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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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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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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3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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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4 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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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220. 두려움이 이빨을 갉아먹다

DUMMY

'패시브' 스킬들은 기본적으로 장착된 것들로. 제냐가 온 오프on-off를 조절하지 못하는 스킬들을 총칭했다. 그것들은 특정한 조건을 만족하면 효과를 발휘하며 극대화된다.


'궁술' 계열의 패시브 스킬들은, 손에 활대와 화살을 쥐고, 시위를 당기는 그 자세를 취해야만 근력을 보정해준다거나. 궁술과 관련된 세세한 동작에 걸려 있는 보정과 추가적 효과들이었다.


제냐가 본격적으로 전투에 들어가자 기다렸다는 듯 여러 종류의 패시브들이 힘을 발휘하며 보탰다. 이미 전투의 감각이 제냐를 덮었다. 인지 능력이 극도로 올라갔고, 비련시 온라인의 시뮬레이터는 김서원에게 1초를 무수하게 쪼개어 보여주기 시작했다.


떨어지듯 달려가는, 추락인지 질주인지 모를 기행이었는데.

제냐는 선명한 감각으로 자신의 몸을 느끼고 컨트롤했다. 시스템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어어어···'하고 헤매는 사이 땅에 몸을 처박았을 테였다.


그건 사람의 반사신경이나 감각 능력으로 인지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게임에서 근력과 함께 순발력 등, 여러 스탯들을 종합적으로 올려야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가끔 어느 괴랄한 작자들은. 유니크 스킬 따위를 얻어 한 종류의 스탯 상승을 대체하기도 했다. 무수한 스킬은 결국 무수한 스탯과 같아진다. 스킬, 스탯, 아이템은 어느 정도 서로 보완이 가능한 요소들이었으니.


그러나 안정적으로 게임을 운영하기 위해선, 3대 요소가 고르게 높은 편이 좋은데. 특이한 작자들은 늘 '뭔가 색다른 육성법이 없을까' 한다. 특정 스탯을 증가시켜주는 스킬들을 모아 익히고. 스탯 단련에 쓸 시간과 노력들을 그 외 1개 요소에 모두 때려박는 식이다. 그렇게 효과적인 방법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게임엔 늘 기인들이 많다.


캐릭터 육성에 결과적으로 실패하더라도.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내고자 하는 사람들 때문에 늘 플레이 스타일이 발전하는 지도 몰랐다.


제냐 역시 평범한 육성법은 아니다. 애초에 육성 스타일 개발을 위해 정보를 찾아보지조차 않았으니까. 그게 제냐가 비련시 온라인을 대하는 방식이었고, 게임을 진정으로 즐기는 길이다.


제냐는 책을 읽는 걸 좋아한다. 다양한 세계를 한 자리에서 맛볼 수 있으니까.

게임은, 비련의 시나리오 외에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었다. 대부분 그리 방대하고 세밀한 세계를 구현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게임은 어떤 명작가의 대서사시보다도, 혹은 그만큼.

세밀한 구현을 해내고 있었다. 인간의 상상력의 최고봉 그 즈음에 이 게임의 기술력이나 그래픽, 감각 구현 기능이 있는 게 분명하다.


제냐가 세밀하게 해내는 머릿속의 직접 상상으로도 이보다 더 정밀한 세계를 떠올리는 게 불가능했다. 그건 대단한 일이다. 광학 기술의 목표 중 하나가 실제 사람의 눈을 따라가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인간이 만들어 낸 '디지털' 제품이, 신이 만들어낸 자연계, '아날로그' 제품을 모방하는 건 아주 긴 과정의 도전이다.


이 게임은 분명 특이점이었다. 인류 역사의 변곡점이라고까지는 말하지 못하겠으나. 그런 확신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김서원이 이쪽 계통의 기술 전공이 아니라서.

어쨌든 비전문가인 김서원의 눈에도 선명하게 보였다. 이 게임 이후에, 관련 기술이 세계 각지에 쓰이며 일어날 변화가.


아마 뉴스에서 대단한 사건을 보도하고 있지 않은 걸 보면. 아직 이 기술력들이 상용화되기에 시간이 걸리는 게 아닐까. 세계에 있는 어딘가의 대기업 모처에서는. 이 기술력으로 대단한 작품이나 상품을 만들려고 하고 있을 수 있다. 이미.

그 상용화 직전 단계의 테스트 제품이 이 비련시일 지도 모르고.


어쨌든 제냐는 지금은, 게임 외적인 이야기보다는.


게임 내에 펼쳐지고 있는 스토리 라인과 씬Scene에 집중했다.


앞에 적이 있다.


저들을 해치우면 이 씬은 계속 이어질 것이고.


제냐의 플레이도 계속될 테다.


죽는다면,


뭐 아쉽지만 여기서 끝일 거다.


기왕이면 이런 대단한 작품, 게임의 서비스를 그 안에서 즐기고 싶었지만. 도중에 탈락된다고 하더라도 어떤 후회도 없다. 시작할 때부터 이미, 100% 즐기고 있었으니까. 그의 스타일대로.

과정도 그의 선택이었으니. 결과도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었다. 인생이라고 한다면 아마 조금 더 세심하게 남의 말을 들어봤을 테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마구잡이로 걷지는 않았으리라. 그런데, 여긴 가상의 세상이었고.


계정 삭제가 뼈아프지만 그냥 데이터 쪼가리가 날아가는 것 뿐이었다. 김서원과는 별 상관이 없는.


그런 경험을 하면서 인생에서 어떤 기로에 섰을 때. 자신만의 '감'을 기를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한 일이다. 누구도 조언을 해줄 수 없는 급박한 상황. 오롯이 판단해야 하는 선택의 순간. '진짜' 선택의 순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게임의 의의는 그걸로 충분하리라.


투, 투, 툭.


건물 외벽에서 날다람쥐보다 빠르게 뛰어 달리는 제냐의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자신의 발소리는.


아마 목조 건물 안쪽에, 사람이 있는 얇은 외벽을 밟은 데가 있다면. 객실 내의 사람은 조금 더 크게 들었으리라.


귓전으로 바람이 스치운다.


머리칼이 나부꼈다.


흑발, 캐릭터 제냐 킴의 머리는 조금 덥수룩했다. 이발이라도 하는 게 좋을까. 현실의 김서원은 여기까지 머리를 기르진 않는다.


검은 망토 안쪽으로 철제 느낌의 장구류가 묵직한 빛을 낸다.


요란하게 반사되는 빛깔은 아니었다. 은은하게. 달빛에 비춰져도 그리 튀지 않을만큼. 전체적으로 암습에도 크게 무리가 없는 복색이다.


퉁.


제냐는 그런 정도의 소리를 내며 뛰었다.


기력술의 경지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강렬한 행동성을 띄면서도 조용할 수 있었다.


빠르게 움직이고, 강하게 뛰면서 주변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고 물을 수 있지만.


애초에 사람이 이렇게 뛰는 것 자체도 말이 안되지 않는가.


초상력이라는 신비의 에너지는 모든 방향으로의 발산과 수렴이 가능했다.


움직이기 위한 방향으로 사용자의 몸을 이끄는 것도 되었고. 그 외 필요없는 충격을 주변에 전하지 않게끔. 부가적인 충격이나 에너지를 감싸며 상쇄시키는 것도 가능했다.


더욱 빠르고 더욱 은밀하게.

무예가들이 추구하는 경지란 그런 것일지 몰랐다.


최고의 공격이란 결국 상대가 알아보지도 못하는 순간에 찔러넣는 검이다. 뭐, 룰을 따르는 한도 내에서 말이다. 비인도적인 짓거리가 아니고 상의된 공간 안이라면. 언제든 그런 공격이 최속의, 최선의 공격수이리라.


지금 제냐가 선 곳은 전장이었다.


게임 속에 구현된 가상의 전쟁터이기는 하지만.


저들은 제냐의 목숨을 노리러 왔다.


김서원은 그저 즐길 뿐이지만. 제냐로서는 제법 진지한 투로 상대를 해주어야 하리라.


퉁, 하고 이전보다 조금 더 큰 발자국 소리를 내며 제 몸을 튕겨냈다.


호텔 건물의 외벽, 그 아랫단에 거의 다다른 즈음이었다. 마침 계속해서 노리던 '여자 초상술사'가 근처 높이에 있었다. 그녀의 위치보다 조금 높은 곳에서, 위에서 아래로 덮치듯 공격을 하는 것이다.


대각선으로 제냐가 행동 방향을 바꾸어 날았다. 아니, 나는 것보다는 튕겨졌다, 가 차라리 비슷하리라. 그 궤적을 설명하는 데는.


탄력적으로 움직이는 고무공이, 무언가에 비껴 맞아 갑자기 궤도를 튼 것처럼 간다. 총알과도 비슷했고. 아무튼 사람이 반응을 하기에는 어렵다. 초인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이리라. 근접전이라고 한다면, 기력술사를 완벽하게 상대할 수 있는 초상술사는 아주 드물었다.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고 굵은 워메이지가 아니라면.


대공가에 속한 지 10여 년 째.


맥기 조르드는 눈 깜짝할 사이에 자신에게 이미 다가온 '적'의 움직임에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했다.


그녀 나름대로 진흙탕을 구르며 고생을 했다고 여겼는데.


'제냐'가 맥기보다는 조금 더 수준이 높은 초능력자였다.


초상술사의 감지 기술에 거의 걸리지도 않은 채 이동한 것이다.


기력 감지술로도, 실제 시야로도 잘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다가왔고. 빨랐고. 또 그녀의 신경 자체가 '여관' 건물에 가 있던 것도 있으리라.


"어."


맥기 조르드는 멍청하게 앞을 처다봤다. 망토를 입은 사내가 밤의 허공을 날아 자신을 덮친다.


그녀 역시 조금 어두운, 묵빛의 망토를 뒤집어 쓰고 있었다. 얇은 천이었으나 빛이 투과되지 않는 아티팩트였다. 초상력적인 스킬은 대단한 게 붙어 있지 않았고. 기본적인 수준의 은신술을 썼지만 그녀의 솜씨가 전문적인 암살가들보다 뛰어나진 않았다.


맥기는 어둔 밤, 허공을 처다봤다. 그녀의 검은 머리칼이 흔들렸다. 약간의 곱슬 머리였다. 자연스레 웨이브가 들어간 어여쁜.

선이 굵고 이목구비가 시원한 미녀였다. 맥기 조르드는.

그녀의 갈색 눈동자가 앞을 응시한다. 초점이 흐려졌다가, 맞았다.


맞았다고 생각한 순간, 제냐는 이미 비스트 슬레이어로 긴 궤적을 그리기 시작하고,


있다.


*


촥.


안타깝다.


뭐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NPC라고 하더라도 이런 플레이는.


기본적으로 전쟁과 정치적 알력 상황. 위험하고 위기의 시대를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다보니까. 이 비련의 시나리오가. 사람이 사람을 상대하는 씬들이 불가피하게 들어간다.


다만 그런 어쩔 수 없음을 상쇄하려는 듯 검의 궤적이 만든 장면은 모자이크 처리가 되었다. 일부분은 말이다.


제냐는 성인이었고, 간단한 정신 감정에서도 문제가 없었고. 신경 계통의 약물을 복용하거나, 정신병력도 없다.

그래도 기준치 이상의 멘탈을 갖고 있었고, 만일 원한다면 조금 더 적나라한 장면들을 볼 '수도' 있다. 만일 성인이 아니거나, 혹은 약간의 정신적 문제가 있다고 판명이 된다면 원하더라도 그럴 수 없었다. 가장 최고 수준의 락Lock이 걸린 채로 비련시 내의 비쥬얼을 경험해야 한다.


제냐는 기본 설정에서 바꾸지 않았다.


'제냐 킴'의 몸을 조종하는 임시 AI가 아니라 김서원 본인이었기에.


이름모를 여자 술사의 목이 날아가는 장면은 흐릿하게 보였다. 그 내부의 단면이나, 혈액 역시 빛의 입자가 대신한다. 일반적인 시야라면 이런 모자이크가 필요 없을 정도로 빛이 별로 없는 밤의 일이었다.


그러나 제냐는 야간시가 발달되어 있다. 멀고 작은 것도 선명하게 보았고.


움찔, 하고 움직이는 작자들이 곧바로 다음에 느껴졌다.


제냐는 다음 사냥감을 찾았다.


암살조들은 자신을 찾아왔으리라.


자신이 가만히 있었고, 저들이 사냥을 위해 왔으니. 아마 저 치들은 스스로를 '사냥꾼들'이라고 여겼으리라. 그러나 사냥감은 곧바로 움직였고, 구도를 뒤집었다.


헌터즈 길드는 몇 개의 목표를 사냥하기 위한 길드였고, 공동체다.


이 게임의 라스트 씬을 진지하게 노리고 있는 릿샤나 호아킨도 있었고. 제냐나 최태현, 라이엔도 모두 나름의 목적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중간 목표로서는, 그들을 노리고 있는 시나리오 퀘스트의 '메인 빌런'을 도리어 사냥하자는 의미가 있었고.


사냥감으로 불리는 건 사실 아주 달가운 일이다.

오만하지 않은가, 사냥꾼은.


사냥감을 잘 관찰하지 않고 미리 그들을 타겟으로 삼은 작자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사냥감으로 삼기에 가장 좋은 이들이다.


스포츠는 좋아하는 편이다.


이 게임에서 재미가 있는 구간은. 이처럼 목표를 잡기 위해 빠르게 달릴 때가 있다. 보스몹의 숨통을 끊을 때.

그들을 덮쳐 오는 위협에 정면으로 거스르며 물살을 반대로 타고 나갈 때.


제냐의 감지 능력이 주변을 넓게 인지했다. 자신이 있는 곳으로부터 적어도 반경 2, 300여 미터 정도는 한 번에 커버가 가능하다. 그 정도 거리가 제냐가 주 전장으로 삼기에 딱 좋은 범위였다. 칼부림을 하기에 좋다.


현실의 일이라고 한다면 아득한 거리다. 칼을 들고 뛰어가다가 지칠 지도 몰랐고. 총이라면 가능은 하겠다. 제냐는 원거리 무기는 쓰지도 않지만. 칼을 들고, 직접 화살이나 총알처럼 뛸 수 있었다.


콱,


하고 석재로 옹골차게 지어진 건물의 옥상을 박찼다. 맥기 조르드가 있던 곳이다. NPC 하나는 이미 클리어 했다.


몇 녀석이 왔는지 모른다.


이길 수 있을까,


를 생각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이겨야만 했고, 아니면 게임 오버다.


현실이었다면 훨씬 조심했을 일이다.


분명하게 느껴지는 인기척들의 위치를 파악한다. 머리에 평면적인 맵이 떠오른다. 맵의 위를 뛰어다니는 다섯 개의 푸른 점들.


어두운 배경의 지도 위에 녹색 야광으로 건물과 길들이 표시되었다. 그러고자 한다면 3D 맵을 머리 한 켠에 띄울 수 있었다. '띄웠다'는 건 비유가 아니었다. 제냐의 시점에서 볼 때, 인지되며 동시에 그의 눈에 증강된 맵 비쥬얼이 배경 위에 그려진다. 머리맡 위에 선명하게 그려진 지도이다.


제냐의 스킬과 감각이 연동된 지도였다. 실시간으로 상대의 위치가 움직였다. 굳이 고개를 들어 머리 위에 있는 큰 지도를 보지 않더라도 머리속에 정보가 들어온다.


다섯 개의 푸른 점은 빠르게 거리를 벌린다. 생각보다 제냐가 위협적으로 구는 것이 예상 외일 테다.


가장 가까운 쪽을 향해서 제냐가 건물들을 넘는다.


목조 건물, 혹은 석조.


여러 바닥을 밟으면서 거리 위의 허공을 달렸다.


밤바람이 조금 찬 것도 같다. 나들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속도감이 지나치다. 산책은 아니고.


오늘 처음 보는 춤 상대들과 격정적인 춤을 춰야 하리라.


제냐의 박자에 따라오지 못한다면 다섯 명 까지는 아마 순식간에 없어질 테다.


그 이후로는 알 수 없다.


일단 자신의 감각에 걸린다는 게, 그보다 그리 역량이 높잖다는 증거다. 그리고 제냐는 빠른 속도전, 근거리와 솔로 플레이에 특화된 전투 클래스 유저고.

상대가 NPC라면 그를 이기기 쉽지 않을 테다. 유저들만큼 다양한 장비와 스킬, 스탯까지 모두 갖추기란 어려운 법이었으니. 설령 같은 레벨이라고 해도 체급에서 차이가 난다.


제냐가 레벨이 더 높다면, 아마 결과는 뻔하다.


지금 위치를 잡지 못한 여러 명의 경우에는(아마 분명 더 있으리라 여겼다) 결과를 짐작할 수 없고.


어디까지 통할까.


콱.


제냐는 다시 한 번 새로운 석조 건물의 옥상을 밟고 뛰었다. 망토를 입은 사내가 한 번 더 거리 위를 난다.


금세 다음 녀석에게 다다랐다. 도망치는 속도를 보니, 그리 빠르지는 않은 것 같다.


이전에 왔던 작자들과 비교해서 크게 나아지지 않은 솜씨들이었다. 미세하게 따진다면 조금 더 고수이기는 하겠으나.


확실하게 100레벨, 고수급 이상에 다다랐다고는 말 못할 느낌이다. 중수급 유저가 지금의 제냐를 감당하기란 불가능하다. 특별한 수단을 몇 개쯤 운용한다면 혹시 모르고. 설마 지금 상대하는 치들이 목숨을 도외시한 고수 대적용 필살기라도 갖고 있을까.


아니기를 바라면서.


우선 한 놈의 기척을 확실히 잡은 제냐는 다시금 뒤를 노렸다.


'기사'였다, 이번의 기척은. 검을 다루던 무슨 무기를 다루던. 일단 근접전에 능한 기력술사임이 분명했다. 움직임의 태가 달랐다. 반응도 기민하고.


"흡."


보라.


벌써 저렇게, 뒤를 점한 제냐에게 반격하려 몸을 돌리고 있지 않은가.


장도 하나와 대거. 제냐는 훕, 하고 숨을 내뱉으며 다음 발걸음을 강하게 찍었다.


석조 건물의 옥상 바닥이 조금 부서졌다. 금이 갔고. 큰 충격은 아니었다. 제냐가 다루고 있는 MP의 총량과 밀도를 생각하면.


제냐도 나름, 고수 나부랭이다.


기력술을 정밀하게 다룬다.


진각進脚을 밟을 때 지나치게 주변을 부수지 않으려 상쇄하는 MP를 쓰고 있다. 그럼에도 그의 컨트롤을 벗어나 건물이 터질 정도로. 강하게 밟았다는 소리다.


복면을 쓰고, 검은 천 옷으로 제 몸을 다 두르고 있는 사내였다. 뒤돌아 보는 얼굴에서는 안광만이 유일하게 구분 가능한 인상이다.


처음으로 마주친 여성과 비슷한, 갈색 눈동자였다. 아마 인종이 같은 모양이지. 복면 위로 드러나는 콧대 조금도 백인의 그것처럼 느껴진다. 천으로 둘러싼 머리에는 금발이 있을까.


홉뜬 눈동자는 경악을 담고 있다.


그럴만도 할 것이다.


‘눈동자’는 아주 오랜만에, 놓쳤던 적을 만난 참이었으니.


알렌은 예전보다 훨씬 빨라져버린 제냐를 상대한다.


죽을 각오로, 몸을 돌려서 좌측에 맨 칼날을 뽑아든다. 발검과 동시에 우상단으로 휘두른다. 절실한 검기劍氣를 담아서. 이 세계에서 검기란 이름뿐인 무엇이 아니다. 실제로 기력술이 존재하는 세상이었고, 유형화된 기운은 강철의 날보다 더욱 예리하다.


알렌은 온전하게 검기를 다룰 줄 모른다. 그러나 간혹, 중수들 중 최정상급에 달한 이들이 발하는 기력술의 칼날을 ‘검기’라고 부를 때도 있었다. 고수급이 희귀하다보니.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기술의 이름이 된 것이다.


정말로 ‘소드 마스터’의 칭호를 얻은 자들이 쓰는 그것에 비한다면. 확실히 모자람이 있고, 흔들리는 구색의 검기였다.


알렌의 검은 칼날이 금빛의 검광을 둘렀다. 어둠 중에 제법 빛을 내고 있었다. 이런 검으로 암살이 과연 가능할까. 물론, 평소에 알렌은 암살자로서 야습을 할 때 기운을 조절한다. 빛이 주변으로 뻗어나가지 않게끔.


지금은 그따위 사소한 신경을 쓸 겨를이 없다.

죽기 살기로, 최대한의 검기를 벼려 담아서 휘둘러야 했다.


비스트 슬레이어가, 알렌의 검격 정반대에서 휘둘러진다.


익숙한 칼이다. 알렌은 눈에 그것을 담았다. 빌어먹게 낯이 익다.


얼굴을 가리지도 않고, 야밤에 그를 덮치고 있는 놈.


제냐 킴이다.


사냥감 A.


알파 사냥감.


최근 대공의 심기를 가장 어지럽힌 암살 대상자.


알렌은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본능적으로 파악했다.


저 한 번의 검격을 막아낼 수 있을까?


못 막아내면 그대로 죽는다.


알렌은 필생의 의지로 팔을 뻗었다. -챙!


강렬한 금속성과 함께 거칠게, 불꽃이 튀었다.


야밤의 어느 건물 옥상.


절예絶藝를 보이고 있는 검술가 둘이 합을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왈츠의 첫박자는 아주 무례하게, 짓쳐 들어왔다.


다음 박자를 쫓지 못한다면, 두 사람 중 하나는 죽게 된다.


알렌은 제 의사와 상관 없이 춤에 참여한 둘 중 하나였고. 복면 속에서 이를 악물었다. 어찌나 세게 물었는지. 어금니가 근처의 다른 이빨을 갈아냈다.


*

christopher-campbell-Gkf6_gNdSUM-unsplash.jpg


작가의말

삶의 마지막이 될 것인가,

알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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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 231. 비극, 누군가의 입장 24.03.20 11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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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 228. 괴물의 위용에 대하야 24.03.19 15 1 13쪽
228 227. 구조하러 온, 괴물 24.03.19 17 1 16쪽
227 226. 대립 24.03.19 14 1 14쪽
226 225. 술사조 조장 24.03.19 12 1 11쪽
225 224. 부부단장, 히베 24.03.18 14 1 24쪽
224 223. 작게 숨을 내뱉었다. 24.03.17 16 1 23쪽
223 222. 누구의 끝, 그 다음 24.03.15 17 1 16쪽
222 221. 누구의 끝 24.03.14 18 1 10쪽
» 220. 두려움이 이빨을 갉아먹다 24.03.14 16 1 19쪽
220 219. 떨어지듯 달리다 24.03.14 13 1 12쪽
219 218. 제냐는 미리 준비했다. 24.03.13 16 1 13쪽
218 217. 다이스Dice, 릿샤, 흑각 24.03.12 16 1 22쪽
217 216. 밤을 꿰뚫어보는 까마귀는 누구일까 24.03.12 23 1 11쪽
216 215. 살수조 모집 24.03.11 17 1 16쪽
215 214. 사냥감 A 24.03.10 18 1 12쪽
214 213. 이미 따라진 와인, 근처로 달려온 골칫덩이 24.03.10 16 1 16쪽
213 212. 조금 시간이…. 24.03.10 15 1 17쪽
212 211. 한 번 불꽃처럼(악의) 24.03.08 15 1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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