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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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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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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9 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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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쪽

121. 골목길

DUMMY

*


펠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가장 먼저 미첼의 시신을 본 자였다.


플레이어들은 NPC의 시신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아도 되지만, NPC들은 다르다. 그들은 적나라하게 펼쳐진 그로테스크함을 마주한다.

물론 그것으로 인해 상처를 받을 인격은 없었다. 그렇게 시뮬레이트 된 가상의 인격이 표현될 뿐이었다.


만물박사가 표현하는 펠의 인격상 감정은, 분노였다.


검은 늑대단은 우애가 깊다. 우호적이고, 단원들 간의 끈끈함이 깊었다. 붉은 늑대나 푸른 늑대에 비해서 말이다.

알사드 공작은 속모를 자였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계획을 혼자서 꾸미고 있는 인간이었고, 산슈카에서 가히 일인지하 만인지상과 비슷한 위치에 있으면서 그 자리에 만족하지 않는 인간이다.

그런 위치에 있는 자가 자신의 일을 하지 아니하고 다른 어떤 꿍꿍이를 품은 채 계획을 진행시키는 게, 국가적으로도 위험한 일일 수 있었다.


그러나 검은 늑대들은 그의 아래에서 길러진 자들이었으며, 임무를 수행하는데 최선을 다한다. 기사는 자신이 몸 둘 곳을 찾아 떠돌다가 한 곳에 정착하면 그곳에 충성을 바친다. 아무래도, 주군을 지키다 목숨이 다하는 것이 기사의 명예라는 것이었다.


프린스 알사드의 속모를 공작 속에서, 갖가지 위험한 임무를 맡아 검은 늑대단은 진창을 구른다. 붉은색이나 푸른색 역시 고생을 하고 같은 기사로서 위험한 길을 걷지만, 검은 늑대들은 그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할 수 없다는 점이 조금 달랐다.

본질적으로 또 태생적으로 조금 다른 길을 걷는 것이다.


대놓고 대공 가문의 원조를 받을 수도 없었다. 다른 늑대단들이 임무 중에 위험에 처한다면 아마 대대적인 지원군이 움직여 충분한 시간을 버틴다는 가정 하에 살아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드러내놓고 움직이는 자들이었으니.

그러나 검은 늑대들이 맡는 임무는 대개가 암살이었다. 거기에 합법적으로 죽음을 선고할만한 인물이 아닌 경우가 절대 다수였다. 보통은 프린스 알사드의 입맛에 맞지 않는 자들을 죽여왔다.

그런 자들 중에는 실력이 뛰어난 작자도 있고, 세력을 가진 자들도 있다.


그런 이들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암살한다는 게 참으로 어렵다. 최악의 상황에 그들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그들의 본거지를 들켜서는 안된다.

알사드 대공가로부터 왔다는 사실 자체가 없던 일이 되어야 했고, 비밀이었다.


검은 늑대단은 일이 잘못되었을 때 현장에서 죽을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다. 붉은 늑대나 푸른 늑대에 비해서 말이다. 그들은 때가 아니다 싶으면 뒤로 물러섰다가 재정비를 하고 도약을 해도 된다. 검은 늑대단은 뒤가 없었다. 본질적으로 산슈카의 국법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방종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 그들이었기에.

숨을 곳 없는 낭떠러지가 검은 늑대단원들이 서 있는 곳이었다.


모두가 산슈카 태생의 단원들이었고, 혹은 이방인 출신이어도 한미한 태생을 갖고 있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알사드 공작은 검은 늑대단을 위해서 특별히 약점이 많은 자들을 골랐다. 자신이 처지를 바꾸어줄 수 있는 자, 은혜를 끼칠 수 있는 자들을 말이다. 그는 그렇게 빚을 지우거나 누군가에게 새로운 인생을 주며, 검은 늑대로 키워왔다.


이 단원들 중에 알사드 공작의 도움을 받지 않은 자가 거의 없으리라. 거기에 하고 있는 일만큼 적절한 대우나 봉급 역시 챙겨주는 편이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산슈카 굴지의 기사단이었고, 알사드 공작가는 기사가 갈 수 있는 직업의 장소 중 최고의 자리 중 한 곳이었다.


목숨을 거는 일도 각오를 한 것이었지만, 이렇게 동료가 쉽게 목숨을 잃을 때는 아무래도 격분을 느끼게 된다.

펠 파이든은 복면 속의 입으로 크게 숨을 들이셨다. 곧바로 달린다. 한 틈을 내어주었다. 그가 상대가 달아났으리라 생각되는 담벼락을 넘어 추적을 시작한다. 그는 추적술의 대가이기도 했다. 검은 늑대단에서 간부직을 맡으려면 반드시 필요한 능력이다.


암중 기동, 은밀 기동, 그리고 추적과 수색 등. 암살과 암습에 필요한 여러가지 능력들을 갖고 있어야만 했다. 단원들보다 한 두 수 정도 높은 수준의 기력술이나 전투 능력 또한 당연히 있으면 좋은 것이고.


그가 움직이는 방향대로, 곧이어 여러 명의 늑대단원들이 도착하여 미첼의 시신을 확인한다.


지금 암살대의 대장을 맡고 있는 펠이 지시를 내리며 따라 들어왔으므로, 뒤이어 오는 자들도 망설이지 않고 펠의 뒤를 따라 연달아 달린다. 그들 간의 신호 교류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갖고 있는 아티팩트 중 한 종은 특수한 방식의 MP를 내는 것이 있었다. 다 년 간의 훈련으로 제법 먼 거리에서도 소량의 MP가 발산하는 것을 캐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갖고 있는 아티팩트의 MP 파장에 특화된 감각이라고 할 수 있다.

어둠 속에서 다소 신호가 어그러져 서로 길을 잃는다고 하더라도, 근방에 있다면 찾을 확률이 올라가고 순간 놓친다고 해도 쫓아갈 수 있게끔 되어 있다. 그렇게 마치 개미들처럼 일사분란하게 검은 늑대들이 뛰었다.


골목에 들어선 가장 마지막 두 인물은, 인상을 찡그리며 미첼의 시신을 치웠다. 그들은 흔적을 남기지 말아야 했다. 당장 시신을 수습할 방법이 완벽하지는 않았다. 그저 미첼의 겉옷을 풀어, 그 검은 천으로 흩어진 시체를 담아 옷에 있는 끈으로 묶어 밀봉을 한다.


주변에 있는 피는 어쩔 수 없다. 특수 용액 따위를 조금 가지고 다니니 그것을 뿌려 지워보지만 대량이라면 완벽히 지우기도 어렵다. 어느 정도 특수한 상황에 요긴하게 쓰라고 소량을 가지고 다닐 뿐이었다.

연금술사들이 만들어낸 다양한 도구와 용액들은 그들의 임무에 도움을 주지만 소량이고 또 비싸다. 알사드 공작이라고 해서 일반 단원들 모두에게 무한정 지급해줄 수 있는 물건들은 또 아니었다.


임무의 때마다 자신들이 알아서 적정량을 챙긴다.


미첼의 시신을 꽁꽁 싸맨 단원들은 골목의 어둔 구석,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잡기들을 움직여 빈 공간을 만들어내었고 거기에 일단 미첼을 두었다.

날이 밝거나, 혹은 암살 임무가 온전하게 끝낸 뒤에 돌아와 수습을 할 요량이었다.


검은 늑대는 흔적을 남기지 말아야 했다. 아마 어느 정도 남는다고 하더라도 산슈카 국내라면 프린스 알사드의 세력이 알아서 할 수 있었다. 수도에서 약간의 소란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들이 이 밤 중에 임무를 성공하지 못해 돌아가는 이가 없다면, 아마 공작령에서 손을 쓸 것이다. 그들의 세력 중 일부는 당연히도 수도에 있었다. 대공의 업무를 처리하는 그의 부하 세력들이었다.


그들이 사람을 보내고, 이 한밤 중의 소란들을 다 지울 테였다.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그들 스스로 모든 일의 마무리를 지을 수 있게끔 해야 하는 게 지금 검은 늑대단원들의 사정이었다.


미첼의 시신을 적당히 수습한 자들도, 골목의 담벼락을 넘어 동료들을 쫓았다. 그 너머에 미첼을 단칼에 죽인 기가 막힌 솜씨의 용병이 있었다.

열 명이 넘는 기사단원이 동시에 합공을 한다면 아마 당해내지 못하리라. 그것이 가능하다고 하면, 이미 산슈카 국내에서 손을 쓸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런 작자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군대가 필요했고, 또 실력을 직위로 바꾸어보면 왕실에서 대접받는 왕립 기사단의 최고 간부급 이상의 솜씨임을 뜻했다.

그런 거물을 이런 식의 암살이라는 속편한 방법으로 지워버릴 수 없었다. 오래도록 계획을 꾸미고 흉계 속에 상대를 가두어, 독을 쓰던 심리적인 함정을 파던 해야 했지.


알사드 공작마저 마냥 우습게 볼 수 있는 수준의 상대가 아니게 되는 지점이었다.


산슈카 국내에 그런 수준의 용병이나 모험가가 있다고 들어본 바는 없었다. 사르삿 내에도 말이다. 늑대단원들은 그들의 상식이 맞기를 바라면서 달린다.


*


“훅.”


제냐는 검에 묻었던 흰 입자들을 어느새 털어냈다.


이런 모자이크 처리에 있어서도, 그는 그다지 위화감을 느끼지 않는다. 일반적인 NPC가 아니라, 플레이어의 퀘스트 진행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특수 NPC임으로 다른 자들과 여러모로 다른 식의 조정이 들어간 탓이다.


그로테스크한 광경이 플레이어에게 보이지 않는 건 비련의 시나리오를 플레이하는 유저들이라면 상식처럼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제냐를 대신하는 AI 제냐에게 역시 마찬가지였다. 추후에 퀘스트 로그를 읽을 수 있는 때가 오게 된다. 퀘스트를 만약 제냐가 끝까지 무사히 마친다면 말이다. 그 때 퀘스트 로그는 단순히 글로 볼 수만 있는 게 아니라 정확히 어떻게 시뮬레이트 되었는지 영상으로 볼 수 있게끔 나온다.


그 때 플레이어가 보는 광경 역시 지나치게 잔인하거나 선정적인 장면들에 대해 모자이크가 되어 있는 영상이었고, 그게 지금 AI 제냐가 시야로 바라보는 광경과 일치했다.


플레이어는 유저의 현실적 성격에 따라 대담할 수도, 혹은 비위갸 악하고 심약할 수도 있었다. 그런 개인 차에 상관 없이 온전한 전투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게임 상의 도움이나 연출이 필요할 때가 있다.

제냐, 그 너머에 있는 김서원의 성격을 만물박사가 완전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최대한 그의 평균적 전투력을 표현하기 위해서 모자이크라는 게임성을 부과하는 것이다.


제냐의 성품을 모방해서 만들어낸 AI가, 피 때문에 놀라 자빠진다면 퀘스트 씬의 진행에 있어서 지나치게 박한 조정이라고 개발진이 판단했던 탓이다.

그런 식으로 배려를 해주어도, 죽을 자들은 어디에서든 죽고, 곧 게임 오버를 당한다.

녹록치 않은 게임이었고, 제냐가 이토록 별 계획도 없이 다니면서도 아직 죽지 않은 것이 사실 신기할 정도의 일이었다.


보통은 들어서기 전부터 갖가지 전략을 세우고 이미 공략된 여러 육성법들을 조합해서 최대의 효과를 보려 유저들이 노력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렇게 온갖 변수를 통제하여 플레이하려고 해도, 이 게임은 지나치게 방대한 요소들을 담고 있기에 완벽하게 통제될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어느 길목에서 무언가가 툭 튀어나와 발치에 걸리게 되고, 그렇게 넘어져서 급소가 깨져 죽을 지 모르는 상황인 것이다.

제냐의 플레이 기록을 본다면, ‘운이 좋았다’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으리라.


타다다다,


하고 시멘트 바닥을 밟았다.


현대의 포장도로처럼 깔끔한 느낌은 아니었다. 표면도 조금 더 거칠고, 자갈처럼 보이는 알들이 군데군데 박혀 있었다. 걷는 데 방해가 되는 느낌 까지는 아니다. 이 위를 지나는 바퀴들도 모두 제대로 잘 굴러갔고 말이다.


제냐는 혼신의 힘을 다해 뛰고 있었다.

다행히 그런 제냐를 뒤쫓는 이들이 잘 잡지 못하고 있다.


기력 감지술을 켜고 있다.


반경 십 수 미터 정도에는 별다른 일이 없었다. 감지술을 굳이 켜지 않더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이기는 하다. 제냐는 감지술의 범위를 멀리로 보냈다. 조감도鳥瞰圖로 제냐가 달리는 모습을 위에서 지켜보는데, 그가 지나가고 있는 신체 주변 외에는 검은 화면이라고 생각을 하자. 그 때 원형의 밝은 시야 범위가 제냐의 몸체로부터 멀어져서 움직인다. 반경 십 수 미터 정도의 감지 범위였고, 그것이 제냐의 몸과는 상관 없이 움직이며 반경 수백 미터 범위 내부를 수색할 수 있었다.


수색이 가능한 좁은 눈을 가지게 된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제냐는 시야를 멀리 뒤로 보냈다. 반경 십 수 미터이기에 한 번에 모든 장소를 훑을 수는 없었다. 길을 따라서, 제냐는 의미가 있을 듯한 장소를 쭉 직진으로 이어 보았다. 그의 뒤에 쫓아오는 자가 누가 있는지 말이다.

그리 멀지 않은 장소에, 몇 명이 달리고 있었다. 검은색의 옷을 입고 있는 놈들이었다. 그 기세가 아주 흉흉했다. 복면에 가려져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는데, 흉신악살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게 아닐까, 상상이 되기도 했다.


뭐, 그들간의 유대가 있었다면 그럴 것이다. 제냐는 금방 그들의 동료 중 한 명을 게임 오버 시켰다. 게임 내에서는 게임 오버이고, 이곳에서는 죽음으로 인식된다. 게임 오버가 곧 죽음이라는 의미는 현재 달리고 있는 AI 제냐에게도 깊게 다가온다.


골목의 담벼락, 복잡하게 구불거리며 이어지는 샛길들. 여러가지 장애물들을 뛰어 넘고, 또 때로는 갑자기 위쪽으로 올라가서 방향을 바꾸기도 했다. 그러나 지붕 위쪽을 타고 넘는 자들이 있음을 안다. 너무 위쪽으로 올라가 도시를 질주하면 그의 모습이 차라리 길바닥을 달릴 때보다 더 드러날 수가 있었다.

어쨌든 제냐는 소수자였고, 지금은 무조건 싸움을 피해야 하는 입장이다. 개활지에서 열 명이 넘는 기사들이 그를 포위한다면 살아날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았다. 정식으로 전투를 벌인다면 말이다.

그 상황에서도 또 MP를 무리하듯 쏟아부어 활로를 연다면 도주 정도는 가능할 지 모른다.


결국, 이 지루한 추격전은 길어질 테였다. 제냐는 발이 빨랐고, 그들이 설령 포위를 할 지언정 도망칠 수 있는 실력이 있었으니까. 저들이 포션 따위의 물건들을 얼마나 챙겨 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제냐보다 많지는 아마 않으리라.

NPC들보다 플레이어들이 그런 점에서 이점이 있었다. 기본 상점에서 무수한 양의 포션들을 팔고 있으니까. 중급, 고급으로 넘어가면 플레이어들의 입장에서도 포션이 깨나 부담되는 가격이 된다.


고수들이 된다면 그들이 다루는 돈이 실제 게임 내에서 자본을 소유하고 미리 긴 시간 재산을 축적해왔던 NPC들과도 견주어 볼 수 있는 단위가 되기 시작한다.

그 때부터는 플레이어들에게 부여했던 어드밴티지를 슬슬 거두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어들이 소모품의 사용에 있어서는 훨씬 나은 입장이었다.

어쨌든 물약 상점에서 팔고 있는 것들은 플레이어들을 위한 용도라고 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NPC들은 자연적으로 만들어 생산해내는 물약들을 사용하고, 그것들의 물량이 떨어지면 포션 값이 천정부지로 오르거나 혹은 돈이 있어도 구할 수 없는 지경에 다다르게 된다.

플레이어들은, 아무리 포션이 떨어지고 플레이어들이 많이 사재기를 한다고 하더라도 최악의 상황에 기본 물약만은 무한하게 팖으로 살 수 있는 길이 있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플레이어들이 다니고 있는 포션 상점에서 플레이어들이 사는 포션들은 개발진에서 마련한 여타의 재고라고 할 수 있었다.

콘란드 대륙 내의 시세나 상황과는 관련 없이 어느 정도 일정분을 늘 마련해두었다.

수 억에 달하는 플레이어들이 추가로 대륙에 떨어져 생활을 하는 셈이었으니, 그런 점에 있어서는 공격적으로 플레이를 할 수 있게끔 좀 더 지원을 해주는 것이다.


결국 개발사가 원하는 것도 플레이어들이 적극적으로 게임을 해내고, 금방 성취를 이루어내고 게임의 클리어까지 도달하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이 게임, 비련의 시나리오는 플레이하고 있는 이들은 아는 자들이 없었지만 테스트를 위한 물건이었다. 이 게임을 만드는데 사용된 거대하며, 방대한 데이터 처리 능력을 자랑하는 초AI 만물박사의 능력 테스트이다.

우연과 기적, 그리고 피와 땀이 맺힐 정도의 노력이 겹쳐져 한국의 어느 중소 개발사가 괴물같은 AI를 만들어냈다.

그 AI의 단초를 만들어낸 집단은, 곧이어 초국가적인 여러 대기업들의 지원과 지지를 받을 수 있었고, 그들의 투자 속에서 제대로 된 결과물을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그 초국가적 대기업들에는 한국을 뿌리로 삼고 있는 기업들도 물론 있었고, 그들의 지분이 아마 가장 많을 것이다. 아무래도 국적을 따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가급적이면 전 세계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자신들의 기술을 써야겠지만, 기왕 한국인이 만들어낸 것이었으니 자국에 큰 수혜가 간다면 그렇게 하리라. 개발진들은 그런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지원 속에서 단초에 불과했던 AI는, 어떤 면에서 특이점이라고 보아야 할 정도의 물건으로 만들어졌다.

인간의 통제에 따르며, 순식간에 방대한 정보를 처리할 수 있는 기계. 그 정보의 ‘방대함’은 이 세계를 담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인간이 담을 수 있는 크기의 ‘세계’였으므로, 비유나 과장이 들어가는 표현이기는 하다. 진정한 의미에서 ‘우주’를 말한다면 고작이라는 수사가 붙어야 할 세계이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인간이 살아가면서 인식하는 한 사회, 나라, 공동체, 그리고 지구촌의 여러 사회적 흐름들을 모두 정보 처리기 안에 넣고 시뮬레이트 할 수 있는 기계라는 건 어마어마한 일이었다.

이전에도 AI 기술을 비롯해 온갖 과학 기술들이 만들어지고 발전 경쟁을 거듭해왔지만, 이건 그야말로 우연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무엇이었다.


그것을 만들어낸 천재적인 한국인들도 자신들이 어떻게 그것을 만들어낼 수 있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물론 그 과정이야 초 단위로 모두 기록을 해두었고 세세하게 저장 해두었으니 그대로 구현은 가능하다만.

똑같이 그렇게 한다고 제 2의, 제 3의 만물박사를 만들 수 있다는 장담은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한 개의 초인공지능을 만들어낸 것만으로도 그것을 감당하기 위해 모든 인력이 달라붙어 일을 처리하고 있었으니까.


비련의 시나리오는 그런 의미에서 좋은 프로그램이었다. 압도적인 체현률, 압도적인 감각을 자랑하는 초 가상현실 게임을 만들어 배포를 한다면 아마 모든 사람들이 참여하리라는 생각이었다.

서비스에도 돈을 받지 않았고, 그저 소프트웨어를 사는 데 얼마간 들 뿐이며 기기를 구입하는 데 비용이 발생할 뿐이었다.

기기를 살 돈이 없는 자들은 대여용의 기기를 이용하거나, 전문적인 대여점에 가서 외출을 하고 가상현실 게임에 접속하기도 한다. 흔히 게임방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이전에 비해서는 풍경이 많이 달라져 있다.


인터페이스 기기들의 발전으로 여러 가지 종류들이 있었고, 자신의 입맛에 따라 여러 인터페이스 기기들 중 정해진 컨셉의 게임방으로 가서 게임을 즐기는 게 현재의 시대상이다.

개중에서 가상현실 게임은 보통 사람이 의식을 완전히 맡기고 플레이하게 됨으로, 캡슐 형의 보호 장치를 두고 침대같은 내부에 누워서 게임을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완벽하게 누워서 즐기는 곳도 있었고, 어느 정도 경사를 두고 반쯤 벽면에 기대어 즐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장시간 누워있다 보면 아무래도 혈류라던가 문제가 있을 수 있기에 생긴 행태들이다.


현재 제냐와 암살단들이 벌이고 있는 것도, 현실이라고 보일 정도의 정밀한 구현이었다. 이런 시나리오들 하나하나가 쌓여서 이야기의 줄이 된다. 수 억 갈래의 줄이 플레이어들의 수만큼 존재하며 시나리오의 클리어를 위해서 나아간다.


그 줄의 방향성은 아마 위로 올라갈수록 통폐합이 될 것이다. 누가 먼저 가느냐의 싸움이었다. 누가 대륙급의 퀘스트, 그리고 메인 스토리 급의 퀘스트를 열어 시대를 주도하느냐의 경쟁이다.

기술력의 발전으로 어느 제작 계열 플레이어가 세계 문명을 뒤바꾸려고 하더라도, 그 전에 전쟁 통치 계열의 플레이를 한 걸출한 유저가 세계 전쟁을 일으키고 자국을 패권국으로 만들겠다고 들고 일어선다면 거기에 휩쓸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세계 정복 전쟁, 같은 말은 우스운 이야기였지만 콘란드 대륙은 아직까지 그런 것들이 훨씬 더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시대이기도 했다. 아직 핵과 같은 무기는 이 시대에 없다. 그러나 SP라는 특이한 물질이 존재하는 세상이었고, 그것들을 마치 현대 과학처럼 궁구하는 자들이 언젠가 괴물같은 무기를 만들어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도 초인들의 위에 서는 극한의 초인들이 함께 모여 일을 벌이면 그 비슷한 짓거리 정도는 가능할 지도 몰랐고.


아무튼 제냐는 달린다.

살아남기 위해서.

이 캐릭터에 로그인할 플레이어를 위해서 달리는 셈이었다. AI 제냐는. 주인에게 그것을 돌려주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점에서, 충실한 종의 모양새와도 같았다. 인격은 없는 가상의 시뮬레이트 프로그램일 뿐이지만.


제냐의 뒤를 가장 바짝 쫓고 있는 것은 펠 파이든이었다. 그는 제냐의 짐작대로 흉신악살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 복면 속에 가려져 있으나 겉으로 조금 태가 날 정도의 구겨짐이다.

펠 파이든은 미남이었다. 전형적인 금발에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날카롭고 차가운 인상의 미남. 서구인을 모델로 만들어진 인종이었으므로, 당연히 현실의 시각에서 봤을 때 서구적인 이목구비를 하고 있다.


달리고 있는 펠의 손에 어느새 작은 검 하나가 들려 있었다. 기형적으로 생긴 소검과 나이프의 경계에 있는 것이었다. 작은 지팡이 정도로도 보이는데, 칼날에 묘한 홈이 패여 있어서 구멍이 나 있다. 미묘하게 홈의 위치가 달랐고, 그 홈은 약간씩 다른 방향으로 깎여 있다. 주로 상대의 몸 속에 깊이 찔러 넣었을때, 내부를 살짝 긁듯이 상처를 주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기력술을 사용해 튼튼하게 만들어 집어 넣고 뺀다면 전혀 걸리는 것도 없이 수욱 빠진다. 상대의 생명도 그와 함께 빠지는 것만이 문제일 뿐이었다. 물론 펠에게는 문제가 없다. 암살 대상들은 늘 구사일생의 기회를 잡아보지도 못하고 한 번의 찔림으로 목숨을 잃고 만다.


이번 대상은 조금 사나운 사냥감이었다. 과연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쉽게 목숨을 뺏을 수 있을 지 모르겠다. 펠은 칼의 그립을 쥔 오른손에 불끈 힘을 쥐었다. 검은 장갑을 쥐고 있는 손이었다. 그는 다시금 땅을 박찬다. 여전히 뒤에는 동료들이 든든하게 달라붙고 있었다.


어두운 밤거리. 사르삿. 시간은 새벽 4시 41분. 4시가 되기 전부터 거리는 조용함과 어둠으로 물들지만, 통금 시간은 엄금했기에 정확히 6시가 지나서 사람들은 움직이기 시작한다. 가을 무렵이라 그 때 해가 완벽히 뜰런지 애매했다. 6시 정도면 그래도 거리가 밝을 것이다. 그 전에 무조건 처리해야 겠다고 펠은 다시금 생각했다.


타다다다.


시멘트 바닥을 밟는 그의 발자국 소리가 아주 조용하게 울렸다. 암중 기동술과 은밀 기동은 검은 늑대단의 기본 소양 중 하나이다. 귀를 가까이 가져다 대지 않으면 듣지 못할 소리. 공양이가 땅을 밟는 것같은 작은 소리를 내며 그는 달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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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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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133. 유니콘 23.11.02 20 3 14쪽
133 132. 전리품들 23.11.02 18 3 14쪽
132 131. 수난 23.11.01 20 3 20쪽
131 130. 백마 23.11.01 17 2 19쪽
130 129. 헛웃음 23.11.01 18 3 11쪽
129 128. 저녁 비행 23.11.01 18 3 18쪽
128 127. 또 사냥 23.10.31 16 3 12쪽
127 126. 재접속 23.10.31 16 3 22쪽
126 125. 간밤의 습격, 그 끝 23.10.30 19 3 32쪽
125 124. 위검기僞劍氣 23.10.29 19 3 19쪽
124 123. 맥컬리 23.10.29 18 3 21쪽
123 122. 펠 파이든 23.10.29 21 3 21쪽
» 121. 골목길 23.10.29 17 3 23쪽
121 120. 미첼 카니브 23.10.28 21 3 17쪽
120 119. 튀어 23.10.28 22 3 24쪽
119 118. 오케이Okay 23.10.28 20 3 19쪽
118 117. 검기劍氣(2) 23.10.27 20 3 30쪽
117 116. 검기劍氣 23.10.25 24 3 28쪽
116 115. 파罷했음 23.10.25 22 3 34쪽
115 114. 돌아갑시다. 23.10.25 20 3 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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