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귀마고
터덜 터덜
한수의 안내를 받으며 귀마고로 향하고 있는 소진, 어느새 달이 머리맡에 자리한 완연한 밤이었다.
거구에 걸맞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내딛는 한수의 발걸음, 소진은 정확히 두배 더 바삐 걸을 수 밖에 없었다.
조용히 걷던 둘, 한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교 밖에서는 어떠셨소? 나간 목적을 이루셨소이까?"
소진이 소하부주에게 저지른 충격적인 일 때문에 한수는 궁금했던 그간의 근황조차 묻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반정도는? 그러는 군장은 잘 지냈소?
"허허, 나야 뭐 눈코 뜰 새도 없이 바빳지. 최근에 아주 골치 아픈 일들이 더 많아져서 그렇소. 정파 놈들로 모자라서 글쎄.. 크흠. 아니외다"
이제 막 섬서행을 마친 소진에게 말할 사안은 아니라 생각했는지 신강 경계부의 양민 실종사건에 대하여 함구하는 한수
'뭐야.. 찝찝하게 왜 말을 하다 말아!'
언짢은지 인상을 찡그리는 소진
"무슨 말이길래 하다 마는거요? 어쨋든 얼마나 더 가야하오?"
"귀마고는 이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소. 다만 들어가는 방법이 좀.. 복잡하여 오래걸리는 것 뿐이오"
'들어가는 방법?'
"뭐 얼마나 대단하길래 들어가는 방법이 따로 정해져있소?"
슬쩍 웃는 한수, 건방진 소진에게 넌지시 알려준다.
"우리가 공자의 처소에서 나온지 얼마쯤 됐는지 기억하오?"
"흠.. 글쎄. 한 일각쯤 된 것 같은데? 그런데도 도착을 못하니 이상해서 묻는거요. 약간 방향이 빙빙 도는 것 같기도 하고"
한수의 눈이 조금은 흔들렸다. 소진에게서 노고수에서 볼 만한 통찰력을 느낀 한수
"역시, 감이 좋으시오, 공자. 지금 나는 귀마고에 들어가기 위해 신궁에 새겨진 진법의 핵에 나의 독구기를 남기는 중이오"
"진법에 핵에.. 뭘 남겨?"
전생에서도 이생을 무학에 몸담았으나 진법에 대하여는 문외한인 소진, 그는 한수의 말을 전부 이해하지 못했다.
딱 보니 진법의 기초도 모르는 눈치의 소진, 한수가 그 수준을 확인한다.
"진법에 대해 얼마나 알고계시오? 공자"
"글쎄.. 이 정도면 장호가 무공에 대해 얼마나 아는것과 거의 흡사한 수준?"
가만히 소진을 보는 한수. 자신의 무지에 매우 뻔뻔한 소진의 자세가 어이없었다.
"흠.. 그냥 백지장이라 생각하고 읊겠소"
'.. 기분이 좀 나쁜거 같은데..?'
소진의 고개가 슬쩍 삐딱해질 찰나, 한수는 위험을 감지하고 금세 말을 진법에 대해 가르치기 시작했다.
"진법이라 함은, 자연속에 흐르는 기를 인위적으로 비트는 것이 그 기초요. 때로는 물건으로 때로는 사람으로 때로는 부적으로.. 그 매개는 아주 다양하지"
'오호.. 진법에 대해 듣는건 제법 오랜만이군'
"그래서? 그게 지금 당신이 그 짜증나는 독구기를 남기는 것과 무슨 상관이지?"
소진은 일전에 비무에서 딱딱하다 못해 질기기 까지한 한수의 독구검이 주마등 처럼 지나갔기에 순간 신경질을 냈다.
"상관이 있소. 귀마고를 열기 위해 자물쇠에 열쇠를 거는 것 같은 사전작업 이랄까?"
그러나, 소진의 지식은 한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준비를 못했다.
'.. 있으니까 하겠지! 어라? 지금 또 뭔가 풍경이 달라진 것 같은데.. 이제는 어딘지도 모르겠군..'
말을 계속하면서도 한수가 앞장서 가는 곳을 뒤에서 소진이 따라가고 있는 모양새, 한수가 걷다 멈추고 기운을 흘려낼 때 마다 주변의 풍경이 조금씩 달라지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전혀 아랑곳 않고 뒤 조차 돌아보지 않고 제 갈길을 나아가는 한수, 소진이 이해하는 것을 포기한 눈치
"귀마고는 역대 천마들의 소장품들이 보관되어 있는 신교 최대의 보물창고라고 할 수 있소. 그리고 그런 귀마고를 당대의 천마군장이 문지기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지"
'호오.. 신교 이인자를 문지기로 둔 창고라.. 도대체 그안에 무엇이 들었을까?.. 흐흐'
설명을 들으면 들을 수록 그 안에 무엇이 있을까 상상하며 군침이 흐르는 것을 수 없이 삼켜내느라 바쁜 소진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천마군장을 창고의 문지기로?.. 너무 인력낭비아니오?"
소진이 말하는 와중에도 또 다시 슬쩍 방향을 틀어 걸어나가는 한수, 소진은 느낄리 없는 멀미를 경험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는 소진의 말에 공감하는 눈치인 한수가 입을 열었다.
"크하하, 어쩔수 없소. 귀마고를 열기 위해서 천마군단장에게만 전수되는 독구기(獨龜氣)로만 열 수 있기 때문이오."
"호오.. 교주도 맘대로 열지 못하는 보물창고라.. 그나저나, 좀 천천히 걸으시오. 토할것 같소"
소진은 토가 쏠리는지 한수의 무복을 바짓가랑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잡아 말리려 했으나, 미동도 하지 않는 한수. 일전에 비무가 계속 떠올라 짜증이 치솟았다.
'..진짜 힘만 더럽게 쎈.. 건아니지만 미동도 안하냐!"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기에 포기한 소진,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걷고 또 방향을 바꾸기를 수차례, 드디어 한수와 소진은 어느 곳에 당도했다.
다만, 소진의 두 눈에 엿보이는 감정은 뭐랄까.. 기대감과는 조금 먼 무언가
"이곳은...?"
슬쩍 고개를 끄덕이며 소진의 표정을 살피는 한수, 입꼬리가 한껏 올라간 것을 보아하니 매우 즐거워 보였다.
"그렇소. 이곳이 귀마고 입구요. 어떻소. 근사하지 않소?"
'뭐..? 근사해? 근사하긴 개뿔..'
소진은 자신의 눈 앞에 있는 관경이 절대 천마신궁이 아니라 단언할 수 있었다.
'동굴?.. 천마신궁 안에 이런 거대한 동굴이 있을리가 없잖아?!'
그냥 동굴도 아니다. 집채만한 바위가 막고있는 동굴. 게다가 그 바위에는 마치 무엇인가를 봉인하기 위해 금줄이 쳐져 있었기에 을씨년 스러운 분위기를 더하였다.
'바위에 뭐라고 적혀있는데.. 오래되서 잘 보이지도 않는군. 무슨.. 마고인가?'
글귀를 슬쩍 읽으려 하자 온몸에 털이 곤두서는 느낌. 마치 본능이 저 글귀를 읽는 것을 막는 듯 했다.
온몸에 소름이 돋은 소진, 그의 두 눈동자에 가득했던 탐욕은 여름날 무서운 이야기를 듣는 아이의 그것 같아졌다.
".. 무슨 창고 주제에 이렇게 을씨년스러워..? 갑자기 가기 싫어지는데 안가면 안되오?"
예상 밖의 모습에 기가차는 표정의 한수
"나참! 교주님한테는 따박 따박 대들면서 귀신은 무섭소?"
"내가 무슨! 근데 나름 천마신궁을 이곳 저곳 다녀본 것 같은데 이런 곳은 처음보는 것 같소.."
"그럴 수 밖에. 아까와 같이 진법의 생로를 하나 하나 열지 못하면 존재조차 인식할 수 없는 상승의 진법속에 가려져 있으니. 이제 그만하고 슬슬 들어갑시다"
말을 마친 한수가 소진의 머리통 만한 굵기의 팔을 천천히 들어올리더니 동굴을 가로막고있는 커다란 바위에 손을 올린다.
한수의 몸에서 서서히 흘러나가는 독구기가 팔을 통해 바위로 향하고, 바위에 휘감긴 금줄에 하나씩 닿는다. 그리고는 천천히 나머지 금줄을 향해 퍼져나가는 독구기
'.. 역시.. 괴물이로구만, 이놈이나 저놈이나"
모든 금줄에 그의 기운이 닿자 기운용을 마치는 한수, 진지했던 표정이 다시 사라지고 장난기 많은 표정으로 돌아온다.
그리고는 무언가 재미있는 것을 볼 기대에 가득찬 한수, 그것이 소진을 더더욱 불안케 했다.
"이제 좀 놀라게 될거요"
"놀라긴 뭘..!"
헉!
'..뭐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아예 눈이 없어져버린 느낌인데.. 어?!'
순식간에 찾아온 암전, 무언가를 본 다는 것을 망각할 정도로 아득한 어둠속에서 누군가가 소진의 팔을 강하게 잡아 당긴다.
"...!"
'어라? 말도 안나오는데?'
소진에게서 빛과 소리를 앗아간 어둠속에서 그를 잡아 끄는 이것이 아군인지 적인지 가늠할 수 없게 했다.
그렇기에 소진은 소리치며 자신을 당기는 힘을 뿌리치려고 노력하나, 그를 놔줄 생각이 전혀 없어보이는 막강한 힘. 결국 그가 이끄는 데로 한참을 끌려 가는데..
잠시간의 적막을 뚫고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미친.. 이건 마치.."
'제단'
소진은 아까 보았던 동굴의 바위에 쳐진 금줄이 의미하는 것을 이곳에서 뒤늦게 나마 눈치챌 수 있었다.
둥근 원형의 지하 공간. 수많은 방들 가운데 위치한 거대한 석조 건축물이 자리했고 그것은 한눈에 봐도 제단의 형상이었다.
상황파악이 끝났는지 눈을 부릅뜨고 한수를 노려보는 소진
"설마.. 귀마고가 귀(貴)한게 있는게 아니라 귀신(鬼)이 붙은 걸 모아놓은 거요?.... 여긴 도대체 뭐하는 곳이오?"
음흉하게 웃는 한수, 사실 그는 소진의 재빠른 판단력에 순수하게 감탄했다.
"음.. 반은 맞췄소. 둘 중 하나가 아니라 둘 다요. 신교의 역사속의 귀(貴)하고 귀(鬼)한 것 들을 모아놓은 이곳. 이곳이 바로 귀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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