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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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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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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3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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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9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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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123. 맥컬리

DUMMY

*


펠 파이든이 죽었다.


그의 뒤를 따라 달리던 검은 늑대단원들은 눈빛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선두로 쫓고 있는 자들이 하나 둘씩 목숨을 잃고 있었다. 상대는 교활했으며, 지형을 잘 알고 있었다.

거기에 그들보다 강력했다.

암습을 당했으므로 손속에 거침이 있지조차 않았다. 상대는 작심을 했고, 거침없이 칼을 휘두른다. 암살자가 칼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 역시 미치도록 우스운 일이었지만, 이렇게 무력하게 동료들이 죽어나가는 상황에서 전략 수정의 필요성 정도는 느껴야만 인간이다.


그들은 속도를 맞춰 뛰기 시작했다.


가장 속력이 빠른 이들의 그룹이 세 명 남았다. 나머지 자들은 넷 넷으로 나뉘어서 부지런히 쫓고 있었다. 펠 파이든이 죽었으니, 그들 중에서 가장 최선임자인 맥컬리가 지휘를 맡았다. 발이 빠른 그룹에 속해 있었고, 복면 속에 투박한 인상이 가려져 있는 30대의 사내였다. 짙은 갈색 눈썹과 검은 눈동자. 그리고 흑발을 하고 있는 백인 남성이다.

물론 지금은 암살조의 복장을 하고 있기에 외견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맥컬리는 남은 단원들 중 최선임자이기도 했고, 다행히 수준이 가장 높기도 했다. 펠 파이든만큼은 아니었다. 그와 1대1로 정면에서 붙는다면 10번 중 7번 이상은 확실히 질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그런 펠 파이든을 한 번에 해치웠고.


반드시 협공을 해야 했다. 애초에 그러기 위해서 시작한 암살이기도 했다. 지금은 한 밤 중에 일어난 것 치고는 너무 활개를 치며 뛰어다니는 상대의 페이스에 휘말려서 벌어진 사달이다.

암살자들은 암살자의 행보와 호흡이 있었다. 사냥감이 마음대로 숨을 쉬게끔 내버려 두어선 안된다. 더군다나 사르삿은, 그들의 거점은 아니었으나 아주 익숙한 동네이기도 했다.


일반 지구의 속속들이까지는 알지 못해도 그들은 산슈카가 자랑하는 공작가의 기사단원들이었으며, 그들의 주인은 산슈카의 대공이다.

사르삿에서 다소 떨어진 자리에 알사드 공작령이 있지만 이곳에서 벌였던 작전들의 수가 그래도 꽤 된다.


꽤 된다,


라는 점에서 프린스 알사드가 얼마나 오만하게 나라를 호령하고 있는 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보통 그가 뒤 구린 일을 시킬 때 검은 늑대단을 움직이니까 말이다.

왕실이 버젓이 존재하는 왕가의 앞마당에서 이미 여러 번의 속 시꺼먼 작전들을 수행하고 별 뒤탈이 없었다는 뜻이었다. 대담하고, 오만한 짓이었다.


그를 견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여러 권력자들이 듣는다면 뒷목을 잡을 일이었으나, 교활한 대공은 늘 자신의 속내와 행보를 감추며 돌아다닌다.

그가 정적이라고 생각하고 방해가 된다고 여겨 자취를 지워버린 귀족들만 수 십이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 지는 알 수 없으나, 여러가지 이유를 대면서 그간 긴 세월 한 명 한 명 없애버린 것이다.


귀족이 아니라면 수가 더 많았고, 이런 식으로 가볍게 작전을 벌여 그 목숨을 취한 이들이 아주 많다.

해외까지 셈을 하면 또 많아질 테고.

검은 늑대단은 알사드에게 헌신을 했다. 한 명 한 명 다들 사연이 있었고, 알사드는 그들의 약점을 알며 인간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 약점을 잡았다, 는 점은 은혜를 끼쳤다는 것이다.

비열하게 허점을 노려 인질 따위를 잡고 늑대단을 운용해서는 별로 좋은 결과를 보지 못한다.


세르게이 알사드는 그렇게 생각하는 인간이었다. 도구로써 부하를 최대의 효율로 사용하려면, 그들에게 은혜를 끼쳐야 한다. 그래서 그들이 ‘자발적으로’ 그 일을 하는 것인양 최대한 느끼게끔 해주면, 인간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의뢰나 임무라고 하더라도 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검은 늑대단은 실력에 비해 알려진 일이 거의 없는 기사단이었고, 동시에 알사드 대공의 가장 유용한 패였다.


그 유용한 패가 하나 둘씩 사라지고 있었다. 제냐 킴이라는 이방인 용병의 손길에 의해서 말이다.

위험한 작전에 투입하는 인원들이라고는 하지만 하나하나 키워내기 위한 비용과 시간이 만만찮다.

본격적인 기사의 수준이었고, 그런 초인들을 그저 무한정으로 길러낼 수 있다면 프린스 알사드는 어떤 계략도 필요 없이 중부 대륙을 집어삼킨 뒤에 제 좋을 대로 대륙적 행패를 벌였을 것이다.


제냐 킴의 수준을 잘못 가늠한 점도 있었고, 그의 성장세를 완벽하게 착오한 점도 있었다.


확실히 충분한 수였으니까 말이다. 제냐가 이전의 퀘스트 씬에서 더 이상 성장하지 않고 있었다면. 운트 작힘 백작과의 일에서 알사드 공작의 심기를 거스르는 활약을 했다고 한들, 압도적인 무력을 갖고 있었다면 양상이 훨씬 달라졌을 테였다.

제냐는 당시의 판도를 확연하게 바꿀 수 있을 실력을 갖고 있지 못했고, 그래서 판단한 것들이 암살자 플레이어 아르망디를 고용하거나 혹은 검은 늑대단의 기사들 중 몇을 보내는 일이었다.


검은 늑대단 셋을 보내고도 실패를 하자, 다시금 더 많은 인원을 보낸 참이었지만, 그 사이에 제냐는 다시 성장을 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제냐에게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특히 성장을 위해 몰입하고 있는 플레이어에게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전체적으로 스펙을 업그레이드 한다거나, 혹은 스킬에 대해서 깊이감 있는 깨달음을 얻을 경우에는 단시간에 전투력이 완전히 변모할 수도 있었다.


게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전투력을 결정하는 많은 요소에 대해 다시 보게 된다. 일반적으로 인터넷에서 알려지는 일반론으로는, 전투 클래스의 플레이어들에게 중요한 건 스탯과 스킬, 그리고 아이템이었다.

정확한 말이었고, 반박할 수 있는 이들은 별로 없으리라.

그러나 그 너머 고수의 세계에서, 또 그 위의 랭커들의 세계에서 비련의 시나리오는 완벽한 컨트롤 게임이었다. 플레이어의 컨트롤 피지컬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현실만치 깊게 구현되어 있는 이 세계의 인과와 스킬에 대한 이해를 해내는 것이 중요했다.


한 가지 스킬이라고 하더라도, 고수가 다루는 것은 단순한 희귀도와 스킬 레벨 그 이상의 위력적 차이를 보였다.

똑같이 유니크 스킬을 8단계까지 익힌 상태에서 비슷한 전투 스타일을 가진 플레이어들끼리 부딪힌다고 하더라도, 어느 쪽이 스킬의 원리와 과정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느냐에 따라 원 사이드One side한 결과가 나올 수도 있었다.


그건 수치 너머의 세계였고, 그게 사실 비련의 시나리오가 구현하고자 하는 세계의 이상에 가까웠다.

현실이라는 건, 아날로그라는 건 디지털로 정의할 수 있는 그 너머의 세계였으니 말이다. 모든 디지털 프로그램들의 목적은 아날로그의 영역을 처리 영역에 넣어 두면서도, 디지털로서의 완벽한 결론과 분석을 내놓는 일일 테였다.

다시 말해 세상의 모든 정보를 분석하고 지배하고자 하는 바람이었고, 그건 아마 이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도 닿지 않을 지점이었지만, 그래도 여태까지 인류 역사의 기술 발전사에서 가장 그에 가깝게 도달한 것이 바로 현재의 ‘만물박사’였다. 곧, 그 AI를 활용해 만들어낸 비련의 시나리오라는 게임 세계였고 말이다.


맥컬리는 도심을 달린다.


그의 곁에 양 옆으로 동료들이 따라 붙었다. 둘이 죽었고, 셋이 선두를 달린다. 나머지는 넷 넷으로 나누어져 뒤를 따르고 있다.


상대가 세 명을 한 번에 상대하고 죽일 수 있을까?


맥컬리는 알렌과 숀, 페이트가 살아돌아온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지 못하리라는 쪽에 한 표를 내세운다. 더군다나 알렌이나 숀, 그들보다는 맥컬리가 한 수 정도 앞서는 실력이었으니 말이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들은 동이 트기 전에 사르삿을 떠나는 게 좋다. 제냐의 달리기는 빨랐고 끈질겼다. 이 근처 지리를 아주 잘 알고 있는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이리저리 방향을 선회하면서 골목 속으로 들어갔다가 건물을 넘어 다른 길로 가는 그 행보에 거침이 없었다.

간신히 쫓아서, 다시금 사르삿의 복잡한 샛길 중 한 곳에 다다랐을 때였다.


비슷한 지형이었다. 미첼 카니브가 죽은 데와 말이다. 똑같은 지점은 아니었고, 그건 맥컬리가 확신할 수 있었다. 구조물이 달랐고 무엇보다 머릿속에 움직이는 경로를 그려 넣으면서 달리고 있었으니까. 같은 장소에 다다를 수 없는 방향으로 지금껏 달려왔다.


아주 잠깐, 사람의 키보다 훨씬 높은 담벼락이 갑자기 샛길 사이에 생겨 있어서 그 너머를 볼 수가 없었다. 너머도 건물로 막혀 있는 것 같았다. 넘어 가려면 담벼락을 밟고, 그 앞 쪽에 있는 건물의 지붕을 밟은 뒤 뛰어가야 했다.

아마 제냐 역시 그러했으리라.


맥컬리도 제냐가 넘어갔을 방향 그대로 짐작하며 움직였다. 그 역시 색적과 추적 스킬을 갖고 있었다. 어둡고 좁은 골목길에 사람 하나가 지나갔던 흔적이지만, 아주 약간씩 남아 있었다. 주변에 흐트러진 물건이나 발자국, MP를 사용해서 거칠게 움직이다 보면 또 거리에 상흔이 남으니까 말이다.


MP를 과하게 발출한 자리에 재빠르게 다다른다면, 때론 그 향취를 느껴 MP의 소유자가 어느 방향으로 움직였는 지도 알 수 있게 된다.


검은 늑대단원들 중 감지 스킬의 역량이 좋은 자들이 감지술을 발휘하며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어둔 골목 속을 검은 망토로 몸을 덮고 빠르게 내달리는 제냐를 찾는 게 영 쉽지는 않았다. MP의 소모 역시 최대한으로 줄이면서, 어느샌가 은엄폐를 사용하며 달리고 있었고.


거기에 무엇보다 잡기 어려울 정도의 속도였다. 결국 가장 앞서가는 맥컬리 조의 인원들이 일일이 눈으로 흔적을 살피고 뒤를 쫓는 게 최선의 수가 되었다.


어둡고 앞이 막힌 골목. 맥컬리와 두 명의 동료는 잠시 멈추어 섰고, 도약을 준비하며 짧은 호흡을 고른다. 그리고 발을 떼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양 옆으로 수 미터 정도 되는 폭이었다. 그리고 십 수 미터 앞에 담벼락이 있었고. 담벼락 너머에는 곧바로 건물 하나가 달라붙어 있어 그 목조 건물의 후면이 보였다.

그 건물의 후면, 창고의 문이나 혹은 창문처럼 보이는 곳에서 검은 인형이 쏜살같이 빠져나왔다. 어둔 그림자 속에 자신의 몸을 숨기고 있다가 튀어나왔다. 허공을 가르는 살처러 아래로 떨어져 내린 그것은 정확히 맥컬리를 노리고 있었다.


맥컬리의 눈이 흔들렸고, 그의 소매 자락에 들어 있던 소검이 스르르 빠져나온다. 간단한 잠금 장치로 팔뚝에 매어둔 것인데, 전완근에 힘을 주면서 특정한 방향으로 털어내면 고리가 풀리면서 빠져나오게 되어 있었다. 맥컬리가 소검의 그립을 잡고, 기력술을 발출하며 상대의 공격에 대비했을 때, 쏘인 화살같이 다가온 신형이 맥컬리의 앞에 섰다.


뒷목이 쭈뼛 서는 듯한 서늘한 MP의 기운이 느껴졌다. 기력술의 경지가, 확실히 맥컬리보다는 높았다. 검은 형체는 사람이었고, 가까이 다가온 것은 대가리를 디밀면서 아래로 쭉 떨어져 내리다가 몸을 회전시켜 그 팔에 든 것을 흩뿌렸다.

맥컬리에게 다행으로 암기류는 아니었고, 단순히 검격이었다. 휘둘러진 검격을 맥컬리가 막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다음의 것이었다.


캉!


다행히도,


서슬퍼런 기운을 흘리면서 날아온 비스트 슬레이어의 검격을 맥컬리는 막아냈다. 목이 베이는 것 대신, 소검의 칼날을 주면서 한 번은 살 수 있었다.

몇 번 반복되었던 기습이었기에 그의 뇌리 한 켠에 경각심이 올라와 있어서 가능했던 방어일 지 몰랐다.


새된 쇳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칫.


제냐는 혀를 속으로 찼다. 나름대로 강하게 휘두른 비스트 슬레이어인데, 상대는 그 찰나에 검을 빼어들어 막았다. 거기에 제법 완성적인 기력술을 칼날에 담았고, 큰 상처 없이 물러섰다. 비스트 슬레이어의 검격은 무게감이 아주 두터웠고, 칼을 막은 사내는 자연스럽게 뒤로 밀리며 거리를 벌렸다. 자신이 그 충격을 맞아 뒤로 더 뛴 것도 같았다. 몸놀림이 좋은 자였다.


검은색의 천 옷으로 몸을 둘둘 싸매고 있는 자들이었지만, 가까이에서 만나 보면 체격이 어떤 지 정도는 대강 감이 왔다. 여성인지 아닌지, 제냐보다 큰 사내인지 아닌지 정도는 말이다.

제냐보다 약간 더 체격이 크고 길쭉한 사내다.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고 매섭다. 펠 파이든, 제냐는 그의 이름을 모르지만 바로 앞 순간에 죽였던 인간을 닮아 있었다. 어쩌면, 그를 쫓고 있는 검은 늑대단은 모두 비슷한 눈빛을 갖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고.


제냐는 숨을 삼켰다. 침을 삼키기도 했고. 근육의 빠른 움직임을 위해서 잠깐 기도를 가라앉히며 자세를 정비했다.

상대는 셋이었다. 별로 좋지 않았다. 자신이 지금까지 최대한 도망을 치면서 상대와의 거리를 벌리기 위해 애를 쓴 수가 있었다. 제냐는 전속력으로 뛰었고, 다행히도 그를 쫓는 암살자들의 속도는 제각기 달랐던 모양이다. 그 추격전이 길어질수록 후발조와 제냐를 쫓는 선발조와의 거리는 벌어지게 되어 있었다.


지금 제냐에게 이들을 상대할 수 있도록 주어진 시간이 과연 몇 초나 있을까. 아까의 상황보다는 조금 더 길 것이라고 여겼다.

이들이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 자들인지도 모르고, 연원도 내력도 모르며 솜씨도 다 알지는 못하지만 그들의 동료를 어쨌거나 없앴으니까. 그로 인한 동요나 소요, 움직임의 지연이 없으리라고는 생각치 않는다. 아무리 철혈의 기계처럼 훈련된 암살자들이라 할 지라도 그러기는 어려웠다.

그건 집단의 색깔에 따라 다른 것이기는 했지만 다행히 지금 그가 상대하는 검은 늑대단은 철저하게 암살자로서의 인격만 가진 인간들은 아니었다.

프린스 알사드는 얼마든지 그런 집단을 만들어 낼 성정과 여력이 있는 사내였지만, 그것이 도리어 임무의 실패 확률을 높인다고 생각해서 보다 자유로운 기풍의 집단을 구성하고 그들이 자발적으로 그의 일을 돕게끔 했다.


그 내에서 생긴 동료간의 우애 따위는, 확실히 지금 상황에서 아주 약간의 동요는 준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전투력을 저하시키지는 않았다. 도리어 살아 남아야겠다는 의욕을 더욱 고취시키는 역할을 하지. 제냐는 끊임없이 그들의 약점을 파고들어 흔들려고 할 테였고, 그들은 보다 안정적으로 제냐를 잡아 죽이기 위해 애를 쓸 것이다.

단순히 달리고 있는 것 뿐이었지만 머리가 아파올 정도의 궁리를 하고 심리전을 걸어보려 하고 있었다. 잘 되고 있는 지는 모르겠다.


제냐는 일단,


파직,


하고 푸른 번갯불을 틔워 검에 씌웠다. 어둔 골목길에 불빛이 비쳤다. 푸르른 썬더 볼트의 기운이 비스트 슬레이어를 먹었고, 검은 망토를 입고 있는 세시앙 인 청년의 얼굴이 그 어둠 사이에서 드러났다.


맥컬리와 쟝, 그리고 매기는 제냐의 얼굴을 밝은 빛 속에서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청년의 표정은 덤덤하고, 약간의 미소마저 어려 있었다.

제정신인 인간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은 아니었다. 지금 막 자신을 습격한 암살자들로부터 도망쳤고, 또 칼을 꺼내들어 그들의 목숨을 갈취한 상황이었으니까.

보통은 흥분되거나, 두렵거나, 긴장되거나, 뭐 그런 류의 표정을 짓는 것이 정상적인 인간의 일이리라.

제냐는 다만 그런 감정들을 꺼내지 않으려고 하는 것 뿐이었다. 그 연기가 생각보다 아주 자연스러웠고 잘 먹힌다는 게 일반적인 경우와 조금 다르긴 하다.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그렇게 여기지 않으려 애를 쓰면서, 더블 인챈트를 건 비스트 슬레이어를 제냐는 휘둘렀다.


그가 순간적으로 거리를 좁혀 들어가며 맥컬리에게 다가섰다. 세 명은 나란히, 아니 조금 삼각형을 그리면서 서 있다. 맥컬리가 가장 앞에 나서고 있고, 그 뒤를 쟝과 메기가 지키고 있었다. 세 명 모두 제냐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냐는 삼각형의 가장 앞선 꼭짓점인 맥컬리에게 다가가 비스트 슬레이어를 후려 갈긴다.

순간적인 이동이나 폭발적인 속력은 이들이 늘 따라가기 힘들어하는 것이었다. NPC들 역시 그렇게 움직일 수는 있겠으나, MP의 소모가 많고 부담이 되기에 자주 그러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제냐는 이들보다 강력한 체력과 내구성을 갖고 있었고, MP의 양 역시 배 이상 많다. 그런 점에서 이런 식의 급진적인 움직임을 조금 더 자유롭게 자주 사용할 수 있는 내력이 나온다.


캉!


맥컬리는 또 한 번 칼날을 세워 제냐의 공격을 막았다. 썬더 인챈트를 두른 비스트 슬레이어였는데도, 단박에 그 검이 잘리지 않은 것은 상대가 고수에 근접한 기력술을 갖고 있는 인물이라는 뜻이었다.


레벨 4, 50정도. 중수 정도의 어설픈 기력술을 가지고 제냐의 공격 앞에 선다면 무기가 부서질 테였다. 단박에 부서지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내구성이 크게 닳고, 압도적인 공격력 앞에 뒤로 물러나기만 해야 할 테다.


맥컬리는 적어도 수 교환이 가능한 정도의 솜씨는 갖고 있었다. 미첼 역시 그러했고, 펠 역시 그러했다. 펠은 맥컬리보다 더 낫기도 했다. 다만 그들은 방심의 틈을 가졌고, 그 틈을 제냐가 찔렀을 뿐이다.

열 세 명이나 되는 인원을 그런 식의 방심만으로 기습해 죽이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한 명을 없앨 수록 그들의 심리적인 방어 기제는 더더욱 올라올 테니까. 대비하고 있는 인간의 허를 찌른다는 건 아무리 궁리를 해도 늘 쉽지 않은 일이다.


맥컬리는 손에 묵직한 감각을 느끼면서 뒤로 물러서야만 했다. 맞서려면 맞서지 못할 정도의 힘이나 파괴력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 구는 것이 그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맥컬리는 힘으로 싸우는 편은 아니었고, 그의 무기 역시 그러하다.


훅, 하고 그가 다른쪽 소매를 다시금 털어낸다. 맥컬리의 소매는 남들보다는 조금 더 품이 넓다. 그 속에 검을 집어넣어 놨기에 그렇다. 왼쪽 손을 털어내자 거기에서도 소검이 나왔고, 그가 묵색의 검 두 자루를 집어 들었다.

그 검날에 웅웅거리면서 기력이 실린다. 맥컬리의 몸 주변에도 나타난다.


대도시의 골목. 흔히 보기 어려운 수준의 초인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었다. 제냐 역시 어느새 그런 정도의 경지까지는 온 셈이다. 이전에는 작힘 백작의 기사들과 정면 승부를 피하려고 빌빌대야만 했는데. 지금이라면 당시의 호아킨이나 릿샤와 승부를 벌인다고 해도 질 것 같지는 않았다.

실제로 그들이 당시 그대로의 솜씨라면, 현재의 제냐에게는 높은 확률로 당해내지 못하리라. 둘을 동시에 상대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온갖 비장의 수단들을 다 꺼내어 그를 뒤흔든다면 또 모르긴 한다. 릿샤 애드윈은 천재의 일종이었으니까. 그녀의 스킬들은 위험하고, 파괴적이다.


비스트 슬레이어가 운다. 칼날이 약간씩 떨린다. MP가 과도하게 들어가면 안정성이 줄어들어 물체가 진동하거나 하는 반응을 나타내기도 한다. 약간의 진동 정도는, 기분 좋은 느낌이었다. 강하게 만들어진 비스트 슬레이어였으며 지금도 계속해서 강화를 거듭하고 있었다.

그 정도의 흔들림은 전투를 위한 기쁜 몸부림 정도로 여긴다. 파지직, 하고 번갯불이 다시 튄다. 스파크가 여기저기 튀어 골목의 바닥 따위를 때렸다. MP가 시퍼렇게 불탄다. 제냐의 눈이 깊게 가라앉는다.

입가에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미치광이의 모습이다. 칼을 들고 서로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웃음이라니 말이다.


제냐는 얼마 전 연무장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지금 눈 앞에 세 명이 있다. 모두 아마 뛰어난 실력의 기사들인 것 같았다.


맥컬리가 양 손에 검을 들고 기세를 끌어올리고 있는 것처럼, 뒤의 두 명도 제각기 무기를 집어 들었다. 쟝은 길다란 예검을 들었다. 어디에서 그것을 꺼냈는 지 알기 어려웠다. 등에 진 상태로 여태 움직였는 지 모르겠다.


길다란 롱소드처럼 보였는데, 일반적인 검보다 훨씬 얇은 세검이었다. 빠르고 강력하며, 얇으나 튼튼한 검이었다. 수준 높은 소재로 만들어진 묵빛의 세검을 쟝이 들고 앞을 겨눈다. 그 옆에 메기는 맥컬리처럼 두 자루의 검을 들었다. 맥컬리의 것이 소검의 영역, 단검보다 조금 더 길다면 메기가 든 것은 본격적인 검이었다. 비스트 슬레이어보다 약간 짧은 정도.

다들 저런 물건을 어디에 감추고 달렸는지, 여태껏 시가지를 달릴 때는 그리 눈에 띄지 않던 무장들이었다.


무기의 길이로 따지자면 맥컬리가 가장 쉬운 상대였다. 비스트 슬레이어의 간격 안쪽으로 파고들 수 있을까?

그러나 고요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제냐를 노려보며, 검력을 쌓고 있는 모습을 보면 확실히 맥컬리가 가장 어려운 적이었다. 셋 중에는 맥컬리의 기세가 제일 높다. 뒤의 둘 역시 제대로 된 경지를 쌓은 기사들이었으나, 맥컬리보다는 한 두 수 정도 아래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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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 138. 프린스 오브(5) 23.11.04 17 3 13쪽
138 137. 프린스 오브(4) 23.11.04 17 3 13쪽
137 136. 프린스 오브(3) 23.11.03 19 3 18쪽
136 135. 프린스 오브(2) 23.11.03 17 3 12쪽
135 134. 프린스 오브Prince of 23.11.03 18 3 17쪽
134 133. 유니콘 23.11.02 20 3 14쪽
133 132. 전리품들 23.11.02 19 3 14쪽
132 131. 수난 23.11.01 20 3 20쪽
131 130. 백마 23.11.01 17 2 19쪽
130 129. 헛웃음 23.11.01 18 3 11쪽
129 128. 저녁 비행 23.11.01 19 3 18쪽
128 127. 또 사냥 23.10.31 16 3 12쪽
127 126. 재접속 23.10.31 17 3 22쪽
126 125. 간밤의 습격, 그 끝 23.10.30 19 3 32쪽
125 124. 위검기僞劍氣 23.10.29 19 3 19쪽
» 123. 맥컬리 23.10.29 19 3 21쪽
123 122. 펠 파이든 23.10.29 21 3 21쪽
122 121. 골목길 23.10.29 17 3 23쪽
121 120. 미첼 카니브 23.10.28 21 3 17쪽
120 119. 튀어 23.10.28 23 3 24쪽
119 118. 오케이Okay 23.10.28 20 3 19쪽
118 117. 검기劍氣(2) 23.10.27 20 3 30쪽
117 116. 검기劍氣 23.10.25 24 3 28쪽
116 115. 파罷했음 23.10.25 23 3 34쪽
115 114. 돌아갑시다. 23.10.25 20 3 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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