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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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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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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03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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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1 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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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쪽

175. 태양은 모조품을 용서한다

DUMMY

“붉은 구.”


입술을 그러모아 이야기를 하는 게 릿샤 애드윈이다. 그녀의 앞에서 커지기 시작하는 태양은 그럴싸한 형상이 되었다.

수십 여 초만에 다시 어마어마한 MP를 쏟아내고 있었다. MP고갈은 진즉에 찾아왔다. 쏟아내는 양보다 오브젝트와 포션을 미리 빨아 충당하는 충전량이 높다면 그나마 버틸 수 있을텐데. 그보다 더한 속도로 쓰고 있었다.

마스터 마기아가 되든, 뭐가 되든. 초상술사로서 워메이지의 길을 선택했다면 MP 고갈은 어쩔 수 없는 짐이었다. 급한대로 무엇이든 끌어다 써야 하는 입장이기에, 목숨을 잃는 것보다는 현기증으로 괴로운 게 훨씬 낫지 않겠는가 말이다.

물론 유저가 현기증으로 심하게 괴롭지는 않다. 그저 유저의 감각대로 캐릭터가 움직여주지 않는 것뿐이다. 30cm 정도 팔을 움직였는데, 반응이 늦고 방향도 엉뚱한 곳으로다. 심지어 휘두르는 팔의 세기와 거리도 다르다.


그런 오차 범위들을 머릿속에서 계산하면서 계속해서 스킬을 써야 하는 게 결국 워메이지들이었다. 초보, 중수의 당시에는 그렇게 친숙한 게 아니었다. MP고갈 말이다. 자신이 갖고 있는 MP에 맞게 적정량 한도 내에서 스킬을 쓰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고, 상황이 무리하게 흘러갈 것 같으면 도망치는 게 자연스러운 행동법이다.


중수 중에서도 수준이 높아지고, 고수가 되고. 마스터 마기아로서 초일류 워메이지가 되어 전장을 활보하고. 그렇게 되면서, 스킬에 대한 이해도가 깊어진다. 그 말은 똑같은 양식으로 플레이어에게 주어지는 스킬이라는 도구를 분해해서 더 다양한 상황에 대응시킬 수 있다는 뜻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대처법이 늘어나고, 다양한 상황에 대비하면서 전장에 더욱 깊숙히 몸을 담그게 된다. 초상술사는 ‘준비하는 자’라는 이명이 있었고, 준비를 할 수 없는 현장에서 일을 하는 건 어울리지 않았다. 원래라면.


마스터 마기아에 도달한 워메이지들은 태생적인 한계를 극복한 이들이었고, 그 한계 극복의 여파가 상습적인 ‘MP 고갈’ 상태인 셈이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다면 단순하게 전장에서 빠져나오고 도망치면 되겠지만, 고수급이 되면 스킬을 다각도로 해석하고 분해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이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조금 더 힘을 쏟고, 조금 더 한계에 가깝게 여력을 꺼내다보면 MP고갈이라는 상태가 아주 친숙하게 되어버린다.


릿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팔과 손이 부들부들 떨리듯이 시야 역시 얌전히 있지를 못했다. 흔들거린다. 초점이 제대로 맞지 않는다. 그러나 콘란드 내에서, 육안은 그녀에게 그렇게 필요한 게 아니었다. 어차피 MP로 감각한다. 기력 감지술이라는 건 대개 원리가 비슷하고, 초상술사들도 흔하게 사용한다. 약간의 차이가 있었고, 그게 감지술의 기본 스킬이라고 보는 게 맞으리라.


초상술사는 술사들 나름대로, 기력술사들은 또 그 나름대로. 그리고 ‘감지술사’라는 특수한 부류는 또 그들의 방식대로 기본격의 기력 감지술을 점차 발전시켜 나가는 식이다.


릿샤는 실의 형태로, MP를 가늘게 뽑아 멀리 보낸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 그녀가 뽑아낸 MP사絲만이 뚜렷한 감각으로 느껴졌다. 그녀의 몸에서 시작해서 아주 멀리까지 뻗는 것들이다. 바람에 날리는 실처럼. 해파리의 촉수처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릿샤의 감각을 대변하는 도구들이다. 릿샤에게는 뚜렷하게 그 형상이 느껴진다. 자신의 MP로 직접 만들어낸 것이니 말이다.

투명한 색이라 눈에만 보이지 않을 뿐, 확실하게 실존했다. MP를 감각하는 다른 감지술사가 본다면 역시 느낄 수 있으리라. 제냐 역시 감지술을 발휘하고 MP의 흐름에 집중하면 느낄 수 있었다.


실들이 나풀거리면서 그녀의 몸으로부터 멀어진다. 점점 길어지며, 그 끝이 먼 허공을 더듬는 것이다. 수 가닥으로부터 시작해서, 마치 누에나 그런 류의 벌레들이 실을 뽑는 것처럼 점차 늘어난다. 점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손으로 만질 수도 없다. MP를 모아 기력술을 사용해 잘라낸다면 벨 수는 있었다. 초상 스킬로도 타격을 입힐 수 있었고.


릿샤가 감각하기에는 흐릿한 시야가 아닌, 뚜렷한 3D맵 데이터가 들어오고 있는 식이었다. 점차 육안으로 바라보는 어지러운 시야 화면에서는 눈을 감는다. 대신 감은 눈, 어둔 시각 위로 밝혀지는 3D맵의 조감도가 나타난다.

그녀를 중심으로 해서 점차 먼 거리의 형태까지 알 수 있게 된다. 수 가닥으로 시작한게 수십, 수백, 수천, 수만 가닥으로 뻗어나간다.


아무리 하잘 것 없는 미물이라고는 하지만, 한 가닥 한 가닥이 MP로 이루어져 있다. 그 수와 길이, 민감도는 릿샤 애드윈이라는 초상술사의 수준을 대변했다. 그녀는 고난이도의 중첩 스킬을 사용함과 동시에 이만한 수준의 감지 수색술을 사용할 수 있는 술사이다.


불의 구는 점차 커졌다. 열기가 화끈, 하고 그녀의 볼로 다가왔다. 초상술의 제어로서는 실패의 흔적이다. 그러나 애초에 다루고 있는 에너지가 지나치게 방대해서, 그 정도 거리에 그 정도의 열기라면 아주 성공적이었다. 절대적으로는 아쉽지만, 누구를 데려다 놓아도 그보다 깔끔하게 하기는 쉽지 않으리라.


비슷한 레벨대에서라면 더욱 그러하고. 레벨 100부터 200구간의 고수급에서도 그러하다. 극도의 어지러움을 릿샤 애드윈의 캐릭터가 느끼고 있는지, 슬쩍 눈을 떠보아도 제대로 초점이 잡히지 않았다. 다만 바로 앞에서 이글거리는 강렬한 빛은 느낄 수 있다. 주홍빛, 에서 크기가 커지며 색깔이 옅어졌다. 이제는 밝은 주황색, 오렌지 색에서 밝은 노란색으로 넘어가고 있다.


금세 사람보다도 거대한 지름이었다. 릿샤는 진작에 넘었고, 호아킨의 키로 잰다고 하더라도 더 커진다.


점점 더 비대해지는 태양의 구는 그 크기만큼이나 비례하는 에너지를 품고 있다. 이번에는 단순한 열량과 폭발력이었다. 단순한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쿠콰과가가가강.


암석을 믹서기가 갈아대고 있는 듯한 굉음이 멀리서 계속 울리고 있었다. 검은 용의 몸뚱아리와, 돌 절벽에 닿은 폭풍의 구가 만들어내는 하모니였다. 불협화음도 화음이라고 한다면, 가장 강렬한 오케스트라 소리를 만들고 있는 상황이리라.


멀리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물론 검은 용을 죽이기 위해서 하는 것이니만큼, 놈의 위치나 상태에 대해서 알기는 해야겠지만. 이미 얼어붙었고, 잠시간은 움직이짐 못할 것이다. 그래서 첫 공격을 저 ‘폭풍의 구’로 잡았다. 블리자드를 모티브로 삼았다. 눈보라를 영어로 풀이한 이름이었지만, 콘란드 대륙 내에서는 전설 급 스킬의 이름이었다.


마스터 마기아들 중에서도 특별한 이들만이 쓸 수 있는 스킬이었다. 아마 레벨 140, 50이상은 되어야 제대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 제대로 사용된 블리자드에는 아직도 채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거진 근접을 했고, 그 레벨 대의 고수들이 하는것만치 자연스럽고 안정적으로 연발할 수 없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150레벨 정도의 마스터 마기아는 블리자드를 평범한 일격으로 다룬다.


120레벨 정도의 노련한 마스터 마기아는 다소 힘을 준 부담스런 일격으로 다루지만, 이것을 쏘아낸다고 직후의 전투 템포에 영향을 크게 받지는 않는다. 여전히 운영이 가능하다.


레벨이 100이 채 되지 못한 릿샤 애드윈은, 지금 폭풍의 한 자락과 태양의 숨결을 응용해 만들어낸 이 스킬들로 거진 반 전투불가 상태에 빠져들고 있었다.

물론 일시적인 MP 고갈 현상이 가장 큰 이유였고, 다소 회복 시간을 거친다면 계속해서 지원 공격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적정 레벨에 쓰는 다른 고수들처럼 움직이면서, 전투를 지속적으로 이어나가면서 여유롭게 운용하기는 힘든 스킬들이다.


한 번 쏘아내고 나면 쿨다운 타임을 가져야 했다. 지금 연속적으로 두 발 째를 준비하고 있는 건, 상당한 무리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검은 용은 그만큼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으니까. 이 파티에서 단시간에 최대의 공격력을 뽑아낼 수 있는 건 릿샤였다. 다른 이들은 본격적인 초상술사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제냐가 초상술사로서의 능력이 있는 건 알고 있지만, 릿샤와 비교한다면 당연히 모자라다.


그녀 역시 검술을 가지고 제냐에게 덤벼들면 한참 모자른 것처럼 말이다. 사람마다 적성도 있었고, 유형도 있었다. 각자가 능력을 개화시키는 시기도 달랐고. 최대 규모의 파괴에 적합한 건 지금 시점에서 그녀다.


붉은 머리의 그녀, 는 자신의 머리칼처럼 붉은 기운을 만들어내 키웠다. 그것은 붉은 기가 점차 사라졌고, 종래에는 거의 백색에 가까운 구형이 된다. 릿샤의 뻗은 팔에 가까이 붙을만치 거대해진다.


우우웅, 또 우우웅.


일정한 박자의 진동 소리를 내면서 운다. 태양의 구는 대기를 떨어 울렸고, 열기를 전달했다. 이글거리는 아지랑이가 그 근처로 생겨났다. 뻗은 팔과 볼이 조금 뜨뜻하다. 릿샤는 그것들의 열기를 조정해서 다른 쪽으로 돌린다. 그리고 제어력에 집중을 해서 열기가 바깥으로 더욱 빠져나가지 않도록 애를 쓴다.


구름이 흐른다. 열기의 구가 허공에 떠 있었지만 기상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능히 일어날만한 양의 에너지였고, 열기를 품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릿샤의 컨트롤 실력이 그만치 뛰어나다는 반증이다.


릿샤의 손이 더욱 떤다. 기력이 쇠한 이유도 있었다. MP 고갈이 극심해지면서 평형 감각이 손상되어서 그런 점도 있다. 아찔한 정신상태 속에서 초상술사는 집중력을 더해간다. 정신력이 가장 중요한 분야의 일을 하면서 정신적인 데미지를 입는다는 게 참 말이 안되는 일 같지만. 그런 불가능해 보이는 도전 과제들을 매일 부여받는 게 워메이지의 일이다.


릿샤 역시 워메이지였고, 이골이 나 있다. 평범하다, 이 정도는.


두 눈은 다시 감는다. 눈꺼풀 위로 뜨거운 감과 빛이 전해져온다. 아까 느껴졌던 후끈한 정도의 열기는 아니었다. 그녀는 더운 걸 싫어했다. 열감은 줄어들었다.


그녀의 입술이 벌리면서 중얼거리며 무언가 말을 꺼냈다. 정신력이 흐트러질 때는 입으로 발음하는 것만큼 좋은 것도 없었다. 몸과 정신은 연결되어 있다. 몸이 약해지면 정신도 약해질 수 있었고,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현실에는 후자의 일이 더 많이 벌어진다.

정신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확실하게 실체가 있었고, 또 다치기도 쉬운 부위였다.


릿샤는 정신이 더 강력하다. 육체보다는 훨씬 말이다. 현실에서의 그녀 역시 운동을 주기적으로 하고는 있었지만. 근육이 생기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책상 앞에서, 혹은 무슨 기계 앞에서 보내고 있었으니. 식생활 역시 불규칙했고, 잠을 자는 것도 그러하다.


비련의 시나리오는 누워서 반쯤 가수면 상태로 진행이 된다. 신경 반응은 계속해서 자극되고 있지만 꿈속에서의 그것처럼 이루어진다. 마인드 트레이닝을 하는 시간처럼 현실의 육체 역시 근육 반응이 조금씩 있었지만 무리한 운동까지는 당연히 아니다.


잠이 오지 않을 때 시뮬레이션 기계를 켜고 시나리오 온라인에 접속하는 게, 휴식 시간을 보내는 일종의 방법이기도 했다. 그렇게 로그아웃을 하고, 새벽에 잠에 드는 것이다. 일정이 빡빡할 때는 잠잘 시간조차 부족한 날이 있었기에 못하지만. 도리어 개인 시간이 남을 때는 이렇게 보내곤 한다. 그녀의 생활 중 일부를 채워주는 제법 괜찮은 취미였다.


“케슈앙, 비에트, 마리스.”


뭐 추억의 이름들이고, 별 의미도 없는 단어들의 나열이었다. 콘란드 대륙의 NPC들은 이곳 역사와 관계된 고대어 따위를 암호문으로 사용한다. 캐스팅을 할 때 읊는 시동어로 상대가 스킬의 형상을 추측할 수 있다면 그것만큼 낭패가 없었으므로, 집중을 돕는 연상 단어들인 시동어는 보통 상대가 이해할 수 없는 암호로 이루어져 있었다.


NPC들끼리 워메이지간 싸움을 하게 되면, 서로 읊어대는 시동어를 듣고 상대의 공격을 미리 알고 파훼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다고 한다. 하나의 세계관과 역사를 공유하다 보니, 같은 암호군에 속하는 시동어를 쓰다보면 그렇게 된다.

릿샤가 읊는 건 그냥 어린 날의 추억들이다. 예전에 같이 놀았던 유아기 시절 친구들의 이름을 적당히 재배열한 것도 있고, 만화 영화 속에서 보았던 단어들을 바꾼 것도 있었다. 다 크고 나서 돌이켜보면 별로 스트레스가 없었던 그 시절의 단어들이다.


붉은 구는 이제 회전을 시작했다. 열기와, 바람. 거기에 뇌기를 덮는다. 냉기를 제외하고 열기를 넣은 셈이다. 폭풍의 구와 비슷한 면도 많고, 다른 면도 있었다.

형상도 조직법도 대개는 같았다. 거대한 불의 구는 유리구슬처럼 형체가 잡혔다. 내부에서 강렬하게 휘돌기 시작했다. 세탁기처럼, 아니 그보다는 당연히 훨씬 빠르다.

바람의 기운은 불길을 거세게 다루었다. 가축을 치는 유목민처럼. 릿샤가 쏟아내는 검푸른 바람의 기운이 불길 속에 섞여서 내부의 회전을 빠르게 한다.


점차 고속으로, 초고속으로 변해간다. 열량은 점점 늘어간다. 뇌기 역시 열을 더하는 중이었다. 전류와 열기가 함께 흐르는, 거진 생지옥같은 환경이 된다. 구체의 내부는 말이다. 짜릿함과 지독한 열상을 동시에 얻을 수 있는, 피격자 입장에서는 최악의 물질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드문드문 밝게 빛나는 구체 중에서도 더욱 번뜩이는 광량이 있었다. 전류가 스파크를 만들어내는 중이었다. 바람의 기운은 계속해서 산소, 탈 것들을 제공해주었다. 산소가 없어도 MP로 만들어낸 불은 이글거리며 타오른다. 빛과 열을 낸다. 탈 것이 없어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있다면, 조금 더 추가적인 힘을 얻을 수 있었다.

MP만으로 모든 현상을 제어하는 건 지나친 낭비라고 할 수도 있었다. 이런 식의 중첩 스킬이 되면 더욱 그러하다. 원소술을 다룬다면, 그리고 여러 종류의 속성을 다루는 자라면 당연히 그 스킬들 간의 상성을 파악해서 서로 시너지를 낼 수 있게끔 해야 했다.


바람의 기운은 불을 지피고, 더욱 맹렬하게 타오르게끔하고, 또 밀실 속에서 화염이 휘돌며 더욱 지독한 불이 되도록 만들어준다. 궁합이 잘 어울린다. 뇌전 역시 불의 구 내부에서 어마어마한 양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낙뢰를 잡아다 가두어둔 것 같았다.

실제 떨어지는 낙뢰보다는 아마 위력이 조금 약할 것이다. 그러나 최대한 그에 가까워질 수 있도록 릿샤는 애를 쓴다.


태양의 구, 태양의 숨결을 만들어내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결국 상상력이었다. 뭐든 컨셉이 중요했다. 확실한 상상과 확고한 믿음. 제대로 형상을 그려내야만 초상 스킬이 성공을 한다. 상상력을 전혀 쓰지 않고 스킬을 쓰는 법도 있기는 하다. 그게 자동화된 스킬 사용이다. 초보 초상술사들이 그렇게 쓰곤 하고, 레벨이 올라가고 요령이 늘면서 자기류의 것으로 바꿔간다.


중첩 스킬이라는 건 이미 확고한 고유성의 영역이었다. 거진 창작의 영역이라고 해도 좋았다. 초상스킬은 예술을 닮았다. 어떤 면에서. MP를 이용해 여러 현상들을 만들어내고, 불로 빛으로, 바람으로 한기로, 뇌전의 기운으로. 그것들을 물감 삼아서 새로운 그림을 그려나가는 작업이었다.

릿샤는 예술에도 관심은 있었다. 주전공은 결국 학문이었지만. 과학 분야의 종사자들에게도 예술적 창의력이라는 건 필요한 법이었다. 결국 아이디어라는 건 한 통로를 이용해서 사람에게 다가오게 마련이었으니까 말이다.


빠릿빠릿한 계산 능력, 두뇌 회전, 냉철한 이성. 그런 것들도 물론 필요하지만, 때로는 감각적인 창의성 역시 학문의 길을 걷는데 있어서 도움이 된다. 새로운 발견을 한다는 게 참 어려워진 현대 시대이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더욱 지엽적이고 전문적으로 분야를 잘게 쪼개어가다 보면 자기만의 연구와 발견을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릿샤 역시 그런 걸 원하고 있었고.


어린 천재였고, 그녀는 훗날 나이를 먹어 학계에, 나아가 일반적인 사람들의 상식에 새겨질 수 있는 족적을 남기고 싶어했다. 그렇게 되려면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어야 할 테였다. 사회에 기여를 하고,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릿샤는 기꺼이 그러고자 했고, 자신의 능력을 가진 것 이상으로 마음껏 발휘하고 싶었다.


머리가 팽팽 돌아간다. 어질거리는 캐릭터의 뇌리를 표현하는듯, 제대로 집중이 안되고 초상 스킬의 유지와 운용이 점점 어려워진다. 그러나 MP 고갈로 인해서 다가오는 현기증 등의 증상들도 최고점은 있다. 그 구간을 지나면 더 이상 심각해지지는 않았다. MP가 아예 바닥이 된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다. 지금은 급속도로 빠져나가면서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다.


푸른 물약은 최고급품으로 돈을 탈탈 털어 사서 잔뜩 위장에 때려 부었다. 뱃속에서 찰랑거리는 것도 같다. 소화가 되기 전에 그것들은 작용을 하면서 MP를 채워낼 것이다. 거기에 실제로는 잘 하지도 않는 악세서리들을 아주 몸이 무거울 정도로 여기저기에 달았다. 옷이나 보호구에 가려서 당장은 보이지 않지만.

그것들이 배터리처럼 뜨끈한 열과, 은은한 빛을 내면서 울어댔다. 거기에서 뽑혀 나오는 MP들의 양 역시 만만치 않다. 정확하게 계산 하에 지금 스킬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 두 발 만으로 리타이어를 하게 된다면, 애초에 전략을 짜지도 않았다.


즉흥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지만 제냐 파티는 제법 생각을 많이 하고 전투에 임하는 편이었다. 다들 그런 편인 성격의 사람들이라 그렇다. 호아킨도, 릿샤도. 제냐와 최태현도 말이다. 진지한 성격들이었고, 고작해야 게임의 사냥 컨텐츠에 임하는 거면서 눈빛을 날카롭게 빛내고 셈을 해댄다. 뭘 해도 비슷하게 할만한 인간들이란 뜻이다.


그런 집중력을 바깥에서도 발휘할 수 있다면 그것만큼 좋은 게 없다.


“후우우우우우우.”


긴 한숨이 절로 토해져나왔다. 릿샤의 입이 잠시 쉰다. 얼추 중첩 스킬의 구성이 끝났다. 머릿속으로 복잡한 생각들을 억지로 해나가면서, 캐릭터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상황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눌러가면서.


복잡한 술식을 완성시켰다. 태양이 나타나 있었다. 지름만 십 수 미터는 되어 보였다. 처음의 그 구의 중심은 릿샤로부터 꽤 떨어져 있었는데, 그것으로 부족해 조금 앞으로 이동시켰다. 거대한 구. 폭풍의 구를 마지막에 날려 보냈을 때보다 크다. 이것 역시 압축을 해야 했다. 술식의 후반부에 들어선다.


밝게 빛나는, 똑바로 쳐다보기가 조금 힘든 노란색의 구체가 점차 줄어든다. 어마어마한 열량과 에너지가 속에서 난리를 치고 있었고, 물리적인 입자들이 발광을 하는 중이다. 자연적이고, 물리적인 법칙에서 다소 벗어나 있는 MP들 역시 자연계의 법칙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않았다. MP만의 법칙이 있을 뿐이었고, 그 개연성의 흐름은 자연물들과도 닮아 있었다.

궤가 다를 뿐이지 MP도 법칙성이 있고 그 다음에 움직이는 놈들이었다.


과한 밀도로 뭉쳐지고 있었고, 그건 어마어마한 반발력으로 릿샤에게 다가왔다. 보이지 않는 투명한, 거대한 손이 릿샤에게서 뻗어나가는 것 같다. 릿샤의 의지력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릿샤로부터 만들어진 MP의 구체를 찰흙 다루듯 바깥에서 여기저기 누르며 성형하고 있었다. 동그랗게, 더 동그랗게. 깔끔한 외곽을 가지고 더 작아지게끔 균일한 압력을 가한다.


압력에 반발하는 힘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그건 외부를 감싸고 있는 투명한 보호막의 한계를 시험한다. 릿샤는 압력을 늘림과 동시에 보호막 스킬의 강도를 더해야만 했다.


어질,


하고 눈을 감은 상태에서도 순간 정신이 조금 더 흐려졌다. 릿샤 애드윈, 그 캐릭터 너머에 있는 유저의 정신은 물론 멀쩡하다. 캐릭터의 변화가 플레이어에게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다만 다루고 있는 캐릭터가 점점 이상해질 뿐이다.


현실의 그녀와 릿샤는 명확하게 구분되는 지점이 있었고, 다소 피곤하고 배가 고플 뿐인 애드윈이 릿샤 애드윈을 응시한다.


참 더럽게 현실적이고, 불친절하고, 어려워서 짜증나는 게임이었지만. 또 그래서 그만큼 이겨낼 때의 재미가 배가되는 면이 있었다. 아예 불가능한 난이도였다면 예전에 때려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플레이 스타일과 실력으로 어느 정도 가능할법한 난이도가 계속 주어지고 있었다. 그런 환경을 만나는 것 역시 플레이어의 일종의 운이라고 할 수 있다.


모두가 여기저기 난배치 되어 있는 게임 내 요소를 적절하게 만나는 건 아니었다. 막말로 게임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초보자 존 근처에서 갑자기 네임드 몹을 만나고 횡액을 당하는 게임 오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건 여러가지 특수한 조건과 요소가 갖춰졌을 때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우연’이라는 말로 커버된다. 이 게임은 그런 식이었다. 떨어져 나간 사람이 개발사를 향해서 상당한 수위의 욕설 메일들을 보내곤 하는 일들이 이해가 가는 지점이다.


물론 개발사 태Tae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 자신들만의 철학을 완성시키겠다는 완고한 고집으로 똘똘 뭉친 집단이었던 탓이고, 이 게임도 돈을 벌기 위해서 만든 게 아닌 이유다. 소프트 웨어를 구매하는 비용은 있었지만 이용 자체는 무료였다. 정액제를 채택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거기다 게임 내에서 현금을 이용해 살 수 있는 것들도 없다.

물론 게임이 시스템적으로 현금 거래를 지원하지 않을 뿐, 유저들 간에는 이미 공공연하게 거래를 하며 게임을 좀 더 쉽게 하는 경우들이 있었지만.


어쨌든 게임사에게 돌아가는 이익은 없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원 수, 여태껏 어떤 게임도 도달해본 적 없는 숫자의 플레이어 수를 보유했으니 어마어마한 광고 수익은 덤이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그리 많은 매체와 협업하며 광고 수익 따위를 얻지도 않는다. 여러모로 기이한 개발사였다, 태Tae는. 많은 사람들의 궁금증이기도 했다. 개발진들의 정체가 말이다.


물론 개발진들이야 애초에 게임을 만들려던 사람들도 아니었고, 단순히 AI 계열의 기술을 개발하다가 초인공지능이 튀어나와서 시험 테스트를 하고 있는 것 뿐이기는 했다만.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사업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는 고위권자들 뿐이었다.


게임을 플레이하다 우연히 장애물과 맞닥뜨려, 그대로 접어야 했던 무수한 플레이어들의 비난은 개발자들의 귓전에 그리 효과적으로 닿지 못했다. 한국계 연구원들이 주축이 되는 ‘태’의 팀원들이었다. 개중에서 팀장, 리더라고 할만한 인물인 ‘박수정’이란 사내는 지독하게 무심한 편이고, 타인의 평가에 그리 귀를 두지 않는 편이라 더욱 그러했다.


게임을 플레이하고 있는 유저들 중에서는, 손에 꼽는 인원들만이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릿샤는,


개발자들을 향해서 속으로 욕들을 뇌까린 적이 물론 많기는 하다. 그러나 게임 오버를 당한다고 해도 개발사에 악성 메일을 보낸다거나 할 생각까진 없었다. 그렇게 하는 일 자체가 이미 심력 낭비고 스트레스였다. 즐기기 위해 들어온 게임이 끝났다면, 그냥 거기까지인 거고 다른 취미를 찾을 일이지.

정력을 더 낭비할 생각은 없다.


이미 감은 눈. 감지 스킬로 감각하고 있는 주변의 상황.


콰아아아앙, 하던 굉음은 어느새 거진 다 끝나고 그 잔음만이 흐른다. 데슈칸의 절경처럼 보이던 돌 절벽이 부서져서 무너져내렸다. 그 바윗덩이들이 눈사태처럼 굴러가, 그 아래 가파른 산맥의 경사면을 구른다. 나무들이 우습게 쓰러졌고, 보이지 않지만 있었을 많은 작은 생물들이 죽었으리라.

안타깝지만, 어쩔 수는 없었다. 이제부터 그녀는 더 큰 파괴 행위를 자행할 셈이었다. 아까 것보다 조금 더 활기찬 놈으로 먹여줄 셈이다.


검은 용은 여전히 허공에 얼어붙어 있었다. 조금쯤 꿈틀거리는 것도 같았다. 수백 여 미터 너머에 있는 그것이지만, 그녀의 감지 스킬은 두 군데를 집중적으로 관찰하고 있었다. 그녀를 중심으로 하는 반경 수십 미터 정도의 상황. 그리고 앞쪽으로 수 백 여 미터를 더 나아가서 있는, 검은 용과 돌 절벽 근처의 상황.


불의 탄을 날려보내 쏴맞추어야 하니까, 당연한 시야 선택이다.


아까 건 검은 용을 침묵시켰고, 다운시켰다. 울어대면서 용솟음치던 놈을 침착하게 만들었지만, 지금 건 다소 뜨겁게 해주리라. 한기의 다음에 가는 것이다보니 그 차이가 더욱 여실히 느껴질 것이다. 릿샤가 원하는 갭이었다. 검은 용의 몸뚱이는 더럽게 단단하니까, 속성 데미지를 제대로 먹이지 않는다면 공략이 참 어려웠다.


예전의 토벌대에는 속성 데미지를 능숙하게 만들어내고 다루는 이들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무식하게 그냥 싸웠고, 전체 토벌대원들이 죽어 나자빠지는 동안에 호아킨과 릿샤가 열심히 칼과 스킬을 박아넣어 죽일 수 있었다.

그 때 경험치과 칭호 따위들을 고스란히 먹었기에 오늘 날까지 달려올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직도 산슈카였다. 고작해야 산슈카 말이다. 콘란드 대륙 전체를 활보하면서 클리어 씬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는데.


어쨌든,


여러가지 마음을 담아 불의 구를 날려보낸다.


그녀의 앞에 있던 태양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굉장한 소리는 없었다.


공기가 조용해졌다.


바람이 사그라들었다. 어마어마한 열기 앞에서 이상한 변화였다. 주변의 공기들이 팽창하고, 열기를 받아 위로 올라가고 더욱 거센 바람이 불어도 이상하지 않을텐데. MP의 흐름이라는 건 예상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태양의 숨결이라고 이름붙은 스킬이 가져올 폭력적인 변화를 감지하듯이, 데슈칸 산맥의 어느 허공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소란스럽게 떠들던 검은 용은 아가리를 닥치고 있었고. 돌 절벽의 부스러짐은 굉음을 흘리곤 있지만 가장 큰 폭발과 파괴는 지나갔다. 제냐도 최태현도, 호아킨도 라이엔도. 썬더스도 브라운도. 입을 다물고 있다. 그들은 불의 구가 움직이는 궤적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근처에 있는 동물들은 다 피난을 갔는가. 울음 소리 하나 들리지 않고 적막하다.


무슨 농담처럼도 보이는 밝은 구형의 에너지탄이, 주욱 뻗어나가


검은 용에게 닿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허공에 멈춰져 있는 얼어붙은 검은 선의 앞쪽에 닿는다. 아가리를 벌린 채로 굳어버린, 미세하게 떨면서 살아남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검은 용의 대가리였다.


폭풍의 구가 만들어냈던 한기의 흐름들을 잠식해가면서, 주변 공기의 분위기를 완벽하게 바꿔내면서, 이제 주인공이 바뀌었다는 듯 태양의 구는 자신의 존재감을 여실히 드러냈다.


태양은 저 하늘 위에서 선연한 빛을 내리쬐고 있었고, 그 아래에 왜 자신을 닮은 모조품이 있느냐고 따지지는 않았다.

그저 릿샤 애드윈이라는 볼품없는 조각가가 만들어낸 저열한 열화품에 불과하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저열한 열화품은, 애초에 따라하고자 했던 원본의 위대함이 지나치게 거대했기에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위력을 담고 있었고, 노란 색의 빛의 구가 깨져나간다.


검은 용의 대가리는 오랜 세월 살면서 느껴보지 못했던 파괴력과 열량의 폭풍을 그대로 뒤집어 써야만 했다.

rajiv-bajaj-i4QIqfcTkN8-unsplash.jpg


작가의말

조물주는 마음이 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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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211. 한 번 불꽃처럼(악의) 24.03.08 15 1 21쪽
211 210. 미치광이는 그네를 거꾸로 탄다. 24.03.07 15 1 21쪽
210 209. 이동移動 24.03.06 14 1 20쪽
209 208. 지루한 옮김, 라이엔의 상념 24.03.05 17 1 21쪽
208 207. 지루한 옮김 24.03.05 16 1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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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 205. 거북이 사냥 24.03.03 18 1 36쪽
205 204. 따스한 햇빛이 비치고 있었다. 24.03.01 13 1 12쪽
204 203. 화살막이 24.03.01 14 1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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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 201. 짜증 24.01.07 13 1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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