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모
고구려 태왕 사유는 치양성 성주 고원이 부여구의 유인 전술에 속아 성을 빼았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분노가 치밀어 명을 내렸다.
"유인 전술에 당하다니, 어리석기 짝이 없구나! 패전의 책임을 물어 고원의 가족을 모두 하옥하라!"
국상 주영이 아뢰었다.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패전의 책임을 물어 고원의 가족을 모두 하옥한다면, 우리 고구려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질지 모르오니, 이를 유념하여 주시옵소서."
국상 주영은 사유의 어머니 주태후의 오라비로, 사유의 숙부라 사유는 주영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어 물었다.
"허면 어찌하면 좋을지 숙부님께서 말씀해 보십시오."
주영은 사유의 화가 풀리면 고원에 대한 처벌이 가벼워질 것이라 생각해 말했다.
"지금은 국력을 다하여 치양성을 수복하는 것이 우선이니, 고원에 대한 처벌은 치양성을 수복한 후에 논의하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사유는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좋습니다. 숙부님의 뜻을 따르지요. 허면, 치양성을 수복하는 임무는 누구를 보내면 좋겠습니까?"
바로 이때 사유의 동생 고무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폐하, 소제에게 정병 일만을 주시면, 기필코 치양성을 수복하겠사옵니다."
고무는 용맹무쌍하여 사유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다.
사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내, 너에게 치양성 수복의 임무를 맡길 터이니, 부여구의 목을 베고 치양성을 수복하라."
사유의 윤허가 떨어지자, 고무는 정병 일만을 이끌고 치양성으로 향했다.
한편, 척후병으로부터 고구려군의 출병 소식을 들은 부여구는 즉시 장수들을 소집했다.
"아군은 오천이나, 절반 이상이 오합지졸이라 정병 일만의 고구려군과 정면으로 싸워서는 이기기 어려울 것이다. 고구려군의 허점을 노려 싸울 것이나, 여의치 않으면 퇴각할 것이니, 그대들은 이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하라."
부여구의 심복 진정이 물었다.
"하오면, 1만에 가까운 고구려의 포로들과 항복하지 않은 고구려 장수들은 미리 죽이는 것이 좋지 않겠사옵니까?"
부여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백제와 고구려는 모두 동명성왕의 후손인 형제지국이거늘, 어찌 죽일 수 있겠느냐?"
진정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하오나, 1만에 가까운 고구려의 포로들을 살려두면, 나중에 백제의 화근거리가 될까 두렵사옵니다."
부여구는 크게 웃었다.
"하하하, 나, 부여구는 누구도 두려워하지 아니한다. 오직 하늘과 민심을 따를 뿐이다. 내 뜻을 알겠느냐?"
막고해, 진고도, 진정 등의 장수들은 부여구의 말에 크게 감복하였다.
"태자 저하의 크신 뜻에 소인들은 감복할 따름이옵니다."
고무가 이끄는 고구려군은 치양성 앞에 진을 친 후 곧바로 총공세를 펼쳤다.
고구려군은 우뢰같은 함성을 지르며 전차, 운제, 충차 등의 공성 무기를 동원하여 치양성에 총공세를 퍼부었지만, 백제군은 부여구의 지휘 아래 사력을 다해 막았다.
백제군이 사력을 다해 막아 첫날의 고구려군의 공격은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이튿날, 공성전이 한창일 때 수천의 기병대가 나타나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치양성을 향해 돌진했다.
바로 그 순간, 고구려 진영에서 하늘을 찌를듯한 함성이 터졌다.
"태왕 폐하 만세! 태왕 폐하 만세!"
고구려 태왕 사유가 아우 고무를 응원하기 위해 5천의 철기병을 이끌고 친정(왕이 친히 정벌에 나서는 일)에 나선 것이다.
고구려 철기병은 기병 뿐만 아니라 말까지 철갑을 두르고 있었다.
고구려군은 5천의 철기병의 출현과 태왕의 친정에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
사유는 검을 치켜들며 명을 내렸다.
"총공격!"
사유의 명이 떨어지자 5천에 이르는 철기병이 성문을 향해 돌진했다.
"화살을 쏴라!"
백제군은 고구려 철기병을 향해 화살을 퍼부었지만, 화살은 철갑옷을 뚫지 못하고 튕겨져 나갔다.
선봉에 선 고구려 철기병이 성문 앞을 장악하자, 고구려 병사들이 충차로 성문을 여러 차례 때려 성문이 산산이 부서졌다.
성문이 부서지자 적지 않은 고구려 철기병이 성안으로 진입했다.
"강궁으로 쏴라!"
"끓는 물을 퍼부어라!"
"기름을 뿌려라!"
"철조각을 던져라!"
"바위를 던져라!"
백제군은 화살이 철기병 앞에 무용지물이 되자 온갖 수단을 동원해 철기병을 공격했지만, 고구려 철기병은 용맹스럽게 돌진하여 성을 사수하려는 백제군 진영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백제군은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고구려 철기병의 츨현에 사기가 크게 떨어진데다 절반 이상이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오합지졸이라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패색이 짙어졌다.
부여구는 큰소리로 외치며 결사항전을 독려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병사 하나가 열을 능히 대적할 수 있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라! 철기병을 겁내지 마라. 철기병도 창검으로 찌르면 죽는 것은 매한가지다!"
부여구는 수십여 명의 철기병을 베며 용맹을 떨쳤으나 물밀듯이 성안으로 들어오는 고구려군을 당해내기는 중과부적이었다.
부여구는 마침내 퇴각을 결심하였다.
"즉시 전군에 남문으로 퇴각하라는 명을 내려라!"
부여구의 외침에 북치는 병사들이 북을 울렸다.
둥둥둥둥둥둥......
퇴각을 알리는 북이 울리자 백제군은 일제히 남문으로 퇴각했다.
부여구는 이끌고 간 병력의 절반 이상을 잃는 참패를 당했다.
태자가 되어 전장을 누빈 이래 처음으로 패전의 쓴 잔을 마신 것이다.
백제왕 부여계는 부여구의 패전 소식을 듣자 기분이 찹찹했다.
자신이 바라던 대로 부여구가 패했지만, 왕으로서 자국의 영토를 적국에 빼았기는 것이 기분이 좋을 리가 만무했다.
무고하게 희생된 병사들에 대한 자책감이 들었지만, 왕위를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자위하며 측근 신하들을 불러 물었다.
"태자가 고구려군에게 참패하여 절반 이상의 병력을 잃은 채 돌아왔다. 이를 어찌 처리하면 좋겠는가?"
조정좌평 해장이 아뢰었다.
"달솔 진정과 진고도, 은솔 막고해에게 태자 저하를 보좌하지 못한 죄를 물어 직위를 해임한 후 하옥하소서."
부여계는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측근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그대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부여계의 장자인 왕자 부여상이 말했다.
"소자도 조정좌평의 의견에 찬성하옵니다."
다른 측근 신하들도 해장의 의견에 찬성했다.
부여계는 고개를 끄덕인 후 해장에게 물었다.
"허면, 태자는 어찌 처리하는 것이 좋겠는가?"
"태자 저하 역시 패전에 대한 응분의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옵니다."
"조정에는 태자를 따르는 신하들이 많은데, 그것이 가능하겠느냐?"
이때 해장의 입에서 부여계마저 깜짝 놀라게 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태자 저하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고구려왕은 태자 저하께 여러 차례 패하였으니, 고구려왕에게 사신을 보내, 태자 저하를 볼모로 보내는 조건으로 화친을 제의한다면, 틀림없이 받아들일 것이옵니다."
부여계의 장자 부여상의 장인인 해장은 부여상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부여구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는 계책을 고안한 것이다.
부여계가 의문에 찬 얼굴로 해장에게 물었다.
"태자가 가겠는가?"
이미 모든 계책을 꾸민 해장은 부여계가 묻자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태자 저하와 형제처럼 가까운 막고해와 진정의 목숨이 어하라의 손에 달렸으니, 태자 저하께서는 이들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응하시지 아니할 수 없을 것이옵니다."
이 말을 듣자 부여계는 기뻐하며 말했다.
"내, 화친서를 써줄 터이니, 그대가 이 일을 맡으라."
"어라하의 명에 따르겠나이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