물만 조금 뱉어냈다.
“나, 나가자······.”
지드가 겨우 말하고 비틀거리며 걸었다. 에셀은 조금 더 구덩이 아래를 들여다보더니 이윽고 지드의 뒤를 따라갔다.
“오래 된 시체들 위로 최근 것은 두 구 뿐이오. 죽은 지 하루 이틀밖에 안 된 것 같소.”
“우욱!”
지드가 다시 욕지기를 느끼고 허리를 꺾었다. 에셀이 그의 팔을 끌어당겨 어깨에 걸쳤다. 지드는 에셀에게 기대어 후들거리는 걸음을 디뎠다. 광구에서 빠져나온 후에도 진정하지 못하고 몇 번이나 구역질을 한 지드가 결국 힘없이 주저앉았다.
“남은 광구 중 어딘가에 사람들이 갇혀 있을 거요. 감시하는 자는 이 안에 없을 것 같군.”
에셀이 나직이 말했다. 그 점은 지드도 동감이었다. 조금 전 본 광경을 떠올리고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이런 곳에 있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드는 아직까지 침착한 에셀을 올려다보았다.
“너는 어떻게 저런 것을 보고도······.”
지드가 말하다말고 입을 다물었다. 등불에 비친 에셀의 얼굴도 사납게 일그러진 것은 마찬가지였다. 찡그린 이마와 콧잔등이 땀으로 반질거렸다. 지드는 그 역시 충격을 받았고, 그럼에도 자신이 할 일을 잊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곳을 확인해 보겠소.”
에셀이 지드를 힐끗 내려다보고 말한 다음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도움 같은 것은 전혀 기대하지 않는 듯한 태도에 지드는 저도 모르게 울컥해서 벌떡 일어났다.
“걸을 때마다 토하느니 거기서 기다리는 게 낫지 않소? 도련님.”
뒤따라오는 지드에게 에셀이 놀리듯 말했다. 화를 내도 좋을 모욕적인 말이었지만 지드는 그가 비웃은 것이 아니라고 느꼈다.
“토하면서 걸어도 도둑보다는 나아.”
지드가 유치하게 대꾸했다. 뒤에서 걷고 있어 볼이 밀려나는 것이 조금 보였을 뿐이지만 지드는 에셀이 웃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남은 광구를 하나씩 확인했다. 두 개는 사람이 다닌 흔적이 없었고 하나에서는 얼마 안 들어가 썩은 채소나 호밀, 옥수수 따위가 쌓인 것이 보였다. 다른 광구로 들어가기 전에 에셀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무슨 소리 못 들었소?”
지드도 같은 생각을 했던 참이라 움직임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어디선가 희미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에셀이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뛰었다. 아직 확인하지 않은 광구였다. 오래 들어가 볼 필요도 없었다. 입구에서 조금 들어서자 나무둥치를 통째로 몇 개 세워 창살을 만든 것이 보였다.
그 사이로 뭔가 가득 있었다. 다가갈수록 구덩이에서 본 것과 같은 광경이어서 지드는 다시 속이 울렁거렸다. 울음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움직임도 없었다. 먼저 달려간 에셀이 창살 사이로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나일. 나일! 거기 있으면 대답해라.”
에셀이 나직이 외쳤다. 작게 말했어도 그의 목소리는 동굴 안에서 몇 번이나 메아리쳤다. 지드는 죽은 듯이 움직이지 않던 것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것을 봤다. 약한 불빛 속에서 사람들이 하나둘 몸을 일으켰다.
“나일. 나일. 누구 셈 마을에서 온 나일을 아는 사람 없소? 열다섯 살이고, 밝은 갈색 머리에 파란 눈이오.”
이때쯤 에셀이 납치범의 일행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창살 앞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이보시오. 우리 좀 풀어주시오.”
“나리! 살려주세요. 제발 문 좀 열어주세요.”
“제발. 제발. 여기에서 나가게 해줘요.”
사람들이 한꺼번에 아우성치기 시작하자 동굴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조용! 이러다 들키면 다 죽어!”
에셀이 짐짓 사납게 을러댔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줄어들자 에셀은 등을 문 옆에 내려놓았다. 문도 창살과 마찬가지로 나무를 통째 베어 단단히 못질한 것이었다. 쇠사슬이 창살과 문을 꽁꽁 묶었고 커다란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에셀이 자물쇠를 만지는 동안 지드가 창살 앞으로 다가갔다.
“여기에 네슬린 마을에서 온 사람들이 있나?”
“우리들 모두 네슬린에서 살았습니다, 나으리.”
지드의 물음에 누군가 대답했다.
“전부 몇 명이지?”
“여기 있는 사람은 여든 둘입니다.”
“나머지는?”
“······.”
지드가 물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고요한 가운데 자물쇠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울렸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나.”
“잡아먹혔어요!”
한 여자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루에 한 명씩 끌려 나가서, 여기에서는 안 보이지만 비명소리가 들렸어요. 괴물이 잡아먹는 거예요. 괴물에게 제물로 바치려고 사람들을 잡아오는 거라고요.”
여자의 목소리를 시작으로 봇물을 튼 것처럼 사람들의 증언이 잇달았다.
“하루에 하나일 때도 있고 둘일 때도 있어요. 우리를 잡아온 사람들 말이 맛없는 몸은 안 먹는다고 했대요. 그 괴물이······.”
“산채로 씹어 먹는대요.”
“며칠 전에도 두 명을 데려왔는데 하나는 잡아먹고 하나는 여기 가뒀다가 어제 데리고 갔어요. 열다섯 살 정도의 남자아이요. 이름은 몰라요.”
에셀이 벌떡 일어났다.
“데리고 갔다고?”
대답했던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잡아먹으려고 하는 줄 알았는데 조용한 걸 보니 데리고 떠난 것 같아요. 어딘가로 가서 며칠씩 있다고 오고는 해요. 갈 때는 사람을 한두 명 데려가고요.”
“그럼 그······ 괴물은 지금 여기에 없다는 건가?”
“오늘 아무도 안 데려간 걸 보니 없는 거예요.”
지드와 에셀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여기에 없다면 어디로 간 거지?”
쿵쿵 노커가 문을 두드렸다. 소리를 듣자 사람들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촛불을 켜고 문을 열어주고 짐을 옮기기 위해 달려 나갔다.
그 소리를 루시네는 자신의 방에서 듣고 있었다. 열려 있는 창으로 바깥의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문이 열리는 소리, 발소리, 뭔가 묻고 대답하는 소리.
루시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가 달달 떨며 메칼로를 돌아보았다.
“왔어요. 와버렸어······.”
창가로 가서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메칼로가 찡그리듯 웃었다.
“그렇군. 곤란해졌네.”
Comment '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