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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수선

웹소설 > 작가연재 > 퓨전, 무협

공모전참가작 새글

심씀
작품등록일 :
2024.05.09 10:54
최근연재일 :
2024.06.28 19:55
연재수 :
4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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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445
추천수 :
687
글자수 :
320,486

작성
24.06.18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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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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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글자
12쪽

42화. 내가 누구냐고?

DUMMY

두 번째 종목이 미호의 승리로 순식간에 끝난 가운데.

현재 팔계를 제외한 라니와 미호가 각각 승점 1점씩을 획득한 상황이었다.

더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것인지 팔계가 시무룩하게 바닥에 드러누웠다.


[난 이제 되었소. 어차피 마지막 종목에서 내가 이긴다고 한들···.]


“마지막 시험은 특별히 2점을 걸고 진행하지.”


[뭐, 뭐요? 그게 정말이오?]


내 말에 팔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반색했다.

그런 팔계와 달리 역시나 라니와 미호가 내게 항의했다.


[그런 게 어딨어? 그럼 마지막만 어떻게든 이기면 땡인 거잖아!]

[맞아요! 그럴 거면 차라리 종목을 한 가지만 봐도 됐잖아요!]


나를 잡아먹을 것처럼 따지던 녀석들에게 나는 태연스럽게 답했다.


“싫어? 아 싫음 포기하던가. 그럼 우승자는 자연스럽게 팔계가···.”


[누, 누가 싫다고 했어?]

[빠, 빨리 다음 종목 시작해요!]


내가 팔계를 데려가려고 하자 라니와 미호가 이전보다 더욱 펄쩍 뛰었다.

이렇듯 이 대회의 주도권은 나에게 있었다.


‘원래라면 미호를 데려가려고 했지만······.’


그나마 녀석들 중에서 데리고 다닐 만한 녀석이 미호였다.

미호는 실력도 실력이거니와 하얗고 앙증맞은 외모에 함께 다닌다 하더라도 괜찮을 것이었다.

무엇보다 라니와 팔계보단 돌발행동을 하는 게 더 적을 테고 말이다.

나는 부엌에서 미리 가져온 젓가락 통을 녀석들에게 내밀었다.


“인생의 칠할은 운이라고들 하지. 마지막 종목은 제비뽑기다.”


내가 마지막 종목으로 운을 정한 건 라니와 팔계를 위해서였다.

녀석들이 머리나 힘으로 미호를 이겨내긴 요원한 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세상이 얼마나 불공평한지 알고 있던 나는 녀석들의 운을 시험해보기로 했다.


[진짜 이번에 이기면 선인이랑 함께 인계에 갈 수 있다는 거요? 좋소. 그럼 난 하겠소.]

[저도요! 어차피 제가 미호 님을 이기는 건 불가능했으니, 차라리 운에라도 맡길래요······!]


아쉬울 것 없는 팔계야 당연히 참가했고, 라니 역시 이번 종목이 자신들을 위한 것임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미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운도 실력은 실력이니까 뭐. 알았어.]


이윽고 녀석들이 저마다 주둥이로 젓가락을 하나씩 뽑았다.


“내가 하나둘셋 하면 확인하는 거야. 하나, 둘······.”


*


화란에게 빌린 은둔을 타고 화양현으로 향하던 나는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 뒤에 올라탄 녀석이 물었다.


[뭔 한숨을 그리 길게 내쉬오?]


그래.

마지막 제비뽑기에서 이긴 녀석은 바로 팔계였다.

나는 솔직하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너만 아니면 된다 싶었거든.”


[듣는 멧돼지 서운한 소릴! 솔직히 말해보시오. 선인도 내심 내가 동행하게 되어 좋지 않소?]


“좋지 않아.”


[흐흐, 부끄러워하기는. 하여간 선인도 은근히 부끄럼쟁이라니까.]


“······.”


그냥 집에 돌아갈까?

그런 생각이 턱밑까지 치밀어올랐지만 승부는 승부.

더구나 대회에서 이긴 녀석을 데리고 가겠다고 한 건 애초에 나였으니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리 노력하면 뭐하오? 운이 좋아야지. 자고로 인생이란 운칠기삼 아니겠소?]


팔계가 내 마음도 모른 채 지랄했다.


[내가 평범한 짐승이었을 시절에 신강성주와 아미파의 천라지망에서 어찌 살아남았겠소이까? 다 운이지, 운. 하나 실수가 반복되면 실력이듯 운도 반복되면 그 또한 실력이 아니겠소? 껄껄껄!]


“팔계야. 알았으니까 조금만 조용히······.”


[그러고 보니 점심을 먹지 않구려. 화양현으로 간다고 했었소? 그럼 오늘은 우리가 함께 여행하게 된 기념으로 백육에 두강주 한잔 어떻소. 원래 백육은 푹 숙성한 두강주에 먹어야 제맛···.]


“얌마! 백육은 돼지고기인데 네가 먹으면 동족상잔이잖아!”


[집돼지랑 멧돼지가 같소? 난 그런 돼지들과 종자가 다르오. 그렇게 따지면 원숭이 요리를 먹는 인간들도 동족 포식을 하는 게 아니오?]


“어떻게 한 마디를······.”


내가 이래서 최대한 팔계랑 같이 오기 싫었건만.

벌써 까무러치기 일보 직전이었던 나는 최대한 팔계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화양현 인근에 도착했다.

내가 가장 먼저 찾아간 사람은 풍 노공이었다.


“어서 들어오시게. 소협이 이리 방문할 줄 알았으면 돼지라도 잡아두었을 것을.”


풍 노공의 말에 팔계가 슬그머니 내 뒤로 숨었다.

겉보기와 달리 유독 겁이 많은 게 또 팔계였다.

내가 대문을 사이에 둔 채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오늘은 그저 인사를 드리고자 찾아뵈었습니다.”

“소협이 계획 없이 걸음 하는 사람은 아니니 다른 할 일이 있는 모양이군. 뭔가? 내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든 도와줌세.”


느긋한 말투와 달리 풍 노공은 사소한 변화도 단번에 간파하는 혜안을 가진 사람이었다.

딱히 풍 노공에게 숨길 생각이 없던 나는 공손하게 답했다.


“산에서만 살다 보니 세상이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당분간 화양현에 머물 생각입니다.”

“마침 빈방이 있네. 당연히 소협의 벗이 지낼 방도 마련해 주겠네.”

“음······.”


내가 고민하자 풍 노공이 오랜만에 방문한 손자를 대하듯 주름진 손으로 내 손등을 붙잡았다.

덕분에 원래는 객잔에서 숙식을 해결할 생각이었던 나는 생각을 고쳤다.


“그럼 당분간 신세 좀 지겠습니다.”

“신세라니. 우리 화양현 모두가 소협에게 신세를 졌는데. 그런 건 개의치 말고 편히 지내게나.”


나는 빙긋 웃으며 풍 노공을 따라 방으로 향했다.

풍 노공의 뒷모습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때아닌 당근 저주로 인해 식량이 부족해 허덕였던 화양현도 이제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내가 작물을 저렴하게 공급한 탓도 있지만, 조금의 욕심도 없이 화양현 모두에게 작물을 팔고 나눠준 풍 노공의 덕이 가장 컸다.

이윽고 방에 도착한 풍 노공이 하인들을 시켜 다과를 준비했다.

화과자를 먹으며 한담을 나누던 나는 문득 풍 노공에게 물었다.


“올해 환갑이라고 하셨던가요?”

“맞네. 하나 이 마음만큼은 아직도 이팔청춘일세.”

“그리 보이십니다.”


나는 풍 노공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함께 웃음 지었다.

찻잔을 집어 든 나는 더위에 활짝 열어놓은 방문 너머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사람은 소년이 될 수 없다고 하셨었죠.”

“그렇지.”

“하지만 다시 소년이 될 수 있다면, 노공께서는 어찌하시겠습니까?”


화유중개일(花有重開日).

인무갱소년(人無更少年).

지난날 풍 노공이 내게 한 말이었다.

나는 다시 풍 노공을 마주했다.

노공은 놀란 얼굴 그대로 굳어 있었다.


‘만일 풍 노공에게 인연단을 준다면······.’


현재 내가 가지고 다니는 인연단은 겨우 연기기 초기 수준의 단약이었다.

그러나 그건 수도계의 이야기일 뿐.

풍 노공과 같은 이들이 살아가는 강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전설의 영약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런 인연단을 풍 노공에게 준다면, 풍 노공은 다시 소년으로 회귀할 수 있을 것이다.


“청춘은 다시 오지 아니한다네.”


풍 노공은 말했다.


“아무리 돌이켜 보아도 내가 살아온 삶은 부끄러운 인생이었지. 하나 나는 그 삶 전부를 헛되이 보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네.”


이번엔 반대로 풍 노공이 문밖의 풍경을 응시했다.


“나도 소협처럼 파릇한 시절에는 꿈을 꾸었네. 이루지 못할 꿈이었지. 사랑도 해 보았네. 때로는 이별의 슬픔을 누각에 얹어놓고 술에 흥청망청 취하는 날도 있었지. 하지만······.”


다시금 나를 마주한 풍 노공이 주름지게 웃었다.


“그렇다 할지라도 그 모든 날의 나는 언제나 ‘나’였네.”


나이테 같은 그 주름마다 풍 노공이 살아온 역사가 쓰여 있었다.


“이루지 못할 꿈을 꾸었더라도, 언젠가는 이별해야 하는 사랑을 했더라도, 나 자신에게 분노하고 원망했을지언정 그 모든 시절이 있었기에 작금의 내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게야.”


풍 노공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한숨이라기엔 그 숨결에 미련은 보이지 않았다.

노공이 개운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소협이라면 분명 소년으로 돌아갈 방법을 알고 있겠지.”

“······그렇습니다.”

“미안하지만 거절하겠네. 나는 지금이··· 이 순간이 너무도 소중하고 좋아.”


풍 노공은 화양현에, 아니 이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다.

그러나 나의 욕심에 현재에 만족하고 있는 그에게 회춘(回春)을 강요할 순 없었다.

풍 노공은 정말이지 고결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나 역시 이 순간이 너무도, 너무나도 아쉬웠다.


“이런, 내 망령에 차가 식어버렸구먼. 어서 드시게.”

“오늘따라 화과자가 무척 맛있네요.”


나는 마저 차를 마셨다.

차는 어느새 미지근하게 식어 있었지만, 내 마음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


고을을 앞에 둔 위평이 수하들을 돌아보았다.


“다들 무기들은 준비됐지?”

“예, 대장!”


수하들이 위평을 향해 저마다 서슬이 오른 낫이나 도끼 같은 것을 들어 올렸다.

이에 화들짝 놀란 위평이 서둘러 수하들에게 손짓했다.


“야야, 빨리 내려라. 무섭다.”

“예? 하지만 방금 대장이···.”

“내가 준비됐냐고만 물었지 언제 수음하듯 흔들어대라고 했어?”

“······.”


서로의 눈치를 살피던 수하들이 입맛을 다시며 도로 무기를 집어넣었다.

수하들 모두는 자신들의 대장인 위평이 겁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수하들이 그런 위평을 따르는 이유는 한 가지.


“피를 보되 뼈를 보진 마라. 다들 알겠나?”

“예!”


이 드넓은 강호에서 단 한 차례도 패배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강호에서 패배하지 않았다는 건 손에 꼽는 강자라는 증거.

그렇기에 위평이라는 강호의 고수를 앞세운 취생대(醉生隊)의 대원들은 두려울 것이 없었다.

이윽고 고을에 들어선 위평이 주변을 살피다 입꼬리를 올렸다.


“저놈으로 시작하면 되겠군.”


딱 봐도 기생오라비처럼 허여멀겋게 생긴 사내가 헤실헤실한 얼굴로 주민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복어처럼 근육을 부풀린 위평이 보무도 당당하게 사내에게 걸어갔다.

불현듯 자신을 드리운 그림자에 사내가 위평 따윈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듯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가 오려나? 왠 그림자가―”


퍼억!


위평이 휘두른 주먹에 얼굴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사내가 그대로 바닥을 굴렀다.

위평은 사내를 단번에 날려버린 주먹을 자랑스럽게 들어 올렸다.


“지금부터 이 고을은 우리 취생대가 접수··· 이 고을 이름이 뭐라고 했지?”

“화양현. 얘는 이름도 모르고 접수하러 왔네.”

“어 그래! 화양현! 아무튼 화양현은 우리 취생대의 관리를···.”


다음 순간 뭔가 이상함을 느낀 위평이 곁에서 대답한 수하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수하 대신 방금 그가 주먹으로 날려버린 사내가 뒷짐을 쥔 채 태연하게 서 있었다.

위평은 황급히 바닥을 돌아보았다.

방금 꼴사납게 날아가 자빠졌던 사내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는 말은······.


“고, 고수다!”


위평의 수하 중 하나가 그렇게 외친 순간, 위평이 사내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위평이 입꼬리를 올렸다.


‘이놈이 제아무리 고수라 한들 내 악력은 바위조차 으스러트릴···.’


뭔가, 뭔가 이상하다.

온힘을 다해 어깨를 움켜쥐고 있음에도 사내는 여전히 천진난만한 얼굴로 위평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오소소!


일순 위평의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웃고 있는데, 웃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최대한 억누른 위평이 떨리는 목소리로 사내에게 물었다.


“넌··· 넌 누구냐?”

“내가 누구냐고?”


사내, 김준연이 씨익 웃었다.


“농부.”

“농부······?”

“그래 인마.”


이윽고 수많은 복사꽃이 취생대를 덮쳤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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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45화. 밥부터 먹자. +1 24.06.21 287 10 12쪽
44 44화. 얘기 좀 나눌까? 24.06.20 294 9 14쪽
43 43화. 하나 만들자. 24.06.19 310 13 14쪽
» 42화. 내가 누구냐고? 24.06.18 340 9 12쪽
41 41화. 다녀오겠습니다. 24.06.17 324 1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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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27화. 춘식이가 누군데? +1 24.06.03 553 13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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