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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수선

웹소설 > 작가연재 > 퓨전, 무협

공모전참가작

심씀
작품등록일 :
2024.05.09 10:54
최근연재일 :
2024.06.21 23:55
연재수 :
45 회
조회수 :
28,729
추천수 :
667
글자수 :
307,356

작성
24.05.23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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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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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0쪽

16화. 팔계야.

DUMMY

마당에 드러누워 있던 팔계가 몸을 일으켰다.

대문 근처에서 화란과 김준연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던 라니가 팔계에게 물었다.


[어디 가세요?]

[온종일 누워만 있으려니 좀이 쑤셔서. 잠시 주변 산책 좀 하고 오리다.]

[산책이요? 저도 갈래요.]

[됐소. 고독에 방해되오.]


산전수전 다 겪고 말년에 산책길을 떠나는 듯한 팔계의 뒷모습을 향해 라니가 중얼거렸다.


[고독은 개뿔······.]


이내 팔계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던 라니는 문득 무언가를 깨닫곤 서둘러 미호에게 달려갔다.

그사이 사합원에서 무사히 빠져나온 팔계는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안 따라오겠지?]


아무도 자신의 뒤를 밟는 이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팔계가 서둘러 밭으로 향했다.

짧은 다리를 폴짝거리며 달리던 팔계의 입가에는 함박웃음이 가시질 않았다.


‘이럴 줄 알고 아까 고구마 사이에 영초 하나를 숨겨놓았지!’


역시나 김준연의 예상이 맞았다.

그가 예견했던 것처럼 팔계는 식탐과 반골 기질을 참지 못하고 그만 영초를 하나를 봉창질한 것이었다.

금색 잎사귀의 금령초가 팔계의 눈앞에 어른거렸다.

금령초는 처음 팔계가 김준연의 밭을 서리했을 때 먹고 요수로 각성했던 영약이었다.

튀긴 것처럼 바삭거리는 식감과 입안 가득 퍼지는 고소한 향이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딱 한 번만. 이번 한 번만 먹고 내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으리다!’


이건 어쩔 수 없었다.

본능이다.

마치 갓 태어난 아기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젖을 찾아 허덕이는 본능.

이 일을 김준연이 알게 된다면 단약이 될지도 모르지만, 팔계는 차마 그 본능을 이겨낼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밭.

며칠 굶은 걸인처럼 침을 질질 흘리던 팔계는 곧장 고구마가 자란 밭으로 몸을 날렸다.


[······없다.]


영초를 다시 맛볼 기쁨으로 가득했던 팔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어디 갔지? 내 분명 이곳에 숨겨 놓았는데······.]


아무리 찾아도 숨겨둔 금령초가 보이지 않았다.

다음 순간.


[이걸 찾는 거야?]


갑작스레 들려온 요족어에 팔계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미호······?]


그곳에는 미호가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팔계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윽고 미호의 앞에 놓인 영약을 발견한 팔계가 말을 절었다.


[그, 그건 금령초······! 어디서 찾은 것이오?]

[거기 고구마 있는 곳에서.]


팔계는 잔머리를 굴렸다.

이렇게 된 이상 아쉽지만 저 맛있는 금령초를 미호와 반 씩 나눠 먹는 수밖에······.


[그거, 팔계 님이 숨겨둔 거죠?]


일순 들려오는 또 다른 목소리에 팔계가 옆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이번엔 라니가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팔계를 마주하고 있었다.


[라니 소저? 소저는 여길 또 어떻게······.]


말끝을 흐리던 팔계는 머지않아 깨달았다.


‘······함정이다!’


이 모든 게 함정이었다!

그렇다면 누가 짠 판일까.

미호? 라니?

그것도 아니라면 김준연?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팔계는 어쩌다 일이 꼬여버린 건지 알 수 없었다.


[왜 산주님의 밭에서 금령초를 빼돌렸지?]


미호의 물음에 완전히 공황에 빠진 팔계가 뒷걸음질했다.


[몰랐으니까··· 들킬 줄 몰랐으니까! 알면 그랬겠소?]


이젠 아예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팔계의 태도에 라니와 미호가 슬금슬금 거리를 좁혔다.


[라니 소저, 미호 소저······! 잠시 내 말 좀 들어주시오! 난 이걸 소저들과 함께 나눠 먹기 위해―]

[선인님께서 외출하기 전에 그러셨죠. 팔계 씨가 영초를 꿍쳐놨다면 죽기 직전까지 볼기를 때려 줘라.]


라니의 말이 끝난 동시에 꼬리를 바짝 세운 미호의 전신이 푸른 불꽃을 머금었다.


[넌 오늘 죽었어.]

[아, 안 돼! 이럴 순 없―]


이후 화란과 김준연이 돌아올 때까지 천원산에 찰싹-거리는 소리가 쉴 틈 없이 울려 퍼졌다.


*


화란과 함께 천원산으로 돌아온 나는 마당에 널브러져 있던 팔계를 내려다보았다.

팔계의 볼기가 두 배로 부어오른 것이, 내가 없는 사이에 미호와 라니가 일을 잘 처리해준 모양이었다.

나는 몰골이 엉망이 된 팔계의 머리맡에 쪼그려 앉아 한숨을 내뱉었다.


“팔계야. 내가 너 금령초 하나 숨겨둔 것도 모를 줄 알았냐?”


[······알고 있었소? 선인은 처음부터 다 알고 있던 거요? 그런데 왜 방관했소! 어찌 내가 악의 구렁텅이에 빠지기만을 방관했냔 말이오!]


난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팔계에게 나지막이 답했다.


“난 방관한 게 아니라 기회를 준 거야. 너한테는 두 번의 기회가 있었지. 첫 번째 기회는 내가 외출하기 전. 두 번째는 내가 돌아온 후. 그런데 어쩌냐 팔계야. 넌 그 기회를 다 날려 먹었네.”


[······.]


나는 오른손 검지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그 반지는 이번에 화란이 사준 저물계였다.

이윽고 내가 저물계에서 단로를 꺼내자 팔계가 아연실색했다.


[자, 잘못했소! 다시는!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이번에 대산에서 연단서를 몇 권 샀거든? 그런데 어머나? 그중에 멧돼지 요수의 내단으로 만드는 단약 제조법이 있네.”


나는 그대로 팔계를 들어 단로에 집어넣었다.

크기도 딱 알맞은 것이, 처음부터 팔계 전용으로 제작된 단로 같았다.


[뀌, 뀌이익! 왜 이러시오? 제발 말로······!]


“말로 해결될 일이었으면 내가 이러지도 않았겠지. 팔계야. 넌 네가 이렇게 될 줄 알았냐? 난 몰랐는데.”


[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


내가 단로의 뚜껑을 닫으려 하자 녀석은 진선이라도 만난 것처럼 그 말만을 미친 듯이 중얼거렸다.

다시 한숨을 내뱉은 나는 단로에서 팔계를 꺼냈다.

나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차분히 경고했다.


“식탐 줄여라. 마지막 기회다.”


[줄이겠소! 내 위장을 도려내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줄이겠소!]


“라니야. 와서 팔계 좀 데려가.”


[네에.]


라니가 팔계의 목덜미를 입에 물고 우물 근처로 떠난 뒤.

나는 다시금 새어나 오려던 한숨을 삼키곤 화란에게 돌아갔다.

마루에 걸터앉아 연단서를 읽고 있던 화란이 입을 열었다.


“연단술의 기본이 제대로 서술되어 있구나. 내용도 딱히 흠잡을 곳이 없고.”

“그럼 이 연단서를 토대로 단약을 만들면 되겠군요.”

“우선 단로를 가지고 부엌으로 오너라.”

“알겠습니다.”


내가 단로와 함께 부엌에 들어서자 먼저 도착해 있던 화란이 아궁이 앞에서 손짓했다.


“이제 단로를 이곳에 올려놓아라.”


내가 아궁이 위에 단로를 내려놓자 단로의 손잡이를 붙잡은 화란이 다른 손으로 들고 있던 연단서를 읽으며 중얼거렸다.


“연단을 위해 단로를 달구기 위해선 어떤 불보다 단화(丹火)가 좋다라······.”


단로에서 손을 거두고 연단서를 내려놓은 화란이 부엌 밖으로 향했다.

나는 문 너머에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그녀를 우두커니 지켜보았다.

이윽고.


파아앗-!


화란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영력이 폭발하듯 발산하더니 섬광이 나를 삼켰다.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화란이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영력을 품은 채 다시 부엌으로 돌아왔다.

나는 두려운 한편,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화란에게 물었다.


“방금······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방금?”


고개를 갸웃거리던 화란이 이내 한 차례 끄덕였다.


“별건 아니고, 단화를 사용하기 위해 금단을 만들었느니라.”


금단을 만들었다고?

그것도 그 짧은 사이에?

아니 그것보다······.


‘······그럼 그 짧은 사이에 축기기에서 결단기로 돌파했다는 건가?’


하지만 말이 되지 않았다.

아까 대산에서 듣기론 화란은 이미 결단기.

그것도 5대 성인이라 불릴 정도로 뛰어난 위상을 지닌 수도자였다.


‘그러고 보니 경지를 돌파했다기엔 천겁이 내리지 않았어.’


천겁이란 즉 하늘이 수도자들에게 내리는 시련이다.

수선이란 것 자체가 세상의 섭리를 거부하는 일이기에 이를 바로 잡고자 세계가 벌을 내린다.

만약 그 천겁을 맞고도 살아남으면 더 높은 경지로 도약할 수 있지만, 반대로 천겁을 이겨내지 못하면 순리에 따라 그대로 죽는 것이다.


‘어쩌면······ 잃었던 경지를 회복한 건가?’


나는 수도자들 사이에서 화란이 적설좌주로 불리게 된 일화를 떠올렸다.

그때 화란은 그해 겨울을 온통 피로 붉게 물들였다고 했다.

얼마나 많은 수도자를 상대했는진 모르겠으나, 당장 백웅도 결단기 수사였으니 그들을 전부 상대하기 위해서 결단기였던 경지를 깎아 일시적으로 축기기에 머물렀던 것이리라.


‘이제야 화란이 백웅에게 쌀쌀맞게 굴었던 이유가 좀 이해되는군.’


여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나는 다시 화란에게 집중했다.

다시 손잡이를 붙잡은 화란이 법력을 불어넣자 단로가 금빛을 머금으며 달아오르고 있었다.

저물계에서 영약이 든 주머니를 꺼낸 화란이 내게 말했다.


“그 주머니 든 영약을 오행에 따라 꺼내주거라.”

“······오행에 따른 영약이 무엇입니까?”


내가 머리를 긁적이고 있자 화란이 친절하게 설명했다.


“수령초는 수 행렬, 화령초는 화 행렬. 이렇듯 영약은 보통 오행 중 최소 한 가지에서 다섯 가지의 행렬을 품고 있지.”

“아! 그럼 목령초부터 수령초까지 드리면 되겠군요.”

“이해가 빠르구나. 우선 그 영초들이 가장 기본적인 오행초들이니 꺼내보거라.”


나는 조심스럽게 목령초와 화령초, 그리고 토, 금, 수령초까지 꺼내 화란의 옆에 내려놓았다.

이윽고 화란은 가장 먼저 집어 든 목령초를 단로에 넣었다.

그러자.


치이익-


단로에 집어넣자마자 액체로 변한 목령초가 바닥에 고였다.

이윽고 화령초부터 차례대로 수령초까지 집어넣자 어느새 단로에는 오색 빛깔의 액체가 아름답게 끓어오르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일선시까지 넣고 한 시진 정도 쉬지 않고 저으며 끓여야 하니 그대는 나가서 아이들과 쉬어라.”

“아닙니다. 보조가 필요하실 테니 계속 곁에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거기에 앉아서 이 연단서를 읽도록 하여라.”


나는 화란에게서 건네받은 연단서를 첫 장부터 차분히 읽었다.


‘연단할 때 가장 좋은 건 결단기부터 사용할 수 있는 단화지만 화 속성 공법으로도 대체가 가능하구나.’


단화란 쉽게 말하자면 무림고수들이 간혹 사용하곤 하는 삼매진화와 비슷했다.

그리고 이 연단서에는 딱히 결단기에 이르거나 화 속성 공법을 익히지 않아도 삼매진화를 만드는 방법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나중에 나 혼자 단약을 만들어야 할 때가 있을 테니 결단기가 되기 전까진 삼매진화를 익혀놔야겠군.’


이후로 영약에 깃든 음양오행을 토대로 재료의 비율을 배합하는 이론이 연단서의 내용 대부분이었다.

나는 화란이 책방에서 찾았던 다른 두 권을 떠올렸다.

이곳에 오기 전 화란에게 얘기를 들어보니 지금 내가 읽고 있는 것이 연단술의 기초서, 나머지 두 권은 연단술의 심화 이론과 그렇게 터득한 연단술을 응용하는 방법이었다.


‘단학은 쉽지 않구나.’


이 연단서를 쓴 저자 또한 잊을만하면 “연단은 정확한 제조법과 시간을 지켜야만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끝없는 시행착오를 거쳐 자신만의 연단법을 완성해야 한다”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가진 영약을 몽땅 실험 재료로 사용하기엔 부족할뿐더러 아깝다.


‘결단기 수도자인 화란조차 탐내는 영약을 무작정 사용할 순 없지.’


그렇기에 나는 이 연단서를 토대로 연단술을 연마하는 한편, 나중에 실력 좋은 연단사를 모셔와 약간의 조언을 얻을 계획이었다.

뭐 그 과정에서 납치나 감금, 군만두 같은 약간의 마찰을 빚겠지만 말이다.


“도마를 가져오거라.”

“······예!”


정신을 차리자 어느새 한 시진이 지났는지 화란이 내게 손을 뻗고 있었다.

나는 얼른 아궁이 위에 밥상을 펼쳐 도마를 내려놓았다.

이윽고 단로를 들어올린 화란.

밀가루 반죽처럼 꾸덕꾸덕해진 내용물보다 거기서 풍겨 오는 감미로운 향기에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도마 위에 반죽을 천천히 쏟아낸 화란이 단로를 내려놓고 숨을 골랐다.


“이제 이것을 일다경 정도 식히면 된다.”

“그럼 차가 필요하겠군요. 금방 차를 내어 드리겠습니다.”

“고맙구나.”


나는 고생하는 화란을 위해 얼른 말린 수령초 잎사귀로 차를 끓여 바쳤다.

화과자까지 곁들인 티타임이 어느 정도 끝났을 무렵.

손을 털고 일어난 화란이 도마 위에 얼추 식은 반죽을 살펴보았다.


“거의 다 끝났다. 이제 이 반죽을 단 형태로 빚으면 된다.”

“이건 제가 하겠습니다. 크기는 어느 정도로 빚으면 될까요?”

“한입 크기면 된다. 애초에 양이 얼마 되지 않으니 다섯 개를 만들면 딱 알맞겠구나.”


우물에서 손을 씻고 돌아온 나는 반죽을 조심스럽게 떼어내 손으로 둥글게 빚었다.

다만 아직 제대로 식지 않았는지 단화의 기운이 남아있어 손바닥이 불로 지진 듯이 고통스러웠다.

화란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괜찮으냐?”

“견딜··· 견딜 만합니다.”

“조금 뜨거울 때 빚어야 영력이 손실되지 않고 잘 뭉쳐지니 어쩔 수 없구나······ 나도 거들어주마.”


엄살이 아니라 결단기의 금단에서 발산한 힘이라서 그런지 아직 연기기 수준인 내가 견디기엔 다소 무리가 있었다.

끝내 내가 간신히 두 개를 빚고 화란이 세 개를 빚었다.

완성된 단약에 내가 침을 삼키자 화란이 말했다.


“이것이 내가 유일하게 만드는 법을 알고 있는 오행구족단이다.”

“이 단약을 먹으면 경지가 얼마나 오르는 겁니까?”

“오행구족단은 경지를 위해서라기보단 공법 수행을 위해서 먹는 영약이니라.”

“공법이요?”


화란이 오팔처럼 아름답게 빛나는 단약을 하나 집어들었다.


“보유한 자질에 따라 익힐 수 있는 공법의 속성이 다르다는 건 알고 있겠지?”

“그렇습니다.”

“이 단약엔 그 자질을 향상해주는 효과가 있다.”

“오······!”


내가 이해한 것이 맞는다면, 요컨대 이 단약은 속성 친화력을 올려주는 영약이었다.


‘그리고 속성 친화력이 올라가면 자연히 자신의 속성에 맞는 공법을 익히기 수월하겠고 말이지.’


화란이 말을 이었다.


“나도 일전에 오행구족단을 몇 개 먹어 보았지만, 재료가 재료이다 보니 이 세계에선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 없는 영약이다. 그리고 따로 수행이 늘어나진 않으니 바로 먹어도 부작용이 없지.”


마침 단약도 다섯 개겠다, 미호를 포함한 요수들을 불러모은 나는 녀석들에게 단약을 하나씩 나눠주었다.

나는 먼저 오행구족단을 먹은 미호와 라니의 반응을 살폈다.

누구 할 것 없이 놀란 눈을 한 녀석들이 한 마디씩 감탄했다.


[왠지 전보다 법력을 더 잘 다룰 수 있게 된 느낌이야.]

[맛있어요! 이렇게 맛있는 영약은 처음이에요!]


그러고 보니 라니는 무슨 속성이지?

아직 단수기에 익힌 공법도 없어서 그냥 맛있기만 한 건가.

나도 서둘러 단약을 먹고 싶은 마음에 화란을 돌아보았다.

내 마음을 눈치챈 것인지 화란은 아무 말 없이 단약을 삼켰다.

그리고 이제 내 차례.

오행구족단을 입에 머금은 순간이었다.


“······맛있다.”


뒷맛이 약간 씁쓸했던 원영하수오와 향기만 좋았던 수령초와 달리, 오행구족단은 뭔가 제대로 된 요리를 먹은 것처럼 맛이 일품이었다.


‘첫맛은 달콤하고 중간엔 고소하며 향긋한 것이 끝에는 시원하구나······.’


태어나서 머리털 나고 이렇게 맛있는 과자는 처음이었다.

행복감에 빠진 내가 감정의 본질 중 하나를 깨우치려고 할 때였다.


[엉망진창이군.]


뭐?


[오행구족단이라는 이름과 다르게 무엇 하나도 제대로 섞여 있지 않소.]


나는 감히 화란의 연단 실력에 도전장을 내민 팔계를 노려보았다.

녀석이 감히 독사 같은 혓바닥을 주제도 모르고 굴려대고 있었다.


[불 조절도 실패했군. 너무 익혔소. 뭣보다 단을 빚을 때 손에 정성이 없다랄까?]


팔계가 먹은 건 내가 빚은 것이었다.


“말조심하자 팔계야.”


[나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오만?]


나는 서둘러 화란의 안색을 살폈다.

화란이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팔계에게 답했다.


“단약을 만드는 건 처음이다 보니 실수가 있던 모양이구나. 그렇게 형편없었느냐?”


[천원산주님껜 외람되오나, 이 단약은 단약이라 부를 수도 없을 만큼 완성이 되지 않았습니다. 아예 평가할 수가 없―]


퍼억!


나는 감히 화란을 능멸하던 팔계를 그대로 걷어차며 외쳤다.


“누가 언제 너더러 맛 평가하라고 했어? 맛도 제대로 모르는 게!”


저 고삐 풀린 반골 녀석.

편히 앉아서 받아먹는 주제에 기껏 화란이 고생해서 만든 것도 모르고 혹평이나 하다니!

나는 애써 미소를 그리며 화란을 돌아보았다.

결단기 수도자의 성질을 긁어댔으니 어쩌면 다음에 단로에 들어갈 재료는 우리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휴, 다행히 불쾌해하는 기색은 아니군······.’


화란은 어딘가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내가 라니와 함께 안도하던 사이 담벼락에 처박혔던 팔계가 바닥을 굴러와 다시금 짧은 앞다리를 휘적거렸다.


[이번만큼은 나도 절대 양보 못 하오! 나 팔계요, 팔계! 요수가 되기 이전부터 이 세상을 돌아다니며 얼마나 다양한 맛을 맛보았는데!]


“혹시 지금 입에서 신맛 같은 거 감돌지 않아?”


내 물음에 입맛을 다시던 팔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 신맛이 나긴 하오만······.]


“그럼 그건 무슨 맛일까?”



팔계가 급히 입을 다물었다.

불현듯 입에서 신맛이 감돈다는 건, 죽음이 억지로 아가리를 벌리고 손을 욱여넣고 있다는 의미다.

그리고 팔계 역시 그 맛의 의미를 알고 있는 듯했다.

근데 이걸 내가 어떻게 아냐고?

딱히 나도 알고 싶지 않았다.

그냥 학창 시절에 일진들에게 잘못 걸려 뒤지게 맞았을 때 알게 된 거니까.


[그, 그래도 죽더라도 할 말은 해야겠소!]


“귀신이 말을 하네?”


[······.]


벌써 귀신 취급을 당한 탓일까, 팔계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이내 한숨을 내쉰 팔계가 죽음이 두렵지 않은지 또 건방진 입을 나불거렸다.


[······내 옆구리를 보시오. 열세 달 전 신강성에서 성주의 생일잔치 때 팔대진미로 손꼽히는 도원향과 팔색옥미갱을 훔쳐먹었을 때 생긴 상처요. 구멍이 두 개지요?]


얘가 갑자기 뭔 소리를······.


[그리고 여긴 아홉 달 전 아미산 금정봉에서 복호사의 절밥을 전부 훔쳐 먹다 생긴 상처지. 나보고 맛도 제대로 모른다고 했소? 아니! 난 살아있는 매 순간 미식을 위해 목숨을 걸었소!]


······.


[선인은 모를 것이오. 미식에 대한 내 시이이임정! 내가 어떤 심정으로 미식을 위해 목숨을 걸었는지! 그건 죽음을 불사하는 항전의······!]


“······그만해라.”


[옙.]


녀석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결론은 신강성주의 생일상을 훔쳐 먹은 것도 모자라 아미파의 절밥까지 손을 댔다는 얘기가 아닌가.


‘거기에 화란의 영역에 있던 내 밭까지 포함하면······.’


눈앞이 절로 아득해진다.

이 정도면 살기 위해 먹는 것이 아니라 먹기 위해 사는 수준이잖아.

팔계는 내 생각보다 더 미친놈이었다.


‘근데 이 정도 수준의 미각이면 단약을 만들 때 꽤 도움이 되지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팔계야.”


[왜,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보시오?]


“너 먹는 거라면 목숨도 걸 수 있지?”


[······일단은 그렇소만.]


팔계의 머리를 쓰다듬자 녀석이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내가 웃었다.


“너 나하고 일 하나 같이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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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26화. 언젠가 이곳에도 봄이 오겠지. 24.06.02 521 11 14쪽
25 25화. 웬만큼 멍청이가 여기 있었을 줄이야. +2 24.06.01 547 12 16쪽
24 24화. 죽을 힘을 다해 덤벼라. +1 24.05.31 572 11 17쪽
23 23화. 기연 +1 24.05.30 650 15 15쪽
22 22화. 상상해라. 24.05.29 594 14 15쪽
21 21화. 답례라고? +3 24.05.28 598 17 14쪽
20 20화. 준연의 마음 (3) +1 24.05.27 608 18 16쪽
19 19화. 준연의 마음 (2) 24.05.26 629 19 14쪽
18 18화. 준연의 마음 (1) 24.05.25 651 18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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