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환기(喚起)
참천의 비밀스러운 과거, 그것은 실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초대 천마도.. 두 번째 삶을 살고 있는 나와 같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허나, 소진은 이것에 대해 예인에게 물론,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전달할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말 한다고 믿어줄리도 없고'
예인은 갑자기 생각이 많아진 듯 조용해진 소진을 보고 호기심이 샘솟는 표정을 짓는다. 허나 그녀는 입가에 맴도는 의문을 억지로 집어 삼키는 듯 하다.
".. 너는 여러모로 예상할 수 없는 놈이네. 내 기억속의 초대도 그러하듯, 너도 어쩌면..."
말끝을 흐리는 예인, 다행인지 아닌지 소진은 아무 반응 없이 심각한 표정을 짓고있을 뿐이었기에 다행히 그 말을 듣진 못한 듯 하다.
잠시 생각을 끝낸 소진,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는 이내 입을 연다.
"..후.. 모르겠군. 이 삶은 도대체 감이 오다가도 사라지니 종잡을 수가 없어..!"
"이 삶? 뭐 두 번째 사냐?"
!
꿀꺽
'젠장.. 생각으로 한다는게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설마..'
소진으로서 생에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비밀을 들킬 상황이 일말의 예고도 없이 느닷없이 찾아왔기에, 이마에는 식은 땀이 삐질 삐질 새어나오고 두 눈은 지진이 일어난 듯 갈피를 잡지 못한다.
허나, 신은 망각을 빼앗은 김에 눈치도 덤으로 가져가셨는지, 소진의 부자연스러운 반응에도 아무렇지 않은 예인. 오히려 어이가 없는지 한참을 크게 웃었다.
"말도 안되는 헛소리 할 시간이 많지? 빠져가지고.. 아무튼 내가 참천검에 대해 해줄 수 있는 이야기는 여기 까지야. 더 말해주고 싶어도 해줄 이야기가 없어"
두 손을 내젓는 예인의 몸짓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려는 듯 바삐 움직이자 소진이 납득했는지 이만 자리를 피하려 몸을 일으킨다.
"알겠소. 그럼 난 이만.."
소진이 두 손을 탁자에 대고 의자를 뒤로 빼는 순간, 예인의 박력 넘치는 손이 탁자를 내려친다.
쾅!
"동작 그만"
화들짝 놀라 이글거리는 눈으로 자신을 째려보는 예인을 마주하는 소진, 그녀의 모습은 마치 꼬리를 부풀리고 먹잇감을 향해 날아가기 직전의 고양이 같았다.
"뭐..뭐요! 깜짝이야!"
"이렇게 단물 만 쏙 빼 먹고 가면 쓰나. 이러면 내가 너무 손해잖아, 안그래?"
슬쩍 삐져나온 혀가 아랫입술을 훑고 사라지는 것이 어느새 먹잇감을 노려보는 한 마리의 뱀 처럼 변한 예인의 모습, 소진의 등줄기가 오싹해진다.
"... 난 당신에게 줄게 없소"
피식
잔뜩 움추린 소진이 조금은 귀여운지 낮게 웃는 예인, 그는 손가락을 까닥하며 소진을 부른다.
"따라 나와, 댓가는 치뤄야지?"
그리고는 의자가 힘겹게 받치고 있던 그녀의 도를 바닥에 질질 끌고 어디론가 향한다.
'..진짜 가기 싫은데.. 도망갈까?'
"빨리 안오지? 셋 센다. 하나.. 둘!"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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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헉..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인간이지?'
바닥에 대자로 뻗어있는 소진과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자존심을 지키려는 듯 박살난 연무장 바닥에 거대한 도를 꽂아놓고 가까스로 버티고 서 있는 예인
"후.. 그렇게 까불더니, 믿는 구석이 있었구나? 너 맘에 들어"
섬뜩
신교의 광녀가 맘에든다니.. 이것을 좋아해야 하나 고민하던 소진은 황급히 말을 돌리려는듯 질문한다.
"근데.. 언제까지 반말 할거요?"
예인은 허례허식이 진절머리난다는 듯 파리 내쫒듯 손을 휘두른다.
"신교에서 내 예의를 바랄 수 있는건 교주님 앞에서 뿐이야. 그리고, 꼬우면 너도 반말 하라니까? 게다가 나이도 비슷해보이는데 왜 내가 왜 네까짓 놈에게 존대해야하지? 게다가 감히 나를 광녀라 부른놈에겐 더더욱. 살아 있음에 감사해, 지금도 죽이고 싶은거 참고있는거니까"
'이거 진짜 광녀네?.. 교주님 빼고 다 반말한다는거아니야? 그리고 무슨 나랑 동년배?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아니 소하부주라며, 그리고 보이는 것도 좀 나이가.."
슬쩍 예인의 위아래를 훑는 소진, 물론 앳된 얼굴에 갸냘픈 몸이 그녀를 더욱 어려보이게 하나, 소하부주라는 직책이 주는 무게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싸늘하다. 예인의 눈빛이 소진의 심장이 꽂힌다.
"..이립인지 다섯해 지났다.. 거기지? 네놈의 심장이"
"?! 무슨 소하부주가 이립?! 아니 그 도좀 내려 놓으라니깐..!"
그렇게 짧은 헛소리가 지나자, 예인은 품에서 무언가를 소진에게 던졌다.
"후.. 됐고, 이거나 받고 꺼져. 오늘치다"
탓
예인이 던진 옥함이 자연스럽게 소진의 손에 잡힌다. 근처에 있기만 해도 약향이 물씬한 것이 극상승의 영약임을 눈치 챌 수 있게 한다.
"진..진짜 주는거지? 이런걸 매일 준다고? 미친.. 감사합니다, 소하부주님!"
괜히 머쓱 한지 먼 곳을 바라보는 예인, 그녀가 던진 것은 사실 이런 취급을 받을 수 없는 귀한 것이었다.
"뭐.. 자소단이라나? 군사부에서 슬쩍 했다. 너 같은 놈 아니면 쓸모도 없는 정파놈들의 영약이라 챙겨왔다. 마기로 펼쳐내는 정공이라니, 정말이지 한치도 예상할 수 없는 미친놈이네"
!!!
그런 예인의 이야기 따위는 자소단이라는 단어를 듣고 멈춰버린 소진의 정신에 끼어들 세가 없었다. 그야말로 자소단이었기에..
십년에 단 한알. 그 자체로 절세의 영약이며, 은매화 였던 소진조차도 먹어보지 못한 대 화산 장문인의 상징 중 하나인 그 자소단이 이 옥함 안에 들어있는 것이다.
"자..자소단..?!
'이..이게왜 여기에..'
놀라움과 슬픔이 뒤엉킨 소진의 표정, 한눈에 봐도 사연이 있는 듯 한데..
...
'.. 왜저래? 저 영약이 그렇게 마음에 드나?'
다행히 눈치를 엿 바꿔 먹은 예인은 단지 난생 처음보는 영약에 감탄을 금치 못하는 강호초출처럼 보였다.
허나, 지금 이 순간 소진의 마음은 마치 볕 들 곳 하나 없는 새까만 암흑속에 떨어진 복수자, 단단히 고장난 사람처럼 시선을 옥함에 고정한 체 예인에게 묻는다.
"자소단.. 자소단... 이거 어디서 났어..?"
"모른다니깐, 그냥 처먹.."
예인은 말을 끝 맺지 않았다. 정확히는 말을 할 만큼의 공기가 폐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어느새 고개를 들어 예인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는 소진의 눈빛속에서 엎드린 체 숨죽이고 있는 아득한 진노를 마주한 순간, 그녀의 폐는 얼어붙은 듯 기능을 망각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린 예인, 흐름이 끊긴 호흡이 돌아오고 그녀의 커다란 두 눈이 경악으로 가득 찼다.
교주의 분노를 마주했을 때도, 예인은 이런 느낌을 받아 본 적이 없다. 원초적인 본능이 자극받아 정신이 옭아 매어지는 느낌. 그렇기에 예인은 이전과 같이 소진을 대할 수 없었다.
".. 화산.. 무림맹.. 군사부에서 무림맹 수송물자를 털다가 발견했다. 그나저나 너는 도
대체..?"
"또.. 무림맹이라 이거지?.. 맞아. 내가 지금 이럴 때가 아니야. 그것들을 두고 숨을 쉬고 있었지, 내가?"
그녀의 입에서 또 다시 등장한 무림맹, 그 망할 것들이 감히 화산의 자소단을 운송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목함을 열어 자소단을 입에 털어 넣어버리는 소진
우걱우걱 몇 차례 씹어넘기고 가부좌를 틀어 영약을 온전히 흡수한다.
이 일련의 과정을 멍하니 쳐다보던 예인,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소진의 한마디에 정신이 번쩍 든다.
"뭐해, 칼 들어. 이제부터 진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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