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초고왕

위례궁의 별궁에 연금된 해연

해원은 여현을 설득하기 위해 운을 뗐다.

"대왕, 외람되오나, 소신이 양국의 우호를 위해 한 말씀 올리겠나이다."

"말해보거라."

"지금 승냥이같은 연왕 모용황이 고구려와 부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어, 양국이 우호를 다져 힘을 합쳐 연에 맞서 싸워야할 이 시점에서, 어찌 백제의 부여구 태자로 인하여 양국의 우호를 깨려 하시나이까? 대왕께서 부여구 태자를 고구려로 보내지 아니하오면, 양국의 우호가 깨어질 것이오니, 부디, 이를 유념하여 주시옵소서."

여현은 대노하여 용상을 주먹으로 치며 말했다.

"짐이 부여구 태자를 고구려로 보낼 수 없다 알아듣게 말했거늘, 네가 감히 짐을 협박하는게냐?"

여현이 대노하자 해원이 황송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미천한 소신이 어찌 감히 대왕을 겁박할 수 있겠사옵니까? 다만, 저희 태왕께서는 대왕께서 부여구 태자를 고구려로 보내지 아니하신다면, 양국의 우호관계를 끊을 것이라 말씀하셨사오니, 부디, 이를 유념하여 주시옵소서."

"짐의 뜻은 확고하니, 태왕께 그리 전해드리거라."

해원은 더 이상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고개를 조아리며 인사했다.

"대왕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소신은 이만 물러가겠나이다."

해원이 인사를 올린 후 물러가자, 여현은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고구려 태왕 사유가 부여구를 요구할 것이라 짐작하였으나 저토록 강경하게 나올 줄은 예상치 못했구나! 고구려가 부여의 적이 된다면, 부여는 양쪽에 강한 적을 맞게 될 터인데,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이때 여혜가 찾아와 시녀가 여혜의 왕림을 알렸다.

"폐하, 공주마마께서 납시셨나이다."

"들라 이르거라."

여혜는 고구려 사신이 여현에게 부여구를 넘겨 달라고 요구한 사실을 듣고 온 것이다. 여현이 여혜에게 물었다.

"어인 일로 왔느냐?"

"소녀, 고구려 사신이 아바마마께 부여구 태자를 넘겨달라 하였다 들었사온데, 사실이옵니까?"

여현이 한숨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고구려 사신이 부여구 태자를 넘겨주지 아니하면, 양국의 우호관계를 끊겠다고 이 아비를 겁박하더구나."

부여구에게 첫눈에 반한 여혜로서는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 하실 것이옵니까?"

여현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이 아비는 결코 사유에게 굴복하지 아니할 것이다. 부여는 천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이거늘, 어찌 고구려에게 고개를 숙일 수 있겠느냐?"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던 여혜는 여현의 말을 듣자 얼굴이 구름걷힌 햇살처럼 환해졌다.

"현명하신 판단이시옵니다. 부여구는 천하의 명장이라 부여구가 우리 부여에 있는 한 고구려가 감히 부여를 넘보기 힘들 것이옵니다. 또한 고구려는 연과의 전쟁으로 나라가 피폐해져 부여를 침범하기 어려울 터이니, 심려하지 아니하셔도 될 것이옵니다."

부여는 기원전 6세기경 송화강 상류 농안 지방에서 일어난 국가로 만주의 패자 조선이 한나라에 멸망당한 후 백년 이상을 만주의 패자로 군림하였다.

대소왕 때에 고구려를 번번히 침략하다가 오히려 고구려 대무신왕의 반격을 받아 패하여 대소왕이 전사한 후 고구려에게 만주의 패자 자리를 빼았겼으나, 이후로 왕위에 오른 부여왕들은 부국강병책으로 국력을 다지며 만주의 패자 자리를 되찾기 위해 안간힘을 써왔다.

고구려와 만주의 패권을 두고 다투던 부여는 285년 의려왕 때 선비족 모용외의 침략을 받았는데, 크게 패하여 도읍 분능이 함락되고 의려왕은 자결하여 부여는 한때 멸망의 위기에 빠졌다.

의려왕의 아들 의라왕은 고구려의 속국 옥저로 도망친 후 진나라의 도움으로 나라를 회복한 후 고구려와 화친조약을 맺었다.

이후 지금까지 두나라는 우호관계를 맺고 지내왔으나 망명온 부여구로 인하여 두나라의 우호관계가 깨어지게 생겼으니, 여현은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무렵, 부여는 선비족 모용황이 세운 연의 계속되는 침략으로 국력이 쇠약해졌는데 고구려까지 침략한다면 나라에 큰 위기가 닥쳐올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부여구가 부여에 망명했다는 소식을 들은 부여계는 해찬을 부여로 보냈다. 해찬은 부여계의 부마로 부여계의 딸 부여진의 부군이다.

부여의 도읍 분능에 당도해 여현을 알현한 해찬은 여현에게 인사를 올렸다.

"백제의 사신 해찬이 부여의 대왕을 알현하나이다."

여현은 백제왕 부여계가 사신을 보낸 이유를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하며 물었다.

"백제의 어라하께서 어인 일로 그대를 보냈는고?"

"어라하께서는 우리 백제의 태자께서 부여에 망명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신에게 태자를 모셔오라 하셨나이다. 태자께서는 어라하께 죄를 짓고 부여에 망명한 것이오니, 부디, 백제로 돌려 보내주시기를 청하나이다."

"부여구 태자가 무슨 죄를 지었는고?"

"태자께서 고구려에 볼모로 가겠다 자청하셔서, 이를 조건으로 백제와 고구려 양국의 평화조약이 맺어졌사온데, 태자께서 도중에 탈출하셔서 우리 백제의 입장이 실로 난처하게 되었사옵니다. 이로 인해 백제와 고구려 양국의 평화조약이 깨어진다면, 두 나라간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 자명하오니, 이를 유념하여 주소서."

여현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짐이 부여구 태자를 받아들였으니, 이미 부여구 태자는 짐의 사람이 되었느니라. 짐이 어찌 짐의 사람을 져버릴 수 있겠느냐? 짐은 짐의 사람이 된 부여구 태자를 백제로 돌려보내지 아니할 터이니, 어라하께 짐의 뜻을 전하거라."

여현의 말은 부드러웠으나 태도는 단호했다. 해찬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대왕께서 부여구 태자를 백제로 돌려보내시지 아니하시오면, 백제는 고구려와의 전쟁이 불가피할 것이옵니다. 부디, 굽어 살펴 주소서."

"백제의 사정은 딱하나, 짐은 짐의 사람을 져버릴 수 없으니, 그리 알고 이만 물러 가거라."

해찬은 여현을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닫고 인사를 올린 후 물러갔다.

여혜는 그동안 사방으로 태자비 해연의 행방을 알아보았지만, 행방이 묘연하여 어디로 갔는지 단서조차 찾지 못하였다.

여혜는 문득 해연이 백제를 탈출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혜는 태자비의 사촌이자 부마인 해찬이 왕궁에 왔다는 소식을 듣자 시종을 보내 자신의 처소에 들릴 것을 청했다.

해찬은 여혜가 어째서 자신에게 그녀의 처소에 들릴 것을 청했는지 호기심이 생겨 그녀의 부름에 응했다.

여혜의 처소에는 발이 쳐저 있어 여혜의 얼굴을 뚜렷히 볼 수 없었지만, 발의 틈 사이로 천하절색이라는 여혜의 빼어난 자태를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해찬은 여혜에게 인사를 올리며 운을 뗐다.

"백제의 사신 해찬이 부여의 여혜 공주를 배알하나이다."

"와주어서 고맙소."

"공주께서 어인 일로 소인을 부르셨나이까?"

"내, 그대에게 물어볼 것이 있어 청하였소."

해찬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무엇을 묻고자 하시나이까?"

"백제 태자비의 소식을 알고 싶소. 그대는 태자비의 사촌 오라비니, 혹시 알고 있을까 하여 그대를 이곳으로 청한 것이오."

해찬의 얼굴은 갑자기 먹구름처럼 어두워졌다.

"태자비마마께서는...... 지금 위례궁의 별궁에 연금되어 있사옵니다."

여혜는 이 말을 듣자 깜짝 놀라 되물었다.

"내가 듣기론, 태자비께서 백제를 떠나셨다 들었거늘, 허면, 떠나지 아니하신 것이오?"

"그러하옵니다. 소인의 숙부께서 태자비마마를 배에 태워 떠나보내셨으나, 태자비마마께서는 워낙에 효성이 지극하신지라, 숙부님을 살리기 위해 배를 돌려 돌아오신 후 어라하께 자신이 태자 저하의 탈출을 계획한 주모자라 하시며, 숙부님을 대신하여 죄를 받겠다 청하셨사옵니다."

여혜는 별안간 해연의 효심에 가슴이 뭉클하여 눈가에 이슬같은 눈물이 맺혔다.

여혜는 눈물을 가리기 위해 부채를 들어 얼굴을 가리고는 옷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여혜의 처소에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