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너무 크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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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니와 팔계가 완전히 새 단장을 마친 집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음··· 이젠 사합원이라 부르면 안 될 정도로 변해버렸네요.]
라니의 말대로 기존의 사합원이 그저 주택 수준이었다면, 이젠 아예 문파 하나를 세워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의 장원이 되어 있었다.
‘이 정도 규모면 오십 명··· 아니 백 명 정도는 거뜬히 지낼 수 있겠군.’
아침마다 밭일을 위해 드나들었던 정문은 낡고 초라했던 모습을 완전히 탈피해 대궐의 입구처럼 변해 있었다.
정문을 중심으로 새로 생긴 담벼락 너머로는 능히 삼십 장은 거뜬히 넘는 길이의 마당이 펼쳐진다.
“어떠십니까?”
유설령이 말했다.
“귀하께서 연단에도 재주가 있으시니 이를 위해 수련관 외에 의약당도 따로 만들어 보았는데 마음에 드시는지요?”
나는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고개만 끄덕였다.
‘겨우 삼 일만에 이 모든 걸 다 만들어버리다니.’
처음 유설령의 지시로 무색빙곡에서 열 명의 수도자들이 사합원을 방문했을 땐 최소 한 달은 걸리겠다 싶었다.
그런데 한 달도 아닌 삼 일.
그것도 그저 사합원을 옆으로 증축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형태로 수십 배는 더 확장해버렸다.
나는 아직도 얼떨떨한 기분으로 비로소 유설령에게 답했다.
“잠시 둘러봐도 되겠습니까?”
“이제 귀하와 백천화 님의 거처이니 편히 둘러보십시오.”
나는 요수들을 데리고 가장 먼저 의약당으로 향했다.
의약당에 들어선 순간이었다.
[신경 좀 쓴 모양이네.]
미호의 혼잣말처럼 의약당엔 연단을 위한 도구와 재료들이 빠짐없이 갖춰져 있었다.
심지어 저 단로는 내가 쓰던 것보다 더 좋은 재질이었다!
유설령이 안내인처럼 덧붙였다.
“앞에 보이는 저 보관함은 저희 무색빙곡의 법술을 걸어두어 약재를 보관하여도 오랫동안 상하지 않을 겁니다.”
“완전 냉장고네요······.”
우리가 다음으로 향한 곳은 수련관이었다.
수련관이야 어떻게 만들든 거기서 거기였으니 딱히 감탄할 구석은 없겠지만, 나는 왠지 수련관에 들어선 이후 달라진 공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곳에 오니까 영력이 짙은 기분인데, 여기도 무색빙곡의 법술을 걸어놓으신 건가요?”
“아닙니다. 다만 수련관 바닥 밑에 영석을 깔아두어서 그럴 겁니다.”
“영석이요? 얼마나 깔아두었기에 이 정도의 영력이······.”
“대략 오십만 개 정도 깔아두었을 겁니다.”
오, 오십만 개라고?
‘지금 내가 사용하는 저물계의 가격이 영석 백 개니까 오십만 개면······.’
영석 오십 개로도 십만대산의 장터에서 충분히 좋은 영약이나 법기를 구매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오만 개도 아니고 오십만 개라니.
내가 놀라워하고 있자 유설령이 아쉬운 투로 중얼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오백만 개를 깔아드리고 싶었으나, 저희 무색빙곡의 재정도 여유가 있는 건 아니라서······.”
“아, 아닙니다. 이 정도로도 충분합니다!”
“그리 기뻐하시니 마음이 놓이는군요.”
나는 진심으로 고마움을 담아 유설령을 바라보았다.
영석이 괜히 수도자들의 화폐로 쓰이는 게 아니다.
오랜 세월 땅속에서 천지영기를 흡수한 특별한 보석을 영석이라 부른다.
그렇기에 영석이 많은 곳은 자연스럽게 천지영기가 짙어지고, 천지영기가 짙다는 것은 수도자에겐 수행하기 최상의 조건이라는 의미다.
‘하긴 세계 자체에 천지영기가 희박하니 이렇게라도 수행해야 경지를 올릴 수 있겠지.’
더구나 이런 하계에서, 그것도 사계인 이곳에서 영석은 무척이나 귀한 상황일 터.
그런 영석을 아낌없이 퍼준 유설령이 갑자기 위대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흠, 흠.”
문득 화란이 곁에서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녀가 내 입에서 튀어나와 유설령의 금단을 박살 내는 상상이 눈앞으로 스친 나는 서둘러 기쁨을 감췄다.
우리가 다음으로 도착한 곳은 식당이었다.
거의 객잔 수준의 좌석과 부엌이 딸린 곳이라 팔계가 입이 찢어지도록 기뻐했다.
그렇게 의약당과 수련관 그리고 식당을 지나 우리는 대청에 도달했다.
뛰어다녀도 부족함이 없는 대청과 복도를 중심으로 수십 개가 넘는 방들이 보였다.
유설령이 설명했다.
“이곳 안방을 중심으로 작은 방들을 지나면 옷방과 욕실이 있습니다. 휴게실엔 백천화 님과 준연 후배가 한담을 나눌 수 있도록 여러 다기와 놀이기구들을 준비해 놓았으니 여가 생활을 할 때도 부족함이 없을 겁니다.”
휴게실뿐만 아니라 옷방엔 나와 화란뿐만 아니라 요수들까지 입을 옷까지 부족함 없이 준비되어 있었다.
옷의 재질도 무색빙곡에서 준비한 것이라 그런지 평범한 비단과 달리 웬만해선 찢어지거나 해지지 않을 것이었다.
안내를 마친 유설령이 화란에게 고개를 숙였다.
“두 분께서 흡족한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이는군요.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이윽고 내게도 인사를 건넨 유설령이 비둔술을 이용해 무색빙곡으로 떠났다.
그때 말없이 자신의 방을 들여다보고 있던 화란에게 내가 물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집이 너무 바뀌었기 때문일까.
화란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마음에 든다. 다만··· 너무 크구나.”
그제야 나는 화란의 표정이 어째서 좋지 않았는지 이해했다.
화란 정도의 수도자라면 범인들을 쥐어짜 내는 한이 있더라도 천원산에 궁궐을 지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화란은 나와 함께 살기 이전부터 허름하고 작은 사합원에서 살고 있었다.
‘화란은 언제나 소박한 편이었지.’
유령명궁처럼 궁전에서 살아가는 유귀와 다르게 화란은 꾸밈없이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나도 거짓 없이 수수한 그녀의 모습이 좋았다.
“그래도 한 번쯤은 이런 곳에서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습니까?”
“그것도 그렇다만······.”
이윽고 화란이 본심을 털어놓았다.
“나와 그대의 방이 멀어졌지 않느냐.”
“음··· 그렇긴 하네요.”
원래의 사합원이라면 서로 방문을 열어두면 바로 얼굴이 보일 거리였다.
그러나 대청이 커진 지금이라면 방문을 활짝 열어두어도 서로의 얼굴이 점처럼 작게 보일 것이었다.
나는 풀썩 웃으며 답했다.
“그럼 저는 마루에서 지내겠습니다.”
“아니다. 나는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라···.”
“그래야 화란 님께서 언제든 저를 보호해주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내게 입술을 맞춰 법술을 부여한 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화란은 내 신변을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이젠 나도 안다.
화란이 나를 얼마나 생각해 주고 있는지.
그런 화란을 위해서라면 마루에서 지내는 것 정도는 아무런 불편함이 없었다.
[쯧쯧.]
그때였다.
[하여튼 이리 눈치가 없어서야··· 연못의 물고기도 다 말라 죽겠군.]
내 다리를 머리로 툭 친 팔계가 갑자기 혀를 찼다.
그뿐만 아니라 라니와 미호조차 나를 뭔 동물원의 원숭이 구경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다들 왜 이러지?’
다음 순간 라니가 맑은 눈망울로 말했다.
[그럼 선인님이랑 산주님이 같은 방을 쓰면 되지 않나요?]
“얘가 갑자기 무슨 소릴···!”
내가 놀라 펄쩍 뛰었다.
팔계도 라니의 말을 거들었다.
[제아무리 남녀가 바른 곳에 있는 것이 천지의 대의라 하지만, 태극도 음양이 합일해야 비로소 형성되는 것. 거리가 멀면 가까이 붙이면 되는 거 아니겠소?]
“지금 무슨 소리들 하는 거야? 나 몰래 단체로 광증이 도지는 단약이라도 먹었어?!”
[이상하구려. 선인은 지금 무슨 소리 안 들리시오?]
“무슨 소리?”
[복장 뒤집어지는 소리 말이오.]
“······?”
나는 정말로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어 우두커니 천장만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다들 왜 이러는 걸까?
내가 어떻게 감히 화란과 같은 방을 쓰라는 거냐고······.
“다들 그만하거라.”
내 고민이 심마로 변하려던 순간 화란이 중재했다.
“그저 정들었던 집이 많이 바뀌었기에 투정 한번 부려본 것이니. 그리고 그대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각자의 수행에 방해가 될 터이니 같은 방을 쓰는 건 아니 된다.”
그대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 화란이 문을 닫으며 말을 이었다.
“조금 피곤하구나. 난 쉬러 갈 테니 다들 할 일들 하여라.”
화란이 방문을 닫자 라니와 팔계는 물론 미호까지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며 내게 한마디씩 던졌다.
[바보.]
[등신.]
[쪼다 해삼 나려타곤 일걸개 고금제일 천둥벌거숭이.]
“······.”
나는 그대로 팔계의 뚝배기를 깼다.
*
새로 바뀐 방에 누워 있던 나는 낯선 천장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도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화란이야 소박한 성격이니 그렇다 해도, 문제는 요수 녀석들의 반응이었다.
내가 버릇처럼 쓰다듬고 있던 미호에게 물었다.
“넌 뭐가 문제였는지 알지?”
[몰라.]
“그럼 왜 나한테 아까 등신이라고 했어?”
[등신이니까.]
“······.”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어느새 바보 등신 쪼다 해삼 나려타곤 일걸개 고금제일 천둥벌거숭이가 되어 있었다.
물론 주둥이를 함부로 나불거린 팔계 뚝배기를 손수 깨줬기에 쪼다부터는 말을 취소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바보 등신이었다.
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까 내가··· 화란 님이랑 방을 같이 써야 했던 건가?”
[글쎄.]
“진짜 내가 방을 같이 안 써서 화란 님의 기분이 언짢아진 거야?”
[모른다니까.]
나는 모르쇠로 대꾸하는 미호를 그만 쓰다듬었다.
그러자 미호가 내 손끝을 입으로 물어 다시 손을 원위치시켰다.
“대답해주기 전까진 쓰담쓰담 없어.”
[치사하게 이러기야?]
“그보다 넌 네 방 놔두고 왜 내 방에서 이러고 있는 건데?”
[여기가 더 편하니까. 뜨거운 맛 보기 싫음 잔말 말고 쓰다듬기나 해!]
“으, 응······.”
미호의 화도공법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던 나는 쓰담쓰담 기계가 되어 다시 미호의 털을 빚어주었다.
그게 좋은지 한동안 그르릉 소리를 내던 미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원래 이런 건 본인이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 법이야.]
“그러니까 그런 게 뭔··· 아니다. 그만 생각하고 공법이나 연마하자.”
더는 이런 일로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 순 없던 나는 몸을 일으켜 미호를 마주했다.
미호도 공법 연마라는 말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일어났다.
“나도 슬슬 지도공법을 배울까 하는데, 뭐가 좋을까?”
[지도공법까지 배우려고? 어차피 천도공법만 익히고 지족 수행은 영약으로 맞추면 되잖아.]
“그것도 그렇긴 한데, 이왕 기초를 다지는 김에 제대로 하면 좋지 않겠어?”
[틀린 말은 아니지. 좋아.]
이윽고 내 품에 올라와 앞발 한쪽을 내 단전에 얹은 미호가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뜬 미호가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넌 팔계처럼 양기가 충만하니 금강비법을 배우면 돼. 지금부터 구결을 설명할 테니 잘 듣고 따라 해. 두 번 말하게 하면 알지?]
“근데 금강비법은 금 속성 연체공법 아니야? 난 목 속성인데.”
[내가 그런 것도 모르고 말했겠어? 가만히 있으면 어련히 알아서 해줄 테니까 넌 잘 배우기만 해.]
“아, 알았어.”
미호가 발톱을 세우는 모습에 나는 즉시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았다.
나는 머지않아 미호가 이야기하는 구결을 따라 금강비법을 익히기 시작했다.
문득 구결을 외우던 나는 미호의 오성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금강비법의 구결을 나에게 걸맞게 바꾸다니······.’
따로 시간을 들여서 만든 것도 아닌, 그냥 그 자리에서 즉시 공법을 변형시킨다.
무엇보다 더 놀라운 건 그냥 금 속성 공법을 목 속성으로 변형한 것이 아닌, 내게 최적화된 구조로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미호가 우리 중에 가장 먼저 축기기에 이르겠지.’
영약이 없다는 가정하에 이야기하자면, 내가 축기기에 오를 무렵엔 미호는 이미 원영기가 되어 있을 것이었다.
이후 새벽이 지나 창밖으로 여명이 밝아올 때까지 나는 지도공법을 연마했다.
잠시 두세 시간 정도 눈을 붙이기로 한 나는 미호와 함께 자리에 누웠다.
잠이 들 때까지 미호를 쓰다듬던 나는 불현듯 생각나는 질문을 던졌다.
“넌 왜 수선을 하는 거야?”
[영근이 생겨서 요수로 각성했으니까.]
“그런 이유 말고.”
[······.]
무언가 생각에 빠진 듯 미호가 침묵했다.
그동안 나는 내가 수선하는 이유에 대해 사유했다.
모든 수도자가 경지를 올려 비승해야만 하는 의무는 없다.
연기기든 축기기든 결단기든, 혹은 그 이상이든 현재에 만족할 수만 있다면 그곳이 하계든 상계든 천수를 누리며 살아가면 그만이었다.
‘그런데도 어째서 수도자는 더 높은 경지를 갈구하는 것일까.’
아직 연기기밖에 되지 않았기에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연기기가 되었기에 나는 조금이나마 그 이유를 가늠할 수 있었다.
‘모든 수도자가 높은 경지를 갈구하는 건, 자신의 바람을 이루기 위한 것일지도.’
칠정 중 바람(欲)을 깨우친 나였기에 유추할 수 있는 결론이었다.
모든 인간은, 아니 살아있는 모든 것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욕망한다.
그리고 욕망이라는 것은 채우면 채울수록 밑 빠진 독처럼 더 많은 것을 바라게 된다.
나의 욕망은 지키고 싶은 것을 지키는 것이다.
더 자세히는 나누고 싶은 이와 나누는 것.
콩 하나도 좋아하는 사람과 나누면 더 맛있고 기쁘다.
그럼 그 이상의 것을 내 소중한 이들과 나눈다면, 그 기쁨은 얼마나 더 커지게 되는 것일까?
[내가 수선하는 이유는······ 엄마 때문이야.]
미호가 말했다.
[나 때문에 엄마가 돌아가셨어. 그러니까 더 많은 것을 배워서, 앞으로 누구도 그런 일을 겪지 않게 할 거야.]
미호는 흉수로 변한 어머니를 죽인 화란을 원망하지 않았다.
어머니를 흉수로 변하게 한 영약을 심은 나 역시 원망하지 않았다.
미호는, 그저 자기 자신을 원망하고 또 원망하고 있었다.
무지(無知).
그것이 미호가 수선하는 이유이자 목적이었다.
“넌 분명 그렇게 할 수 있을 거야.”
나는 미호를 다정히 쓰다듬으며 눈을 감았다.
“나도 도와줄게.”
[응······.]
미호 역시 내 수선의 이유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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