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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군 님의 서재입니다.

루미네라스 연대기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도라군
작품등록일 :
2016.04.10 10:35
최근연재일 :
2016.05.03 21:37
연재수 :
21 회
조회수 :
4,007
추천수 :
37
글자수 :
196,239

작성
16.04.16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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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자
22쪽

북쪽으로 가는 여정 (2)

DUMMY

양치기가 숨이 넘어갈 듯 촌장을 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촌장은 마을 회관에 설치되어 있던 마법 장치로 전달된 왕궁의 소식을 방금 막 전달받았다. 마법 장치는 상호작용이 가능한 마법을 걸어둔 마법석이 담겨있는 작은 상자였다. 각 마을의 회관이나 관공서, 전방의 초소에까지 왕국의 곳곳의 장소에 비치되어, 위급한 상황이나 특별한 일들이 있을 경우 한 번씩 각 장소들로 소식을 전달하거나 명령을 하달하기 위해 만든 장치였다.


[왕위 계승식 도중 근위 대장인 로스 아마드레인이 왕자님을 시해했다. 현재 역적 로스 아마드레인이 도주 중일 가능성이 있으니, 전군은 비상태세를 유지하고 모든 길목을 차단할 것을 명한다. 더불어 각 마을은 모든 수색과 조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할 것을 당부한다. 또한 왕자를 시해한 역적 로스 아마드레인을 발견한 자는 본국으로 신속히 연락을 할 것을 당부한다. 그의 모습을 묘사하는 내용을 첨부하니 이를 숙지하고, 도시와 각 마을의 관리자들은 모든 이들에게 공표하도록 하라.]


촌장은 왕궁으로부터 전달된 소식의 전문을 듣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왕위 계승식에서 왕자가 살해당한 것도 엄청난 충격이었지만, 왕자를 살해한 이로 지목된 자가 얼마 전 마을을 다녀갔던 근위대장이라는 것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라고 있었다. 그때 막 회관으로 들어온 양치기가 시끄럽게 바깥에서 외치고 있었다.


"아이고! 촌장님! 큰일 났습니다."


아직 왕국의 소식을 아무에게도 전하지 않았는데, 무슨 일인가 싶어 양치기의 부름에 촌장의 방에서 나왔다. 양치기는 식탁 앞 나무의자에 앉아서 헐떡이는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못볼 것을 본 듯한 그의 얼굴을 보고 촌장이 물었다.


"가뜩이나 지금 정신이 없는데 너까지 뭔 일이라고 이리 소란스러우냐? 또 양들은 어쩌고 왔단 말이냐? 아니 혹시 늑대라도 나타난 게냐?"

"아이고,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악마가 나타났습니다."

"악마?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거친 숨을 몇 번 더 몰아쉬더니 안절부절못하며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던 양치기는 식탁에 놓여있는 주전자의 물을 컵도 없이 벌컥벌컥 마셨다. 급히 물을 마시느라 가슴팍에 쏟아져 흘러내리는 물들을 닦지도 않고 다시 헐레벌떡 말을 이었다.


"촌장님. 물레 방아 집에 아가씨 댁에 악마가 나타났습니다. 제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시커먼 날개가 6개나 달린 놈이었습니다."

"물레 방아 집에?"


촌장은 마법 장치에서 들었던 소식과 뭔가 연관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번뜩 스쳤다. 촌장은 양치기에게 진정하고 상세히 이야기해보라 했다. 양치기는 그가 양을 치기 위해 이동한 지역에서 발견한 빛줄기를 따라 리베레아의 집으로 이동한 것들과 그곳에서 본 상황을 빠짐없이 촌장에게 설명했다.


"빛줄기가 떨어진 곳에 한놈이 그렇게 악마로 변하더라니까요! 시뻘건 머리색이었는데... 분명히 언젠가 본 적이 있는 듯한 낯익은..."


양치기는 말을 하다가 곰곰이 생각하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질질 끌었다. 촌장은 양치기의 말을 듣다가 그의 기억을 돕기라도 하듯 말했다.


양치기는 손바닥 위로 주먹을 탁 치며 촌장을 바라봤다. 동그랗게 눈을 뜨고 놀란듯한 양치기의 표정을 보고 촌장도 화들짝 놀랬다.


"맞습니다! 그래! 그날 아침에 만났던 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로스가 델라스를 다녀갔던 아침에 밥을 먹던 두 명의 양치기 중 한 명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찾아왔던 높은 양반을 뭔 일인가 싶어 지켜봤던 터라 낯이 익었던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양치기는 촌장의 얼굴을 보며 벌겋게 흥분했다.


"맞아요! 촌장님. 그런데 촌장님 어떻게 아셨답니까?"

"흠. 기다려라 곧 마을 회의를 할 때 소상히 이야기해줄 터니, 넌 어서 양들을 목장에 가두고 사람들에게 해가 지면 모두 여기 모여있으라고 전해라. 급한 일이니 한 명도 빠짐없이 모여 있어야 한다. 난 어서 옆 마을에 다녀와야겠다."

"가드론에 말씀이십니까?"

"그래. 관아에 먼저 알려야 할 것 아니냐. "

"알겠습니다. 역시 악마가 나타난 게 분명하지요? 아니 이런 작은 마을에 이게 뭔 일이랍니까!"


양치기는 촌장에게 호들갑을 떨며 이런저런 말을 했는데, 촌장은 어서 빨리 시킨 일이라 하라며 혼을 내고 가드론으로 향했다. 가드론은 델라스와 몇 개의 마을에서 키우는 양들의 털을 모으는 집하장의 역할을 하는 마을이었다. 넓은 동산과 양들만 가득한 델라스와는 달리 양들의 털을 모아 직물을 짜는 직공이 많이 모여사는 곳으로 주로 양털을 이용해 옷을 만들고 양털로 실을 만드는 곳이 많았다. 또 가드론에는 왕가에 공납을 하기 위한 관아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가드론의 관아는 왕성으로 납품할 공납을 준비하는 일과 왕궁과 각 마을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가드론에 있는 관아에는 촌장의 방에 설치된 마법 장치와 달리 양방향 통신이 가능한 마법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각 마을은 왕성으로 보고할 일이 생기면 관아에 내용을 전달하고, 관아에서는 접수된 내용을 자신들이 처리할 문제와 왕성으로 바로 보고할 내용으로 분류했다. 모든 마을에 양방향 소식을 허용하면 되려 혼선이 생길 수 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그 때문에 왕성은 작은 마을을 몇 개로 묶는 지점에 설치된 관아에 이런 업무를 처리하는 관리직을 반드시 구성해 두었다. 쓸데없는 소식까지 왕성으로 몰려오는 것을 방지하고 자체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도록 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촌장은 일전에 마을을 찾아왔던 로스에 대한 일과 양치기가 말했던 내용을 가드론의 관아에 먼저 전달하기로 했다.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오려면 빠르게 서둘러야 했기 때문에 자신의 노쇠한 말까지 마구간에서 꺼내어 가드론으로 이어진 길을 내달렸다.



"이봐, 이건 너무 추하잖아. 옷이라도 하나 제대로 걸쳐 입자고."


칼라스가 로스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칼라스는 분명히 로스의 내면 안에 있다지만, 매번 바로 옆에서 속삭이듯 말을 걸어왔다. 로스는 그런 것들이 무척 거슬렸지만 지금 당장은 그것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로스는 델라스를 벗어나 왕성으로 향하는 길목에 자리 잡은 숲으로 들어갔다. 어느새 해가지고 주변은 어둠에 잠기고 있었다. 로스는 숲의 나무 사이에서 가장 높은 나무를 찾으며 깊은 곳으로 움직였다. 세 아름은 족히 넘는 아름드리나무를 발견하고 나무에 오르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나무들 틈 사이로 부는 바람을 타기도 하고, 뻗어 나온 가지들을 지지대로 밟아가며 빠르게 나무의 꼭대기로 향했다. 칼라스는 그런 로스가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이야. 이거 놀라운데! 너처럼 바람을 잘 타는 녀석은 오랜만인데. 바람의 민족이라지만 그래도 놀라운 몸놀림이야."

"조용히 좀 해줄래?"


나무의 가장 높은 곳에 뻗어 나온 가지에 도착한 로스가 칼라스에게 말했다. 아마 모르는 사람이 보면 혼자 중얼대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칼라스는 콧방귀를 뀌었다. 가장 높은 곳에서 뻗어 나온 가지의 끝자락에 발을 딛고 서서 숲으로 가려져 있던 주변을 둘러보았다. 평소보다 훤하게 보이는 것이 아마도 칼라스 때문일 것이라고 로스는 생각했다. 역시나 그런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칼라스가 말했다.


"이 정도는 뭐 약간 밝아진 정도지 내 능력의 발끝도 미치지 않아. 날개를 좀 펼쳐줄까?"


칼라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귀 뒤쪽 언저리에서 날개가 펼쳐졌다. 처음 날개가 나올 때와는 달리 아무런 고통도 없었다. 다만 날개가 펼쳐지는 감각만 느껴질 뿐이었다. 펼쳐진 날개는 로스의 얼굴 전체를 뒤덮었다. 까만 깃털이 눈앞을 가렸음에도 불구하고, 신기하게도 숲을 넘어 더 멀리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신비한 경험이었다.


"어서 익숙해지라고. 내가 백 번을 설명한다고 해서 될 문제는 아닌 거 같으니 스스로 익숙해지는 방법 밖에는 없잖아."


로스는 이곳저곳을 집중하며 살펴 봤다. 숲을 넘어 멀리 있는 왕성도 어렴풋이 보일 정도로 엄청난 시야를 제공하는 능력이 감탄스러웠다. 가까운 곳에 집중하면 더욱 놀랍게도 나무 뒤로 가려져 보이지 않는 것이 확실한 작은 동물들의 움직임도 보였다. 그리고 어둠이 자리 잡기 시작한 숲의 구석구석까지 대낮에 코앞에서 보는 것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이렇게 더 멀리, 더 자세히 보이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주변의 모든 소리가 한꺼번에 몰려 들어왔다. 귀가 아플 정도로 느껴졌다. 하지만 조금 집중을 하면 원하는 것만을 또렷하게 들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깨달았다. 아마도 멀리 볼 수 있는 것처럼 멀리 있는 소리도 더 자세히 들을 수 있는 능력 같았다. 물론 시야만큼 엄청난 거리의 소리까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하지만 나무 뒤로 가려져 있던 동물을 바라볼 때는 나뭇가지를 밟는 작은 소리까지 또렷이 들렸다. 엄청난 능력이었다.


"냄새까지 확실히 느껴지지? 대단한 경험일 거야. 하지만 전투 중에는 되려 이런 감각이 더 방해가 될 수 있으니 주의하라고. 하긴 뭐 칼이 막 날아드는 상황에서 멀리 볼 이유가 있겠냐마는."


칼라스의 날개로 인해 로스는 숲에서 멀리 길마다 배치된 병력들을 볼 수 있었다. 비상시를 대비해 늘 훈련해오던 배치 방법이었다. 길목을 막고 차단선을 만들어서 적을 가두는 봉쇄선들이 이곳저곳에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까진 로스가 어느 방향에 있는 것인지 확실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촘촘한 봉쇄선보다는 넓게 길목을 막고 경계하는 수준이었다. 보다 봉쇄선이 촘촘히 만들어지기 전에 사이를 뚫고 북쪽으로 가야 했다. 왕성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의 길목을 모두 살펴보고 나서 칼라스의 날개를 눈앞에서 펼쳐 사라지게 만들었다.


'마침 그믐이라 밝지 않아 다행이야. 밤사이 일단 동쪽을 뚫고 위쪽으로 우회해야겠군. 자이덴을 들를 필요가 있겠어.'


왕성의 동쪽으로는 넓은 평야가 있었지만 평야를 뚫고 나면 다시 숲이 이어졌다. 숲에는 자이덴이란 이름의 오래된 마을이 있었다. 바람의 민족들이 모여사는 로스의 고향이었다. 평소의 훈련으로 미루어 생각해볼 때 이미 마을에도 분명 소식이 전달되고 병사들이 주둔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다소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자신이 살던 집에 들를 필요가 있었다. 보다 경계가 강화되기 전에 뚫어볼 생각으로 나무 위에서 빠르게 내려왔다.


숲을 가로질러 바람을 타고 빠르게 달렸다. 이리저리 뛰어오르며 공중을 날아오르듯 마구 내달렸다. 순식간에 숲의 끝자락이 보이기 시작했다. 칼라스는 그런 로스의 움직임에 신이 난듯싶었다. 숲을 벗어나는 길목에 넓은 평야가 눈에 들어왔다. 밀이 빽빽하게 자라서 밀밭에는 꽃이 가득 피어있었다. 몸을 숙이고 밀밭을 가로지른다면 다소 시간이 지체되더라도 평야를 뚫고 자이덴으로 향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로스는 숲의 가장자리에서 길을 지나는 사람들이 없는지 살펴 보았다. 다행히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로스는 길을 건너 밀밭으로 숨어들어갔다.



그 시각 왕성에서는 비상 대책 회의가 열렸다. 월대에서 왕자의 시신을 수습하고, 모여있는 인원들을 해산시켰다. 슬픔에 빠진 국왕은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고 왕의 침실로 향했다. 비상 대책 회의에는 군단의 사령관들과 왕실의 귀족, 그리고 마법 협회의 고위직들만 모인 회의였다. 회의의 중심에 적장자 듀라드 왕자가 심각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평소 회의에 참여하지 않기도 했던 듀라드 왕자였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회의에 참석해서 많은 이들의 의견을 듣고 있었다.


"애초 이런 일들이 일어날 것을 염려했기 때문에 우리가 그토록 근위 대장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 아니오! 사태가 심각해지고 나서야 외양간을 고치는 꼴이라니..."


지크리트가 혀를 차며 말했다. 회의에 자리한 마법 협회의 마법사들이 지크트리의 말이 맞는다며 맞장구를 쳤다.


이런저런 말들로 다소 회의가 시끄러워지자 듀라드 왕자는 심기가 더 불편해졌다. 가뜩이나 행사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마음이 복잡했는데, 회의가 시끄러워지자 더욱 심난해지기만 했다. 듀라드 왕자는 국왕이 원망스럽다는 기분마저 들었다. 국왕이 건강한 몸이었다면 지금보다 더 편하게 상황을 지켜볼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듀라드 왕자 자신도 동생인 필라드 왕자의 죽음이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 둘의 친분이 각별한 사이도 아니었기에 국왕이나 시이라드 공주처럼 졸도할 정도로 격하게 느껴지는 감정도 아니었다.


듀라드 왕자는 왕실의 모든 것이 귀찮았다. 어릴 때부터 적장자라는 운명으로 태어난 그는 숱한 공부와 훈련으로 지쳐있었다. 일반 시민의 아들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를 꿈꾸며 자신의 운명을 거부하고 싶었다. 적장자라는 부담은 그가 커갈수록 더 크게 다가왔다.


그러던 어느 날 왕궁의 연례행사 잠시 자리를 비운 집사를 피해 시가지로 빠져나간 일이 있었다. 당시에는 아직 호위무사도 없었기 때문에 그는 연례행사에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 쉽게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시장을 둘러보고 마을의 곳곳을 돌아다니다면서 듀라드는 많은 생각에 잠겼다. 마을 곳곳을 뛰어다니던 아이들을 보면서 더욱 자신의 처지가 딱하게 느껴졌다. 당시 15살이었던 자신보다 한참 어린아이들을 보면서, 자신도 이렇게 자랄 수 있었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었다. 저녁에 되자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를 피하지 못하고 젖기 시작한 듀라드 왕자는 추위에 떨면서 시장을 뒤로하고 별수 없이 왕성으로 돌아왔다.


그가 연례행사에서 빠져나간 뒤 듀라드 왕자가 없어진 것을 알고 난리가 났었다. 소중한 적장자가 사라지자 집사는 업무를 소홀히 했다는 이유로 매질을 당했다. 이후 왕성으로 돌아온 듀라드 왕자는 매질을 당한 집사를 보고 치를 떨었다. 자신으로 인해 애꿎은 집사가 매질을 당한 것에 몹시 화가 났었다. 집사는 유일하게 자신이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사람이었기에 듀라드 왕자는 왕실의 처사에 더욱 불같이 화를 냈다.


그날 밤 듀라드 왕자는 적장자인 자신의 운명을 떨쳐내겠노라 마음먹었다. 다음날부터 듀라드 왕자는 매일 밤 연회를 돌아다니며 늦게까지 유희에 빠져 흥청망청하게 놀았다. 지칠 때까지 놀다가 늦잠을 자고 피곤하다며 훈련과 공부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개월의 삶을 반복했지만 좀처럼 쉽게 적장자라는 위치는 자신에게서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던 와중에 작은 희망이 생겨났다. 동생 필라드 왕자가 총명함으로 사람들에게 새롭게 인식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듀라드 왕자는 필라드 왕자가 자신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리라는 기대를 하며 더욱 방탕한 삶을 이어갔다. 호위무사들에게도도 일체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추천하는 이들을 호위무사로 두게 되면 적장자라는 위치를 벗어나는데 더 힘든 요소만 될 것이란 생각에 일체의 관심을 끊어버린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우르의 사건을 곁에서 지켜보던 듀라드 왕자는 더욱 왕실의 관습이나 귀족들의 행동에 치를 떨었다. 그도 적잖게 우르의 사건에 지크트리가 개입되어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귀족들의 그런 안하무인 한 행동들에 치를 떨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밤마다 여는 연회에는 꼬박꼬박 참석했다. 그런 행동은 방탕한 그의 모습을 모두에게 보여주기 위해 나름의 노력이었다. 그리고 몇 해 후 일어난 전쟁의 참상은 이후 그가 왕실의 회의에도 참석하지 않게 만드는 이유가 되어버렸다. 전쟁 중 모든 것이 사그라지는 막대한 공포 속에서도 왕실이 짊어져야 하는 것들이 더없이 그에게 무거운 짐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모든 관계를 끊어버리기 위해 전쟁이 끝나고 왕국이 다소 안정기에 접어들자 일찌감치 결혼을 하고 자신의 부인과 아성에 들어가 사치를 부리며 대외적인 활동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렇게 몇 년 동안 그의 삶은 그가 바라던대로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이후 필라드 왕자도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내심 듀라드 왕자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난생 처음 행복함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가혹한 운명은 결국 그를 다시 이런 불편한 자리로 데리고 온 것이다. 정말이지 너무도 가혹한 운명이라 생각했다.


회의는 로스가 살아있을 수도 있다는 의견에 촛점을 맞추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를 감싸던 빛줄기가 순간이동 마법의 일종임을 알았기 때문에 그의 몸이 반쯤 뜯겨나간 상황이었지만 만약의 가능성을 배재하지 말자는 의견이었다. 지크리트는 당장 추적을 하자고 의견을 제시했다. 지크리트로서는 작은 가능성도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이미 그는 보다 안전한 상황을 도모하기 위해 자신과 내통하고 있었던 밴도 제거하리라고 마음먹고 있었다. 물론 밴은 부분대장이었던 신분이었기에 특수 부대에 의해 취조실에 감금되어 있어서 좀더 미뤄 둬야 하는 문제였다. 그렇지만 그가 자신과의 관계를 털어놓을 리가 없었기에 그것은 그것대로 내버려 두기로 했다.


"그럼 조사단은 어디의 주체로 진행되는 것이 좋겠소?"


미간을 찌푸리며 듀라드 왕자가 말했다. 지지부진한 대화들로 길어지기만 하는 회의를 어서 끝내기 위해 꺼낸 말이었다.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이 듀라드 왕자의 말에 집중했다. 그때 지크리트가 말했다.


"당연히 우리 마법 협회가 하는 것이 합당하다 생각합니다. 현재 주변 인물들을 취조하는 특수 부대는 지금의 방침대로 군단에서 운용하는 것에 큰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그가 살아있을 수도 있다는 가정하에 강력한 소환술을 가진 자라는 점을 고려하여 조사단은 이동 마법과 속박 마법들을 동원한 마법사와 혹시나 모를 유혈사태를 고려하여 강력한 마법사들을 함께 배치하여 운용하는 것이 올바르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면 되겠소?"


듀라드 왕자가 지크리트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른 이들에게 물었다. 그런 질문에 모두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눈치만 살펴보고 있었다. 소환술이 뛰어나고 전투 능력이 출중했던 그를 잡기에는 다소 부담이 되었기 때문에 군단의 사령관들도 별말을 하지 않았다. 만약 놓치기라도 한다면 그 모든 질타를 감당하기 곤란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더 기다리지 않고 듀라드 왕자가 지크리트에게 그리하라고 말했다. 회의를 끝내고 그만 쉬고 싶었다. 물론 처소로 갈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아무도 없는 곳에 홀로 있는 편이 지금의 복잡한 마음을 달래기엔 더 좋아 보였다.


그때 급히 들어온 전령이 지크리트에게 귓속말로 말을 전했다. 지크리트는 화들짝 놀랐다. 그가 전해 들은 내용은 델라스로부터 날아온 이야기였다. 델라스를 그가 방문한 적이 있었다는 것과 한 여자아이가 있는 집을 방문했다는 것. 그리고 빛과 함께 그가 다시 나타났다는 내용들이었다. 그 내용엔 양치기가 묘사한 그의 모습도 포함되어 있었다. 지크리트는 전령의 말이 끝나자 벌떡 일어나 소식을 모두에게 전했다. 하지만 그가 다시 델라스에 나타났다는 내용까지만 전달했을 뿐 양치기가 묘사한 악마와 같은 모습은 비밀로 감추었다. 일순간 회의는 다시 시끄러워졌다. 듀라드 왕자는 더욱 골치가 아파졌다. 그런 듀라드 왕자의 속내를 알아차린 것인지 지크리트가 말했다.


"왕자님. 한시가 급합니다. 마법 협회로 돌아가 조사단을 구성해서 즉시 파병토록 하겠습니다."


왕자는 지크리트의 말에 고마움을 느꼈다. 이로써 좀 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다른 어떤 말도 하지 않고 바로 돌아가란 말을 했다. 지크리트가 회의실을 나가자 듀라드 왕자는 모두 자신들의 일을 하라며 회의를 해산시켰다. 모두가 회의실에서 나가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며 의자에 깊숙히 기대었다.



회의실을 나와 마법 협회로 가기 위해 서둘러 왕성을 나섰다. 왕성 내에는 마법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왕성을 벗어나 빠르게 마법 협회로 이동할 생각이었다. 왕성의 복도를 걸어가며 내용을 전달한 전령에게 말했다.


"너는 이 시간부로 이 내용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양치기가 보았다는 그놈의 모습은 더욱 함구해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네.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리고 넌 바로 최초 소식을 접한 이와 그의 보고를 받았다는 그의 상관을 곧바로 나의 집무실로 오라고 전해라."

"네. 알겠습니다.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지크리트의 방향과 다른 방향으로 전령이 이동했다. 지크리트는 성에서 나오자마자 입구에서 바로 순간이동 마법을 사용해서 자신의 집무실로 이동했다. 집무실의 책상에 앉아 시종을 시켜서 마법 협회의 회의를 준비시켰다.


"여섯 장의 검은 날개라. 어째서 그런 것이... 애초 계획과는 뭔가 틀어지기 시작했나 보군.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갈 것 같은 기분이야. 빠르게 싹을 잘라야겠어."


지크리트는 여섯 장의 날개를 가진 악마 같은 모습이란 이야기가 도통 믿어지지 않았다.


작가의말

읽어주시기만 해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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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덴브과 랜서 (1) +4 16.04.23 172 2 17쪽
14 북쪽으로 가는 여정 (5) +3 16.04.21 229 2 21쪽
13 북쪽으로 가는 여정 (4) +2 16.04.18 174 2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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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쪽으로 가는 여정 (2) +2 16.04.16 230 2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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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왕위 계승식 (5) +4 16.04.14 201 3 19쪽
8 왕위 계승식 (4) +2 16.04.13 128 2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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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왕위 계승식 (1) +2 16.04.12 217 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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