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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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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최근연재일 :
2024.06.03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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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73,4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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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9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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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쪽

80. 뱀(2)

DUMMY

*


멀리 뛰었다. 던져진 바윗덩이가 긴 포물선을 그리듯이, 제냐는 뛰면서 자세를 바꾸었고, 회전하면서 마지막에 내리 꽂혔다. 그대로 주욱 중력을 따라 낙하하는 그 양 팔에 한 자루의 폭이 넓은 도와 대거가 들려 있었다.


사용법은 간단했다. 그대로 역날로 틀어 쥐고, 순발력과 근력으로부터 기인하는 힘을 가득 들여 고정한 뒤, 무게를 실어 뱀의 등줄기를 파내듯이 찌르는 것이다.


쾅!

하는 폭발음이 들린 건, 썬더 인챈트 스킬로 비스트 슬레이어에 깃들었던 뇌전의 기운과, 다량의 MP가 터져 나간 탓이다. 화약이 터지듯한 충격과 연출과 함께 뱀의 등께의 가죽이 크게 벗겨졌다. 대거는 그 옆자리를 기세 좋게 찔렀고, 비스트 슬레이어의 폭발로 한 차례 까진 맨 살을 더욱 후벼 파면서 열기와 발린 독을 내부로 전달했다.


치이이익, 하는 고기가 구워지는 듯한 소리는 뱀의 내부 혈액과 살덩이가 타들어가며 나는 소리였다. 번개의 연출 이펙트는 그대로 뱀의 안쪽으로 투사되었고, 뱀의 몸이 찌릿함을 느끼면서 떨어대는 것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크기로 보자면 트럭 따위 자동차 종류의 위에 올라탄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발을 두고 있는 지면이 근육으로 이루어져 요동친다.


단단하게 박힌 어금니처럼 뱀의 살을 물어버린 두 자루의 검탓에 쉽게 흔들리지는 않았다. 그대로 내부에서 손목을 뒤틀어, 검날의 방향을 바꾼 뒤 바깥쪽으로 촤악, 하고 빼냈다. 바깥에서 파고 드는 것보다 안쪽에서 솟구쳐 오를 때 검은 조금 더 쉽게 움직였다. 아무래도 흑요석같은 비늘과 가죽을 뚫는 것보다는 속살을 베는 것이 훨씬 쉽다보니.


“키야아아!”


뱀은 제대로 된 상처를 입히지도 못하고 자신의 몸만 피를 흘리고 있었다. 적을 찾아 뱀이 그 대가리를 마구 흔들었다. 검이 빠지자 흔들렸지만, 제냐는 그대로 뱀의 등줄기를 타고 꼬리 쪽으로 향했다. 길다란 뱀의 몸체가 저 멀리, 숲 외곽까지 빠져 나가는 게 그대로 보였다. 멀리서 볼 때도 괴생물체였지만 직접 타서 바라보니 기이한 광경이다.


흑사의 몸뚱이보다 비스트 슬레이어의 공격력이 높다는 게 판명이 났고, 한 차례 공격으로 쏟아낸 검기에 다시 MP를 부과했다. 검 주변의 빛의 칼날이 다시금 부풀어 올랐고, 제냐는 뱀의 요동에 맞추어 뛰어 오르거나 앞으로 달리면서 계속해서 그 등허리에 자국을 만들었다.


캉! 하고 잘 들어가지 않고 걸리는 느낌마저 났다. 방패나 쇠를 때리는 것 같다. 어지간히 힘을 잘 주고 빈틈을 노리지 않는다면 어려웠다. 스킬 중 검도가의 감각이나, 사냥꾼의 감각이 그에게 순간순간 약점처럼 보이는 곳을 인도해 보여주었다.


그 방향으로 제대로 검을 찔러넣을 수 있는 건 검술 류 스킬들의 도움이다. 그 흐름을 몸으로 잘 체득하기 위해 감각하고 기억하면서, 제냐는 뱀의 몸에 상처를 냈다.


콰득, 하는 거친 저항감을 꿰뚫고, 정확한 호흡과 기력술로 강격을 날리면 뱀의 가죽이 베였다. 다소 힘을 빼고 나면 잘 상처가 나지 않았다. 뱀의 움직임에 적응하고 달리면서, 그 짓거리를 해야 했기에 묘기에 가까웠으나 대형 짐승류 몬스터와 같이 곡예를 벌이는 건 제냐가 어차피 잘 하는 일이었다.


지면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묘기와 같은 움직임을 이어나갈 수 있게끔 돕는 건 보법의 영향이다. 유동적인 땅바닥, 흑사의 등허리는 전투 보행을 익힐 수 있는 좋은 지형이었다.


웃쌰.


제냐가 한 번 곡예처럼 뛰었다. 뱀의 근육이 강하게 수축하면서 발을 디딘 곳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끼고, 그 타이밍에 뛴 셈이다. 줄타기의 묘리처럼 뱀의 움직임에 몸을 맡겨 뛰자 훨씬 가볍게 날 수 있었다. 그대로 떨어지는 지점은 다행히 뱀의 뒤쪽 등허리다. 방향이 바뀐다면 공중에서 묘기를 부리며 몸을 뒤틀어서라도 방향을 바꾸어야 했다.


아직 제냐는 공중을 날 수 있는 종류의 스킬을 익히지 못했다. 강한 방출형의 에너지 공격을 쏟는다면 공중에서 자리 이동이 가능하겠지만, 함부로 쓰기에는 MP가 아깝다.


콱!


다시금 땅바닥과 같은 검은 뱀의 몸체 위에 내려 앉으면서 찍었다. 아예 두 손바닥으로 지면을 짚듯이, 자세를 낮추어 대거와 비스트 슬레이어의 검날을 전부 뿌리까지 박아 넣었다.


크어어어,


하는 뱀의 신음 소리가 몸을 타고 울렸다. 숲을 울리는 소리다. 뱀의 몸체는 하나의 거대한 진동관처럼 굴었다.


*


홱,


하고 뱀은 대가리를 돌렸다. 앞서 나가면서 거목의 뿌리를 거세게 친 그것은, 그 반탄력으로 잠시 자리에 멈춰 섰다가 유연하게 머리 부위를 꺾어서 뒤를 향했다. 뱀의 몸은 유연하다. 일반적인 뱀보다도 조금 더 말이다. 체형 자체가 ‘거대함’보다는 ‘긴’ 것이 더 눈에 띄는 뱀이었다.

그 마디마디의 관절이 유연하게 틀어지지 않았다면 제 몸을 가누기조차 어려웠으리라. 마치 밧줄이 그렇게 꺾이듯이, 뱀은 순식간에 방향을 틀어 자신의 남은 몸뚱이를 두고 앞부분만을 꺾어 뒤로 달렸다.


자신의 몸 위에 올라타 있는 한 먹잇감을 잡기 위해서였다. 흑사의 눈이 요사스럽게 빛났다. 누런 홍채가 커졌다. 동공은 쪼그라들고, 뱀은 건방진 사냥감을 향해 다가간다. 흙바닥, 돌멩이, 수풀, 뭐 그런 것들이 움직이는 뱀의 대가리 근처를 스쳤다. 뱀의 속력은 제법 빨랐다.


황소가 달리는 정도의 수준은 될 것이다. 네 발로 뛰어가는 준족의 짐승마냥, 꿀렁거리며 움직인다.

뱀은 작은 동물을 상대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게 그 동물을 잡기 위한 좋은 방법일 것이다. 섣불리 큰 동작으로 몸을 뒤틀었다가는 놓칠 수 있었으니.

효율을 중시하는 저격자의 마음가짐과 비슷한 움직임으로 뱀이 다가간다.


지면을 달려 나가는 뱀의 움직임이 자신의 몸에서 꼬리 부근으로 향하는 제냐의 그것보다 더 빨랐다. 뱀은 최고 속력으로 처음에 다가온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뱀의 대가리가 움직일수록 자연스럽게 제냐가 타고 있는 끝부분은 점점 더 그에게 다가온다. 제냐는 뒤로 가는 무빙 워크 위에 올라탄 사람마냥 균형을 잘 잡아야 했다.


뱀의 몸에서 뒤로 가는 그로서는 불편한 움직임이었다. 촤악! 하고 자신의 거죽 어딘가가 또 베여 나간 것을 느낀다. 뱀은 두 눈과 또 냄새, 소리로 제냐를 쫓았다. 복잡한 숲 속에서 뱀은 자신의 몸뚱이지만 한 눈에 다 담지를 못했다. 중간 지점 즈음을 달리던 제냐를 보았고, 한 순간 쏘아지듯 뱀의 머리가 튀어오르며 허공을 날았다.


화살마냥 다가가는 뱀의 몸은 탄력적이었고, 곤두선 근육이 위협적이다. 쩍 벌린 아가리는 승용차라도 한 입에 집어삼킬 듯했다. 제냐는 뒤에서 다가오는 거대한 기척에 반응해야만 했다. 기력 감지술과 강화된 오감은 뱀의 움직임을 알고는 있었지만,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는 마지막 도약은 예상 밖의 속도였다.


피할 길이 마땅찮다고 느낀 제냐는 발을 구르며 단숨에 위로 솟구쳐올랐다. 그가 밟은 뱀의 비늘이 부서질 정도로 강하게 차올라 뛰었다.


*


쾅! 콰악, 콰득!


첫 번째 소리는 뱀의 대가리가 어느 나무의 중간을 처박는 소리였다. 벌린 아가리 틈으로 나무가 들어갔고, 그대로 뱀은 씹어버렸다.

그 이빨이 촘촘하고 날카롭다. 마치 대거, 혹은 성인 남성의 팔뚝만한 길이의 숏소드만하다. 상아빛으로 빛나는 그 이빨에는 뱀의 침이 흘렀고, 그건 흑사의 생김새에서 얼추 상상되듯 독액과 섞여 있는 것이었다.


또한 이빨의 강도나 턱의 무는 힘도 생물의 그것이라 상상하기 힘든 모양이었다. 혹은 흑사의 특질과 비밀이 그 부위에 특별히 숨겨져 있다거나.


나무는 마치 썩어 문드러진 오래된 고목의 조각이 바스라지듯 흑사의 입 안에서 부서졌다. 그대로 멈추지도 않고 쿵, 하고 다른 나무 몇 그루를 처박은 뒤의 흑사가 요동치면서 선회해 다가온다.


제냐는 위에 한 차례 떠올랐다가, 그대로 어느 나무의 중간 가지에 안착했다. 흑사는 동체 시력이 좋고 감지 범위가 넓은지 제냐의 움직임을 바로 포착하고 그 나무를 향해 달려든다. 검만으로 저런 괴물을 잡을 수 있을까, 싶었지만 어쩔 수 없다. 이미 벌인 일 아니겠는가. 제냐는 이동 중의 파이어 볼트 캐스팅Casting을 시도했다.


파이어 볼보다 조금 더 공격적인 형태를 띄고 있는 스킬이었다. 위력 자체는 들어가는 MP의 양에 의해 결정되는 것인데, 기본적으로 부여되는 성질에 폭발력 보정이 있었고, 날아가는 속도가 더 빨랐다.

또한 파이어 볼보다 조금 더 촘촘한 MP구조를 가졌고, 단단한 물건이 무른 것에 파고들듯 관통력 역시 조금 더 낫다.


제냐는 나무의 위에서 대거를 쥔 손을 그대로 앞으로 뻗었고, 대거의 칼 끝 앞에서 염열의 기운이 모여들며 붉은 아지랑이가 뭉쳐졌다. 연기가 흩어지지 않고 고정된 형상을 가지며 공이 된다.

처음엔 손톱만한 것이 곧이어 손마디, 손가락, 손바닥 즈음이 되었고, 그 때 즈음 흑사의 대가리가 제냐가 올라선 나무의 밑둥을 쳤다.


쿵!


도끼로 찍는 것보단, 정말 트럭이 갖다 박는 교통 사고의 소음이었다. 그대로 나무가 부러질듯 휘청거린다. 흑사가 제대로 치자 거목도 별 것이 없었다. 흑사의 몸은 튼튼하며 강력하다. 한 차례 쿵, 하고 나무를 뒤흔들자 그 타이밍에 맞춰 휩쓸리지 않기 위해, 제냐는 공중에 다시 붕 떠야 했다. 휘었던 나무가 제 자리로 돌아올 때 발을 움직여 가지 하나에 밑창을 딱 갖다 대었다.


나무의 유동성에 맞춰 허공으로 다시 한 번 뛴다. 거목의 중간에서 솟구친 것이라 이전보다 훨씬 높다. 숲의 나뭇가지들을 뚫고 하늘이 잘 보이는 높이까지 올랐고, 그 와중에 대거의 칼끝 앞에 모이는 붉은 염열의 공은 점차 커져간다.


어느새 사람의 머리통만한 크기가 되었고, 용암이라도 되는 듯 밀도 있는 외견이었다. 기체가 아닌 진득한 액체가 모여든 것마냥 MP가 형성되었다. 제냐는 적당히 타격을 줄만큼 모였다고 생각되자, 그대로 시선에 잡히는 흑사의 몸뚱이를 향해 날렸다.


대거는 어떤 기계적 장치도 없었지만, 마치 총구처럼 방향을 겨누었고 그 앞에 선 구체가 휙 날았다.

화살처럼 날아간 불의 공이 휘어졌고, 얇게 변한 모습의 대가리가 흑사의 비늘 한 부위를 타격했다. 그대로 쾅! 하는 폭음과 함께 비늘과 가죽 조각이 여러 부위로 튀었고, 흑사의 몸뚱이에 제법 그럴싸한 상처를 내며 내부를 지진다.


흑사는 그럴수록 비명과 함께 몸을 뒤틀었다. 여전히 치명상은 아닌 모양이었고, 그저 화만 계속해서 돋구는 모양이다. 거대한 체적을 가진 놈은 체적에 맞는 만큼의 부위를 타격으로 없애야 치명상으로 인식하고 HP역시 그만큼 닳게 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그가 흑사의 HP 중 어느 정도를 깎아 먹었을까.


긴 이야기를 생각하지 않고, 제냐는 그저 현재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대로 공중에서 몸을 빙그르르 회전시켜 방향을 잡았고, 흑사의 몸뚱이 위로 다시금 떨어진다.


허공에서 회전하며 날아 박히는 제냐의 검날이다. 검의 위에는 여전히 기력의 칼날이 덧씌워져 있었다.


콰학!


뱀의 몸에 다시금 구멍 두 개를 추가했다. 흑사가 눈을 번뜩인다.


*


흑사는 짜증이 났다.

금세 그 입에 들어오거나 죽을 줄 알았던 먹잇감이 생각보다 더 날렵하고, 움직이는 범위가 넓었던 탓이다.


제 몸보다 훨씬 긴 거리를 단숨에 튀어오르고 쉽게 방향을 바꾼다. 그리고 다시 흑사의 몸에 올라타서 상처를 내고 있었다.


뱀은 먹잇감이 잡기 까다로운 상대라고 생각했다. 주변 지형을 개의치 않고, 조금 더 난폭하게 움직이며 그에 깔려 죽도록 뱀은 움직였다.


콰악,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금 뱀의 몸, 중간 지점 즈음에 상처를 내는 놈이다. 뱀은 그와 함께 몸을 뒤틀었다. 한 번의 움직임이 아니라, 그대로 미친듯이 굴렀다. 제자리에서 온 몸의 근육을 써가며 미친 것처럼 회전한다. 송곳이 돌아가듯, 숲에 몸을 걸친 채 회전하는 뱀의 몸은 그 단단한 만큼 주변 것들을 부수어가며 난리를 쳐댔다.


콰직! 하고 몇 개 그리 굵지 않은 나무가 그대로 부러지며 뱀 쪽으로 쓰러졌다. 흑사는 개의치 않았다. 그대로 회전을 계속하면서 여기저기로 움직였고, 그때마다 그 위에 쓰러진 나무들은 들썩거리며 크게 요동쳤다. 뱀의 몸에 칼을 박아 넣었던 제냐는


*


“으아아아아아아!”


비명을 지르면서 칼을 놓쳤다. 그것밖에는 답이 없었다. 그대로 쥐고 있었다가는 땅바닥과 뱀의 몸 사이에 깔려 갈려버릴지 모르는 일이다. 제냐는 일단 뛰었다. 아주 살짝 점프하는 것만으로도 뱀의 회전탓인지 강하게 튕겨나갔다. 콰학, 하면서 숲의 낙엽 더미를 파헤치면서 몸으로 숲바닥을 체감했다.


입 안으로 흙이 들어와 씹혔다. 그 맛까지 얼추 느껴진다. 특히 식감이 아주 일품이었다. 낙엽의 부스러기와 흙더미. 자갈마저 있는 듯하다.

퉷, 하고 제냐는 돌을 뱉어냈다. 입 안에 들어오는 흙가루들 역시 마찬가지였고. 그대로 앞으로 벌떡 일어났다. 머리가 살짝 어질거렸지만 큰 상처는 없었다. 눈 앞에서 거대한 쇼가 벌어지고 있었다.


트럭만한 몸통을 지닌, 어마어마하게 길다란 뱀이 고속으로 회전하며 숲 속에서 춤을 춘다. 흑요석처럼 번들거리는 비늘은 상당한 강도를 갖고 있었고, 나무나 수풀들 따위는 그것의 움직임에 거침없이 갈려나간다.


믹서기가 그렇듯 주변 것들이 그 아래로 빨려 들어가거나 치이면서 분쇄되었다. 죽음의 소용돌이처럼 보이는 꼴에 제냐는 일단 침착하게 뒤로 빠져 거리를 벌리면서, 썬더 볼트를 시전했다.


"IV."


인벤토리의 약어를 외치는 건 그것을 켜는 쉬운 방법 중 하나였다. 다양한 인터페이스는 사용자 설정으로 끄고 켜는 법을 설정할 수 있었고, 지금은 이처럼 약어를 외치거나 양쪽 눈을 빠르게 세 번 깜빡이는 것으로 해두었다. 당장 접전이 벌어지고 있을 때 눈을 감는 건 어려웠다. 적과 멀어진 뒤에는 얼마든지 소리 없이 끄고 켤 수 있었지만.


푸르고, 반투명한 물자 목록이 그의 앞에 튀어나왔다. 거기에서 제냐는 푸른 물약을 긁어 현실화 해냈다. 42개 정도 남은 고급 MP 포션 중 세 개를 꺼내어 그 긴 주둥이를 손가락 사이에 끼워 한 번에 들었다. 같은 종의 물건을 한 칸에 중복 수납했을 때는 개중 일부만 꺼낼 수 있었는데, 손가락 끝을 가져다 대고 긁듯이 바깥으로 빼냈을 때 올리고 내릴 수 있는 작은 스크롤이 가시화되어 보여진다.


그 때 손가락을 얼마나 움직이느냐에 따라서 같이 숫자가 표시되어 오르락 내리락 하는데, 자기가 원하는 지점에서 한 번 멈추게 한 뒤 물건을 집어 꺼내들면 되는 것이다.

인벤토리 따위의 인터페이스 사용이 얼마나 빠르고 능숙하느냐가 전투력에 관련이 있을 정도였다. 이건 게임이었으니까. 게임 내 시스템에 얼마나 익숙한 지가 중요한 건 당연한 일이다.


제냐는 그대로 이빨로 뚜껑을 씹어 하나씩 돌려 깠다. 그대로 투, 뱉어낸 뒤 들이킨다. 두 개 쯤 마시고 세 개 쯤 마실 때는 반쯤 먹고는 땅바닥에 버렸다. 어쩔 수 없다. 전투 중이었으니. 다시금 MP를 운용해 시전 중이던 썬더 볼트의 구현화에 집중했다. 서서히 차오르는 MP를 모조리 썬더 볼트에 소모했다.


거리는 점점 뒷걸음질 치며 벌리고 있었다. 깨나 멀어져도 거대한 굉음을 내면서 숲을 초토화시키고 있는 뱀의 몸집에 비한다면 그리 먼 것이 아니었다. 길다란 그 몸이 언제라도 접혀서 그 쪽을 향한다면 바로 사정거리 내에 들어올 지경이었다. 제냐는 나무들의 틈 사이를 잘 계산하며 지나가서, 사격을 할 만한 사선을 유지한 채였다.


터져 나갈듯 부풀어오른 전뇌의 구체가 어느새 품에 한가득 안을 만치 커졌을 때, 발사했다. MP가 쑤욱 하고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아직 전투를 할만큼은 충분히 남아 있었다. 이번에는 백색의 빛을 내뿜는 뇌전의 투사체가 이리저리 꺾여대며, 뱀을 향해 날아갔다.


파즈즈즈! 하고 공기 중에서 터져나가는 소리를 내며 자유롭게 날던 놈은 회전하는 뱀의 몸뚱이에 정확히 맞았고, 곧 쿵, 하는 묵직한 폭발음과 함께 뱀의 돌아가는 몸체 위로 상흔을 남기며 내부에 피해를 주었다.


데미지는 확실히 들어가고 있었다. 생각보다 뱀의 거체에서 오는 위용이 막강했다. HP가 뱀의 전체로 보자면 그리 깎이지 않고 있었고, 장기전으로 간다고 해도 흑사의 공격을 막고 피해내는 데 당장 기력이 상당히 들었다.

묘기와도 같은 솔로 플레잉이 언제까지 가능할 지, 자신의 기력과 체력이 다하는 것이 먼저일지 뱀이 죽는 게 먼저일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우리네 인생이 그렇듯, 언제나 결국 알 수 없는 걸 해야하는 법이었다. 아무리 100%의 계산을 해내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 게 인생인 법이었다. 제냐는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게임 내에서 그런 당연한 사실들을 떠올릴 수 있는 건, 이 게임의 묘미이기도 했고 또 제냐가 비련의 시나리오를 온전히 즐기는 방법이기도 했다.


늘 쉬운 것만 해서는 영 재미가 없다. 어려운 길로도 가보고, 또 이겨냈을 때의 성취감이 있을만한 길도 가보고, 하는 게 삶 아니겠는가.


콰아아, 하고 썬더 볼트의 폭음과 빛이 잦아들 때 즈음, 제냐는 다시금 초상 스킬을 발현했다. 파이어 볼트였다. 물약은 아직 남아 있다. 안전한 자리에서 계속해서 사격을 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쏠 수 있었다. 단발에 지나친 MP를 담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천천히 지속적인 데미지를 입히는 건 가능하다.


물약도 배가 차오를 때까지 먹고 나면 끝이었지만, 전투를 하며 시간을 보낸다면 다시 마실 수 있게 된다.


제냐는 예비용의 준수한 철검 하나를 인벤토리에서 다시 꺼내들었다. 왼 손에는 깨나 무게감 있는 한손용 도끼를 잡았다. 그대로 두 냉병기의 날을 뱀이 회전하는 곳을 향해 내민 뒤 불꽃의 구체를 형성했다.


*


콰앙!


불꽃이 뱀의 표면에 맞았다. 회전하고 있는 이상, 물리적인 화살 따위를 쏘아내봐야 튕겨나가거나 제대로 박히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결국 초상 스킬만이 답이었다. 마침 화살보다는 한 발 한 발의 공격력이 더 높기도 하다. 뱀은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는지 미친듯이 몸을 뒤틀면서 여기저기 옮겨다녔다.


순식간에 숲이 아작이 났다. 수십 그루, 족히 수백 그루 이상이 갈려 나간다. 제냐의 곁으로도 그 긴 몸이 다가왔지만, 그럴 때마다 발바닥에 불이라도 붙은 마냥 뛰어 간신히 피해냈다. 근처에 나무가 있다면 입체적으로 움직여서 피하는 것이 쉬워진다.

뱀의 미친 스피닝Spinning은 이따금씩 발작을 하듯이 위치를 바꾸며 범위를 넓혀갔다.


흑사의 춤으로 인해 숲에 난데없는 공터가 생겨나고 있었다.


제냐가 밟고 뛸 만한 지형지물이 사라질수록 뱀과의 싸움은 단순한 구조가 되어간다. 디딜 만한 입체적인 발판이 적을수록 제냐는 거대한 뱀과 싸우는 일이 부담스러워진다. 그는 계속해서 공터의 바깥으로 후퇴하면서, 초상 스킬을 쏘아댔다.


뒤로, 뒤로, 뒤로.


미쳐버린 회전 공격을 하면서도 뱀의 지각 기관에는 용케 제냐가 어렴풋이 걸리기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아니, 단순히 초상 스킬로 인한 데미지를 인식하고 그쪽 방향을 찾는 것인지도.


제냐를 향해서 점차 다가오는 흑사의 소용돌이다. 제냐는 계속해서 숲 지형을 바꿔 나가는 뱀을 이끌고 다니며 파이어 볼트나 썬더 볼트를 갈겨댔다.


한참이 지났고, 뱀의 거죽 중 너덜거리는 부분이 깨나 많아졌을 즈음이었다. 얼핏 보아도 상당수였고, 일정 부위는 흑사의 흑요석같은 비늘이 사라지고 검붉은 피와 살점이 드러나 있다. 그것들을 공격한 썬더와 파이어, 두 종류의 속성은 열상을 입히고 지져버렸기 때문에 피부가 손상된 것에 비해서는 피가 많이 튀지 않았다.

신체 내적으로 보자면 더 데미지가 많이 들어갔긴 할 것이다.


어둠숲의 한 부분에 대대적인 공사가 일어나고 있는 지경이었다. 흑사가 어둠숲에 한 개체만 있는지는 잘 모른다. 아마 거대한 숲 속을 여러 섹터로 나누어놓고, 그 섹터 별로 한 개체가 있거나 없거나 할 것이었다. 이 근방의 흑사는 이 놈 하나 뿐이었다.

그리고 흑사가 머무는 영토 근처에는 별다른 천적도 이빨을 드러낼만한 몬스터도 없었는지, 숲이 그렇게 요란스럽게 사라져가는 와중에도 다른 방해물이 나타나지 않았다.


제냐로서는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차라리 변수라도 생겨야 그것을 이용해서 어떻게 사냥을 쉽게 풀어나가 보겠건만. 흑사는 아직까지도 체력도 정력도 멀쩡하며 굳건해보였다.


흑사가 있던 동굴을 중심으로 거대한 원을 반경 수 백미터에 이르러 그려보자면, 그 원에서 동쪽부터 남쪽까지, 약 90도 즈음의 지형이 강제로 공터처럼 변해버리는 지금이었다. 나무들의 부스러기, 잔해들이 쓰레기처럼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흑사가 요동칠 때마다 그것들이 잔뜩 허공으로 피어올랐고, 요란한 소용돌이처럼 바람에 날려 시야를 가렸다. 흑사가 있는 인근은 국소적인 규모의 자연 재해처럼도 보인다.


그 와중에 적절한 지점을 찾아 가죽을 벗겨내고 있었으니, 마냥 피하고 저격하는 일도 쉬운 게 아니었다. 바로 근처에서 인간의 눈높이로 상대하고 있는 광경은, 자연 현상이나 재해의 앞에 대항하는 감각이다.


쿠화아아!


뱀의 뒤틀림이 숲의 지형에 따라서 이리저리 요동쳤다. 굴곡이 있는 땅에 걸치면 그것을 디딤대 삼아서 한 번 튀어올랐고, 트럭만한 굵기의 대형 밧줄이 거목의 중간 지점 즈음까지 솟구쳐 올랐다가 땅에 갖다 박았다. 쿵! 하는 진동과 함께 흙바닥이 패였고 그 자리에 있던 여러 숲의 토산들이 파편화되어 날아간다.


뱀의 다이나믹한 움직임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 그 여파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 제냐는 인간을 피하는 벌레라도 된 마냥 열심히 뛰었다. 다행히 한 순간에 고속 이동을 할 수 있는 기력술의 묘용이 있기에 살아 있는 것이지, 어느 정도 스텟과 스킬이 받쳐주지 않았다면 순식간에 게임 오버가 되었을 테다.


뱀의 힘은 끝이 없는 듯 계속해서 숲의 개간 공사를 이어나갔다. 제냐도 지겹도록, 파이어 볼과 썬더 볼트를 써댄다. 전투의 모습이 일변도로 고정되었다. 갑작스러운 공사 소식에 자리를 떠나야 하는 인근의 소동물들에게는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변화 그 자체였지만.


비스트 슬레이어와 발톱 대거가 과연 어찌 되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제냐는 기력술로 다시금 자신의 각력을 강화시키면서, 이번에는 앞으로 뛰었다.


뱀이 그에게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 회전하는 뱀의 몸뚱이를 줄넘기처럼 넘으려는 생각이었다. 흙바닥을 파헤치며 앞으로 펄쩍 뛰고, 한 순간에 십 수 미터 이상을 날듯이 전진한다. 쿵, 하고 발바닥으로 땅을 찍으며 한 번 급정거를 한다. 뱀의 형태에 따라 뛸만한 곳이 달라지리라.


제냐는 적당한 지점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틀어가면서 뱀에게 접근했다.


소용돌이치는 뱀의 위용이 장관이었다. 트럭만한 게 고속 이동을 끊이지 않고 하는데, 그럴 수 있는 에너지가 과연 어디서 나오는가 싶을 정도였다. 흑사는 일반적인 생물체의 상식을 뛰어넘는 체적을 갖고 있었다. 흰수염고래가 현실에 있다지만, 그것 역시 바다에 살며 물 속을 유영하니 그만한 크기가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땅 위에 그만한 게 돌아다녔다면 영 비현실적인 모습이었으리라.


트럭만한, 흑요석의 비늘이 작은 칼날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 고속 회전하는 흑사의 몸뚱이 근처에 다가선 제냐는 퍼올려지는 흙더미, 나뭇잎, 나무의 부스러기 따위에 간신히 눈을 뜨면서 크게 뛰었다. 폭발적인 힘이 하체와 그 중심을 잡는 허리 즈음에 집중되었고, 단박에 십 수 미터를 뛰어오른다.


그대로 뱀을 넘는 제냐는 공중에서 몸을 뒤틀어 손도끼를 투척했다. 기력술을 담은 그것이 콰직! 하고 뱀의 몸에 날아가 찍혔다. 뱀이 난리를 치며 지나간 폐허, 그 반대쪽에 착지했다.


제냐는 기력 감지까지 동원하며 세밀하게 주변을 살폈지만 비스트 슬레이어처럼 보이는 것은 없었다. 아마 뱀의 몸통에 그대로 박혀 있으리라. 제냐는 뱀을 본다.


괴랄한 회전으로 공사중인 흑사. 저기에 꽂혀 있을 비스트 슬레이어와 발톱 대거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운이 나쁘다면 그대로 내구도가 왕창 닳아 무기로써 써먹을 수 없게 될 지도 모른다. 제냐는 속으로 혀를 차면서, 다시금 거리를 벌렸다. 타다다, 하고 땅을 박차는 그의 발길이 가볍다.


MP는 아직 반절 정도가 남아 있었다. 시간이 가면서 물약 역시 더 들이킬 수 있었다. 다시금 적당한 거목을 찾아 오르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는다.


“후우우우······.”


제냐는 인벤토리를 열어 장궁을 꺼내들기로 했다.


철시를 가볍게 쏘아서는 저 회전력에 튕겨나갈 것이고, 한 발 한 발을 파워샷으로 기력을 잔뜩 실어 날려야 박힐 것 같았다.


초상 스킬의 난사에 지겨워진 제냐는 다른 방법을 찾는다. 그가 전통 두 개를 꺼내 하나는 어깨에 메고, 하나는 나뭇가지 위에 적당히 기대어 세워놓고, 파워 샷을 날리기 시작했다.


*


콰득, 콰직!


하는 격렬한 소리와 함께 뱀의 비늘을 부수고 철시가 파고들었다.


뱀이 돌아가는 와중에 잘도, 또 절묘하게 박혀 들어가는 것이었다. 한 발 한 발에 실린 기력이 보통이 아니라 관통력이 극도로 늘어났기에, 반탄력을 이기고 파고든 것이다.


그대로 반절 이상이 뱀의 몸통에 들어가자 뱀이 돌 때마다 철시가 움직이며 뱀의 살 내부를 헤집었다. 제냐는 뱀을 고슴도치로 만들어 보겠다는 듯, 적절한 지점을 찾아 연사와 속사를 반복했다.


파워 샷을 사용하는 이상 발사 속도 자체는 현저히 느려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뱀을 잡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봐야지 않겠는가. 일단 인벤토리에 챙겨 온 철시 모두를 쓰는 한이 있더라도 데미지는 줘봐야 할 것이다.


성실하게 쏘아내는 철시가 뱀의 몸뚱이에 하나씩 박혀 들어갔고, 그 상처가 약간의 따가움이 있지만 초상 스킬만치 확연한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는지 뱀은 영 방향을 잡지 못하고 제냐가 있는 방향이 아닌 다른 곳으로 돌아갔다.


제냐는 시간을 벌었다는 느낌으로, 안심하고 전통 속의 철시들을 차근차근 소모할 수 있었다.


콰득! 다시 한 발이 검은 비늘 사이를 헤집어 살을 찔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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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126. 재접속 23.10.31 16 3 22쪽
126 125. 간밤의 습격, 그 끝 23.10.30 19 3 32쪽
125 124. 위검기僞劍氣 23.10.29 18 3 19쪽
124 123. 맥컬리 23.10.29 18 3 21쪽
123 122. 펠 파이든 23.10.29 19 3 21쪽
122 121. 골목길 23.10.29 16 3 23쪽
121 120. 미첼 카니브 23.10.28 21 3 17쪽
120 119. 튀어 23.10.28 22 3 24쪽
119 118. 오케이Okay 23.10.28 20 3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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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116. 검기劍氣 23.10.25 22 3 28쪽
116 115. 파罷했음 23.10.25 21 3 34쪽
115 114. 돌아갑시다. 23.10.25 19 3 29쪽
114 113. 동행 23.10.23 22 2 32쪽
113 112. 박영식, 안드레 박 23.10.22 22 3 34쪽
112 111. 사슴의 고기 23.10.20 28 3 34쪽
111 110. 재료 수급 23.10.18 22 3 31쪽
110 109. 피츠 브래드 23.10.15 23 3 24쪽
109 108. 사내는 지난 시간을 등지고 돌아섰다. 23.10.12 21 3 18쪽
108 107. 아이젠 하우드 23.10.12 28 3 35쪽
107 106. 소란 23.10.10 24 3 16쪽
106 105. 귀족제 23.10.10 25 3 17쪽
105 104. 리액션 23.10.08 27 3 34쪽
104 103. 마무리, 재회 23.10.06 29 3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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