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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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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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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7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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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1.12.2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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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0쪽

돈을 왕창 벌자!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1987년 6월.

대한민국은 몹시 혼란스러웠다.

대학생들의 단식농성에 이어 전국적으로 시위가 벌어졌다.

지식인과 예술인들의 시국선언도 잇달았다.

고문치사 조작·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를 외치며 대학생과 직장인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시위대는 독재정권에 대한 민중항쟁의 의미로 시민들에게 차를 세워서 경적을 울려줄 것과 흰 손수건을 흔들어 달라는 요청을 했다.

이에 따라 택시운전수들 내는 경적소리와 시내버스에서 흰 손수건을 흔드는 시민들이 줄을 이었다.

마침내 6월 26일.

전국 37개 도시에서 국민평화대행진 시위가 전개되었다.

6·10민주항쟁의 3배가 넘는 시민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였다.

특히 회사원들, 소위 넥타이 부대들의 시위 참여로 6월 항쟁은 학생 항쟁에서 시민 항쟁으로 불길처럼 타올랐다.

단순히 한 도시만의 단발성 시위가 아니었다.

전국 동시다발로 진행되었다.

역사적인 사건이 벌어지고 있던 바로 그 시기.

류지호는 학교에서 야간자율학습을 하고 있다.

교사들은 학생들이 시위에 휩쓸릴까 더욱 철저하게 통제했다.

학생들이 모두 등교하면 교문을 막아섰고, 월담하는 학생을 철저히 봉쇄했다.


‘서울에서는 여고생들이 시위대에게 도시락을 날라준다는데, 우리는 지금 교실이라는 감옥에 갇혀 공부를 하고 있구나.’


류지호의 세대는 386세대와 X세대 사이에 낀 어정쩡한 세대라고 볼 수 있다.

소위 386세대라 불리는 민주화 세대처럼 대학에 들어가서는 학생운동을 했고, X세대만큼은 아니지만 적당한 자유와 풍요도 누리게 된다.

사실 류지호는 6월 항쟁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그저 연하대 후문에 놀러 갈 때마다 최루탄 연기 때문에 힘들었다는 것 정도.

6·10 항쟁이란 역사적 사건을 모르고 있었다면 그때와 똑같이 별 생각 없이 생활 했을 터.


‘학교를 땡땡이치고 시민회관으로 달려가 화염병을 들고 돌을 던진다고 갑자기 민주투사가 되는 것도 아니지.’


이런저런 생각으로 인해서 공부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깨진 집중력을 억지로 돌려놓지 않았다.

대신 기지개를 켜고, 눈 주위를 마사지 했다.

그러면서 교실의 야자 풍경을 둘러보았다.

교과서를 베개 삼아 잠든 놈, 턱을 괴고 연습장에 의미 없는 낙서를 끼적거리는 놈, 어려운 수학문제를 놓고 끙끙거리는 놈, 세상 편한 얼굴로 짝꿍과 소곤거리는 놈, 만화책을 읽는 놈....

문득 자신과 급우들의 자녀들이 살아갈 미래를 생각해보았다.

자신 세대와 달리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을 걱정해야 하고, 지겹고 힘겨운 입시를 통과하고 또다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야만 하고, 삶의 가치보다 물질적 풍요를 더 추구하고.... 부익부 빈익빈을 당연시 하게 되는.

그런 사회에서 살아가야 할 자신의 자녀들.

갑자기 우울해졌다.

미래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나 같은 놈 말고, 역사적인 인물이 과거로 돌아왔다면 세상은 좀 살기 좋아질까?’


절레절레.

쓸데없는 생각이다.

부질없기도 했고.

어쨌든 6월 한 달 동안 류지호는 잠자는 시간도 아꼈다.

먼저 방송실에서 영어회화와 종합영어강의 카세트테이프를 챙겼다.

신문 배달할 때와 등하교시에 워크맨으로 영어강의를 들었다.

워크맨은 김준우에게 빌렸다.

부잣집 아들답게 그는 20만원이 넘는 워크맨을 가지고 있었다.

몇 달만 빌려달라고 하자 흔쾌히 빌려줬다.

그러기 쉽지 않다.

친구라면 따지지도 않고 아낌없이 베푸는 좋은 녀석이다.

‘호구 잡히기 딱 좋은 성격이지.’


류지호는 잡놈들에게 이용도 많이 당했던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암튼, 영어 테이프 듣는 것이 지겨울 때도 있다.

그럴 때는 AFKN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최신 팝송을 들었다.

한 달 정도 경과하면서 영어 테이프 듣기를 안 하면 허전해졌다.

습관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방송부 생활 역시 특별한 사건 없이 무난하게 흘러갔다.

교감이 불쑥 찾아와 류지호의 속을 뒤집어 놓고는 했다.

류지호는 몸을 한껏 낮췄다.

공연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학업에서 작은 성과도 있었다.

드디어 중학교 수학을 떼고, 고등학교 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수포자라고 하더라도 한 번 배웠던 교과내용이다.

막상 해보니 안 될 건 없다.

어느 날인가 방송실에서 마주친 김석민이 류지호에게 물었다.


“암기과목은 성적 잘 나온다며?”

“그런대로.....”


김석민이 특유의 비웃음이 가득 담긴 어조로 말했다.


“돌대가리인 줄 알았는데 그래도 암기력은 좀 있나봐?”

“이게 죽으려고!”


류지호가 장난으로 응수했다.

원래 김석민의 말투가 그렇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수학은 원리만 알면 매우 쉬운 학문이라고 말해. 근데 웃긴 게 뭔 줄 알아? 그 원리를 깨치는 게 쉽지 않아. 말처럼 쉬우면 개나 소나 다 수학 만점 받게?”


류지호는 대꾸하는 대신에 고개를 끄덕였다.


“수학은 말이야, 꾸준히 오랜 시간 투자해야 돼. 솔직히 왕도가 없다고 생각해. 선생들도 수학 잘하는 놈만 따로 관리 들어가잖아. 수학만 잘하면 학력고사에서 점수가 잘 나올 기반이 갖춰졌다고 볼 수 있는 거니까.”


김석민의 말투에 오만함이 묻어있었다.

그 꼴이 우스워보였지만 류지호는 비웃지 않았다.


“슬슬 미분적분 풀지 않나?“

“어, 미분적분 푸는 걸 어떻게 알아? 그거 2학년 때 배우는 건데.”


김석민은 류지호의 말에 적잖이 놀란 모양이다.


‘내가 문제는 못 풀어도 이미 고등학교를 한번 다녀본 몸이다. 그걸 모르겠냐?’


류지호는 웃음이 나오는 걸 꾹 참았다.


“공식은 외웠어?”

“배운 데까지는 문제없어. 막상 문제를 풀려고 하면 머리에 쥐가 나서 그렇지.”


김석민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공식은 외웠어?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는 있었네.“


대화를 나누다보면 한 대 패고 싶은 충동이 일게 만드는 녀석이다.


“멍청아, 무조건 외우려고 하지 말고, 수업시간을 잘 생각해봐.”

“내가 수업시간에 딴 짓 안하고 얼마나 집중하는데!“

“시험문제는 누가 내냐?”

“그야 그 과목 선생이 내지.”

“그러니까!”


김석민이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푹 쉬었다.

꿀밤 한 대 먹일까?

류지호가 슬그머니 주먹을 쥐었다가 도로 폈다.


“시험 문제 잘 보면, 대부분 수업 시간에 선생이 중요하다고 언급했던 것에서 출제 돼. 수업시간에 선생이 그냥 넘어가는 부분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거야. 항상 강조하는 것을 집중해서 외워. 그걸 다 암기하고 나면 나머지에 관심을 가지고.”

“누가 그걸 몰라서 수학을 못하는 줄 아냐?”

“됐고, 너는 참고서 뭐로 하냐?”

“정석수학.“


대부분의 학생들이 보는 참고서다.

류지호라고 다르지 않았다.

김석민은 난이도가 좀 더 높고 책도 두꺼운 해법수학으로 공부를 했다.


“매일 정석 한 단원씩 예습해 와봐. 모르는 것 있으면 내게 물어보고.”

“자식~ 진즉에 그럴 것이지.“


그날 이후 류지호는 모르는 부분이 생기면 김석민을 따라다니며 물었다.

그러자 김석민은 류지호의 집요함에 질려버렸다.


“내가 과외선생이냐? 왜 귀찮게 지랄이야!”


결국 김석민은 류지호가 수학 참고서만 손에 쥐고 있어도 피해 다니기 바빴다.

그런 모습들이 교감의 레이더에 포착됐다.

교감은 이때다 싶었다.

그는 학생들은 가끔씩 잡도리를 해줘야 말썽을 부리지 않는다고 믿었다.

때문에 군기를 잡아줄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너희들 일루 와봐라.”


‘젠장할 미친개!’


류지호는 튀어나오려는 욕지거리를 억지로 되삼켰다.

공연히 짜증을 냈다가는 한 대 맞을 것 두 대 맞을 수 있다.


“석민아.”


교감이 다정한 어투로 이름을 불렀다.


“이 놈이 너 괴롭혀?”

“아니요.”


김석민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왜 저 놈을 보면 도망 다녀?”

“자꾸 저한테 수학을 물어봐서 그랬어요.”


교감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뭐야! 찌끄러기 같은 자식이 어디서! 자기 공부하기도 바쁜 애한테 뭘 어째!”

“후우~ 흥분하지 마세요. 교감선생님.”


김석민이 긴 한숨을 내쉬며 교감을 진정시켰다.


“지호가 제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는 게 웃겨서 제가 좀 놀려먹었어요. 지호가 절 귀찮게 하거나 괴롭히는 게 아니고요.”


김석민이 교감 몰래 류지호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


교감이 진실을 추궁하듯 김석민을 똑바로 쳐다봤다.

김석민은 꿈쩍도 하지 않고 마주 쳐다봤다.


“화장실은 다녀왔어?”

“예.”

“쉬는 시간도 얼마 안 남았는데 얼른 들어가서 수업 준비해.”


교감이 김석민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거렸다.

김석민이 인사를 하고 멀어지자, 교감의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


“너 이름이 뭐라고 했지?”

“류지호입니다.”

“언제 이발 했어?”

“지난주에 했습니다.”

“거짓말 하면 혼난다.”

“머리숱이 많아서 길어 보이는 겁니다.”


류지호가 앞머리를 들어 교감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교감에게 두발 길이로 지적을 받는다면 빡빡머리로 밀어버릴 각오도 있다.

그깟 헤어스타일은 하등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교감은 류지호의 명찰을 손으로 뒤집어 보다가 실내화를 봤다.


“실내화 꺾어 신고 다니는지 보자.”


류지호가 실내화를 벗어 보여줬다.

실내화 뒷굽이 꺾은 흔적 없이 깨끗했다.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짓는 류지호에게 교감은 같잖다는 반응을 보였다.


“흥!”


두발부터 복장까지 철저히 대비한 류지호다.

꼬투리를 잡으려고 안달이 난 교감이 차라리 안쓰러울 지경이다.


“공부 열심히 해라.”


교감에게 꾸벅 인사를 한 류지호는 마지막까지 예의바른 모습으로 돌아섰다.

속으로 구사할 수 있는 온갖 쌍욕을 했지만.


❉ ❉ ❉


안개가 어슴푸레하게 내려앉은 새벽.

주택가 골목길에 경쾌한 발걸음소리가 들렸다.

옆구리에 신문뭉치를 낀 류지호가 달리는 소리다.

처음 신문배달을 시작할 때만 해도 제법 쌀쌀했었다.

6월도 막바지에 접어들자 기온이 많이 올라간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휘익, 턱!


신문 한부가 대문 너머로 날아가 마당에 떨어졌다.

류지호는 신문을 던져 넣을 집은 던지고, 접어서 대문 사이에 끼어야 할 집은 끼워 넣었다.

아직 요령이 부족해 달리면서 신문을 던지는 것은 무리다.

한창 신문을 돌리고 있는데, 한 아주머니가 류지호를 불렀다.


“얘, 너 이리로 와봐.”


신문을 돌리다 보면 모든 어른들은 예외 없이 다짜고짜 반말이다.


“네가 이 동네 신문 배달해?”

“한국신문 돌립니다.”

“못 보던 애네?”

“돌리기 시작한지 이제 한 달 조금 넘었습니다.”

“뭐가 그렇게 자주 바뀌는 거야?”

“아주머니, 제가 지금 돌려야 할 집이 많아서 그러는데, 하실 말씀 있으면 빨리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류지호는 짜증을 가까스로 참으며 정중하게 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주머니는 류지호의 아래위를 훑어봤다.


“뭐 하나만 물어볼게.”

“말씀하세요.”

“혹시 여기 있던 우유 못 봤어?”


간혹 벌어지는 일이다.

이들에게 우유가 없어지면 신문 배달원이, 신문이 없어지면 우유 배달원이 첫 번째 용의자가 되는 것 같았다.


“최근 우유가 매일 없어지는데 혹시 못 봤어?”


물어보는 저의는 확실했다.

이미 류지호를 도둑으로 보고 있는 표정이다.


“글쎄요. 제가 신문 돌리는 데만 집중을 해서 잘 모르겠습니다.”

“에이, 내 이놈의 우유 도둑놈... 잡히기만 해봐라!”

“우유 배달하시는 분께 확인 한 번 해보.....”


꽝.


아주머니는 류지호의 말을 듣지도 않고, 대문 안으로 사라졌다.

내일부터 류지호가 신문 돌리는 시간에 맞춰 아주머니는 우유를 대문 앞에 둘 것이다.

그리고 대문 뒤에 숨어 류지호가 우유를 가져가는 지 몰래 지켜볼 것이다.

신문을 돌리다 보면 반말과 사은품 요구협박은 차라리 애교에 가까웠다.

다른 신문으로 바꿀 거라며 쌍욕을 섞어가며 협박하고, 오늘처럼 도둑으로 몰리면 당장에 때려치우고 싶은 충동이 든다.


‘오늘은 무슨 마가 낀 날인가?’


신문을 빳빳하게 펴서 대문 밑으로 밀어 넣는데, 대문이 활짝 열렸다.

뽀글이파마를 한 뚱뚱한 집주인 아주머니가 모습을 드러냈다.


“얘!”

“안녕하세요.”


류지호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이 집은 아주머니가 특히 유난을 떨었다.

류지호는 꼬투리 잡히지 않기 위해 최대한 몸을 낮췄다.


“매일 신문이 왜 이렇게 늦는 거니?”

“아주머니 댁이 제일 마지막에 배달이 되서 그렇습니다.”

“우리 아저씨는 일찍 출근을 한단 말이야. 이럴 것 같으면 조간신문을 뭣 하러 받아보니? 내일부터 30분 일찍 배달하도록 해!“


지금 시각은 새벽 5시를 조금 넘은 시간이다.

시내버스 첫차가 다닐 시간도 아니다.


“사장님은 몇 시에 출근하시는데요?”

“그건 네가 알아서 뭐하게?”


심술이 가득한 얼굴의 아주머니가 류지호를 매섭게 쏘아봤다.


“예. 내일부터 그렇게 하겠습니다.”


내일부터 이 한 집 때문에 한 달간 짜놓은 동선이 흐트러지게 생겼다.


❉ ❉ ❉


신문배달을 마친 류지호가 태권도장으로 달려갔다.

최근 유단자 품새로 넘어가 고려, 금강 품새를 배우기 시작했다.


“고려 배우는데 이제 검은띠 매도되지 않습니까?”

“까분다.”


홍 사범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류지호는 당장 승급심사를 볼 것도 아니기 때문에 안달하지는 않았다.

태권도 자체만 놓고 보면 완벽한 무술이라거나 실전성에서 최고를 논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태권도 발차기는 실전에 쓸모가 있지만, 태권도 스탠스나 룰이 실전에 적합하지 않아 다른 격투기나 무술을 접목시켰을 때야 말로 태권도의 진가가 발휘 된다.]


UFC 모 해설가가 한 말이다.

태권도의 약점을 그래플링이나 스트라이크로 보완한 격투가들이 종합격투기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도 한다.

이 세상에 완벽한 무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면 강한 격투가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각 무술의 장점을 모아 부족한 부분을 서로 보강해 자신의 신체적 능력에 최적화된 최고의 격투기를 만들어 내는 것.

이것이 강한 격투기가 아닐까.

다만 무술에서 단순히 격투기술만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

모든 무술은 예의와 정신수양을 강조한다.

신체를 단련하는 것은 인내력과 강한 정신력을 함께 수련한다는 것이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은 결코 허무맹랑한 말이 아니다.

태권도를 수련하면서 무기력함이 조금씩 희석되고 있었다.

확연히 눈에 띨 정도가 아니라서 정작 본인은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달라지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지각을 겨우 피해 등교한 후, 류지호는 수업도 열심히 들었다.

방송부 생활도 편해져서 2학년 선배들과도 살갑게 지냈다.

또한 시간이 날 때마다 유도장에 나가 새로운 유도 기술을 배웠다.


“오늘은 좀 화려한 기술을 한번 배워보자.”


방송부 선배 하재근으로부터 가장 기본적인 양손 업어치기에 이어 한손 업어치기, 업어 떨어뜨리기 등을 배운 후로 빗당겨치기와 허리후리기를 배웠다.

배대뒤치기 같은 고급 기술도 배웠다.

기술의 난이도가 올라가면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런데 새로운 기술들로 인해 류지호가 유도에 재미를 붙이는 계기가 되었다.

방송부와 사인방 친구들로부터 함께 어울리지 않고 따로 논다는 태클이 들어왔다.

하지만 류지호는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뭐든 배우고 갈고 닦으면 그 쓰임새가 언젠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그것이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어, 그 전에 포기하고 마는 것이 문제다.


❉ ❉ ❉


하루가 어떻게 지났는지 모를 정도로 바빴던 6월 한 달도 끝에 다다랐다.

류지호는 오랜만에 아버지와 텔레비전 뉴스를 시청했다.

여당대표가 대통령에게 직선제 개헌안을 수용할 것을 건의해 승낙을 받아냈다는 뉴스가 나왔다.

대통령 선거 직선제 개헌과 헌법 개헌 등을 포함한 시국수습방안 이른바 6·29 선언.

수많은 이들의 피와 희생 그리고 눈물과 땀 속에서 1987년 6월의 민주항쟁은 결실을 맺었다.

제대로 된 민주국가로 가기 위해 앞으로 시간이 더 필요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첫발을 내딛었다고 볼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아버지, 이제 대통령을 직선제 투표로 뽑게 되겠네요.”

“그러게 말이다.”

“형, 직선제가 뭐야?”


류순호가 물었다.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투표해서 뽑는 거.”

“진짜? 그럼 나도 할 수 있어?”

“너하고 나는 해당 안 돼. 만 20세부터니까 대학생부터 할 수 있어.”

“에이 씨, 사람 차별해? 학생은 국민 아닌가?”


류민상이 류순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순호 네가 어른이 되서 바꾸면 되지 않겠냐?”

“그럼 내가 대통령이 되어야 하잖아요.”

“내 아들이 대통령이 못 될 건 또 뭐냐?”

“공부를 아주 잘해야 되는데... 솔직히 자신 없어요.”


하하하.


류민상과 류지호가 크게 웃었다.


“법은 국회의원들이 바꿔.”


류지호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대통령이 마음대로 바꾸면 되지 왜 국회의원한테 맡기는데?”

“학교에서 안 배웠어? 삼권분립. 대통령은 행정부 수반, 국회의원이 입법기관.”

“배웠는데 생각 안나.”

“자랑이다, 인마.”

“형, 그거 알아?”

“뭘?”

“진짜 재수 없어.”

“아버지, 순호가 형한테 하는 말버릇이 버르장머리가 없는데 회초리 한번 드셔야 하지 않을까요?”

“순호 인석, 형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야?”


심영숙이 참외를 담은 접시를 가지오며 말했다.


“그만 놀려요.”


그제야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류순호가 벌떡 일어나며 한 마디 했다.


“만날 나한테만 그래!”


류순호가 심통 난 얼굴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심영숙이 나란히 앉아있는 부자를 보며 혀를 찼다.


“쯧, 잘하는 짓이오. 부자지간 쌍으로 둘째 놀리니까 좋아요?”

“참외 덜어주세요. 제가 가지고 갈게요.”


심영숙의 잔소리가 길어질까 류지호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심영숙이 참외 한 조각을 포크로 찍어 류민상에게 내밀었다.


“놔둬. 내가 가져다 줄 테니까.”

“잘 먹을게요.”


류지호가 껍질을 벗겨낸 통참외를 한입 베어 물고, 방으로 들어갔다.


“......?”


책상 위에 뜻밖의 선물이 놓여있었다.

선물상자에는 휴대용 카세트레코더 마이마이가 들어있었다.


“아~”


류지호는 복잡한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잘게 떨리는 손으로 마이마이를 집어 들었다.

중고도 아니고, 새 제품이다.

방문이 열리며 심영숙이 빼꼼 얼굴을 디밀었다.


“아들! 아빠는 원래 운동화를 사주려고 했었대. 공부에 필요하다는 말 듣고 마이마이를 사오셨어. 그거 가지고 영어공부 열심히 해.”


류지호가 당장에 아버지에게 달려가려고 몸을 돌렸다.


“지금 막 잠자리에 드셨으니까 내일 아침에 고맙다고 인사드려.”

“예. 감사해요 어머니.”

“엄마도 고마워, 아들~”


심영숙이 방문을 닫았다.

류지호는 한참을 어둠속에서 우두커니 서있었다.


[효도하자! 성공하자! 가정에 충실하자! 당당한 사내가 되자! 우정을 소중히 하자!]


이날 일기장에 문구가 하나가 더 추가되었다.


[돈을 왕창 벌자!]


작가의말

다음주에 오전 연재시간을 바꿔야 할지 고민 중입니다.

크리스마스 휴일 잘 보내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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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영화밥 먹고 살 팔자... (5) +9 22.01.07 10,461 233 22쪽
35 영화밥 먹고 살 팔자... (4) +7 22.01.07 10,529 212 22쪽
34 영화밥 먹고 살 팔자... (3) +8 22.01.06 10,762 197 21쪽
33 영화밥 먹고 살 팔자... (2) +5 22.01.06 11,024 217 20쪽
32 영화밥 먹고 살 팔자... (1) +8 22.01.05 11,642 222 24쪽
31 급하게 먹는 밥은 체하는 법이다. +13 22.01.05 11,457 227 26쪽
30 필요한 초능력은 재력(財力). (4) +11 22.01.04 11,764 228 24쪽
29 필요한 초능력은 재력(財力). (3) +16 22.01.04 11,830 241 24쪽
28 필요한 초능력은 재력(財力). (2) +12 22.01.03 11,797 236 21쪽
27 필요한 초능력은 재력(財力). (1) +8 22.01.03 12,268 237 20쪽
26 블루오션인 건 확실해! +9 22.01.02 12,358 251 27쪽
25 오늘 넌 영화감독 같았어! (4) +12 22.01.01 11,875 260 20쪽
24 오늘 넌 영화감독 같았어! (3) +11 22.01.01 11,878 250 22쪽
23 오늘 넌 영화감독 같았어! (2) +8 21.12.31 12,162 238 16쪽
22 오늘 넌 영화감독 같았어! (1) +8 21.12.31 12,956 245 24쪽
21 우리는 가족입니다! (3) +14 21.12.30 12,848 262 24쪽
20 우리는 가족입니다! (2) +12 21.12.30 12,886 265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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