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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수선

웹소설 > 작가연재 > 퓨전, 무협

공모전참가작

심씀
작품등록일 :
2024.05.09 10:54
최근연재일 :
2024.06.21 23:55
연재수 :
4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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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7
글자수 :
307,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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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2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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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36화. 돌아가자.

DUMMY

침묵이 무한히 이어진다.

나와 유귀 그리고 화란은 지하별궁의 교태전(交泰殿)이라 불리는 곳에서 삼자대면 중이었다.

침묵에 다시 광증이 도질 거 같았던 내가 말문을 열었다.


“화란 님. 일은 잘 해결되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그대는 잠시 입을 닫아라.”

“······.”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숙였다.

겉보기엔 평소의 화란이었지만, 음절 하나하나에 담긴 감정은 평소의 그녀가 아니었다.


“혼례는 올리지 말라 했거늘, 네가 감히 본녀의 말을 무시했군.”


나는 놀란 마음에 화란을 올려다보았다.


‘약을 만들 때 보이지 않는다 했더니, 그동안 유귀랑 만났던 건가?’


하긴 유설령의 말과 달리 광증이 극에 달한 유귀가 나를 찾아와 내 머리를 뜯어먹은 일은 없었다.

아마도 내가 광증에 빠져 단약을 만들 동안 화란이 시간을 벌어준 것이리라.

그사이 화란에게 예의를 차린 유귀가 고개를 조아리며 답했다.


“진인께는 송구하오나, 혼례식을 올리지 않는다면 유령명궁의 이들이 혼란에 빠질까 염려하여 진인의 말씀을 무시하면서까지 강행하였나이다.”


그동안 어떤 일이 있던 것인지, 화란을 대하는 유귀의 태도가 공손해져 있었다.

아니 공손해진 것을 넘어 엄연히 유령명궁의 궁주인 그녀가 이소사대하듯 화란을 대하고 있었다.


“하여 진인께서 바라시는 무엇으로든 보상하겠습니다.”

“이미 혼례를 올려 이곳 모두가 김준연을 네 남편으로 알고 있을 터인데 어찌 보상하겠다는 것이냐?”

“저희 궁도들은 아직 제 병마가 치료되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이를 이용해 지금 당장 파혼을 명해도 아무도 의심치 않을 것이옵니다.”

“흐음······.”


화란이 근심이 깊은지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때 나와 눈이 마주친 화란이 눈매를 좁혔다.


“거기 있지 말고 이쪽으로 와.”

“예? 예······.”


유귀의 옆에 앉아 있던 나는 황급히 화란의 곁으로 이동했다.

다음 순간 내 손등을 꼭 붙잡은 화란.

내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우린 이만 돌아가겠다. 만일 우리가 돌아가서도 내 사람이 네 남편이라는 소문이 천원산까지 들려온다면, 그땐 정말 참지 않을 것이야. 알겠느냐?”

“명심하겠나이다. 허나 낭군의 노고를 헤아려 약소하지만 답례를―”


━━誰 가 ■ 의 ■ 君 이 라 ■ 것 이 냐?━━


지이잉!


일순 뇌가 하얗게 타들어 가는 통증 속에서 백지화된머릿속에격을헤아릴수없는수준의빙도공법들이―


“화 많이 났나 보다.”


화란의 반대편을 돌아보자 아무도 없었다.

방금 누군가 여기서 단약을 먹고 있었던 거 같은데······.

여하튼 나는 역정을 내던 화란의 손을 맞잡았다.


“진정하십시오. 전부 유귀의 병 때문에 엎질러진 일 아니겠습니까?”

“심신이 온전치 못하다고 하여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감히 올리는 말씀이지만, 병은 스스로 통제할 수 없기에 병이라 합니다.”

“흐으음······.”

“더구나 이렇게 진심으로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저도 이번에 영초를 많이 써서 보상을 좀 받아야겠습니다.”

“그대가 이리 말한다면······ 알겠다. 나도 조금 흥분한 건 사실이니 그대의 얼굴을 봐서라도 참으마.”

“감사합니다.”


내가 웃자 화란도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나는 슬슬 상황을 정리하고자 유귀에게 말했다.


“유귀 님의 광증을 치료한 건 기쁜 일이나, 저는 본의 아니게 이곳으로 끌려와 해를 보았습니다.”


때로는 가끔 모른 척 넘어가야 하는 일도 있지만.

이럴 땐 그냥 넘어갔다간 화란의 위엄도 그렇고 모양새가 이상해진다.

유귀도 내게 보상하길 바라는 것 같기에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유령명궁에서 적절히 답례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다. 다만 내 낭··· 그대에게 많은 빚을 졌고 이 빚은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을 듯한데, 정말 그것으로 괜찮겠는가?”


문득 화란의 눈치를 살피던 유귀의 말투가 느슨해졌다.

딱히 중요한 건 아니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귀가 말을 이었다.


“그럼 본궁의 보고를 열어줄 테니 원하는 게 있다면 마음껏 가져가도 좋다.”

“감사합니다.”


나는 슬쩍 화란의 안색을 살폈다.

다행히 무표정한 것이 화란도 만족한 모양이었다.

다만 금방이라도 화란이 유귀의 금단을 흩어버릴 것 같은 분위기였기에 나는 슬슬 이번 여정에 마침표를 찍었다.


“지금은 정리해야 할 일이 많으니 답례는 나중에 다시 방문할 때 받는 거로 하겠습니다.”

“이야기는 이쯤 하였으면 되었다. 더는 이곳에 있고 싶지 않구나. 그만 돌아가자.”


대화가 끝나자마자 화란이 품속에서 꺼낸 은둔에 나를 태웠다.

또다시 납치당하는 기분이었지만, 이제 집으로 돌아간다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안했다.


“파혼은 지금 즉시 행하도록.”


그때 손을 들어 올려 법력을 발산한 화란이 지하별궁의 천장을 거대한 빙산으로 뚫어버렸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기함하는 나와 달리, 무슨 뜻인지 이해한 유귀가 굳은 얼굴로 끄덕였다.

유령명궁의 상공을 부유하고 있던 우리를 향해 유귀가 외쳤다.


“이런 괘씸한! 백천화가 신랑을 데리고 도망쳤다! 다시 본녀의 신랑이 돌아올 때까진 이 혼례는 보류다, 보류! 흐으윽, 오늘 밤 둘 중 하나는 죽어 귀신이 될 때까지 쌍수하려 했건만······!”


······어쩌면 유귀는 혼례식 때도 제정신이었을지 모른다.

연기를 저렇게 잘 하는 걸 보면 말이다.

머지않아 유령명궁의 지역을 벗어난 나는 온통 눈으로 뒤덮인 북해를 내려다보며 풀썩 웃었다.


“요수들은 어쩌죠?”

“······헛?”


그제야 별궁에 놔두고 온 녀석들이 생각난 건지 화란이 은둔을 멈춰 세웠다.

이후 우리는 화란에게 납치된 나를 되찾으려는 유령명궁의 귀도공법 세례를 뚫으며 녀석들을 데리고 천원산으로 돌아왔다.


*


내가 유귀에게 납치당했다가 집으로 돌아온 지도 하루가 지났다.

오랜만에 나를 관조했다.

어제는 유귀에게 해를 봤다고 했지만, 딱히 내가 손해만 본 것은 아니었다.


‘법력을 운용하는 수준이 부쩍 늘었어.’


유귀의 병마를 치료하기 위해 나 역시 광증이 도지는 단약을 먹은 결과.

그 단약이 어떤 작용을 했는진 몰라도 이전보다 내 속성 법력에 대한 이해도가 몇 배는 넘게 상승해 있었다.


꿈틀꿈틀-


내 손바닥 위로 미니어처 크기 수준으로 축소된 나무가 한 그루 자랐다.

이렇듯 이제 의지를 언령으로 내뱉지 않아도 생각만으로도 법력을 원하는 형태와 위력으로 발현할 수 있게 되었다.

더구나 이전에 연마한 명천화연과 수엽호신법의 구결도 좀 더 명료하게 이해되고 있었다.

달라진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 정도 연단술이면 바로 진짜 인연단에 도전해도 문제없겠어.’


폭발적으로 상승한 건 내 법술 실력만이 아니었다.

유령명궁에서는 정말 살기 위해 연단을 했다.

물론 유귀에게 목숨을 위협당해서가 아니라, 광증에 미쳐 나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게 어느 정도냐면 이젠 팔계의 미각 없이도 인연단의 상위 버전을 스스로 구상할 수 있을 정도.

일전에 백웅에게 받은 축기단도 있으니 그것을 토대로 나만의 축기단 역시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었다.

물론 시행착오를 거쳐야겠지만, 왠지 지금이라면 원하는 단약은 손쉽게 만들 자신감으로 충만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남았는데······.’


마루에 걸터앉아 있던 나는 화란의 방을 돌아보았다.

어제 이후 화란은 집으로 돌아온 뒤부터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오늘 아침 문안 인사를 올리러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직도 화가 덜 풀리신 건가······.”


귀찮다고 수도자들의 다리 한 짝과 유귀의 머리 절반을 날려버리는 사람이 화란이다.

그 성격대로라면 어제 유귀의 금단을 흩어버려야 직성이 풀렸을 터.

그것을 내가 말렸으니 화가 여전한 게 당연한 일이었다.


[쯧쯧, 왜 그렇게 눈치가 없소?]


그때였다.


[선인은 진실로 산주께서 노기를 풀지 않는 연유를 모르는 것이오, 아니면 모른 척하는 것이오?]


“······그게 뭔 소리야?”


우물 근처에 만든 진흙탕에 몸을 푹 담그고 있던 팔계가 나를 못마땅하다는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팔계가 진흙에 몸을 몇 번 뒹굴뒹굴하고는 내게 다가왔다.


[이리 눈치가 없어서야······ 일단 약속한 금령초부터 줘보시오. 오랜만에 진탕 뒹굴었더니 입이 심심하구려.]


어제 녀석들에게 원하는 영초를 하나씩 주기로 약속했던 나는 저물계에서 금령초를 꺼내 팔계의 입에 물려주었다.

금령초를 오물거리던 팔계가 그제야 만족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예를 한 가지 들어보겠소. 가끔 선인은 요상한 부분에서만 이해가 뒤떨어지곤···.]


“오랜만에 인의예지로 맞아볼래?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크, 크흠! 보채지 말고 일단 듣기나 하시오. 만일 선인이 아끼는 물건을 다른 사람이 가져갔다면 기분이 어떻겠소?]


“음······.”


나는 어렸을 때의 일을 떠올렸다.

내가 아직 미취학 아동이었을 시절, 아버지가 사준 장난감을 동네 초등학생 형에게 빼앗겼던 일이 있었다.

그땐 스마트폰은커녕 시골이라 인터넷도 느려 컴퓨터 게임도 하지 못하던 시절이었기에 그 장난감만이 내 유일한 오락거리였었다.

그리고 그런 장난감을 빼앗겼을 땐······.


[되찾은 후가 더 분한 법이지. 그렇지 않소?]


팔계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무기력하게 빼앗겼다는 나에 대한 원망.

그리고 다른 사람의 손에 더럽혀졌다는 찝찝함.

돌이켜보면 나도 그때 되찾은 장난감을 며칠 가지고 놀지 못했던 기억이 있었다.


‘만일 내가 화란이 아끼는 물건이라면······.’


화란도 지금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을 것이었다.

그럼 나는 이제 얼마 못 가 화란에게 버려지는······.


“안 돼!”


나는 다급히 화란의 방으로 향했다.

이대로 화란에게 버려질 순 없다.

이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유귀에게 납치된 순간 새삼 되새길 수 있었다.

당장 유령명궁의 궁주인 유귀에게 잡혀가 꼼짝없이 혼례를 올릴 뻔한 것만 봐도······.


‘······이건 딱히 나쁜 일만은 아니지 않나?’


아, 아무튼!

지금이야 화란의 보호를 받고 있기에 망정이지, 나처럼 주제에 맞지 않은 능력을 지킬 힘조차 없는 산수 같은 건 조금만 운이 나빠도 다른 수도자에게 납치당해 평생 지하에 갇혀 군만두나 먹으며 죽지 못해 살아갈 것이었다.


“화란 님. 저 김준연입니다. ···화란 님?”


하지만 아무리 문 앞에서 그녀를 불러봐도 대답이 없었다.

일순 눈앞으로 불길한 미래가 스쳤다.

화란에게 버려진 내가 요수들과 함께 외딴 섬에서 농사나 지으며 늙어 죽어가는···.


벌컥-


다음 순간 열린 문 너머로 화란이 나를 마주하고 있었다.

내가 놀랄 새도 없이 엎드려 빌려던 순간이었다.


“이리 와.”

“엇······!”


나를 억지로 방안으로 들인 화란이 문을 닫고는 맞은편에 앉았다.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모습에 내가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떨구고 있자 화란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고개를 들어라.”

“예······.”


천천히 고개를 든 순간, 화란의 얼굴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서로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거리에서 그녀가 내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윽고.


“웁, 우웁··· 지금 뭘 하시는, 웁······!”

“가만히 있거라.”


화란이 소매로 내 입술을 도자기처럼 닦기 시작했다!

얼마나 문질러대는지 입술의 주름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걱정까지 들었다.

다행히 화란은 내 입술이 닳아 없어지기 전에 손을 거뒀다.

내가 우두커니 화란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자 그녀가 별안간 한숨을 내쉬었다.


“다 내 잘못이다. 내가 너무 안일했느니라······.”


이제는 자책하기 시작한 화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그녀의 감정변화에 내가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네려던 순간이었다.


“법술을··· 이제부터 그대에게 법술을 하나 부여할 것이다. 이건 그저 법술을 부여하기 위한 것이니, 그대는 오해하지 말고 가만히 있거라.”

“무슨 법술인진 모르겠지만 알겠―”


다음 순간 화란이 법술 대신 입술을 내게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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