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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군 님의 서재입니다.

루미네라스 연대기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도라군
작품등록일 :
2016.04.10 10:35
최근연재일 :
2016.05.03 21:37
연재수 :
2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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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4.10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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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3쪽

그림을 그리는 아이 (2)

DUMMY

헬리브 왕국의 수도 헬리브를 벗어나 델라스를 향해 열심히 달렸다. 왕궁을 떠날 때 챙겨온 요깃거리를 먹을 때를 제외하곤 계속 남쪽으로 달렸는데, 이대로라면 예상보다 더 빨리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4일이라는 시간이 있지만 로스는 어딘가 모르게 불안하다는 왕자의 말이 자꾸만 의식됐다. 그런 의심을 덜어드리고자 시간을 더욱 단축하려고 마음먹었다.


수도를 향하는 길이 대체로 잘 정비되어 있었기에 이동에 큰 어려움이 없었는데, 수도에서 멀어질수록 길은 점점 좋지 않게 변했다. 다행스럽게도 어둠이 깔려 잘 보이지 않을 밤이지만 곧 보름이 다가오는 터라 밝은 달이 주변을 비추고 있어 주변이 깊은 어둠에 잠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숲에 들어서게 되면서 주변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델라스로 이동하기 위해선 침엽수가 빼곡히 자리 잡은 숲을 지나야 했다. 로스는 볼틴에서 내려서 말을 손으로 이끌며 걸을 수 있을 만큼 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더 이상 주변이 잘 보이지 않게 되자 이쯤에서 야영을 하기로 결정했다. 볼틴의 고삐를 나무에 잘 메어 두고 로스는 양손을 모아 손바닥에 힘을 모았다.


"밤을 밝혀줘. 켄트리."


손바닥에서 작은 빛에 발산되더니 작은 구체가 나왔다. 구체는 점점 큰 빛을 발산하며 로스의 어깨 높이로 떠올랐다. 바람의 민족들이 모여사는 자이덴 지역에는 켄트리라 불리는 소환수가 많았다. 로스가 처음 자신의 소환수로 삼은 것도 켄트리였다. 켄트리는 작은 공처럼 생겼는데, 몸에서 빛을 내며 주변을 밝혀주는 소환수이다. 소환수들과 계약을 하면 주인의 부름에 따라 언제든 차원을 넘어 공간에 나타날 수 있다.


소환수는 이렇게 실생활에 유용한 생물들이 있는가 하면 공격적이고 사나운 소환수들도 존재했다. 이런 소환수를 어떤 방식으로 다루는 것이 소환수의 실력을 가늠하게 만드는 것 중 하나이며, 얼마나 강력한 소환수를 부릴 수 있는지, 또 한 번에 몇 마리의 소환수를 다룰 수 있는 것인지를 근거로 소환사의 실력을 가름하곤 하는 것이 보통이다. 거기에 더해 적절하게 소환수를 전투에 배치하여 응용하는 기술이 더해지면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반대로 소환사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생물이기도 한 소환수를 다루기 때문에 전투 중 소환수가 죽어버리면 소환수가 죽으면서 생기는 리스크가 그대로 소환사에게 누적되는 단점도 가지고 있었다. 계약을 하며 자신의 내면에 그들의 생명을 공유시키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소환사와 싸울 때는 소환사를 먼저 처리하는 전투 방법을 대대적으로 훈련하기도 했다. 일순간에 소환수를 제압하고 그 리스크를 통해 소환사가 타격을 입는 틈을 이용해 그들을 제압해버리는 방식이었다.


그런 방법 외에도 소환수를 계약하는 방식은 자신의 내면에 소환수를 아로새기는 행위로 이루어진다. 이런 행위를 통해 계약된 소환수는 언제든 부름에 나올 수 있지만 반대로 마력에 취약하기 때문에 소환사들은 마력을 자신의 몸에 취할 수 없게 된다. 상대가 걸어주는 버프의 경우는 자신이 취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힘이 몸에 깃드는 방식이라 관계가 없지만 스스로 어떤 마법을 발현하려 하면 몸 안에서 마력과 소환수의 힘이 격렬히 반응하면서 소환수가 자신들에게 취약한 마력의 힘을 벗어나기 위해 소환사의 몸에서 한꺼번에 튀어나오기 때문에 소환사는 그 순간 즉사할 수 있다는 위험요소도 존재했다. 실제로 마법사와 소환사의 전투 방식에 마력을 주입해서 강제로 소환사에게 마력을 취하게 만든 다음 상대를 터뜨려버리는 방식의 전투도 존재했다.


반면 마법사들은 마력을 집중하여 대기에 흘러 다니는 마나를 근간 삼아 힘을 발현하기 때문에 소환수를 다루는 소환사에 비해 리스크가 적고 안전했다. 그리고 소환수들의 한계를 뛰어넘는 공격력을 갖춘 마법들도 존재하기 때문에 전투에서도 제약이 훨씬 적었다. 이런 몇 가지 이유들로 소환사들에 대한 평가는 언제나 마법사들의 평가에 비해 낮은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인식들이 누적되면서 마법사들도 늘 소환사들을 자신들보다 떨어지는 전력으로 생각하며 그들을 낮게 평가해왔다.


한때 많은 수를 자랑했던 소환사들은 점점 숫자가 많이 줄어들게 되었다. 여러 가지 해법들이 등장하고 마법사들의 존재가 강력히 등장함에 따라 소환사가 되는 자들이 적어진 것이다. 더욱이 소환사는 자신의 소환수를 계약하기 위해 때로는 목숨을 건 위험까지 감수해야 했기 때문에 마력에 재능이 있다면 수양과 공부, 훈련을 통해 강해질 수 있는 마법사가 되는 편이 훨씬 유리했다. 실제로 소환수를 가지기 전의 소환사의 재능을 가진 자들은 마법에도 재능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 둘의 방식이 소환수를 얻으며 갈림길을 가지기 전에는 무척 비슷한 자질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이 소환사인 경우에도 자식에게 자질이 보이면 되려 그를 마법사로 키우는 이들도 많아졌다.


왕궁에서는 전력이 될 수 있는 모든 이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을 의무가 있었기에 소환사들도 마법 협회처럼 협회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소환수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도감을 만들어 소환수들을 기록하며 기술을 발전해 왔다. 소환수만을 이용한 공격에는 한계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검술이나 궁술과 섞어 전투하는 방식들도 함께 훈련하며 그들의 힘을 키워왔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소환사를 대처하는 방식들이 보편화되면서 점점 힘을 잃어갔다. 결국 현재 헬리브에 남아있는 소환사 협회에는 마지막으로 협회에 등록한 이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소환사들의 협회는 날이 갈수록 약해져 갔지만 마법 협회의 힘은 날이 갈수록 강해졌다. 그들은 협회를 통해 늘 새로운 마법을 발표하거나 연례행사에 참여하여 힘을 자랑하고는 했다. 한때 헬리브 왕국 500년을 이끈 전력으로 소환사도 마법사도 동등한 위치에 지위를 누렸지만 현재는 마법 협회가 가장 중요한 국력의 척도가 될 만큼 상황이 바뀌었다. 거기에 더해 해마다 마법 협회는 연례 행사를 열어 새로운 마법을 시연하고 자신들의 힘을 자랑하기도 했다. 행사에 참관하는 국민들은 더욱 고양되어 마법사의 꿈을 키우기도 하고 그들이 있기에 왕궁의 평화가 지속될 수 있다는 의식을 가지기도 했다.


그런 마법 협회에서 바람의 민족 출신이면서 소환수를 부리는 소환사인 로스는 늘 인정하고 싶지 않은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그를 깎아내리고 다시 그 자리를 자신들이 가져가려는 노력들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숱한 임무들을 통해 스스로 얼마나 뛰어난 전력인지를 증명해왔던 로스를 쉽게 끌어내릴 수가 없었다. 이제는 근위대장에까지 오른 로스의 지위를 위협하는 것은 더욱 곤란한 상황이 되었다.


실제로도 마법 협회에서 로스를 끌어내리기 위한 시험을 몇 번이건 했었지만 늘 수포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실패는 마법 협회에게 되려 좋지 않은 인상을 심어주기도 했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필라드 왕자의 호위무사였기 때문에, 로스에 대한 시험은 왕자에 대한 시험이라고 사람들이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가장 사랑받는 왕자의 호위무사를 시험에 빠지게 만든 사건은 국민에게 큰 지지를 받아오던 마법사 협회의 지지력에 큰 흠집을 내며 그들이 쌓아온 신뢰를 갉아먹는 요소가 되었다. 이런 몇 번의 사건을 겪은 후 마법 협회는 로스를 향한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다시 신뢰를 회복하며 지내기로 타협했다. 국민에게 신뢰를 잃는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마법 협회의 근간을 위협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로스에게 힘을 빌려주거나 호의적이 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늘 로스를 없는 사람처럼 무시했지만, 연례행사와 같은 국민과 대면하는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왕가의 근위 대장과 좋은 관계임을 보여주기 위해 가식적인 손을 뻗을 뿐이었다. 로스는 이런 가식적인 행위에 염증을 내면서도 그들의 힘이 국가에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도 그 손길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관계로 2년 동안 왕국은 평화로운 시기를 보낼 수 있었다.



켄트리를 공중에 띄워두고 침낭을 펴고 먹다 남은 빵을 한입 베어 물고 나무에 기대 누웠다.


'왕자님이 말한 아이는 어떤 아이일까? 초상화를 그리기는 하는 성격이셨던가?'


로스는 오랜 기간 호위무사를 해왔지만 아직도 왕자에겐 알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왕자인 반면 누구도 모르는 것들이 많은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이번 임무처럼 뜬금없이 던져주는 일이 많았다. 한때 많은 정보를 공유하지 않는 이런 것이 자신보다 먼저 제1 호위무사를 수행하던 기사 롤랑이 임무 중 전사하면서 별수 없이 자신이 이어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다시 제1 호위무사였던 롤랑과 함께 호위무사를 수행하며 로스 그 역시도 위대한 롤랑을 언제나 존경하며 따랐기 때문에 제1 호위무사가 된 후에도 늘 그를 그리워하며 지냈다. 그리고 필라드 왕자 역시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필라드 왕자는 로스의 그런 생각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이 한때 로스를 불러 말한 적이 있었다.


'로스. 자네를 못 믿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너무도 믿고 아끼기 때문에 그런 것이니 서운해하지 말게.'


스스로를 롤랑과 비교하며 질책해오던 로스에게 왕자가 해준 말이었다. 그 이후로 로스는 롤랑을 뛰어넘는 사람이 되겠다고 마음먹고 늘 열심히 임무에 매진하며 믿음직한 호위무사가 되기 위해 노력해왔다.


숲의 나무들 사이로 바람이 불었다. 바람소리에 볼틴이 귀를 세우며 푸드덕 거렸다. 푸드덕 거리는 볼틴으로 인해 로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람 소리에 집중하며 주변을 경계했다. 하지만 특별한 것이 느껴지지 않아 안심하고 볼틴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안심 시킨 뒤 다시 나무에 기대 누웠다.


로스는 말을 타지 않는 편이 더 빨랐다. 소환수를 부려도 되고, 바람의 민족에게 주어지는 능력인 바람을 타고 공간을 내달리는 기술이 뛰어난지라 실제로 말을 타고 달리는 것보다 빠르게 이동이 가능했다. 그런 질주 능력이 정찰병이었던 그를 더욱 유명하게 만들어주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불의 민족이 강력한 파괴력을 갖추는 그들만의 능력이 있듯이 물의 민족은 치유 능력에 강했다. 흙의 민족들은 단단한 신체 능력을 바탕으로 한 방어술이 뛰어났다. 바람의 민족은 바람을 이용한 뛰어난 이동 능력과 바람을 응용하여 활을 날리는 기술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대지에는 이 네 가지 원소를 지탱하는 근간인 마나가 가득했다. 그런 다섯 가지의 조화가 세상의 근간으로 루미네라스 대륙에 녹아있었다.


바람의 민족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기술이지만 바람을 응용하여 질주하는 능력과 바람을 이용해 활을 날려 원하는 방향에 명중시키는 기술에 특출난 재능을 가진 로스는 매일 훈련을 통해 시력을 더욱 갈고닦았다. 어릴 적 전쟁에서 전사한 부모를 대신하여 키워준 자이덴의 촌장도 로스의 실력을 보고 살아생전 이런 기술을 가진 아이는 본 적이 없다며 감탄했었다.


그로부터 몇 해가 지나 로스는 서부 전방 초소의 정찰부대인 실피에 지원했다. 그곳은 전쟁으로 전사한 로스의 부모가 복무하던 부대였다. 부모가 근무하던 부대에서 정찰병으로 활동한 로스는 2년 만에 정찰부대 실피의 부대장이 될 수 있었다. 짧은 기간에 부대를 이끄는 사내가 된 로스의 실력은 왕가에도 전해졌다. 그리고 몇 번의 임무를 더 성공적으로 이끈 로스는 명실공히 실피를 서부 전방 최고의 부대로 만들었다.


로스의 실력을 일찍이 지켜보고 있던 필라드 왕자가 이듬해 로스를 찾아왔다. 공석이 된 제2 호위무사의 자리로 발탁하기 위함이었다. 로스는 처음 필라드 왕자의 제안을 거절하려 했었다. 부모님이 계셨던 부대를 떠나는 것도 마음에 걸렸지만, 그보다 마법 협회의 중심에 들어서 있는 불의 민족과 정치적으로 깊게 관여되어있는 왕가의 관습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점이 로스의 선택을 저해하는 요소가 되었다. 하지만 왕자는 바람의 민족인 자네의 가능성을 불의 민족에게 보여줄 기회라며 그를 설득했다. 또한 필라드 왕자가 친히 자신이 필요하다고 내미는 손에 이끌려 부대장의 자리를 위임하고 그길로 왕실에 입성했다. 그로부터 3년간 호위무사로서 충실히 필라드 왕자를 보필하며 지금의 근위대장이 될 수 있었다. 근위 대장이 된 이후에도 25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맡는 근위 대장직을 수행할 수 없을 거라는 주변의 걱정을 없애기 위해 늘 불철주야 노력하여 주변의 걱정을 불식시켰다.


그런 뛰어난 바람의 민족인 그가 볼틴을 타고 온 것은 흔한 일은 아니었다. 그림을 그리는 아이를 데려올 때는 질주 능력으로 데려올 수가 없기 때문에 별수 없이 선택한 것이다. 더욱이 아이를 태우고 돌아갈 때는 지금처럼 강행하며 돌아갈 수 없을 테니 날이 밝는 대로 다시 델라스를 향해 가야 했다. 로스는 남은 빵을 다 넘기고 잠을 청했다.


동이 터오고 있었지만 여전히 숲은 어두웠다. 그런대로 주변이 보이기 시작하자 다시 볼틴을 타고 델라스를 향해 달려 두어 시간 만에 델라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델라스는 작은 마을이었다. 주로 양을 키우는 마을이라 탁 트인 동산에 양들을 가둔 울타리가 눈에 보이는 동산마다 계속해서 보였다. 길을 따라 집이 모여있는 델라스의 중심부에 도착하여 마을 회관을 찾았다. 실제로 그림을 그리는 아이가 17살 정도 된 아이라는 점을 제외하곤 알고 있는 것이 없기에 마을 회관에서 먼저 물어보기로 했다. 왕자는 늘 많은 정보를 주지 않았다. 정보를 주지 않아도 스스로 해결하던 로스를 믿기 때문인지 몰라도 항상 현지에서 임무에 관한 것들을 조합해야 임무의 전체 정보를 알 수 있을 때가 많았다.


마을 회관에 들어가자 마을 사람으로 보이는 두 명이 밥을 먹고 있었다. 입고있는 차림새로 보아 양을 돌보는 목동으로 보였다. 이른 아침, 양을 돌봐야 하는 사람들이 먹는 아침 식사인 모양이었다. 게걸스럽게 먹던 그들은 입구에 선 로스를 바라보고 다소 놀란 표정이었다. 아마도 근위복을 입고 있는 차림새로 보아 높은 관리직이라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중 한 명을 바라보며 로스가 물었다.


"촌장님 계십니까. 헬리브 왕궁에서 왔습니다."


허둥지둥 일어나 인사를 꾸뻑하더니 목이 멘 목소리로 촌장을 다급히 불렀다. 측면으로 보이던 문이 열리고 안쪽에서 대답이 들렸다. 아마도 부엌인듯싶었다. 귀찮은 듯 그릇에 무엇인가를 퍼담던 그가 근위복 차림의 로스를 보고 깜짝 놀라 부리나케 회관 거실로 달려 나왔다.


"제가 델라스의 촌장 요르만입니다. 어쩐 일로 오셨는지요. 나리."

"한 아이를 찾고 있소. 17세 정도 된 아이로 그림을 그리는 아이입니다. 아마도 왕궁에서 후원을 받고 있을게요."

"아, 리베레아를 말하는 모양입니다."

"리베레아? 여자아이요?"


촌장은 광대를 붉히며 웃으며 말했다. 단번에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왕궁에서 다녀가는 모습을 여러 해 지켜본 것이 분명했다.


"여자아이라는 것을 모르셨습니까? 히히"


보통은 왕궁에서 후원을 받는 경우 귀족의 자제나 유지들의 자손이 많았고, 왕가의 초상화를 그리는 정도의 사람이라면 미술 교육을 단단히 받는 귀족의 남자아이일 경우가 많았기에, 로스는 여자아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필라드 왕자도 남자아이라고 말하진 않았다.


"그 아이가 어디 있습니까?"

"제가 안내해 드리지요."


촌장은 식사 중인 두 사람에게 양들에게 여물을 주라고 당부하며 회관 문 앞으로 걸어 나왔다.


"아니요. 혼자 가겠으니 위치만 설명해주시오."


촌장은 자신의 안내를 거부해서 아쉬웠는지 입꼬리를 내리깔며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아마도 안내해주고 금화나 몇 냥 얻어 갈 생각이었는데 그르친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아진 모양이었다. 문 앞에서 멀리 동산을 가리키며 촌장이 말했다.


"저쪽 동산을 넘어가면 대나무가 심어진 곳에 물레 방아가 있는 집 한 채가 있습니다. 그곳에 혼자 살고 있지요. 나리."

"혼자 말이요?"

"예. 부모는 어릴 때 전쟁에서 죽고 할아비랑 함께 살았는데 몇 해 전 할아비도 죽었습니다. 농사를 짓거나 양들을 키우지 않아 굶어죽거나 아니면 일찌감치 시집가서 살거나 할 줄 알았는데, 곧잘 혼자 살고 있더군요. 아마도 매해 여름마다 귀족처럼 보이는 분들이 다녀가곤 했는데, 높으신 양반들이 다녀가서 그런가 보다 싶었지요.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도 높으신 양반들이 얼씬도 하지 말라 당부해서 저희는 그 아이가 시장에 물건을 사러 올 때만 보곤 합니다요."

"높은 분들이 여름마다 다녀갔다... 고맙소. 이걸로 맛있는 점심이라도 드십시오."


로스는 주머니에서 금화 한 개를 꺼내 촌장에게 주었다. 촌장은 헤벌쭉 웃으며 금화를 받아 챙겼다.


볼틴에 올라타서 동산을 향했다. 왕자님은 일 년에 한 번씩 여름이 되면 여동생 시이라드와 집사인 덴브만 데리고 어디론가 가신 적이 있었다. 매년 5일 정도의 여정이었는데, 왕자님이 가장 아끼던 동생인 시이라드를 위한 여정인 줄로만 알았다. 위험한 곳에 가는 것이 아니니 호위군도 모두 따라오지 말라고 당부하고 떠나던 여정이 아마도 이곳일 거라 직감했다.


'고작 그림을 그리는 아이일 것인데 직접 보러 오셨다니. 대체 어떤 아이길래... 게다가 생각보다 위험하지 않은 여정도 아니건만.'


궁금증이 계속 쌓여갔다. 필라드 왕자의 무공실력도 왕궁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이라 델라스까지 오는데 큰 문제야 없었겠지만, 시이라드와 함께 오는 여정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리 간단히 볼 만큼 델라스의 길이 편치 않았고 숲을 통과해야 해야 하는데 숲에는 더러 도적떼가 출몰할 수도 있어서 안전한 길이라 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위 병력 없이 매년 덴브와 시이라드 공주만 데리고 델라스를 방문했다고 하는 것을 미루어보아 그림 그리는 아이의 정체가 예사롭지 않음을 직감했다.


대나무가 잔뜩 심어진 곳에 작은 개천이 흐르고 있었다. 대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진 곳에 지어진 작은 집 한채. 그 옆으로 개천을 끼고 물레 방아가 돌고 있었다. 물레 방아는 낙수 차이를 이용해 도는 물레 방아가 아니라, 흐르는 개천을 동력 삼아 천천히 돌아가는 물레 방아였다. 물레 방아의 역할이 대체로 방아를 찢기 위함이지만 그런 용도로 사용한 지 오래되어 보였다. 아마도 얼마 전 죽었다는 조부모가 운영하던 것이겠지.


로스는 입구에 들어서 볼틴에서 내렸다. 그리 넓지 않은 마당엔 숱한 그림도구가 놓여있었다. 나무로 짜인 이젤에 하얀 종이들이 있었고 물감이나 염료 등이 그 주변에 나뒹굴고 있었다. 바닥에는 꽃이 그려진 그림들이 곳곳에 놓여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 사이로 나비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나비는 마치 그림 위에 그려진 꽃들에 홀린 듯 주변을 선회하며 나부끼고 있었다. 실로 놀라운 광경이었다.


"계십니까? 왕궁에서 나왔습니다."


집의 문에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방문을 열고 한 아이가 나왔다. 검은 긴 머리를 허리까지 기르고, 가늘고 하얀 초승달처럼 보이는 가녀린 몸과 아리따운 얼굴의 아이였다. 경계를 하는 듯 문에 꼭 붙어서 여자아이가 말했다.


"왕궁에서 오시던 분이 아니신데 누구신지요?"


나비들이 날아다는 풍경 뒤로 보이는 그녀는 더욱 신비하게 보였다. 로스는 잠시 아이를 쳐다보다가 말을 이었다.


"저는 왕자님의 호위무사, 로스라고 합니다. 왕자님께서 완성된 초상화와 아가씨를 왕궁으로 모시고 오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여자아이는 잠시 동안 물끄러미 로스를 쳐다보더니, 기억이 난 듯 살포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로스 아마드레인. 맞지요?"

"아, 알고 계십니까? 맞습니다."

"네. 작년 여름에 왕자님께서 조만간 오실 것이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말씀하셨던 모습 그대로네요. 갈색으로 긴 머리칼에 잘 생긴 얼굴의 기사님!"


들떠 보이는 리베레아의 대답에 적잖이 놀란 로스가 되물었다.


"작년에 말입니까?"


로스는 간밤에 말하던 불안감이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라 생각하고 놀라웠다. 그토록 오랜 불안감을 언질조차 하지 않으셨다니. 어딘가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로스는 여자아이를 보면서 말했다.


"바로 왕궁으로 모시고 오라고 하십니다. 채비를 하시지요.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말이지요? 알고 있습니다. 마침 초상화도 다 되고 하였으니 금방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로스는 또 한 번 놀라움을 감추지 못 했다. 그간 왕자가 주던 임무 중에 가장 이상한 임무였다. 하지만 더욱 놀란 것은 이어진 여자아이의 행동에서였다.


리베레아는 박수를 두 번 치고 '돌아가'라고 외쳤다. 그러자 그림 위에 나풀대던 나비들이 순식간에 그림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꽃만 그려져 있던 그림은 꽃과 나비가 그려진 한 폭의 그림이 되었다. 로스는 깜짝 놀라서 그림들을 쳐다봤다. 이제껏 숱하게 보던 마법이나 소환술 따위의 것이 아니었다.


"이런...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하신 거였구나... 마법인가요?"


로스는 어떤 능력이 있는 그림 그리는 아이라던 왕자의 말을 생각했다. 막 방에 다시 들어가려는 리베레아에게 물었다. 리베레아는 방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에 들어가며 말했다.


"음. 마법도 뭣도 아니에요. 단지 그냥 그릴 뿐이죠. 좋아하는 것을 열심히 그리면 그것들이 생명을 가지게 된다던데 아마도 그래서 그런 것 같아요."


리베레아는 웃으며 로스에게 말하며 방으로 돌아 들어갔다.


그림 속의 나비를 쳐다보며 감탄을 하고 있기를 몇십 분. 방문이 열리며 귀족 집안의 남자아이처럼 옷을 입고 머리를 질끈 감아올린 리베레아가 방에서 나타났다. 등에는 작은 봇짐을 메고 있었고, 대나무로 만든 통을 그 옆에 달고 있었는데, 아마도 필라드 왕자가 말한 초상화가 담긴 통 같았다.


"아무래도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잘 모를까 싶어서 그냥 그림 그리는 남자로 치장했어요. 그럴 듯 한 가요?"

"나쁘진 않군요. 그럼 왕궁으로 가시지요."


리베레아는 적잖게 칭찬을 기대한 모양이지만 별 반응 없는 로스의 대답에 입술을 삐쭉거렸다. 로스는 볼틴의 뒷자리에 리베레아를 태우고 동산을 넘어 왕궁으로의 길을 향했다.


"어서 빨리 왕자님을 뵙고 돌아올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그렇게 될 것입니다."


작가의말

열심히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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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덴브와 랜서 (2) +4 16.04.23 182 2 21쪽
15 덴브과 랜서 (1) +4 16.04.23 172 2 17쪽
14 북쪽으로 가는 여정 (5) +3 16.04.21 229 2 21쪽
13 북쪽으로 가는 여정 (4) +2 16.04.18 174 2 21쪽
12 북쪽으로 가는 여정 (3) +2 16.04.17 236 2 25쪽
11 북쪽으로 가는 여정 (2) +2 16.04.16 230 2 22쪽
10 북쪽으로 가는 여정 (1) +2 16.04.16 168 2 24쪽
9 왕위 계승식 (5) +4 16.04.14 201 3 19쪽
8 왕위 계승식 (4) +2 16.04.13 128 2 18쪽
7 왕위 계승식 (3) +2 16.04.13 115 2 17쪽
6 왕위 계승식 (2) +2 16.04.13 228 3 21쪽
5 왕위 계승식 (1) +2 16.04.12 217 2 11쪽
4 그림을 그리는 아이 (4) +2 16.04.11 157 2 20쪽
3 그림을 그리는 아이 (3) +2 16.04.11 283 2 32쪽
» 그림을 그리는 아이 (2) +2 16.04.10 154 2 23쪽
1 그림을 그리는 아이 (1) +9 16.04.10 300 3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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