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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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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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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3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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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8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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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119. 튀어

DUMMY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기에, 남자는 가장 먼저 창문의 나무를 잘랐던 단검을 집어들었다.

그들 모두 검들을 들고 있었다. 사람에 따라서 그 크기도 무게도 형태도 제각각이기는 하지만, 본격적으로 싸울 준비 정도는 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옷 이곳저곳에 감추어 둔 무기와 도구들이 수 종에서 십 수 종까지 있다.

어둠 속에 검은 모습을 보이는 흐릿한 암살용의 단검이 사내의 부무장이었고, 그의 옷자락 안쪽으로 적당한 길이의 한 손 검을 붕대로 묶어 넣어둔 게 있다.

천 옷은 품이 크지만 달릴 때 심하게 펄럭거리지는 않는다. 그럴만한 곳들이 끈으로 묶여 있는 탓이었다. 그 끈들은 모두 제압한 상대를 결박할 때 사용한다거나, 여러가지 상황에서 임기응변으로 써먹는 도구이기도 하다. 하나같이 강력한 철줄이었다. 거기에 소매 역시 질끈 묶여서 입구가 좁았다.


품은 크되 여기저기를 묶어 정비했고, 그 남는 공간에 적당한 도구나 무기들이 들어 있는 것이다. 사내는 몸의 체형에 맞게 절묘하게 휘어진 소검, 곡도 한 자루를 옆구리 쪽에 넣어두었고, 그에 맞추어 움직이는 법을 연습했기에 마치 없는 듯이 굴 수도 있었다.


지금은 그것까지 꺼내들 필요도 없다. 단검 한 자루면 족하다. 어둠 속에서 흑빛의 칼날 위로 반투명한 기운이 맺혀 어른거렸다. 검력이었다. 그들 모두 기사로, 상당한 실력의 기력술사들이다. 완벽하게 고수의 경지에 오른 자는 없었다. 그 정도는 부단장과 단장, 그리고 그들을 보통 실전에서 자주 총괄하는 부부단장 정도 뿐이었다.


이 자리에 있는 자들 중 가장 높은 자가 이십인장이었고, 그는 유저들의 기준에서 레벨 100을 확연히 넘는 정도가 아니다. 검기를 쓰는 기력술을 본격적으로 ‘고급 기력술’이라고 쳤을 때, 중급의 끝자락이라고 볼 수 있으리라.


칼날을 집어든 사내는 이십인장에 비해 한, 두 수 정도는 확실히 아래였다. 그래도 잠자고 있는 인간의 목깃에 칼날을 들이대 박는 것 정도는 숨쉬는 것보다 쉽다.


일렁거리는 기력술은 주변의 공기를 밀어낸다. 그 공기의 흐름이 대기의 변화로 누군가에게 느껴질 정도는 절대 아니었다.

그러나 다른 것의 변화로가 아니라, 간혹 기력술을 깊이 터득한 기사들은 근처에서 누가 MP로 기세를 끌어올리기만 해도 큰 소리로 외친듯한 알람을 받는 경우들이 있었다.

초상술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감지 계열의 스킬을 쓰는 자들은 예외로 두더라도, 그런 부류의 액티브 스킬이 없는 자들도 오래도록 MP를 수련한 인간들은 그렇게 된다.

가장 익숙한 물질이나 에너지로 MP를 느낀다. 그 기세는 사용자의 의지를 담은 것이었고, MP는 사용자의 의지에 따라서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고 강력한 힘이 되기도 한다.

살기를 느낀다, 라는 표현이 적합할 것이다.


콘란드 대륙의 기사들 중 수준 높은 자들은 그런 능력을 가졌다.


누워 있는 남자는 그래서 눈을 떴다.


그가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 이들은 정확히 파악하지는 못했다. 살아남은 자들의 증언이 있었으나, 그게 그 사내의 실력의 전부인 지도 알 수 없었고.

그래서 지금 이렇게 열 세 명이나 온 것이다. 거기에 간부급까지 하나가 끼어서 말이다.


남자, 검은 머리와 검은 눈. 어둠 속에서 눈을 뜬 청년은 목 근처까지 이불을 덮고 있다가, 번뜩이며 앞을 바라본다.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은 여관방의 모습이었다. 주변에 뭔가가 있나?


사내는 주변을 느꼈다. 보기도 전에 이미 말이다. 촉감에 달라붙는 대기의 질을 느낀다. 뛰어난 무사는 그런 법이었다. 오감 모두가 발달하게 되어 있었다. 생존 본능에 가깝고.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면, 위험을 놓치는 법이었고, 그건 곧 죽음을 의미한다.


사내의 경우에는,


죽음이 아니라 게임 오버였다.


그러나 그렇다 할 지라도 피해야 하는 게 옳다. 사내로서는 죽음을 느끼니까 말이다.

사내는 유저이되 유저가 아니었다. 정확히는 유저의 캐릭터를 움직이고 있으나, 로그인한 상태는 아니었다.

NPC들과 마찬가지인 입장이라고 보는 게 옳다. 그런 면에서, 제냐 킴은 평소보다도 조금 더 굳고 매서운 표정을 보이면서 조금 일찍 잠에서 깼다.


정신이 들기도 전에 그의 MP들이 움직이며 주변의 현황을 감지했다. 숨쉬듯이 기력 감지술이 켜졌고, 그 순간을 주변의 암살자들조차 느꼈다.


‘이런.’


이라고, 암살자들 중의 대장, 검은 늑대 기사단의 이십인장인 펠 파이든이 속으로 되뇌었다. 섣불리 소리를 내지 않는 건 이런 일을 반복하다보니 생긴 습관이었다. 생각보다 감이 좋다.

그들 중의 한 단원, 케인이 검력을 끌어올리며 다가서자마자 저렇게 눈을 뜨다니 말이다. 그리고 곧장 감지술을 사용하며 주변을 살피는 게 싸움에 아주 능숙해 보인다.


생각보다 쉽지 않을 수 있겠는데,


라고 펠이 여기자마자 침대에 누워 있던 사내는 퍽,


하고 일어섰다. 제냐 킴 말이다. 그가 누워 덮고 있던 이불을 발로 강하게 찼다. 생각보다 제법 무겁고 두께감이 있는 이불은, 제냐의 킥에 맞아 공기의 저항을 이기며 빠르게 날았다. 제냐는 침대에 누워 있다가 곧바로 이불을 방 안의 반대편으로 날린다.


그리고 곧바로 일어섰고, 기력술을 발동시켰다. MP가 돈다. 숨쉬듯이 자연스럽다. 여태껏 그토록 훈련을 했으니까 말이다.

푸른 빛이 그의 몸 근처에서 맴돌았다. 우우웅, 하는 소리가 작게 들리는 것도 같다.


“이런 씹.”


하고 욕을 마저 다 지껄이지도 못한 채, 케인이 자신의 단검을 들고 침대 쪽으로 달렸다. 다른 자들은 이불에 눈이 잠시 가렸다. 그들에게 그것이 중요한 방해는 아니었으나, 기력술사들 역시 눈을 쓰기는 한다.

애초에 방비가 되어 있다면 모를까, 방비되지 못한 순간에 눈가림을 당한다면 아주 잠깐의 틈 정도는 나는 것이 사실이다.


제냐는 그것을 노렸고, 바로 움직였다. 케인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팩, 하고 이불은 찼고 동시에 침대 위에 올라서 쭈그려 앉았다. 안주하는 자세는 아니었고, 그대로 대퇴부에 힘이 들어가며 날아갈 자세였다. 장비들은, 침대 근처에 널브러져 있다. 기본적인 천 옷만 입고 있다. 전투 시의 복장이라기엔 내복이나 다름 없는 옷들이다.

그나마 쓸만한 것이 있는 위치를 파악했고, 그대로 튀었다.


케인이 다가오는 것을 피하면서 뛴 참이다. 제냐의 시선에서는 오른쪽으로 강하게 박차며 날았다. 박차는 과정에서, 침대 바로 아래 나무바닥을 맨 발로 밟았다. 한 번의 틈이었고 그 사이에 침대 프레임, 그리고 머리맡 쪽에 걸려 있던 것들을 챙겼다.

침대 대충 늘어놓아 걸어둔 검은 망토와, 머리맡 쪽에 걸려 있던 전투용 조끼의 구멍에 손가락을 걸어 뺐다. 두 종류만 챙겨도 일단은 좋다. 신발이 없는 게 맘에 걸리지만 따질 처지는 아니었다.

그걸 따지다간 이름도 모를 검은색 복장의 암살자가 자신의 목덜미에 바람 구멍을 뚫어 놓을 기세였다.


바닥에 내려앉고, 제냐는 MP를 폭발시켰다. 주변에 강한 타격을 주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대퇴부를 비롯한 대근육들이 힘써 움직였다. 근육들의 움직임과 동시에 MP가 작용했다는 뜻이다. 그 운동은 그야말로 폭발적인 운동이었고, 제냐는 순식간에 수 미터를 마치 순간이동 하는 인간처럼 날았다.


던진 이불은 아직 상대의 눈 근처를 가리고 있었고, 개들 중 손속이 빠른 인간이 소검을 집어 들어 이불을 갈라버리려 할 때였다. 제냐는 창문 쪽으로 뛴다. 열려 있는 창가였다. 침대에서 일어나면 보이는 방의 맞은 편, 마치 자고 있던 자신을 구경하던 것처럼 서 있던 인간들이다. 제냐는 가장 빠르게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골랐다.


뭐,


제법 자신도 있었다.


이 정도에 죽을 것 같지는 않았고.


제냐 킴을 움직이고 있는 건 시스템 AI가 난수를 돌려 만들어 낸 가상 인격이었다.


캐릭터가 자고 있을 때는 바깥으로 빠진다. 그러나, 비련의 ‘시나리오’라는 이름답게 중요한 퀘스트 시나리오 씬에 걸려 있는 상황이라면 가상의 캐릭터가 로그아웃한 자리에서 자는 형태로 시나리오의 구멍을 메꾼다.


보통의 일이라면 여관 방에 들어와 로그 아웃을 하고, 그 자리에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굳이 필요 없는 부분을 구현할 필요가 없으니까 말이다. 데이터 저장 공간의 낭비가 될 테다.

그리고 여관 주인은 로그인한 제냐를 보면서, 간밤에 방에서 잘 잠을 잤구나, 하고 인식을 할 뿐이며 말이다.


지금은 제냐가 스스로 수락해서 벌어진 퀘스트 상황의 진행 중이었다.

이전에, 어둠숲에서 맞닥뜨린 암살자들과의 일화 역시 그런 셈이었다. 제냐는 그게 퀘스트의 과정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별다른 보상이 나온다거나, 텍스트 메세지가 나와서 그에게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나중에 퀘스트를 모두 깨고 난 다음에, 퀘스트 로그를 확인할 수는 있을 테다. 그 때 그래서 그랬었구나, 하고 플레이어가 이해할 수 있도록 말이다.


모든 플레이어가 하나씩 자기만의 소설책을 써나가고 있다고 해도 좋았다. 비련의 시나리오는 그만큼 방대한 게임이었다.

어쨌든, 평균적으로 제냐가 기복 없이 발휘할 수 있는 솜씨 정도가 현재 AI 제냐 킴이 방휘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과도하게 운이 좋은 상황이라거나, 혹은 제냐 킴 스스로가 신경 반응 쪽의 피지컬이 좋아서 게임 내에서 어마어마한 컨트롤을 보인다거나, 하는 상황들은 제외한다.

그저 제냐 킴이라는 플레이어 캐릭터가 갖고 있는 스펙 상으로 보여줄 수 있는 퍼포먼스를 컴퓨터가 재현할 뿐이었고, 그에 맞추어 씬이 흘러갈 뿐이다.

여기서 만약 죽는다면, 그대로 게임 오버였다. 제냐는 아마 무슨 일이 생겼는지 제대로 인식도 하지 못한 채 다음 로그인 순간에 퀘스트 씬의 사건으로 캐릭터가 게임 오버 당했습니다, 라는 알림 메세지만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현재 AI 제냐 킴의 솜씨는 일반적인 해당 스펙의 플레이어들 평균보다 조금 더 좋다. 그건 제냐가 이미 게임 내에서 벌였던 업적이나, 전투 기록등을 토대로 약간씩 조정되는 탓이었다.

만약 아무런 게임 내 업적이나 사건에 대한 기록이 없는 초심자라면, 정말 수치적 전투력에 근거한 평균 싸움 실력이 나온다.

제냐는 그동안 자기 레벨보다 높은 난적들을 상대로 적은 HP 소모로 잘 싸웠고, 게임 오버를 당하지도 않고 모든 퀘스트들을 클리어했다. 그런 점은 컴퓨터의 데이터 베이스에 쌓여서 이렇게 도움이 된다.


제냐 킴은 긴장하지 않았다.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뭐, 아마도.

잘 안되서 죽는다면 그것도 어쩔 수 없겠지.

AI의 프로그램은 그런 식의 마인드를 학습해 재생한다. 영혼은 없으되, 마치 가상 인격을 사람이 메쏘드 연기하듯 프로그램 역시 상황에 맞추어 플레이 해보는 것이다.


만물박사는 NPC의 행태만 시뮬레이트 하지 않는다. 그 행태의 깊숙한 내면과 심리까지도 프로그래밍 해서 시뮬레이트 하는 것이다. 거기서 질적으로 다른 AI의 정밀함이 나오게 되며, 유저들이 게임을 즐기다가도 흠칫 놀라게 되는 부분들이다.


방에는 창문이 한 개 있었다. 그대로 나가면 길가, 대로변이 나타난다. 제냐의 기억에 창문을 나서면 간이 지붕 따위가 있어서 밟을 수 있는 자리가 있었다.


기력 감지술은 켜진 상태였고, 창문 바깥에 몇 명인가 서 있는 게 느껴졌다. 네 명이다.

기력 감지술은 상대의 위치와 기세를 알려준다. 정확히 말하자면 기세에 관해서는 정보가 없으나, 사용자의 역량에 따라 알기도 하는 것이다.

완벽한 비쥬얼 데이터를 기력 감지술이 술사에게 전달한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반경 어느 거리 내부의 움직임들을 세세하게 알 수 있는 것이고, 그 내부에서 움직이는 상대의 자세나 행동거지를 보곤 실력을 가늠하는 것이다.


무술에 능해지다보면 그런 것도 가능하다. 제냐 역시 실제로는 별 소양이 없었지만, 적어도 게임 내에서는 무술의 고수같은 짓거리를 할 수 있었다. AI로 움직이고 있는 현재의 제냐 역시 마찬가지였고.


거기에 고유의 MP 반응들이 있었다. 평시에 기력술사의 내부에 있는 것까지 파악하기는 아주 힘들었다. 그건 살갗에서 퍼지는 미세한 냄새를 먼 거리에서 잡아내는 것만치 어려운 일이었고, 특질을 타고난 인간이나 특수한 스킬을 써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향수를 뿌리듯이, 어떤 냄새를 일부러 풍기듯이 현재는 전투의 상황이며 기력술사인 상대들 모두가 MP를 움직이고 있었다.

몸 바깥으로까지 새어 나올 정도의 기력술을 사용 중이었으므로, 그것으로 약간의 가늠이 또 가능했다.

상대들의 수준은 아득하게 높은 정도가 아니었다. 도리어 잘하면 제냐가 상대할 수 있을 정도. 높은 확률로 그보다 낮은 이들도 존재할 터였고.


고로, 제냐가 순식간에 대각선으로 빠지며 창문틀을 넘어 바깥으로 향한다.


촤악,


하고 소검 하나가 튀어나와 이불을 반으로 갈랐다. 그 뒤에 이어지는 검격들이 이불을 갈기갈기 찢어버렸고, 그들 역시 기력 감지술을 사용했다.

외부에 있던 자들도, 내부의 기색이 이상하자 감지술을 켜며 반응한다.

몸에 은은하게 돌리고 있던 MP를 격발시키며 이상 사태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상상하지 못했던 상황은 아니었지만, 최악의 상황으로 가장 낮은 확률이라 여겼던 사태였다.


검은 늑대단이 들어가 있는 방 안에서 빠져 나온다고?


다고,


머릿속으로 몇 마디 문장을 다 완성시키기도 전에 제냐가 창틀에서 몸을 들이 내밀며 빠져나온다. 바깥에 서 있던 자들 중, 검은 늑대단의 멤버 중 하나는 눈을 크게 뜨며 혼자 생각을 하다가, 창문 틈으로 나오는 인형이 그들 동료의 것이 아님을 깨닫고 놀랐다.

놀라며 눈을 크게 뜬 자는 여자였다. 기사단원 중 여자가 없는 건 아니지만 적었다. 이번에 야습을 감행한 멤버들 중 여인은 그녀가 유일하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허리춤에 달린 소검을 뽑아 들며 그 앞을 막아서려고 했다.

그리고 그녀가 가장 왼쪽에 있었고, 차례로 오른쪽에 있는 사내들이 움직였다.


창문에서는 조금 거리를 벌린 채 떨어져 있었다. 상대가 설마 이리로 나오리라고는 짐작도 못했다. 저 방에서 살아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도 예상을 못했지만 말이다.


“잡,”


안쪽에서 대장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잡아, 라는 말을 완성시키기 전에 제냐는 창문틀을 넘어 바깥의 발코니 바닥을 밟았다. 말이 발코니이고, 사실은 그냥 아랫층에 무언가 떨어지는 걸 막기 위해서 만들어둔 외부 지붕이었다. 물건이나 가끔 두거나 빨래나 널지, 정식으로 무언가를 할만한 공간은 아니다. 마음 놓고 딛고 있기에는 조금 부실하기마저 하다.


제냐는 맨발바닥으로 그 지붕의 감촉을 느꼈다. 눈 앞에 있는 네 명이 순식간에 움직이는 걸 깨달았다. 반응이 아주 빠르다. 저 내부에서도 이미 이불을 찢어 발기고 이쪽으로 돌아서려 하고 있었다.

제냐는 빠르다. 그들보다 말이다. 생각보다 수월하게 빈틈을 노려 나올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는 이들의 수준이 생각보다 조금 낮다는 쪽으로 미리 한 가늠을 조정한다.

혹은 심리의 빈틈을 정말로 잘 찌른 것일 수도 있다. 그가 이토록 확실하게 깨어서 바로 반응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아마 어느 암살자도 잘 예상을 못했을 테다.


그러나 제냐는 육감과 관련된 여러 스킬들을 갖고 있었다. 그게 일반적으로 MP를 느끼는 수련자보다 더 명확하게 느끼고 바로 움직일 수 있었던 이유였다. AI 제냐로서는, 마치 무언가가 그의 목덜미를 찌르듯한 분명한 촉감이 느껴졌다.


예전에 로멜리아 가 퀘스트를 수행하고 있을 때 그 혼자 느꼈던 그 불안한 예지감과도 비슷했다. 그 외에도 몇 가지 감각 계열 패시브 스킬들이 연계 작용을 했다.


차가운 외부 지붕의 바닥을 밟으면서, 제냐는 가장 앞에 있는 놈을 향해 무작정 달려들었다. 다시 한 번 MP를 격발시킨다.


이번의 움직임에는 그 혼자 움직일 수 없었다. 이전은 운이 좋았고 상대가 방심을 했다. 제냐가 그들의 평균적인 속도보다 훨씬 빠르다는 것 역시 주효했고. 거기에 MP를 폭발적으로 사용하는 방식이나, 전체적인 MP량도 일반적인 동레벨 대의 NPC들보다 높은 것 같았다. 저번에 만났던 어둠숲의 암살자들 역시 그런 면에서 제냐에게 뒤졌던 참이다.


조금 더 침착하게 진을 짜고 제냐를 몰아 넣어 긴 시간 사냥을 하듯 잡았다면 제냐 역시 곤욕을 치렀을 테다. 혹은 정말로 거기서 게임 오버를 당했다거나.

그러나 제냐의 실력을 제대로 가늠하지 않은 채 덤볐고, 한 명 한 명 틈이 날 때마다 폭발적인 MP사용으로 순간적인 기세를 꺾어 잡아낼 수 있었다.


제냐는 상대가 방비를 하던 하지 않던, 상관않고 그대로 MP를 자신의 몸체 전면부에 때려 박으며 질주했다. 고작 한 두 걸음 거리였으나 속도를 붙이기에는 충분했다. 한 걸음만 있어도 충분하다. 각력에 MP가 쓰였고, 팔꿈치를 앞으로 내밀면서 안면과 급소를 보호한다. 그러고 상대의 명치 부근을 향해서 다이빙을 하면,


“읏.”


“아!”


안쪽에서는 대장의 나지막한 음성이 마저 잡아, 라고 완성되었다. 내부에 있던 작자들도 자신들이 멍청하게 굴었다는 걸 깨달았고, 곧바로 창문 바깥으로 튀어나온다. 방 안에 서 있던 자들 중 창문에 가장 가까이 붙어 있던 인간들부터 차례로 나온다. 그들 중 첫째 인원이 창틀을 밟았을 때,


제냐는 앞에 있는 약간 퉁퉁한 체격의 암살자의 근처에 다가섰다. 암살자는 그 순간적인 일에 자기도 모르게 팔을 들어 막으며, 힘을 주고 MP를 전면에 집중시켰다. 그의 몸이 굳었다. 그게 제냐가 바라는 일이었고.


제냐는 정면으로 뛰어들던 한 걸음에서, 곧바로 옆으로 뛰어 대각선 빈틈으로 빠져나갔다.


쉽지는 않았다. 옆에 있던 검은 복색의 암살자, 체격이 작고 마른 자가 칼을 꺼내드는 게 보였으니까. 본능적인 수준의 반사로 제냐가 달려드는 빈틈을 향해서 칼날을 휘두르는 것 같았다. 제냐는 그 빈틈에 몸을 구겨 넣으면서, 손에 기력을 집중했다.

파지직, 하고 스파크마저 튀었다. 번개의 구체가 손 위에 생겨났다. 더블 인챈트, 라고 부르는 기술이었다. 기력술의 위에 초상 스킬의 인챈트 능력을 덧씌워서 절삭력과 파괴력을 배가시키는 일이다. 지금은 당장 검을 꺼낼 수 없었으니, 손에 쓴다.


제냐의 손에는 그가 침대 근처에 널어두었던 전투용의 조끼와 검은 망토가 들려 있었다. 검은 망토는 단순한 천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어느 정도 방검 효과마저 있는 아이템이었다. 단테스 무기점에서 얻은 상등품이다. 서비스로 받은 것이기는 해도 요긴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검은 망토를 들고 있는 오른손에 번개의 기운이 몰려들어 그 줄기를 뱉어냈고, 검은 천으로 싸여 있음에도 그 불빛이 새어나왔다. 제냐는 그 오른손을 앞으로 뻗어내면서 빈틈을 향해 몸을 갖다 박았고,


멍청하게 팔꿈치를 내세우며 제냐를 막아보려던 사내의 옆을 유유히 지나간다.

이런 정도의 방향 선회나 순간적인 발기술이 가능한 이유는 ‘보법’의 효과였다. 보법 류의 스킬을 제대로 익히고 사용하는 자가 적었다. 그 묘용은 아크로바틱한 움직임을 많이 해내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더 드러나게 된다. 그럴수록 스킬의 레벨 역시 올라가게 마련이었고.

일정 수준 이상의 고수들이 전투직 플레이어로서 제 역할을 해내려면 보법 스킬 역시 필수였다. 현대에 살고 있는 일반인이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운 움직임들을 재현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게 그런 무술 류의 기본 스킬들이었다.

기본 스킬들에 대한 이해가 쌓이고 사용도가 높아지면, 나중에 되서 무시무시한 차이로 나타난다. 이 게임은 평범한 현대의 민간인을 완벽한 무술의 대종사로 만들어줄 수 있는 시뮬레이터이기도 했다.


지금의 짧은 움직임에도 제냐는 큰 생각이 없지만, 세세한 무게 중심의 이동이나 자세의 디테일 따위에서 그런 스킬들이 움직임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AI 제냐로서는 더욱이, 자신이 직접 익히고 있는 능력이라고 여기고 행동하고 있기에 위화감이나 의문점이 적은 점이다.


캉,


하는 소리가 났다.


제냐는 아직 칼을 꺼내들지 않았지만, 기력술로 단단하게 보호받는 그의 손의 강도가 비현실적으로 높아진 탓이다. 일반적인 기력술은 아니었고, 그 또한 순간적으로 살기 위해 평소에 사용하는 것보다 한참 많은 양의 MP를 투입해서, 그것이 마치 단단한 고체처럼 역장을 형성해버린 탓이었다.

어둔 망토 속에서 푸른 번개빛을 토해내던 오른손은 날아드는 소검의 날을 튕겨냈고, 철과 철이 부딪히는 듯한 소음을 만들어냈다.


제냐는 HP의 별다른 소모 없이 그 사이를 빠져 나올 수 있는 것에 무한한 감사를 드리면서, 낮게 나는 제비보다 빠르게 튀어 거리로 쏘아진 화살처럼 내려 앉았다.


쿵!


하는 소리가 무겁게 거리를 울린다.


원시적인 시멘트처럼 보이는 것으로 포장된 도로였다. 그 바닥을 쿵, 하고 찍어대면서 내려앉았고, 제냐는 여전히 기력 감지술이 켜진 상태였다.

거리에 앉자마자 곧바로 주변의 상황이 파악이 되었다. 위에 있는 자들을 신경쓰느라 생각치 못했다. 제냐가 전투 시에 사용하고 있는 감지술은 평면적인 위치의 반경 거리를 가장 잘 잡아낸다. 거기에 조금 더 신경을 쓰면 허공에서 날아드는 것들까지를 잡아내고.

감지술은 제냐에게 정보를 분명 전달해주지만, 사람이 신경쓸 수 있는 것이 한계가 있기에 일어나는 일이다. 조금 더 전투의 경험이 쌓이고 요령이 생기면, 혹은 감지술의 단계가 높아지면 해결되는 부분이기는 했다.


감지술을 달인의 경지까지 익힌 자들은 눈을 뜨지도 않고 감은 채로 싸운다. 그런 유저들이 바라보는 광경은, 눈으로 보이는 시야를 캐릭터 시각 화면에서 아예 제거해버리고 조감도로 주변을 바라보고 움직이며 싸운다. 거리감이 이상해질 것 같은 환경이지만, 스킬을 연마하고 특이한 플레이 하기를 좋아하는 자들은 그렇게도 플레이를 했다.


어쨌든 감지술의 거리 한계도 있고, 습관적으로 감지하는 방향성의 문제도 있었기에 거리에 내려앉은 다음에야 건물 근처에 있는 나머지 세 인간을 확실히 깨달았다.

제냐는, 포탄을 아래로 쏘아낸 것처럼 강하게 착지를 하고서 곧바로 다시 더 뛰어야 함을 깨달았다.


위에서 소란이 일어났다는 걸 깨닫고 움직여야 하나, 반응이 좀 늦었던 세 명이다. 그들 역시 제냐를 죽이기 위해 왔던 검은 늑대단의 일원들이고, 태양의 그늘 건물 현관 근처에 서 있었다.

위에서 쿵, 하고 내려 꽂히는 인형이 보이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고, 순간적인 판단으로 그게 동료가 아닌 암살 대상임을 깨닫는다.

그들이 칼을 뽑아들며 달려들기 전에 제냐가 이미 적을 확인했다.


제냐 킴은 다시금 옆으로 뛰었다.


양 옆으로 긴 가도가 이어져 있었다. 왼쪽으로, 자기도 모르게 방향을 틀면서 강하게 대시하여 뛰었다. 포장된 시멘트 바닥에 쿵, 하는 소리와 균열을 남기며 순식간에 십 수 미터 이상을 날듯이 이동한다.


그리고 나서 다음 순간 땅바닥에 닿았을 때는, 보법이니 뭐니 하는 모든 이동 계열의 스킬을 발휘하며 MP를 격발시킨다. 온갖 힘을 다해서 멀리 달아나는 것이다.


당장 저들과 싸워봤자 아무래도 승산이 없었다. 복잡한 지형을 이용해서 숨고, 피하고, 한 놈씩 상대하는 게 그나마 낫겠지. 아니면 이곳은 왕도 사르삿이니 저들을 막아줄 무언가 무력 집단이 있을 것이다.

치안대 건물이 어디 있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일단 제냐는 뛰었고,


그런 그의 뒤를 1층에 있는 자들이 쫓는다.


우웅,


하는 역장이 만들어지는 소리와 함께 발코니와 제냐의 방에 있던 작자들 중 몇이 한꺼번에 뛰어 내려 앉는다.


몇 명은 그렇게 가도를 달렸고, 다시 몇 명 즈음은 다시 건물들의 지붕을 타며 뛰었다. 제냐를 잡기 위해서였다.


제냐는 인벤토리에 넣어 두었던 칼들을 꺼내기 위해, 순식간에 백 여 미터 정도 멀어진 뒤에 입으로 중얼거리며 창을 띄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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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142. 고블린 페이즈Phase 2 23.11.06 19 3 14쪽
142 141. 프린스 오브(8) 23.11.05 21 3 12쪽
141 140. 프린스 오브(7) 23.11.05 21 3 13쪽
140 139. 프린스 오브(6) 23.11.04 20 3 14쪽
139 138. 프린스 오브(5) 23.11.04 17 3 13쪽
138 137. 프린스 오브(4) 23.11.04 17 3 13쪽
137 136. 프린스 오브(3) 23.11.03 19 3 18쪽
136 135. 프린스 오브(2) 23.11.03 17 3 12쪽
135 134. 프린스 오브Prince of 23.11.03 18 3 17쪽
134 133. 유니콘 23.11.02 20 3 14쪽
133 132. 전리품들 23.11.02 19 3 14쪽
132 131. 수난 23.11.01 20 3 20쪽
131 130. 백마 23.11.01 17 2 19쪽
130 129. 헛웃음 23.11.01 18 3 11쪽
129 128. 저녁 비행 23.11.01 19 3 18쪽
128 127. 또 사냥 23.10.31 16 3 12쪽
127 126. 재접속 23.10.31 17 3 22쪽
126 125. 간밤의 습격, 그 끝 23.10.30 19 3 32쪽
125 124. 위검기僞劍氣 23.10.29 19 3 19쪽
124 123. 맥컬리 23.10.29 18 3 21쪽
123 122. 펠 파이든 23.10.29 21 3 21쪽
122 121. 골목길 23.10.29 17 3 23쪽
121 120. 미첼 카니브 23.10.28 21 3 17쪽
» 119. 튀어 23.10.28 23 3 24쪽
119 118. 오케이Okay 23.10.28 20 3 19쪽
118 117. 검기劍氣(2) 23.10.27 20 3 30쪽
117 116. 검기劍氣 23.10.25 24 3 28쪽
116 115. 파罷했음 23.10.25 22 3 34쪽
115 114. 돌아갑시다. 23.10.25 20 3 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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