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거부할 수 없는 조건
".. 이거 검.. 인것 같긴 한데. 아니, 검이라고 하긴 좀 그런가..?"
낡아 빠진 목갑을 연 소진의 두 눈에 당혹감이 선하다. 그것은 물론 한수도 마찬가지 인듯 허탈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데
"일단은.. 검이라고 봐야겠지, 소진 공자?"
온갖 고생 끝에 열어낸 목함 안에 들어있는 물건, 그것은 손에 쥐기 좋게 조각된 백옥같이 흰 나무 조각이었다.
의아한 표정의 소진이 고개를 쭉 내밀어 목함의 내부를 더 자세히 보니, 이것은 그냥 나무 조각이라고 하기엔 손아귀를 받쳐주도록 조각된 유려한 곡선의 형태, 검날이 꽂혀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얇은 틈새가 있어 이것이 검의 손잡이 임을 짐작케 했다.
그리고 그 손잡이를 목갑을 뒤덮고 있던 금줄과 같은 것이 녹색 빛을 내며 거미줄처럼 묶고 있기에 그 모습이 기이한 분위기를 한층 더하고 있다.
'분명 귀마고의 어둠에서 보았던 참천검이 맞는 것 같긴 한데..'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조금 큰 문제가..
"... 참천'검' 이라매, 날이 없는 검이 어디 있소?"
그렇다.. 손잡이에 검이 꽂혀있을 틈이 보인다는 것은 당연하게도 검날이 없다는 것, 그렇기에 소진은 참천검을 얻었다고 하기에 뭔가 애매한 상황
"우리 지금 이 나무 쪼가리 하나 얻자고 저 귀마고 박살낸거요? 이러면 수지타산이 안맞는 정도가 아니라 쪽박 찬 건데?"
그가 손끝으로 가리키는 동굴, 귀마고 였던 것을 지키고 있는 집채 만한 바위가 조금은 외로워 보였다.
...
폐부를 깊게 찌르고 나가는 소진의 한 마디에 정신이 번쩍 든 한수는 주섬주섬 널부러진 보물들을 챙기더니 자리를 피한다.
"크흠, 그래도 신교의 보물인데 나무 쪼가리는 좀.. 아무튼 나는 다른 보물들을 수습해야 하니 이만 가보겠소. 고생하시오!"
"가긴 어딜 가!... 없네?"
갑작스럽게 홀로 남겨진 소진, 어느덧 점이 되어버린 한수를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참천검의 손잡이에 집중했다.
'하.. 일단 꺼내볼까..? 또 무슨 난리 나는거 아니겠지?'
잠시간을 고민하던 소진은 다시 손을 내밀어 한수의 독구기 때문인지 녹색 빛을 내는 금줄로 묶인 참천검의 손잡이로 손을 내민다.
천천히 다가가는 소진의 손
다행인지 목함을 열 때와 달리 아무 반응도 없는 듯 하다
조심스럽게 참천검의 굴곡에 손을 맞춰본다.
착!
!
"호오..?"
참천검을 손에 쥐고 이리저리 둘러보는 소진, 맘에 드는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베는 힘을 받기에 적합한 모양의 이것은 귀마고의 어둠에서 보았던 어느것이라도, 설령 그것이 하늘일 지라도 베어낼 수 있을 것 같은 믿음을 주기 충분했다.
'단심에게 미안하지만.. 역시 보통 물건이 아니군.. 이것 만으로도 완전한.. 어? 저게 뭐지?'
참천에 홀린듯 감탄하고 있던 소진의 눈에 들어온 목갑의 내부, 검의 손잡이가 가리고 있던 자리에 적혀있는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수백년을 봉인되어있던 목갑의 상태와 괴리감이 느껴지는 뚜렷한 필체, 소진이 이것을 읽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늘을 베어낸 자, 소진의 검]
'..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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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덜 터덜
어느새 해가 떠오르기 시작한 이른 새벽, 소진이 멍한 표정으로 침상에 누워있다.
소진은 갑작스레 수많은 정보가 자신의 머리를 헤집어 놓는 것을 진정시키는데 꼬박 새벽을 다 보냈는지 두 눈이 붉게 충혈되어있다.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헝클어 뜨리는 소진,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다 그렇다고 쳐도.. 전생의 내가 무림맹에서 마주친 빛줄기를 베어낸 내 손에 이 검이 들려 있다는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게다가 이것..'
소진의 두 눈을 붉게 만든 수많은 의문 중 가장 큰 것. 탁자위에 올려놓은 저 빌어먹을 목함과 참천검의 손잡이
목함에 쓰여진 소진의 이름은 마치 누군가가 이 검이 소진의 것이 될 것이라 예언이라도하는 것 같았고, 수백년 전에 적었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뚜렷한 필체가 신묘하기 까지 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이 것은 초대 천마의 참천검이 분명한데, 그런 검이 나의 과거에 갑자기 등장했었고, 지금은 내 눈앞에 이렇게 있다는 거지?..'
어느 하나도 말이 되지 않은 상황임을 억지로 모른체하며 소진이 낼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추론은 역시 어불성설
'젠장.. 교주님을 한번 뵈야겠군'
이 상황에서 자신에게 조금이나마 이 미로속에서 방향이라도 알려줄 유일한 사람, 당장이라도 교주를 만나려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문을 열어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소진은 자신을 향한 살기를 느꼈다.
'?! 암습인가?.. 아니지, 너무 건방지잖아?'
주변을 두리번 거리는 소진은 오래지 않아 자신을 향해 적대감을 드러내는 대상을 찾게 찾았다. 살수라기에는 대놓고 소진의 처소 한복판에 이렇다할 표정없이 꼿꼿이 서있는 가냘픈 여인이 눈에 들어온다.
소진은 저 여인이 누군지 알아보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뉘시길래 남의 집에서 행패신지?"
소진의 한마디에 그녀의 얼굴에 표정이 드러난다. 물론 좋은 감정은 아닌 듯한 말투
".. 나 누군지 몰라?"
'뭐야.. 미친 여잔가?..'
느닷없이 난입한 주제에 자기를 모르냐니, 소진은 이 어이없는 하루의 정점이 저 여인인 듯 했다.
"지금 처음보는데 누군지 어떻게 알겠소? 근데 왜 반말?"
'아니, 요새 한수 군장도 그렇고 다 나한테 반말하는 것 같은데.. 기분탓인가?'
기분 탓은 아니었다.
"꼬우면 너도 말 놔, 근데.. 내가 누군지 모른다 이거지..? 나는 니 생각에 잠도 못자고 여기 있는데 말이야.."
그리고 그녀의 한손에는 어느새 자신의 몸집보다 더 큰 도(刀)가 발검을 준비하고 있다.
저 거대한 도를 보자 소진은 이제야 알겠다는 듯 눈이 커지며 알은체 했다. 물론 반갑다기 보다는 의아한 눈치
"아..?! 그 광녀?! 아니 당신이 여기 왜?"
소진은 드디어 그녀의 도를 보고 자신의 앞에 서서 살기를 뿜어내는 사람이 소하부의 수장, 마도후 예인임을 알아보았다.
".. 사부나 제자나.. 다 죽이고 감옥 가버릴까..?"
불경의 극을 달리는 예인의 언행을 지적하려는 소진, 그러나 자신이 한 말도 그닥 예의있는 발언은 아니었음을 깨닫고 입을 닫는다.
"크흠, 기분 나빴다면 사과하지. 그래서 여기서 뭐합니까? 집주인 허락도 없이 막 들어오면 쓰나?"
그러자, 턱으로 잠자코 있던 호량을 가리키며 이곳에 온 목적을 말한다.
"쟤가 열어줬어. 아무튼, 앞으로 잘 부탁해"
??
"부탁? 나한테 뭐 부탁할 거 있소? 내가 부탁할 건 있는데.."
지난 밤 예인을 찾아갔던 소진의 부탁, 간단하게 말해서 돈 이었다.
"알아. 내가 그 부탁 들어주러 왔으니까. 단, 당연하게도 조건이 있어"
'조건?.. 이 미친 여자가 도대체 무슨.. 아니 내 부탁이 뭔지 알고 들어준다는 건가?'
소진은 다짜고짜 찾아와 반말을 퍼부어대는 예인이 좋게보이지 않는지 슬슬 미간에 주름이 잡히기 시작하는데..
"아니, 아무리 경우가 없다 하더라도 이게 무슨...!"
그런 소진의 말을 뚝 끊고 들어오는 예인
"너, 돈 필요하지?"
꿀꺽
예인의 입에서 돈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마자 어느새 문 뒤에 숨어 훔쳐듣던 장호가 벌컥 튀어나와 소진에게 신호를 보낸다.
'무슨 조건이든 상관 없으니까 당장 받아들여요! 자그마치 소하부주의 돈이라고!!'
그 정도 눈치는 있는지 바로 납작 엎드린 소진, 사실 예인이 무슨 이야기를 해도 납득할 자신이 있었다.
".. 그 조건이라는거 뭡니까?"
물론 저것만 빼면..
"지금부터 딱 한달. 그 한달 동안 매일 해시 마다 내 처소로 와. 그렇다면 매일마다 정해진 양의 영약을 주지. 영약중독을 걱정해야 될 정도의 양일거야. 어때?"
...?
장호는 눈이 돌아가려는 것을 온 힘을 다해 참았다.
'이게 무슨 횡재야! 젠장.. 드디어 팔자 좀 피나! 영약이라니! 우리에게 제일 필요한 영약이라니!'
그리고 장호는 혹시 모를 소진의 돌발행동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듯 금방이라도 검기가 솟아날 듯 두 눈을 부라린다.
그러나
"안녕히 가십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예인에게 다가가 그녀를 번쩍 들어 문밖으로 내보낸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동작. 마치 하나의 초식처럼 끊김 없는 대처에 호량과 장호는 상황을 파악하기 까지 조금의 시간이 걸렸다.
물론 그것은 예인도 마찬가지였는지 다가오는 소진의 손짓을 벗어나려 했으나, 자신을 안아 내보낼 줄은 예상 못햇는지 당황스러움이 얼굴에 가득하다.
그리고 매몰차게 들려오는 굉음
쾅!
뒤돌아 보지 않아도 저 문이 얼마나 굳게 닫혔는지 아무리 눈치 없는 사람이라도 알 수 있었다.
"... 감히.. 나를 쫒아냈단 말이지?.. 좋아.. 본 때를 보여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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