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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 님의 서재입니다.

남경. 상해. 봉천

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전쟁·밀리터리

완결

하산
작품등록일 :
2019.04.01 10:28
최근연재일 :
2019.06.24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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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08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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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쪽

둥베이 2)

DUMMY

순행에 나선 태후의 행차는 거창했다. 화석 공주의 아라사 방문단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일지 모르는 둥베이 순행, 태후의 각오는 남달랐다. 이참에 둥베이는 물론 기인들의 뿌리인 역사유적까지 답사할 생각이었다.

긴 여정을 함께 하며 그녀와 나, 센위는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주제는 둥베이의 역사. 전형적 무골이었던 노감왕(기하인들이 누르하치를 부르는 존칭이자 애칭)은 기록보존에 소홀해 이전 시대의 전승은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강희, 옹정, 건륭제 등 걸출한 선대들이 부국강병은 이루었지만 역사 복원에는 소홀했다. 그래서 기인의 정체성 상실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야기했다. 태후의 뒤 늦은 학구열은 황실의 관점에서는 바람직한 현상이었다.


문헌상의 첫 북방 부족은 흉노(BC 4세기경), 하지만 이때는 이미 국가규모였다. 씨족에서 국가로 가는 기간을 감안하면 이들의 출발은 적어도 1~2백 년쯤 소급해야 할 것이다.

이들은 역사무대에서 사라지는 5세기까지 천년에 걸쳐 북방의 패자로 군림했다. 처음 등장한 곳은 초원과 농경사회의 접점인 황하 유역의 오르도스, 황하가 뒤집힌 U자형으로 흐르는 곳이다. 지명부터가「오르도(칸의 게르)가 있는 곳」이니 원래 중국 땅은 아니었다.

이 지역은 흉노의 뒤를 잇는 북방부족 모두와 인연이 깊다. 하지만 이들의 발흥지는 이곳이 아니라 수천 리 북쪽 흥안령의 후룬베이얼 초원이었다. 초원의 진주라는 천혜의 목장 후룬베이얼, 후룬과 베이얼은 모두 수달이라는 말이다.(몽골어). 둘레 450km의 후룬 호에는 수달들이 대량 서식할 만큼 어류가 풍성했다.


이 초원은 유목민의 낙원이자 피난처였다. 불우했던 시절의 칭기스칸도 이곳에 숨어 말을 기르고 군사를 모았다 한다. 실로 소중한 심신 회복지였지만 나라를 이룰 만큼 넓지는 않았다.

유목에 필요한 면적은 마리당 1,500평 정도. 백 마리쯤 되면 사방 7백m의 초지(15만평)가 필요하다. 50가구라면 무려 8백만평. 바로 이것이 대규모 유목부락이 생기기 어려운 이유이자 이웃 간에 초원쟁탈전이 잦은 이유였다.


규모가 커지면 더 넓은 초원을 찾아 나설 밖에... 또한 생필품의 상당부분은 농경사회로부터 조달해야하므로 교역에 편리한 지역을 선호했다. 이 조건에 맞는 지역이 바로 오르도스였다. BC 5세기 이래 모든 유목부족이 거쳐간 코스...

후룬베이얼 초원에서 오르도스까지가 기마유목민족의 행동반경이었다.


BC 3세기, 몽골초원을 통일한 최초의 제국은 흉노였다.

묵특 선우單于라는 영웅이 30만 명의 기마군단을 조직했다. 한漢의 인구는 5천만. 30만의 흉노 기마군단이 유방군을 백등산에서 포위했다. 이때 패배한 漢은 이후 70년간 왕족 여인과 금품을 바쳤다. 그리고 다시 40년간 이어진 한무제와 흉노의 대결은 동서양 격변의 씨앗을 뿌린 시기였다.

漢무제의 공격으로 약화된 흉노는 동서로 분열한다. 그 뒤 다시 남북으로. 이윽고 漢과 손잡은 흉노 일파와 선비鮮卑에게 협공당한 흉노는 알타이 산맥을 넘어 중앙아시아로 물러갔다. 그 뒤 중국 기록에서 흉노는 사라진다.


2세기, 카자흐스탄 북쪽에 머물던 흉노는 서쪽으로 이동해 4세기 말 러시아 초원의 볼가江을 건너 게르만족인 東고트족을 쳤다. 이를 기폭제로 게르만족 이동이 발생한다.

게르만 부족은 훈족에 쫓겨 로마 영내로 들어간다. 야만인들(고트족, 반달족, 롬바르드족, 색슨족, 부르고뉴족, 프랑크족, 앵글로족 등)이 로마권(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스페인, 아프리카 북안北岸 등)으로 쳐들어가 기존 정권을 정복한 뒤 게르만 정권을 세운다. 이 정권을 모태로 오늘날의 유럽국가들이 탄생했다.

흉노 법률 중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평상시에 칼을 한 자 이상 뺀 사람은 사형에 처하고... 』

흉노 사회가 결코 무력만으로 지배하던 야만집단이 아니었다는 증거다.


북방 유목 민족사를 개관하면 나오는 결론은 오로지 한 마디다. “漢族, 단일민족 아니다 해!”

일개 민족이 어떻게 수억이나 될 수 있는가? 중국인들의 얼굴은 남쪽과 북쪽이 서로 다르다. 광둥과 베이징은 뚜렷이 구분된다. 푸젠성福建과 장시성江西에 있는 우이산武夷山과 난링산맥南嶺 남북에 거주하는 한족은 서로 다르다. 두 개의 ‘한족’간의 차이는 한족과 소수 민족간 차이보다 더 크다.


몽골 대초원과 만주의 경계는 한반도 규모에 버금가는 대흥안령 산맥. 동쪽은 가파르지만 서쪽은 완만한 초원지대로 이루어진다. 한반도의 태백산맥이 서쪽으로 흐르며 펼쳐지는 평창군처럼 아늑한 경관이다.

하얼빈에서 치치하얼로 가면 대흥안령 산맥의 알선동嘎仙洞을 만난다. 화강암 산중턱의 동굴은 천 명쯤은 넉넉히 담을 만큼 넓다. 선비족鮮卑族 탁발부拓跋部 즉 탁발선비의 발원지이니 호한胡漢 융합을 이룬 당나라의 뿌리가 바로 이 동굴이다.

1세기 중엽, 이곳에서의 수렵어로 생활을 떠난 탁발선비는 후룬호呼倫湖 인근 초원으로 이동해 유목민으로 변신했다. 후룬베이얼 초원에서 백년에 걸쳐 세력을 불린 이들은 다시 남으로 이동해 몽골고원의 남쪽 오르도스, 흉노의 옛 땅에 도착한다.


그러니 이들을 기다린 것은 따뜻하고 포근한 초원생활이 아니었다.

남하하는 북방 부족들을 막아선 농경국과 갈등의 세월이 시작된다. 중국의 혼란기 5호16국 시대는 4세기 초부터 135년간 이어진다. 이 격류 속에서 탁발선비는 대국代國을 세우고 386년 다시 북위北魏를 세운다. 그리고 북중국을 통일한다. 가장 늦게 진입했지만 가장 크게 성공한 것이다.


이들은 침략과 약탈로 일관하던 흉노와는 달랐다.

한인들의 정치를 배우고 여기에 북방의 무력을 더해 통치력을 갖추었다. 한인과 통혼하고 복식은 물론 말과 성姓까지 바꾸며 문화적으로 융합했다. 불교를 진작시켜 운강석굴과 용문석굴, 현공사 등 불교 문화시대를 열었다.

가장 극적인 융합은 천도였다.

수도를 중원 한복판인 낙양으로 옮김으로써 역사마저 융합한 새로운 장을 연 것이다. 탁발선비의 전통 지배계급은 관롱집단關朧集團 (관중과 농서지방의 귀족)이다. 이들은 우문宇文씨, 고高씨, 그리고 다시 양楊씨의 수隋, 이연과 이세민의 당唐으로 이어지며 호한융합을 완성한다.

우문, 고, 양, 이씨는 모두 관롱집단 출신. 그러나 안정기에 들어선 당나라는 과거제도를 도입해 사대부라는 신진계층을 만들어 전 시대의 엘리트 그룹 관롱 집단을 퇴출시킨다.


2천년에 걸쳐 기승전결의 드라마를 연출했던 이들 북방민족의 시작은 BC 8~9세기의 흉노, 선비, 유연, 돌궐, 위구르, 그리고 몽골, 거란과 여진으로 이어진다. 명칭은 복잡다단하지만 실제로는 3갈래 뿐이다. 몽골(선비, 유연, 거란, 몽골) 투르크(흉노, 돌궐, 위구르) 동이東夷(산동, 여진, 한반도)

복잡한 호칭은 중국 사가史家들의 작품에 지나지 않는다. 한족漢의 원류인 화하족華夏族의 범위는 원래 좁았다. 하지만 한족의 사가들은 자신들의 범위는 두루뭉술 넘긴 반면 북방 기마민족은 세분했다.

5호16국 시대를 지나면 한족의 범위는 더욱 애매해진다. 그들은 선비족의 수, 당을 한족의 나라로, 원, 청도 모두 중국 왕조라는 식으로 기록했다. 그런 식이라면 문화, 인종이 비슷한 북방 유목민은 모두 한 민족으로 뭉뚱거려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여하튼 이들은 나름의 드라마를 연출한다.

먼저 등장한 흉노는 천년 이상에 걸쳐(BC8~9세기~ 5세기) 명맥을 이어갔다. 씨족사회에서 묵특 선우의 흉노제국(BC3세기)까지 약 8백년을 기起,

한 무제에 밀려 분열하고 서 흉노의 질지 선우 전사戰死 (BC 44년)까지를 승承,

서천西遷 과정에서 다양한 부족과 섞이는 5세기 전반까지를 전轉,

훈족으로 유럽을 휩쓰는 앗틸라 제국시대를 결結로 볼 수 있겠다.


당시 한 무제에게 쫓긴 흉노들이 서쪽으로 가며 불렀다는 구슬픈 노래가 있다.

『기련산을 잃었구나. 이제 말과 양을 어디서 먹이랴.

연지산마저 잃었구나. 이제 우리 여인들은 연지조차 바르지 못하겠구나.』

연지는 뺨에 바르는 화장품이지만 흉노들의 어머니인 왕비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여인들이 화장조차 못하게 된 신세를 탄식하는 동시에 어머니의 산을 잃은 비통한 심정을 읊고 있다.

흉노의 왕은 선우, 왕비를 연지라 했지만 선비와 돌궐족은 왕을 카간, 왕후는 카툰이라 불렀다. 따라서 흉노는 선우시대, 선비, 돌궐은 카간 시대라 불러도 무방하다. 삼국시대의 오나라 손권은 고구려에 보낸 국서에서 고구려 왕을 선우라 칭했다. 칸汗은 몽골 이후 쓰인 칭호로 보인다.


선비족의 역사는 중원의 5호16국 시대와 겹친다.

후룬베이얼 초원에서 일어나 오르도스까지 오는 초창기를 기起,

그리고 3세기에 걸친 갈등기(5호16국 135년을 승承, 남북조시대 150년을 전轉)를 거친 이들은 호한胡漢 융합의 새 문화를 탄생시키며 결結의 시대를 연다.

그 결실은 당나라.

당대의 세계제국 당나라의 수도 장안은 남과 북에서 각각 성장해 온 숱한 갈래의 문화들이 녹아든 결정체였다. 이질적인 호한胡漢 문화가 길고 험난한 통합의 과정을 거쳐 장안의 봄을 활짝 피운 것이다. 일찍이 한나라를 찾은 이방인들은 볼일만 보면 돌아가곤 했다. 그러나 당나라 때는 달랐다.

세계각지에서 당나라로 몰려든 사람들은 아예 돌아가지 않으려 했다. 자기 나라에서는 얻을 수 없는 귀한 재화가 있고 소중한 꿈도 이룰 수 있는 곳으로 믿어졌기 때문이다.

마치 현대의 미국과도 같은 위상이었다.

당대의 활발했던 국제교류의 흔적으로 뒤섞인 언어들은 지금도 곳곳에서 발견된다. 이를테면 청산별곡의 "얄리 얄리" 는 "가자 가자"란 위구르 어다. 선비족의 모용씨는 몽골어 바얀(부자 富者)의 음차 표기다. 모란꽃 만발하던 장안의 봄은 3세기 만에(907년) 끝난다. 그러나 이후의 모든 시대는 그 화려했던 시절을 그리워한다. 또한 그 찬란한 시대를 탄생시킨 원동력이 무엇인지도 내내 잊지 않았다.


이어진 돌궐, 위구르, 거란, 여진, 몽골제국으로 도도히 흐르는 북방 유목민의 역사, 이 시대에 정해진 유라시아 국가들의 국경선은 지금까지 대부분 그대로다. 유목민의 무력은 농경사회를 단연 압도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농경문명의 여유로움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두 집단은 서로의 장기를 겨루며 갈등을 이어갔다.

갈등의 현장은 대초원과 농경지를 나누는 남북 경계. 그래서 농경사회는 산해관에서 오르도스를 가로 질러 서쪽 끝 가욕관까지 기나긴 성벽을 쌓았다.

- 산해관, 거용관, 안문관, 무승관, 우의관, 진용관, 자형관, 낭자관, 검문관, 귀문관, 황애관黃崖關, 천문관, 옥문관, 가욕관(자위관), 양관...

줄줄이 버티고 선 관문마다 쌓인 사연들 또한 많고도 많았다.


예로부터 유목민족들에게는 고유의 운영방식이 있었다. 크고 작은 부족들은 저마다 자치권을 가진 당당한 독립 세력. 강력한 조정자가 없었던 이들은 빈약한 자원(목초지, 오아시스)을 놓고 부족끼리 으르렁대며 힘을 낭비했다. 이윽고 이들은 그 소모적 투쟁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대책을 강구한다. 그래서 공평하게 거주지를 일정기간마다 바꾸기로 했다.

북극성을 도는 북두칠성처럼 신성한 호수 바이칼을 돌면서 방목한다는 원칙이 세워진 것이다. 상징적이지만 수장도 선출해 제반사항은 쿠릴타이 회의에서 의논하기로 했다. 쿠릴타이야말로 이들이 발명한 최고의 지혜였다. 이 쿠릴타이를 중심으로 생긴 느슨한 연방형태의 조직이 곧 당시의 유목제국이었다.

유목 제국의 수장은 절대군주가 아니었다. 이들 사회 또한 상명하복으로 일사불란 하게 움직이는 조직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무리한 주장을 밀어붙이면

“그래, 잘 해봐.”

훌쩍 떠나버리면 그만이다. 민주적일 수밖에 없었다. 토지에 얽매인 농경사회와는 먹이사슬 구조부터가 달랐다.


흉노匈奴, 입심 좋은 종놈.

동아시아 역사에 깊은 족적을 남긴 북방민족의 첫 얼굴이다. 중국사의 반 이상은 이들 북방민족의 역사다. 이들 민족의 발자취는 내몽고자치주 동북 끝, 흑룡강성 서북단의 후룬베이얼 초원에서 황하가 굽이치는 오르도스로 이어진다. 지금은 황량한 사막으로 변한 이 지역은 당시 흉노와 진, 한이 충돌한 주 무대였다.

이들은 누구의 후손이며 또 그들의 후손은 지금 어디 있을까?

한족의 기록에 이들은 BC 3세기부터 흉노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지만 일찍이 주나라 시대(BC12세기)에도 이들은 서융이라는 이름으로 있었다. 부족 단위였던 이들이 제국을 이룬 시기는 진시황의 중원통일기와 겹친다. 당시의 선우單于는 두만頭曼(BC209년), 진시황의 통일(BC221년)과 같은 시대.

흉노와 중원의 충돌은 전국戰國시대부터였다.

전국칠웅 중 북쪽에 있던 조趙 진秦 연燕나라와의 갈등. 이들이 처음 쌓은 장성은 말의 돌격을 막기 위해 흙과 갈대를 켜켜로 쌓은 토벽이었다. 2~3m 정도. 벽돌과 돌로 쌓는 7~8m 규모는 공성기술이 발달한 14세기 이후의 명나라에 와서다.


중원을 제패한 진시황은 북벌에 나서 흉노를 오르도스에서 밀어낸다. 그 땅에 군郡을 설치해 3만여 명을 이주시켰다. 본격적인 영토 편입. 하지만 불안해 옛 성벽들을 이어 붙였다. 만리장성이 등장한 것이다. (BC213년).

중원이 초한전으로 시끄러운 동안에 흉노에는 묵돌冒顿(재위 BC 209-174)선우 시대가 열린다. 그의 집권과정은 박력 넘치는 한 편의 드라마였다.

작은 아들을 편애한 아버지 두만 선우는 적장자인 그를 적국 월지에 인질로 보낸다. 그리고는 월지를 공격했다. 아들을 노린 차도살인의 계.

그러나 위기를 맞은 그는 오히려 적의 한혈마를 빼앗아 타고 탈출해온다. 부족들은 “바트르”(묵돌)를 외치며 열광한다.

("묵특"은 용감한 자, 또는 영웅을 뜻하는 몽골어 "바트르"의 음차 표기)

난처해진 아버지는 그를 차기 선우후보인 좌현왕에 봉한다. 좌현왕은 만호장을 겸하는 지위. 묵돌은 명적鳴鏑(소리나는 화살)을 이용해 기사騎射 연습을 시켰다. 어느 날 이런 명령을 내렸다.

『명적을 쏘는 곳에 일제히 쏘아라. 쏘지 않는 자는 죽인다』


그런 다음 수렵에 나건 묵돌은 명적을 쏜 곳에 쏘지 않은 자는 가차 없이 죽였다. 그 뒤 명적을 자기의 애마愛馬에 날렸다. 차마 쏘지 못하는 자가 나오자 당장 죽였다. 얼마 후 명적을 애처愛妻에게 날렸다. 감히 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자 역시 죽여버렸다. 얼마 뒤 묵돌은 수렵에 참가해 선우가 타는 말에 명적을 날린다.

그러자 부하들 역시 일제 사격을 가했다. 이제 전원이 명령에 따른다는 확신을 얻은 묵돌.

다음 수렵 때 아버지 두만에게 명적을 날린다. 부하들 역시 일제사격, 두만 선우에 이어 계모, 아우 및 자기를 따르지 않은 무리를 모조리 죽였다.


이렇게 선우에 오른 묵돌은 흉노의 전성기를 연다. 동쪽으로 동호東胡를 치고 서쪽(신장성)으로 월지를 격파한다. 흉노의 발상지이자 중요한 목초지인 오르도스도 탈환했다. 이때 멸망당한 동호는 2백여년이 지나 선비족과 오환족이라는 두 갈래 부족으로 다시 등장한다. 당대의 중원은 항우와 유방의 쟁패기, 남쪽은 돌아 볼 필요도 없던 때다. 묵돌은 연에 빼앗겼던 하북과 요동 동쪽 땅까지 회복한다.


BC 202년, 중원 통일로 의기양양해져 흉노정벌에 나선 유방은 일패도지한다. 초전부터 패해 도망치는 흉노를 추격 했다. 주력 보병부대는 떼어놓고 달랑 기병만으로... 그렇게 평성平城(산서성 대동, 운강석굴 있는 곳)까지 맹추격했다.

며칠 후 느닷없이 돌아선 흉노의 30만 대군에 포위된다. 백등산白登山에서 버텨보지만 전투는커녕 아사지경이 된다. 결국 항복하는데 이를 평성의 치恥(백등산의 굴욕)라고 한다. 중원이 화친이라 우기는 조약의 내용인즉슨,

『한나라 공주와 황금 천근을 선우에게 보낸다.

목화, 비단, 술, 음식을 매년 보낸다.

국경시장을 열어서 교역을 보장한다... 등등.』

농경지 따위는 안중에 없는 흉노의 관심사는 오로지 물자확보. 국경시장關市에서의 거래나 약탈이 흉노식 조달방법이었다.


이 불평등 관계는 이후 70년 동안 이어진다. 해프닝도 있었다.

여태후呂太后 섭정시절,

묵돌선우는 새 정권의 화친의지를 타진하는 국서를 보낸다.

『이 몸은 북방에서 외롭고 그대 역시 혼자되었으니 우리 모두가 쓸쓸하도다. 내 있는 것으로 그대의 빈 곳을 채움이 어떠한가?』

국서가 아니라 성폭행이었다.

여태후의 답장.

『나이 들어 머리카락과 이도 다 빠져 여색이 바랜 이 몸 대신 미인 몇 명에 좋은 물건들을 보내니 그로써.....』

굴욕적 화친을 이어가겠다는 것. 압도적 힘의 차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장면이었다.


하지만 전쟁 없는 70년 세월이 이어지면서 농경사회는 황금기를 맞는다. 식량은 풍족하고 길에 돈이 떨어져도 주워가지 않는 세월이 온다. 군마도 30만 필이나 비축했다. 비록 돈으로 산 평화였지만 일단은 성공이었다. 그 시절을 물려받은 한무제 또한 영특한 경영자였다. 16세에 등극해 BC 87년에 죽은 그는 재위 기간만 54년.

굴욕적 화친이 불만이던 그는 흉노 정벌을 면밀하게 준비했다.

그 중 하나가 원교근공. 흉노와 원수지간인 서쪽의 대월지月支와 제휴해 동서 양쪽에서 협공하자는 구상이었다.

하지만 막상 대월지까지 가는 게 문제였다.

당시의 서역은 미지의 땅, 대월지가 어디 있는지도 모를 뿐 아니라 인간이 살 수 없는 불모의 땅, 서역의 끝은 은하수라던 시대였다. 게다가 흉노지역을 지나야하기에 목숨을 걸어야 했다.

다들 가기를 꺼려하는 바람에 지원자를 공모했다. 낭관 장건이 여기에 응모한다. 낭관은 시종관 견습쯤 되는 말단 공무원. 원만한 인품 탓인지 지원자가 없던 탓인지 그는 사신으로 선발된다. 무제가 등극한 지 3년째인 BC139년,

노예 감보와 수행원 백여 명을 데리고 장건은 출발했다.


아니나 다를까, 흉노 땅에 들어서자마자 잡힌다.

“월지는 우리의 적국이다. 그런데 어찌 사신을 오가게 할 수 있겠느냐? 내가 월나라로 사신을 보낸다면 너희는 허락하겠느냐? 피차 마찬가지다.”

포로생활은 10년간 이어졌다. 체념한 듯 포로생활에 충실한 그는 그들의 법도와 풍습을 따랐다. 점차 흉노를 닮아가자 선우는 결혼도 시켰다.

유목생활이 몸에 밴 그는 양고기에 마유주를 맛있게 마셨다. 비록 포로지만 파오에서 반경 10㎞ 정도는 오갈 자유도 얻었다. 흉노 여인 사이에서 아들도 낳고... 이제 흉노인이나 진배없었다. 말과 풍습을 익히고 아내까지 맞았으니 흉노족이 다 된 것 같았다. 감시하던 자도 “그는 이제 흉노인이다” 할 정도였다.

그러나 품에 지닌 신절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았다. 신절이란 20㎝, 10㎝의 대나무나 비단에 전자로 쓴 사신의 증표. 검문소 통관은 물론 지원도 받을 수 있다.

이윽고 탈출한 장건은 대월지를 찾아 서쪽으로 떠난다.


처음 도착한 곳은 대원국, 대원국의 왕은 장건을 환영했다. 한나라와의 교역을 기대한 대원국은 안내인에 통역까지 딸려 주었다. 다음에 도착한 곳은 지금의 키르키스탄에 해당하는 강거국, 다시 서쪽으로 이동해 현재의 우즈베키스탄 지역에 있던 대월지국에 도착한다. 그가 지난 길은 천산북로.

천산북로를 넘었다는 것은 그의 용기와 인내가 대단했음을 말해준다. 이 길은 1980년대까지도 원주민 외에는 접근이 어려웠다. 나는 새조차 없다는 천산산맥, 그리고 사막을 지나 파미르 고원을 넘어야 한다. 파미르는 평균 4천m, 높은 곳은 7천 5백m의 고원.

아마도 짐승의 피를 마시고 감보가 잡은 짐승을 먹으며 고원을 넘었을 것이다. 이렇게 필사의 노정을 거쳐 마침내 대월지에 이르렀다.


당시 대월지국은 드넓은 파미르 고원에서 풍요롭고 안락하게 지내던 시절이었다. 굳이 한나라와 동맹해 흉노를 공격할 이유가 없었다. 장건의 제안은 정중하게 거절당했다.

비록 목적은 이루지 못했으나 장건은 그곳에 1년 남짓 머무르며 많은 정보를 수집했다.

귀로에 오른 장건은 천산남로를 넘기로 한다. 천산북로를 넘다 붙잡혔기 때문이다. 카슈가르와 호탄, 누란을 거쳐 강중(청해성)을 지나던 그는 다시 흉노에 잡힌다.

지난번보다 더 가혹한 생활을 1년간 겪던 그는 선우의 죽음으로 일어난 내란을 틈타 탈출한다. 그리고 BC126년 귀환했다. 13년만의 귀국.


장건의 서역행은 모두 4차례 23년간에 걸쳐 수행된다. 하지만 첫 번째만으로도 충분한 업적이었다. 미지의 땅이던 서역정보와 실크로드 개척이 모두 거기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착실하게 준비한 한무제는 BC 133년 드디어 출병한다. 화친을 깨는 정도가 아니라 대규모 정벌이었다.

당시의 흉노는 군신선우 시대, 한나라는 대군을 매복하고 선우를 유인했으나 매의 눈을 가진 흉노는 이를 사전에 간파하고 사라진다.

4년 후 다시 출병. 초반에 패배. 이광은 잡혔다.

겨우 탈출하고 위청은 약간의 성과를 얻지만 반격당해 오히려 9백리 정도를 잃는다. 이에 정면충돌을 피해 파고 들었다. 흉노의 우익(서쪽 방면군 우현왕)을 무너뜨리고 오르도스를 점령한다. 이곳에 삭방군朔方을 설치하고 한인 10만을 이주시켰다. 첫 성과였다.

BC 124년 흉노의 좌익이 다시 허물어진다. 하지만 주력부대는 아직 건재했다.

BC 123년 2월, 위청이 출병. 하지만 별무 성과.

4월에 다시 출병, 백여 리를 진격해 한나라가 승리했다.


하지만 좀 이상했다. 한나라 장수 6명 중 둘은 전사, 한 명은 포로, 한 명은 투항했다.

비록 진 것은 아니지만 승전이라기도 어렵다. 아무래도 팔이 안으로 굽은 기록. 이후 쌍방은 소강상태에 들어간다.

이해 여름, 한무제는 성과를 거둔다.

섬서성 서쪽에서 출발해 감숙성을 따라 서북으로 두 군(무위武威, 주천酒泉)을 점령한다.

이곳에 기련산과 연지산이 있었는데 기련산은 목장이고 연지산은 연지의 원료인 홍란의 재배지였다. 흉노에게 아주 뼈아픈 패배였기 때문에 민요까지 생긴다.

감숙성에 추가해 음산산맥의 남쪽 초원 즉 내몽고 중부를 확보했다. 이릉의 투항을 변호하는 사마천을 궁형에 처한 것이 이때였다.


이 정도면 정벌은 일단 성공한 셈이었다. 하지만 전쟁의 양상은 갈수록 이상해져 갔다. 무제는 멈추거나 물러설 줄을 몰랐다. 흉노를 밀어내고 얻은 지역을 보존할 때였는데 끝없는 출병만 고집했다.

자그마치 40년 전쟁.

결국 국력이 쇠약해진다. 전쟁 동안 인구는 반(4천만=> 2천만)으로 준다. 전사자 때문만이 아니다. 나라를 떠나거나 농토를 버리나 유랑하는 등 세금징수원 손실이 엄청났다.

고사성어 새옹지마가 이때 생겼다.

전장으로 떠난 자는 돌아오지 못한다. 아버지를 환송했던 자식 역시 돌아오지 못한다.

떠나는 그들을 바라봐야만 했던 절름발이 청년이 마을의 유일한 남자가 된다.

새옹지마.

신하들은 진나라 승상 이사의 '새떼 론' 을 내세워 북방정벌을 말린다.

"북방 오랑캐는 새떼와 같습니다"

날아다니는 새떼는 잡아봐야 몇 마리에 지나지 않는다. 흩어지면 그나마도 잡을 수 없는데 돌아올 때는 다시 떼를 지어 몰려온다. 결국 한무제는 더 이상 흉노와 싸우지 않겠다는 윤대조서를 발표했다.

양패구상, 양쪽 다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는 형국이었다. 빈사상태에 이른 그들은 저마다 살 길을 찾는다. 주화파와 주전파로 갈라진 흉노는 남북으로, 또다시 동서로 분열한다. 약해진 동 흉노는 젊은 피 선비족에 흡수된다. 이윽고 북방의 주인공은 흉노에서 선비로 교체된다. 선비족이 위魏나라를 세운 것이 AD386년이니 4백년쯤 걸린 셈.


40년 전쟁의 유산은 무엇인가?

재정비에 나선 무제는 측근 즉 환관 조직을 강화한다. 그 결과는 백년 후의 망국으로 이어진다. 삼국시대, 진晉나라 그리고 남조를 거치며 중원은 깊은 수렁에 빠진다.

이것이 곧 40년 전쟁의 유산, 결국 백성들만 죽어났다.

흉노는 반파, 한나라는 전파였다.




청일전쟁, 둥베이, 이홍장, 원세개, 명치유신, 서태후, 손중산, 군벌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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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7

  • 작성자
    Lv.99 솔리온
    작성일
    19.05.08 16:14
    No. 1

    뭐지... 역사책은 다른데서... 스토리 진행에 필요한 내용도 아닌거 같은데;;

    찬성: 10 | 반대: 0

  • 작성자
    Lv.69 코페르니
    작성일
    19.05.08 16:18
    No. 2

    어떻게 스토리진행이 하나도 없을수가...

    찬성: 8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88 하산
    작성일
    19.05.08 16:27
    No. 3

    지적하신 부분, 저 역시 공감합니다.
    플롯이 영 아니지요.
    전개할 둥베이 이야기가 북방민족사의 연장이라 부득이...

    찬성: 0 | 반대: 6

  • 작성자
    Lv.59 장빈
    작성일
    19.05.08 16:38
    No. 4

    ;;;;;;;;;;;;;;;;;;;;!!!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93 진온
    작성일
    19.05.08 17:29
    No. 5

    차라리 강의식이면 이해를 하겠는데 이건 좀

    찬성: 2 | 반대: 0

  • 작성자
    Lv.99 아우에이
    작성일
    19.05.08 18:02
    No. 6

    크흠........무료연재라서 그나마 다행스럽네여

    찬성: 3 | 반대: 0

  • 작성자
    Lv.73 자와라
    작성일
    19.05.08 18:08
    No. 7

    이거 완전 무슨 대항해시대 소설에서나 봤던 전개인데.
    스토리전개에 1도 필요없는 설정만 나열하면서 분량 떼우는것. 진짜 극혐이다...

    찬성: 3 | 반대: 0

  • 작성자
    Lv.71 고32과
    작성일
    19.05.08 18:24
    No. 8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59 破雷
    작성일
    19.05.08 18:51
    No. 9

    별도의 부록으로 빼는게 나았을 내용입니다

    찬성: 2 | 반대: 0

  • 작성자
    Lv.59 破雷
    작성일
    19.05.08 18:52
    No. 10

    특히 횟수가 유료화하면 유료화중 하나일 횟수인데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말없는장미
    작성일
    19.05.08 19:47
    No. 11

    BC126년에서 10년이 흘렸는데 BC133년으로 꺼구로 흐름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78 로젠리터
    작성일
    19.05.08 19:55
    No. 12

    놀라운 파격적인 진행입니다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99 아미슈
    작성일
    19.05.08 20:07
    No. 13

    이번편은 호불호가 너무 심하게 갈릴거같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2 비열한습격
    작성일
    19.05.08 20:35
    No. 14

    진짜 쓸데없는 설명. 등장인물이 한 마디 하고 넘어가면 될 걸.

    찬성: 2 | 반대: 0

  • 작성자
    Lv.52 트럭9호기
    작성일
    19.05.08 21:53
    No. 15

    크흑 100원짜리 역사교육 지렸다리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41 이사진
    작성일
    19.05.08 22:02
    No. 16

    대체역사물이니 이런 화가 있을수도 있죠

    찬성: 0 | 반대: 2

  • 작성자
    Lv.61 굽네인간
    작성일
    19.05.08 23:58
    No. 17

    설명충인데...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2 knf
    작성일
    19.05.09 00:49
    No. 18

    기빨리는 화 ㅋㅋㅋ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6 tron
    작성일
    19.05.09 07:16
    No. 19

    작가의 외도.여러댓글에 시달리는게 훤히보임.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4 반가운일생
    작성일
    19.05.09 12:28
    No. 20

    ㅋㅋㅋㅋㅋ 좀 간략했음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3 로르샤흐
    작성일
    19.05.09 17:41
    No. 21

    여진족 이야기하는데 무슨 흉노부터 튀어나옵니까. 거기다 흉노가 한나라와 70년동안 평화롭게 지내요? 받아먹을 거 받아먹으면서도 심심하면 침공하던 게 흉노인데? 한무제가 과한 전쟁으로 국력 낭비한 건 맞지만 올바른 설명도 아닌 왜곡으로 내용 채우는 건 영 아니다 싶습니다

    찬성: 2 | 반대: 0

  • 작성자
    Lv.99 구스타프
    작성일
    19.05.09 23:44
    No. 22

    너무 과한 설정전개네요.그리고 한무제의 흉노침공은 중국의 긴시간으로 보면 한족의 정체성을 만든 시기로 중국에선 그 의미를 크게 부여하죠.정말 너무 설명이 길고 쓸데없고 개인적인 생각도 많이 들어간 설정이라고 생각합니다.굳이 그걸 이렇게 길게 설명할 내용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벡제를 설명하는데 부여족의 역사로 거슬러가고 부여족의 뿌리의 뿌리까지 찾아서 설명하는 형태로 너무 쓸데없는 내용이죠.솔직히 다 읽지도 않았네요.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99 구스타프
    작성일
    19.05.09 23:52
    No. 23

    유전적 구분에서 투르크족,몽골족,퉁구스족은 분명히 다르게 구분되어 있고 역사적으로도 같다고 말하기 힘들죠. 한국인만 하더라도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단일민족이라고 구분짓는데............ 너무 과한 설정이네요 정말

    찬성: 1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88 하산
    작성일
    19.05.11 13:22
    No. 24

    한족은 선비의 수, 당을 한족으로, 원, 청도 중국 왕조로 기록합니다. 그런 식이면 문화, 인종이 비슷한 북방민들을 한 민족으로 싸잡아도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흉노, 선비, 오환, 유연, 돌궐, 위구르, 그리고 몽골, 거란, 여진... 모두 말입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구스타프
    작성일
    19.05.12 02:35
    No. 25

    하산/중국이 역사를 그런식으로 바꾼다고 수와 당의 유목민족의 국가가 바뀌지 않으며 원나라가 몽고족의 나라인게 바뀌지 않으며 청나라가 만조족인 세운 나라인게 바뀌지 않습니다.
    중국은 당연히 여러 이민족들이 융합해서 그들을 자기 문화로 인정하고 한민족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더나아가 중국은 동북아 공정으로 만주족뿐 아니라 만주에 존재한 유목민족들도 모두 중국의 문명이라고 역사를 만들고 있죠. 이미 중국정부는 공식적으로 치우를 자신의 조상으로 인정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작업을 거의 마무리하고있습니다.

    민족적으로 투르크계와 몽골계와 투르크계가 비슷하다고 같은 민족으로 분류하지 않습니다.이런 작품을 준비하신다면 저보다 역사를 더 많이 공부하셨을건데 무리수는 무리수입니다.

    숙신,말갈,여진,만주족이라고 불리우는 청나라의 민족을 투르크족이라고 말하는건 결코 맞지않죠.같은 투르크계열도 민족들의 구분이 존재하는데 오래전에 뿌리가 갈라져나온 그들을 북방유목민이라고 한뿌리에 넣고 그게 맞다고 한다면 할 말은 없습니다.

    중국은 만주 정확히 요서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인 요서문명이 발견되면서 동북아공정에 사활을 걸고 있죠.황하문명에 자부심을 가졌던 한족의 중국은 한족의 원류인 황하문명보다 더 오래된 장강문명이 발견됐을땐 중국의 영통에서 발견되서 대충 넘어갔는데 만주 요서에 세계에서 가장오래된 문명이 발견되자 중국 역사를 통채로 바꾸려고 중국 공산당차원에서 오래전부터 엄청난 돈을 투자해서 진행중이죠.

    중국인도 아닌 한국인인 작가님이 투르크,몽골,퉁크스족을 모두 하나의 유목민족이라고 가정하고 글을 쓰신다면 할말은 없지만 댓글의 답은 굉장히 중국인들의 동북아공정스러운 댓글이시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구스타프
    작성일
    19.05.12 02:39
    No. 26

    과거에 치우는 중국에게 이민족들의 왕이었지만 지금은 공식적으로 중국의 시조중 한명입니다.치우의 무덤은 헌원의 무덤보다 더 잘 조성되어 있다고 하더군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7 숙손통
    작성일
    19.06.03 09:35
    No. 27

    북방민족도 크게 보면 하나일 수 있다... 이게 작가님 생각인가 보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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