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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군 님의 서재입니다.

루미네라스 연대기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도라군
작품등록일 :
2016.04.10 10:35
최근연재일 :
2016.05.03 21:37
연재수 :
2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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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23
추천수 :
37
글자수 :
196,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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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4.16 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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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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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4쪽

북쪽으로 가는 여정 (1)

DUMMY

델라스의 한 동산에 자리 잡은 커다란 나무 그늘 밑에 누워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던 양치기의 머리 위로 한 줄기 빛이 날아갔다. 양치기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서 빛이 날아가는 방향을 바라봤다. 아직도 해가 중천에 떠있는데도 밝은 빛줄기는 확연히 눈에 띄었다.


'대낮부터 저게 뭔 일이람?'


양치기는 무료하던 차에 잘 되었다는 듯 빛이 날아간 방향을 유심히 쳐다봤다. 빛은 분명히 물레 방아가 있는 집 쪽으로 날아갔다. 예전에 할아범이 살아있을 때 방아를 찧기 위해 몇번 들렀던 적이 있는 곳이었다.


'흠. 지금은 여자애 혼자 있을 건데. 뭔 일이라도 일어나는 거 아냐?'


양치기는 리베레아가 마을을 떠났다는 것을 몰랐다. 여전히 그녀가 그 집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무슨 사단이라도 나는 것 아닌가 싶은 마음에 다소 다급해졌다. 몇 번인가 마을 시장에서 식료품을 사러 나왔던 리베레아와 마주쳤던 양치기는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해 남몰래 그녀를 흠모하고 있었다.


양치기는 바닥에 떨어진 밀짚모자를 잽싸게 챙겨들고 양치기는 동산에 풀어 둔 양들을 세어봤다. 양들이 동산 여기저기 모여 풀을 뜯고 있었다. 대강의 숫자를 세어보고 별일이나 있겠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일전에 양 한 마리가 없어져 촌장에게 등짝을 후려 맞고 밤새도록 찾아다닌 기억이 있어서 다소 걱정이 되긴 했지만 리베레아를 떠올리며 마음이 급해졌다. 양들의 숫자를 헤아린 뒤 헐렁한 바지를 추켜올리고 동산을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대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져 감싸고 있는 물레 방아가 도는 집. 그곳의 넓지 않은 마당 한가운데로 빛이 떨어졌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빛은 마당을 가득 채우고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고 있었다. 그 안에 괴로워하는 한 사내가 있었다. 가슴이 반쯤 뜯긴 상황에서 아직도 몇몇의 소환수들이 발버둥 치며 몸을 뚫고 기어 나오고 있었다. 그 때문에 로스는 엄청난 비명을 질렀다. 엄청난 고통으로 의식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끊어질 듯한 의식을 부여잡을 수 있었던 건 몸 안에 들어차기 시작한 어떤 목소리 때문이었다.


'죽고 싶을 만큼 아플 테지? 하지만 아직 안돼. 내가 너를 놓아주지 않을 테니까. 하하'


가증스럽게 느껴지는 목소리가 마치 동굴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울렸다. 소리는 고막 안에서 머릿속으로 다시 뜯어진 몸 한편에 머물렀다가 발끝과 손끝, 머리카락 끝까지 휩쓸고 돌아다녔다. 로스는 고통 속에 몸부림치면서 왕자가 쓰러지던 모습을 계속해서 바라 보고 있었다. 마치 시간의 축이 엉켜 눈앞에서 반복되고 있는 것 같이, 소환수가 왕자의 몸을 뚫고 날려버리던 상황이 계속 눈앞에서 되풀이되었다.


'이곳이 지옥인가...'

'지옥? 지옥이라... 지옥은 애초 네가 살고 있던 곳이 아니었더냐? 하하'


조롱 섞인 웃음이 또다시 온몸에 울려 퍼졌다. 괴로웠다. 이 모든 것이 다 끝나버렸으면 좋겠다고 로스는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도움이 되었던 것인지 일순간 갑자기 모든 고통이 사그라들었다. 눈앞에 몇 번이고 쓰러지던 왕자도 사라졌다. 그리고 빛도 사라지고 모든 것이 어둠에 잠겼다. 마치 어둠이 들어찬 공간에 몸이 붕 떠있는 듯한 묘한 감정이 일었다. 로스는 일순간 드디어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다. 죽음이 다가왔다고 생각하고 담담히 모든 상황을 받아들였다.


"아직 죽은게 아니라니까 그러네."


아까와 같은 목소리였지만 다른 감각으로 느껴졌다. 목소리가 몸의 곳곳에 울려 퍼지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어둠 속 어디선가 로스를 향해 분명히 들려왔다. 뒤쪽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아 로스는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화들짝 놀랬다.


'내가 언제부터 서있었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서서히 한 남자의 발끝이 또렷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내는 점점 가까이 걸어오고 있었는데, 그럴수록 발끝에서 무릎, 무릎에서 허리까지 점점 형태가 확연해졌다.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는 그는 낯익은 옷을 입고 있었다. 로스의 근위복이었다.


"내 이름은 칼라스. 칼라스 바헬라 디오네이다."

"누구지? 내가 아는 이름이 아닌데..."


이젠 여느 때처럼 목소리도 흘러나왔다. 로스는 자신의 음성에 사뭇 놀라며 정신을 차리고 몸을 살펴봤다. 늘 입던 갑주를 차고 깔끔하게 세탁된 듯한 근위복을 입고 있었다. 영문모를 일이었다. 모든 게 꿈이었을까 생각해봤지만 정신은 어느 때보다 명료했고 일어났던 일도 확연한 현실이란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 꿈이 아니야. 현실이지. 그리고 이곳은 나의 공간이다. 아니 원래 너의 공간이기도 했으니 너의 공간이라고 해도 되겠군."


턱을 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로스의 생각을 다 알고 있는 듯했다. 어둠에서 걸어 나와 로스의 몇 발짝 앞에 선 그가 보였다. 이제 머리끝까지 그의 모습이 보였지만 이상하게 얼굴만은 볼 수 없었다.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얼굴이 어렴풋이 보이는데, 그 앞에 검은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며 얼굴을 볼 수 없도록 방해하고 있었다. 한 번씩 얼굴의 형상이 보이는 듯 싶다가도 곧 검게 소용돌이치는 어떤 것으로 인해 일그러지듯 가려져버렸다.


"내 얼굴을 보려고 하지 않는 게 좋아.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웬만한 성자도 내 얼굴을 보는 순간 미쳐버리고 마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인데 넌 누구지?"


키득거리며 웃는 듯한 묘한 얼굴이 순간 스쳐 지나갔다. 그는 고개를 앞으로 쭉 빼고 로스의 얼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로스를 히죽거리며 쳐다보고 있는 듯했다. 로스는 그런 그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여긴 너의 몸 안이야. 내면의 공간이라고 할까? 아니면 정신이 깃든 공간이라고 하는 것이 더 맞으려나? 뭐가 어찌 되었든 이곳은 너의 안이다. 저거 보여?'


손가락을 한쪽 방향으로 뻗더니 어둠 속에 한 지점을 가리켰다. 로스도 손가락을 따라 그곳을 쳐다봤다. 아까까진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공간이었는데, 그의 손이 가리키자 여전히 어둡지만 어찌 된 일인지 마치 대낮처럼 확연하게 칼 한 자루가 꽂혀있는 것이 보였다. 로스는 한눈에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봤다.


"스톰 브레이커...?"

"그래. 맞아. 저기 살아있는 한 자루의 칼. 너의 소환수 맞지? 칼인데 살아있다니 참 재미있는 녀석이야."


4년 전 한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든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곳에서 만난 소환수였다. 마을에 살던 대장장이가 자신의 가족을 몰살시켰던, 천둥의 거인을 증오하며 한 자루의 칼을 만들었다. 5일을 먹지도 않고 잠에 들지도 않으며 오직 칼을 만드는데 매진하던 그가 6일째 그것을 완성했다. 그리고 완성된 칼 앞에서 그는 자결하였다. 완벽하게 만들어진 칼에 저주를 퍼부으며 스스로의 목숨을 칼에 바쳐버린 것이다. 천둥의 거인을 죽일 것을 다짐하면서.


그의 저주 탓인지 몰라도 칼은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늘을 날아다니고 모든 것을 베어 넘겼다. 워낙에 깊이 사무친 원망 탓인지 마을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고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곳을 지나는 자들까지 모두 학살하기 시작했다. 당시 사건을 조사하며 힘들게 사로잡았지만, 로스도 어찌 처분을 해야 할지 걱정일 정도였다. 결국 로스는 칼이 원하는 바를 이루어주기로 약속하고 자신의 소환수로 만들었다. 그리고 몇 달에 걸쳐 겨우 그 칼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의 원한이었던 천둥의 거인을 죽이고 칼이 원하는 바를 이루게 한 것이었다. 그 후 칼은 영원한 복종을 맹세하고 로스의 뜻대로만 움직이는 소환수가 되었다. 로스는 그에게 스톰 브레이커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영원한 복종의 맹세인지 흘러넘치는 마력에 비명을 지르면서도 칼은 검은 심연 같은 바닥에 꽂혀있었다. 로스는 측은한 마음으로 스톰 브레이커를 바라봤다. 칼라스가 히죽대며 그런 로스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제 알겠어? 여긴 너의 몸. 내면의 깊은 곳이지. 이곳에서 계약되었던 모든 소환수가 뛰쳐나간 거야. 네놈의 왕자를 죽이면서! 크하하!"


잔인한 웃음소리가 검은 공간에 메아리쳤다. 일순간 왕자가 느꼈을 고통이 떠올라 참을 수 없는 슬픔이 몰려왔다. 로스는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굵은 눈물방울이 볼을 타고 흘렀다. 바닥에 엎드리듯 주저앉은 로스의 머리 위로 칼라스가 발을 올렸다. 그리고 그대로 로스의 머리를 바닥에 찍어 눌렀다. 로스는 발에 밟혀 얼굴을 바닥에 처박고 쓰러졌다.


"내가 어떻게 해줄까나? 네 녀석을 말이다. 모처럼 바깥에 나오기는 했는데 영 시원찮은 녀석이네. 응?"


바닥에 얼굴을 처박힌 얼굴은 어떤 의욕도 생기지 않았다. 로스에겐 아무런 희망도 남아있지 았다. 그냥 이대로 모든 게 끝이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때 칼라스가 로스의 머리를 바닥에 더 힘껏 찍어 눌렀다.


"이봐. 의지를 좀 가져봐. 날 좀 재미나게 해줘야 하지 않겠어? 이 위대한 악마. 6장의 날개. 마력의 지배자, 칼라스 바헬라 디오네를 말이야."


'마력의 지배자. 그렇구나. 내 몸에 느껴지던 마력은 네 녀석의 마력이었구나. 내 몸에 휘몰아치던 게... 끝내줘. 이대로. 네놈이 악마라면 여기서 끝내줘.'


밴이 새겨둔 연미복의 마법진이 불러들인 재앙의 정체를 알게된 로스는 자신의 소환수가 어찌 그리 미쳐 날뛰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오랫동안 자신과 함께했던 그의 차가운 얼굴이 생각났다. 어째서 그는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는가. 호위무사로서 왕자를 지키는 것이 의무인 우리는 어디서부터 잘못되어 나를 이리 갈가리 찢어 놓을 수밖에 없었을까. 많은 생각을 해봤지만 여기서 그냥 모든 것이 끝나버렸으면 좋겠단 생각으로 귀결되기만 할 뿐이었다.


"이봐. 네놈이 이곳에서 꼬꾸라지든 어찌하든 난 관계없긴 하지만 말이다. 다른 건 몰라도 지크리트를 용서할 수 있겠어?"


지크리트의 미소가 떠올랐다.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분노가 치밀었다. 그의 감정에 반응하듯 검은 공간에 붉은 핏줄기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로스는 손에 힘을 불끈 쥐고 바닥을 짚으며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칼라스는 일어서려는 로스의 머리를 더 힘껏 밟았다. 한번 더 바닥에 콱 하고 처박혔다. 로스는 참을 수 없는 분노에 이를 꽉 깨물었다. 입안에 피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런 로스를 흥미롭게 쳐다보며 칼라스가 로스의 등위를 깔고 누웠다. 칼라스는 로스의 갈색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로스에게 말했다.


"저 아래 명계가 얼마나 따분한 곳인지 알고 있어? 온갖 망령들과 악마가 판을 치고 늘 싸움이 끊이지 않는데도 지루하단 말이야. 그러다가 모처럼 밖으로 나오게 되었는데, 이 기회를 놓치기가 너무 아쉽단 말이지."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

"크크. 소리친다고 뭐가 달라지나 이 사람아. 잠자코 들어봐. 내가 너의 몸에 반쪽을 채워줄게. 너도 봤잖아. 너의 몸이 반은 뜯겨 나가는 것을. 이대로면 그냥 죽는단 말이야. 알고 있지?"


로스는 바닥에 쓰러진 채로 등위에 앉은 칼라스의 말을 분을 삭이며 듣고 있었다.


"물론 공짜로 주겠다는 건 아냐. 재미있는 일을 볼 수 있을 거 같아서 네 몸의 반쪽을 채워주는 대가로 나는 여기 좀 눌러 앉아 있어볼 생각이거든. 그러기 위해서 이곳을 나에게 좀 내줘야겠어. 그런데 말야 작은 문제가 있어."

"문제?"

"몰라서 물어? 네놈의 소환수들이 영 골치 아프단 말이야. 꽥꽥 비명을 질러대질 않나. 달려드는 놈이 있지 않나. 물론 뭐 한 주먹거리도 안되지만. 흠흠. 툭하면 네놈의 몸을 뚫고 나가질 않나. 여하튼 귀찮게도 나랑은 좀처럼 잘 지낼 거 같지가 않아서 말이지.


로스의 등위에 앉아 세운 무릎 위로 팔꿈치를 올리며 턱을 괴고 고개를 삐딱하게 받친 칼리스가 바닥에 꽂혀 휘몰아치는 마력을 참아내며 버티고 있는 스톰 브레이커를 쳐다봤다. 그런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서 생각해본 건데. 둘다 여기서 지내면 어떨까? 네놈이 둘 다 가지고 말이야. 나도 그편이 재미날 거 같긴 한데 말이지."

"마력과 소환수가 함께 할 수 없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인데 뭘 어찌하겠다는 거지?"

"여간해선 함께 할 수 없다는 건 나도 알지. 한데 재미난 생각을 좀 해봤어. 좀 획기적인 방법이라 아무도 생각해보진 못 했을 거야. 바로 내가 너의 소환수들처럼 너와 계약을 하는 거야. 너의 소환수로 말이지. 어때 그럴싸하지?"

"그게 가능할 것 같으냐?"


로스의 대답에 시시하다는 듯 약간 뾰로통해 보이는 목소리로 칼리스가 말했다.


"음... 아무도 안 해본 방법이니 모르지. 분명한 건 아무도 해보지 않았다는 거야. 우리가 인간을 계약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는 있어도 인간이 악마를 상대로 먼저 계약하는 경우는 사실 없거든. 흠. 생각해보니 좀 자존심이 상하려나? 뭐 여하튼 간에 그게 가능하다면 너의 소환수처럼 나도 여기서 살수 있지 않을까? 대신 다른 소환수와 다르게 난 너의 몸의 반쪽을 채우고 있을 거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는 네놈의 소환수들과는 입장이 다르지만 말이야."

"그렇게 한다고 해서 내가 소환수를 부릴 수 있게 되는 것인지는 모르잖아."

"당연히 나도 모르지. 근데 말이야. 소환수를 못쓰게 되더라도 죽어버리는 것보다 낫잖아? 아 그래! 그리고 내게 한가지 생각이 있어."


칼라스가 뭔가 묘안이 떠오른 듯 말했다. 로스는 칼라스의 말에 고개를 돌려 칼라스를 보려고 했다. 하지만 묵직이 깔고 앉은 그 때문에 그가 보이는 곳까지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칼라스는 그런 로스가 재미있다는 듯 그의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가 너의 왼팔을 가질게. 내 힘이 너의 왼팔과 나의 여섯 개의 날개로만 발현되도록 조절해보는 거야. 그리고 남은 너의 한쪽 팔로 소환수를 부리는 거지. 어때 가능할 거 같지 않아?"

"어찌 되든 네 말대로 죽는 것보다야 나을 테니 해볼만하겠지. 하지만 그렇게 하면 난 내 의지대로 왼팔을 못쓰게 되는 건가?"

"그럼 뭐 재미있긴 하겠다만, 그런데 그렇게 하면 더 함께 돌아다니기 어려울걸? 아주 큰 문제가 생기지만 않는다면 몸은 다 너의 의지대로 움직일 거야. 어지간한 일만 아니면 난 여기 있으면서 재미난 것들을 보고 너에게 마력을 빌려주기만 할 거니까."

"어지간한 일?"

"적어도 네가 죽으면 안 되지 않겠어? 기껏 계약까지 하는데 죽어버리면 나도 어찌 될지 사실 잘 모르겠거든. 같이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안 되잖아? 그런 건 최소한 막아야지."

"그렇군. 하지만 소환술을 쓸 수 있다고 하더라도 소환수들 중에선 두손을 사용해서 불러야 하는 경우도 있어. 그럴 때에도 왼손은 쓸 수가 없는 것 아닌가?"


칼라스가 손가락으로 머리를 툭툭 찌르며 가소롭듯이 조롱 섞인 말투로 말했다.


"소환수를 쓰는 녀석이 어찌 더 모르고 있구나. 이건 뭐 내가 설명해주기도 입 아프니 '소렌 미케라오스'라는 이름을 찾아봐. 그럼 알게 될 거야."


그렇게 말하고 로스의 몸 위에 앉아있던 칼라스가 폴짝 뛰어올라 일어섰다. 칼라스가 일어나자 로스도 자리에서 일어나 칼라스의 정면에 섰다. 칼라스가 로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쯤 이제 결정해. 계약을 하든 안 하든 너 이제 곧 죽게 생겼어.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도 네놈의 몸에선 실제로 피가 철철 나고 있거든."

"좋아. 계약하지. 하지만 그전에 한가지 물어볼게 있어."


칼라스가 한숨을 쉬는 듯한 표정이 검은 소용돌이 사이로 또다시 언뜻 비쳤다 사라졌다. 로스는 그런 칼라스의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물었다.


"네 녀석이 말하는 재미있는 것이란 게 어떤 거지?"

"하하. 그럴 줄 알았지. 하지만 말해줄 수 없어! 네 녀석이 계약을 하지 않고 죽어버려서 내가 지옥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해도 말이지. 그편이 훨씬 재미있을 거 같거든. 대신 네 안에서 그동안의 네놈의 행적을 살펴보니 재미난 일이 앞으로 엄청 많아질 것이 분명하단 이야기 정도는 해줄게."


마치 선심 쓰는 듯한 말투로 칼라스가 말했다. 그리고 악수를 하자는 듯 왼팔을 앞으로 뻗었다. 로스는 일순간 저것을 잡으면 계약이 되는 것을 알아차렸다. 로스는 석연찮은 기분이었지만, 자신도 이젠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어둠만 있던 공간에 흘러내리던 핏줄기들이 서서히 발목까지 차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왼팔을 마주 잡자 칼라스가 어둠의 소용돌이 사이로 씩 웃었다. 그리고 오른속으로 소용돌이를 잡아 움켜쥐고 자신의 얼굴 앞에서 뜯어냈다. 소용돌이가 사라지자 로스의 눈앞에 아름다운 칼라스의 얼굴이 보였다. 깊이를 알 수없는 암흑처럼 시커먼 머리칼이 어깨바로 위까지 있었고, 검은 머리칼 사이로 창백한 핏기 없는 얼굴이 무척 대조적인 느낌이었다. 마치 그에게 어떤 색깔도 없는 듯한 무채색의 모습이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동자만은 짙은 붉은 색이었다. 그런 그의 얼굴은 치명적으로 느껴질 만큼의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에 절대적인 공포감이 일 정도였다. 그 얼굴에 미소가 슬며시 피어올랐다.


"오래 쳐다보면 너도 미쳐버릴걸?"


그런 말을 하고 순식간에 로스의 왼팔을 앞으로 잡아당겼다. 칼라스의 힘에 로스의 몸이 칼라스의 몸 쪽으로 확 당겨졌다. 칼라스는 몸을 빙글 돌려 등 쪽으로 로스의 몸을 바치고 왼팔을 자신의 얼굴 앞쪽으로 두르듯 감았다. 그리고 왼팔을 물어뜯었다. 날카로운 그의 이빨이 이두근에 박혔다. 로스는 몰려오는 고통에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칼라스는 더욱 힘차게 물어뜯었다. 그리고 더욱 강하게 힘을 주어 로스의 왼팔을 몸에서 완전히 뜯어버렸다.


로스는 뜯겨나간 왼쪽 팔의 남은 부분을 잡고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창백한 얼굴의 칼라스는 입가에 피를 잔뜩 묻히고 로스의 왼팔을 손에 들고 있었다. 시뻘건 웃음을 짓고 있는 칼라스는 다시 오른손으로 소용돌이를 만들어 얼굴 앞에 펼쳐두었다.


"이제 이 팔은 내가 가질게. 그럼 이따가 보자. 히히"


로스의 비명과 칼라스의 웃음이 공간에 마구 뒤섞이기 시작하며, 핏줄기가 흘러내리는 어둠 속을 마구 헤집고 다녔다. 그리고 그 소리가 아까와 같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몸을 다시 휘감으며 울려펴지기 시작했다. 어두운 공간이 사라지고 로스는 눈부신 빛을 느끼기 시작했다. 빛은 눈을 감고 있는데도 눈꺼풀을 뚫고 그대로 내리쬐는 듯 느껴졌다. 그리고 뜯겨진 왼팔에 다시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온몸을 관통하는 고통 속에서도 왼팔의 감각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반쯤 없어졌던 몸에도 감각이 하나둘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로스는 몸부림치며 바닥에 더욱 웅크렸다. 등 쪽에서 엄청난 고통이 밀려오더니 로스의 등에 갑자기 커다란 날개가 쑥하고 솟아 나왔다. 날개는 커다랗게 펼쳐지며 로스의 몸을 감쌌다. 검은 깃털이 가득한 두 장의 커다란 날개는 로스의 온몸을 덮기에 충분할 정도였다.


'내 첫 번째 날개야. 이 두 장의 날개를 통해서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게 나를 방어할 수 있지. 일종의 나의 갑옷이라고 할까?'


분명히 칼라스의 목소리였다. 머릿속에 그의 음성이 둥둥 떠다니며 깨질 듯이 울려 퍼졌다. 고통스러운 소리에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데 이번엔 귀 뒤쪽에서 작은 날개가 쑥 솟아 나왔다. 등에서 솟아난 날개처럼 크지는 않지만 얼굴을 충분히 감쌀 수 있는 정도의 크기였다.


'내 두 번째 날개야. 이 날개를 통해서 너는 그 누구도 볼 수 없던 어둠을 꿰뚫고 볼 수 있으며 숱한 기척을 알아차릴 수 있지. 오감이 증폭되는 신기한 기분을 느끼게 될 거야.''


그리고 허리에서 그리 크지 않은 날개가 솟았다. 날개는 2 큐빗 정도 되어 보이는 길이였다.


'내 마지막 날개야. 이 날개를 통해서 넌 쉽게 죽지 않는 강인한 생명력을 가지게 되지. 웬만한 고통을 모두 치유해주는 두 장의 날개라고 할까나?'


검고 윤기나는 고운 날개는 빛에 반사되며 표면에 다양한 빛깔을 보이는 듯 반짝 거렸다. 여섯장의 날개는 한번 크게 펄럭이더니 다시 숱한 깃털을 뿌리며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왼팔이 격하게 요동쳤다. 왼팔에 온갖 핏줄이 터질 듯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내 팔을 줘야겠지? 이로써 숱한 마법을 발현할 수 있게 될거야. 너희 인간세계에서 최고라는 불의 민족 마법사들도 다 알지 못하는 강력한 마법들이지. 위대한 마력의 지배자, 칼라스의 힘을 똑똑히 보여주라고. 오만한 그놈들을 말이야.'


왼팔이 안정을 되찾은 듯 잠잠해졌다. 그리고 로스의 갈색 머리가 서서히 붉게 물들었다. 마치 말라붙기 시작한 피와 같은 검붉은 색이었다. 등 뒤까지 자라있던 로스의 갈색 머리는 붉게 물들면서 로스의 허리 넘어까지 자라났다. 마치 붉은 식물이 탐욕스럽게 자라는 듯한 모습이었다.


곧 모든 고통이 사라졌다. 로스는 숨을 헐떡이며 그제야 눈을 떴다. 몸에 갈갈이 찢긴 연미복이 눈에 들어왔다. 온몸은 피가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상처하나 없이 온전해진 몸 위로 붉게 물든 머리칼이 흘러내렸다. 눈의 색깔도 한쪽은 붉은색으로 한쪽은 갈색 눈으로 오드아이가 되었다. 헐떡이던 가슴도 잠잠해졌다.


반쯤 없어졌던 몸도, 칼라스가 가져간 왼팔도 별문제가 없어 보였다. 왼손을 한번 쥐었다 펴보다 주먹을 꼭 쥐었다. 평소와 같이 아무런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힘이 더 용솟음치는 듯 느껴졌다. 그때 칼라스가 로스에게 속삭였다. 아마도 몸 안에서 말하는 것이겠지만 마치 바로 옆에서 귓속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봐. 그만 정신 차리고 어서 주변을 보라고. 저기 재미난 것이 있단 말야."


로스는 주변을 둘러봤다. 로스가 서있는 곳을 중심으로 동그랗게 마법진이 그려져있었다. 떨어지면서 군데군데 땅이 패어있었지만 마법진의 전체 형태가 어떤 것이었는지 알수 있었다. 그려진 마법진으로 부채에 그려진 마법의 문양들이 반응하면서 이동하게 만드는 주문의 일종인 듯 보였다. 마법진의 가장 바깥쪽에 새겨진 어떤 글씨가 보였다. 로스는 몇 걸음 걸어가 그 글씨를 내려보았다.


[보데만 공국 북쪽 산맥, 론페즈 봉우리로 오라.]


필라드 왕자가 남겨둔 글귀 같았다. 어째서 나에게 부채에 담긴 마법을 쓴것인지. 무엇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버리셨는지는 로스는 도통 왕자의 뜻을 알 수가 없었다. 눈물만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그만 질질 짜고 어서 출발하자! 재미난 것들이 잔뜩이야!"


칼라스가 로스의 감정 따윈 신경 쓰지 않는다는 말투로 재촉했다. 로스는 눈물을 닦고 리베레아가 놓아둔 듯한 검은 천으로 덮힌 물체를 보았다. 검은 천을 잡고 벗겨냈다. 검은 천 밑에는 그녀의 그림이 그려진 캔버스들이 차곡히 쌓여있었다. 가장 위에 올려져 있던 캔버스에 일전에 보았던 나비와 꽃이 그려져 있었다. 로스는 그림을 잠시 쳐다보다가 넝마처럼 남아있는 연미복의 남은 천 쪼가리를 찢어버리고 검은 천을 로브처럼 몸에 둘렀다. 그리고 바닥에 새겨진 글씨를 흔적없이 지우고 길을 따라 집 밖으로 나섰다.


로스가 길을 따라 완전히 사라지자 대나무 숲에 숨어 지켜보고 있떤 양치기가 바닥에 주저 앉았다. 사시나무처럼 후들거리는 두 다리를 진정시키며 계속해서 신을 찾으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그는 혹시나 소리가 새어 나올까 봐 입을 한 손으로 틀어막고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칼라스는 그런 양치기를 보며 히죽거렸지만 로스에게 말해주진 않았다.


'북쪽으로 가면 더 재미지겠어. 크크'


칼라스가 로스의 내면 깊은 곳에 위치한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히죽거렸다.


작가의말

12시가 되기전에 올리고 싶었는데 전반적으로 손 볼곳이 많아서 수정이 늦어져서 다소 늦어져버렸네요. 

선작으로 표시해주시고 추천해주시고 덧글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물론 읽어주시기만 해도 저에겐 정말 엄청난 힘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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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덴브와 랜서 (2) +4 16.04.23 182 2 21쪽
15 덴브과 랜서 (1) +4 16.04.23 173 2 17쪽
14 북쪽으로 가는 여정 (5) +3 16.04.21 230 2 21쪽
13 북쪽으로 가는 여정 (4) +2 16.04.18 175 2 21쪽
12 북쪽으로 가는 여정 (3) +2 16.04.17 237 2 25쪽
11 북쪽으로 가는 여정 (2) +2 16.04.16 230 2 22쪽
» 북쪽으로 가는 여정 (1) +2 16.04.16 169 2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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