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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수선

웹소설 > 작가연재 > 퓨전, 무협

공모전참가작

심씀
작품등록일 :
2024.05.09 10:54
최근연재일 :
2024.06.21 23:55
연재수 :
4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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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724
추천수 :
667
글자수 :
307,356

작성
24.06.03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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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7쪽

27화. 춘식이가 누군데?

DUMMY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나와 함께 산길을 내려가던 이암은 여전히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교를 쫓을 것이다.”

“그럼 이전이랑 똑같은 거 아닌가?”


이암이 고개를 저었다.


“이전에는 복수를 위해 마교를 쫓았다면, 이제는 내 목표를 위해 쫓을 뿐이다. 그뿐만 아니라 민생에 해악을 끼치는 흑도와 사교 또한 이 세상에서 뿌리를 뽑겠다.”


복수에 눈이 멀어 나를 마교도로 오해해 무작정 칼을 휘둘러오던 이암은 이곳에 없었다.

그 대신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순간을 생각하며 다른 이들의 그 순간도 지키고자 하는 협객만이 나를 마주하고 있었다.

그것은 대의였다.

아까 내가 만들어낸 꽃밭에서 피어난 건 복사꽃만이 아닌 듯했다.


“받아.”


내가 저물계에서 꺼낸 인연단을 내밀자 이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방금 어떻게 한 거냐?”

“겨울에 꽃밭을 만드는 거랑 비슷한 일이라고 생각해.”

“······그런가.”


이암은 별다른 토를 달지 않고 쉽게 수긍했다.

아마도 내게 무슨 말을 듣더라도 자신이 이해할 수 없으리란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이윽고 내 손바닥에 놓인 인연단을 내려다보던 이암이 고개를 저었다.


“그거라면 이미 있다.”

“뭐야, 진짜네?”


이번엔 반대로 내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이암이 품에서 꺼낸 인연단을 바라보았다.

이암이 말을 이었다.


“처음 그 동굴에 떨어졌을 때 바위 밑에서 발견했다. 누구인진 몰라도 아주 친절하게 바위에 기연이라고 새겨놨더군.”

“······.”


이암은 인연단을 숨겨둔 이가 누군지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

당황도 잠시 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왜 안 먹었어?”

“난 뭔지도 모르고 함부로 입에 넣고 보는 멍청이가 아니다.”


하긴······.

내 딴에는 기연이라 숨겨둔 영약이, 누군가에겐 독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이암은 무림인답게 신중한 편이었으니 당연히 그랬을 것이고.

나는 이암에게 인연단이 무엇인지 설명했다.


“그건 내가 만든 영약이야. 이름은 인연단이고.”

“인연단, 좋은 이름이군.”

“먹으면 네 경지를 올려줄 거야. 지금 네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삼화취정··· 아니 오기조원까진 이르게 해주겠지.”


나는 약효를 줄여서 말하려다가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이암의 입장에선 인연단은 어마어마한 효과를 지닌 영약이었고, 그런 영약이라면 그 성격처럼 함부로 먹기 꺼려할 것이었다.


“오기조원이라니. 그런 건 신화 속에서나 오르내리는 경지 아닌가.”


이암이 같잖지 않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반대로 인연단을 쥐고 있던 그의 손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환희와 두려움이 그의 눈동자 위로 교차한다.

머지않아 섞인 두 감정은 허탈함으로 변했다.


“그렇다면 너는, 오기조원 그 이상이었다는 뜻이겠군.”

“뭐··· 그게 그렇게 되나?”

“흥, 그러니 내가 그토록 목숨을 걸어도 이길 수가 없었던 거였어.”


반응을 보니 저 허탈함은 인연단을 향한 것이 아닌 그가 나를 이길 수 없었다는 사실 때문인 듯했다.


“알았다. 이건 잘 받도록 하지.”

“혹시 모르니까 이것도 가져가.”


잠시 고민하던 이암이 내게 받은 인연단까지 다시 품속에 집어넣었다.

하나는 이암이 오기조원에 이를 때 쓰고, 남은 하나는 아껴뒀다가 기사회생용으로 사용하면 될 것이었다.

입술을 우물거리던 이암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너를 만난 이후 줄곧··· 나는 네게 받기만 하는군.”

“너를 위해 주는 게 아니야.”

“무슨 뜻이지?”


나는 눈길을 돌려 길을 내다보았다.


“언젠가 네가 구할 사람들을 위해 주는 거지.”

“······.”


나는 모두를 도울 수 없다.

그런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까.

그렇기에 내가 돕고 싶은 이들을 도울 것이다.


‘하지만 내가 도운 이들이, 또다시 다른 이들을 돕는다면.’


이암과 대화를 주고받으며 깨달았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도우며, 많은 이들이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을 알게 된다면······.


그러니 이건 그 시작에 불과하다.


아무리 내가 수도자가 되었다고 한들.

결국은 하나의 개인일 뿐이다.

하지만 앞으로 이런 식으로 이암과 같은 이들에게 나의 의지를.

선(仙)을 잇는다면.

그렇게 누군가가 잠시라도 김준연이라는 사람을 기억해준다면.


‘나는 그걸로 살아가는 것이겠지.’


수선이란 역천이다.

하늘의 뜻을 거슬러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그저 수명을 늘리는 건 육체적인 일에 불과하다.

지금이야 영약을 먹고 화란과 미호의 도움까지 받으며 승승장구로 경지를 올리고 있다지만.

이 무량한 세계‘들’에서 나 역시 언젠가 거대한 벽에 가로막힐 날이 올 것이다.


그러니 남기는 것이다.

내가 이곳에 있었다는.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갔다는.

그런 흔적을.


“왜 그래?”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곁에 있던 이암이 어느새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아니다. 그냥······.”

“······아.”


나는 그제야 내 주변에 의식영역이 펼쳐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의식영역은 여전히 불완전했다.

그러나 더는 흩어질 듯 일렁거리지 않고 잔잔한 것이 안정적이었다.

그제야 나는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이것이 나의 바람(欲)······.’


기쁨과 즐거움을 넘어.

나는 마침내 칠정 중 세 번째 감정을 깨우쳤다.


*


사합원으로 돌아가던 나는 조금 언짢은 기분으로 옆을 돌아보았다.


“근데 너 왜 안 가냐?”


내 곁에는 여전히 이암이 걷고 있었다.

팔짱을 낀 채 정면만을 응시하고 있던 이암이 답했다.


“아직 네게 진 빚을 갚지 못했다.”

“빚 갚으라고 그런 거 아니었으니까 너 할 일 하러 가.”

“그럴 순 없다.”


이암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너를 마교도로 오해하고 출수한 것부터 시작해 나는 네게 진 빚을 전부 갚아야만 한다. 마교를 쫓든 흑도를 멸하든 그 모든 건 전부 그 이후의 일이다.”

“······.”


아무래도 이암은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내게 보답하기 전에는 떠날 생각이 없는 듯했다.

한숨을 내쉬던 나는 어느덧 보이기 시작한 사합원을 가리켰다.


“그럼 일단 네가 원하는 만큼 사합원에 머물렀다가···.”

“아니. 난 그 동굴에서 지내도 충분하다.”


나는 이암이 다급하게 말을 꺼내는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암이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점점 걸음을 늦추고 있었다.

나는 그 이유를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네가 뭘 어떻게 생각하는진 모르겠지만, 화란 님은 네가 아는 것만큼―”

“오, 오늘은 이만 여기서 헤어지는 게 낫겠군. 나는 동굴에 있을 테니 뭔가 도움이 필요하다면 차, 찾아와라!”

“······.”


이암은 그대로 길고양이처럼 달아났다.

말까지 저는 걸 보니 어지간히도 화란이 무서웠던 모양이었다.

확실히 이암은 무공을 익혔으니 다른 이들보다는 감각이라던가 기감 같은 게 예민할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이들에게 화란은 무의식적으로 정체를 가늠할 수 없는 괴물처럼 느껴지리라.

하긴 나도 아직은 화란이 종종 두려울 때가 있으니 이암은 오죽했을까 싶었다.


“그래도 좋은 사람인데.”


그렇게 중얼거리던 나는 풀썩 웃고 말았다.

돌이켜보니 지금 이암의 모습은 내가 이 세상에서 눈을 떴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니 이암도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질 것이었다.


“그보다 보답이라······.”


이암에게 시킬 거야 많았다.

당장 농사만 하더라도 이젠 법력을 사용할 생각이었기에 이틀이 걸릴 일을 하루 만에 처리해야만 했다.


‘무림인이기에 체력도 좋을 테니 며칠 정도 농사일을 돕게 하면 알아서 돌아가겠지.’


그뿐만 아니라 틈틈이 무공을 배울 수도 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꽃이나 자라는 공법보단 칼을 휘두르는 무술이 내겐 더 매력적이었다.


‘거기에 지금 난 무림인의 시선에선 내공도 외공도 거의 완성된 거나 마찬가지니까 어쩌면······.’


막말로 강호에 내려가 천하제일검이 되는 것도 헛된 망상은 아니었다.


“수도계에선 연기기 따리인 내가 무림계에선 검선?!”


소설 제목 같은 망상을 지껄이던 나는 이내 실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칠정을 깨우치고 법력을 연마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뭐 신선놀음과 수행을 병행해도 딱히 무리는 없겠지만, 그런 걸 하더라도 최소 축기기 정도는 도달한 후에나 시도해볼 법했다.


‘꺼드럭거리다가 까딱하면 죽는 게 연기기니까.’


괜히 연기기 수준의 수도자가 수많은 수도문파나 가문에서 잡일이나 도맡아 하는 게 아니다.

수도계에서 연기기는 그냥 개복치다.

어설프게 나댔다가 삼화취정이나 오기조원 같은 무림지존들에게 칼 맞아 죽는 게 연기기란 이야기다.

그러니 나는 앞으로도 나대지 말고 사려야 한다.

최소 축기기를 눈앞에 둔 연기기 후기까진 말이다.


‘여하튼 이걸로 축기기에 한 걸음 더 가까워졌어.’


원래는 그런 의도로 이암을 도운 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우연히 감정의 세 번째 본질을 깨닫게 되었다.

이제 남은 감정은 분노(怒), 슬픔(哀), 사랑(愛), 미움(惡).

가만히 되짚어 보자 이젠 만만치 않은 감정들만 남았을 깨달았다.

이곳 천원산에서 저 감정들의 본질을 파악할 겨를은 딱히 없었다.

슬픔이야 내가 무언가를 잃은 것도 아니고, 아직 누군가를 다시 사랑하거나 미워할 여유도 없다.

그리고 분노는······.


[내 춘식이 어딨소?]


나는 대문을 넘자마자 앞길을 떡하니 가로막은 팔계에게 물었다.


“춘식이가 누군데?”


[왜 그 있잖소. 그때 선인께서 데려온 그 인간 말이오.]


“······걔 이름이 왜 춘식이야? 백번 양보해서 걔 이름이 춘식이라 쳐도 왜 네 소유인데?”


[흐흐, 내가 그렇게 정했소. 아무튼 그 인간이 선인의 벗이 아니라면 내가 주워서 일꾼으로 써먹어도 되는 것 아니겠소?]


“얘기가 왜 그렇게 되지?”


팔계 얼굴을 보니 칠정 중 분노를 알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녀석은 그런 내 마음도 모르는지 짐짓 헛기침을 내뱉었다.


[딱히 악한 의도로 내뱉은 말은 아니오. 다만 이제 선인의 법술로 농사일이 바빠졌으니 일손이 더 필요하지 않겠소?]


“그건 그렇긴 한데······.”


[내가 뭐 요족 수사가 되었다고 인간들을 내 아래에 두고 핍박하겠단 얘긴 아니오.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갈 곳 없는 인간을 거둬서 먹여주고 재워주는 대가로 노동을 시키면 꿩 먹고 알 먹고, 둥지 털어 불 때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발 담그고 물 구경···.]


“야.”


나는 나지막이 팔계의 머리통을 움켜쥐었다.

팔계와 함께 살아온 지도 어느덧 반년이 다 되어간다.

그리고 이 녀석이 밥 먹을 때 외에도 혓바닥을 길게 놀린다는 건 분명 다른 의도가 숨겨져 있다는 의미다.


[왜, 왜 그러시오······?]


“너 솔직히 말해봐. 춘식이, 아니 이암 걔 데리고 뭐 하려고?”


[말했잖소? 우리를 도와 함께 밭일을···.]


“그게 아니라 걔한테 네 수발들게 할 생각이 아니고?”


[······!]


내가 정곡을 찔렀는지 팔계가 그대로 경직됐다.

이내 팔계가 어설프게 웃었다.


[하, 하하. 그게 무슨 소리요? 나는 그저 갈 곳 없는 가여운 인간을 위하는 선한 마음으로다가··· 갑자기 반지는 왜 빼시오?]


내가 화란과의 우정의 반지를 빼서 주머니에 넣자 팔계가 뒷걸음질을 했다.

그래, 내가 요즘 요수들에게.

특히 팔계에게 잘 대해주긴 했다.


“내가 가만히 보아하니 네놈 머릿속엔 마구니가 가득하구나.”


[뭣? 아니 지금 무슨 소릴··· 아무래도 선인께서 뭔가 오해를―]


“닥쳐 이 멧돼지 새끼야!”


[뀌익······!]


그대로 팔계의 볼기를 후려친 나는 문득 이제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곤 내 방을 바라보았다.


“미호야.”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방에서 나온 미호가 팔계를 노려봤다.

나는 그런 미호에게 말했다.


“지금 팔계의 머릿속에는 마구니가 가득하다. 그 마구니를 때려죽여.”


[알았어.]

[사, 살려주시오, 선인······!]


곧바로 법력을 피워올린 미호가 팔계를 향해 서서히 다가갔다.

돼지 멱따는 소리가 저녁 내내 천원산에 울려 퍼졌고, 이후 팔계는 다시는 이암을 춘식이라 부르지 않았다.


*


춘식이··· 아니 이암이 나를 도와 밭일을 시작한 지도 어느덧 일주일이 지났다.

처음엔 화란을 두려워하며 밭일을 하면서도 수시로 사합원을 돌아보던 이암이었지만, 이제는 꽤 익숙해졌는지 라니와 팔계를 도와 능숙하게 작물을 수확하고 있었다.

나는 밭일을 마치고 다시 동굴로 돌아가려던 이암을 불러 세웠다.


“그러지 말고 밥이나 먹고 가지?”

“됐다. 내가 먹을 건 스스로 구할 수 있다.”

“그럼 먹고 싶은 곡물 있으면 한 자루 가져가.”

“괜찮다. 아직 저번에 받은 게 남아있으니.”


요즘 수확한 곡물들이 하도 많아 이암의 동굴에도 내가 준 쌀과 당근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의외로 이암은 요리를 잘하는 편이었다.

며칠 전 이암의 동굴에 놀러 갔을 때 거의 객잔에서 파는 음식 수준의 식사도 대접받았었다.

다시 걸음을 옮기던 춘식이가 문득 나를 돌아보았다.


“오늘 저녁에도 동굴에 올 생각인가?”

“뭐 그래야지. 늦어도 아홉 시··· 아니 술시까진 갈게.”

“마음대로 해라.”


나는 요즘 연단술을 끝내고 저녁을 먹은 뒤에 이암에게 찾아가 검술을 배우고 있었다.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터라 이암의 칼을 위에서 아래로만 휘두를 뿐이었다.


‘그래도 생각보단 재밌단 말이지.’


검술 수련은 의외로 지루할 것 같았지만, 이미 내 육체는 요단 덕분에 완벽한 수준이라 그런지 체력단련 같은 자잘한 수련은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처음엔 똑바로 휘두르지도 못하던 것이 이제는 제법 반듯하게 내리칠 수 있게 되었다.


‘이러다 진짜 내가 검선이 되는 건 아닐지······.’


라는 망상을 하던 내 귓가에 문득 이암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런데 꼭 내게 검술을 배워야겠나?”

“갑자기 그건 왜?”

“난 널 제대로 가르칠 자신이 없다.”


이암이 무엇을 걱정하는진 나도 알고 있다.

애초에 나는 무공 따윈 없어도 이암 정도의 무림인은 손쉽게 제압하는 것을 넘어 목숨까지 앗아갈 수 있는 수준이다.

이암도 처음 내가 아무런 무공도 익히지 않았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었다.

그럼에도 이암은 내 정체를 캐묻지 않았다.

아마도 나 역시 인연단을 먹고 이렇게 강해진 것이라 생각하는 듯싶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넌 검술에 재능이 없다.”


뭐?


“나도 그리 무공이 뛰어난 편은 아니지만, 한때 강호에서 암약하며 많은 이들을 보았다. 그중에선 너와 같은 이들도 있었지.”

“나와 같은 이들이 어떤 이들인데······?”

“아무리 발버둥 쳐도 목표를 이룰 수 없는 이들.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이 다른 이들. 그렇다고 낙담하지 마라. 이건 온전히 재능의 문제니.”


어······.

여기서 갑자기 재능 얘기가 나온다고?

이암이 이런 얘길 꺼낼 줄 몰랐던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애초에 무림에선 타고난 육체가 재능 아닌가?’


천년기재나 무황지체처럼 그냥 숨 쉬는 것만으로도 무공이 쌓이는 이들을 무림에선 천재라고 한다.

지금 내가 그랬다.

물론 숨 쉬는 것만으로 무공을 익히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애초에 내 육체는 영력과 요단의 음양지기로 웬만한 도검은 침범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런 내게 이암은 말했다.


“아무리 바위가 무겁고 단단하다고 한들, 바위가 매화검법이나 오호단류도 같은 무공을 사용할 순 없는 이치와 같지.”

“······그러니까 네 말은, 내가 그 바위라는 거야?”

“안타깝지만 그렇다. 물론 노력으로 재능의 격차는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며칠 동안 보아온 네 수준에 의하면 검술의 극치를 보기 위해선 수백 년이 걸리겠지.”


뭐야······.

그렇다는 말은 지금까지 내가 배워온 검술들이 헛수고라는 얘기잖아.


‘······아니지.’


나는 이암이 말한 부분 중 현실적으론 불가능하지만, 나에게는 가능한 부분을 되새겼다.

이암은 분명 노력으로 재능의 격차를 극복하는 게 가능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 기간이 무려 수백 년.

정말로 수백 년이 걸릴진 모를 일이나 최소한 내가 바위에서 사람이 되려면 그만큼의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의미일 것이었다.


‘그리고 난, 그 수백 년 동안 살아가는 게 가능한 수도자고.’


그렇다.

재능이 없다면 시간을 쏟아부으면 된다.

여기선 얼마나 수명이 늘어나는진 모르겠지만, 웬만해선 축기기에 이르는 순간 내 수명은 200년 정도는 더 늘어날 테니까 말이다.


‘그렇게 결단기 원영기에 이르면 언젠가 나도······.’


문득 손에 쥔 희망이 연기가 되어 흩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원영기에 오르면 최소 천 년 이상은 살게 된다.

그런데 원영기다.

하계에선 천외천이라 부르는 그 원영기.

원영기가 아니라 축기기 정도만 되어도 무공은 취미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게 될 것이었다.


‘결국 검선이 되겠다는 꿈은 포기할 수밖에 없는 건가.’


현실을 받아들이고 낙담하던 내게 이암이 다가왔다.

내가 그냥 검술은 취미로 배우고자 마음먹은 순간이었다.


“그 대신 바위는 그 자체로도 강하다.”


이암의 주먹이 의미를 모르고 눈만 깜빡이던 내 가슴을 툭 쳤다.


“그러니 너는 검이 아닌 권을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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