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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그코크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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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그코크
작품등록일 :
2023.05.11 21:42
최근연재일 :
2024.05.2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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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2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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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한 자들의 낙원

DUMMY

흑마법사는 생각했다.

굉장히 풍요로운 곳이다.

이곳에 처음 당도한 이들은 처음에는 당황할 것이다.

자신도 그러했고 이곳에 도달한 동식물들도 그러했으니까.

식사를 하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몸은 성장하고 튼튼해졌다.

처음 늙은 모습으로 온 자신도 이제는 과거 젊었을 적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낙원이 있다면 이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어느 남자가 오기 전에 그 생각은 여전했다.

어느 남자.

네인을 뜻하는 말이었다.


“처음에는 낙원이라 생각했네. 근데 이상하지 않나? 수만에서 수억의 삶을 나락으로 보낸 내가 최후에 도달한 곳이 낙원이라니.”

“낙원은 맞죠.”

“그렇지. 이곳은 자네의 의지로 도달하는 불행한 자들의 낙원이니까.”


불행한 자들의 낙원.

네인의 기준에서 불행하다고 생각되는 이들에게 이 낙원에 도달할 권리가 주어지는 어떤 의미로는 선택받은 자들의 낙원.

물론 이 낙원에 도달하기 위해 대가가 필요했다.

기억 공유.

네인은 낙원에 발을 딛고 이곳에 머물기 원하는 자들에게 기억을 받는다. 그리고 그들도 네인의 기억을 받는다.


“자네는 정상이 아니야.”

“압니다.”


정상이 아니다.

네인이 전생에 줄곧 자주 들었던 말이기도 했고 어떻게 보면 네인의 아이덴티티이기도 한 말이었다.


“영혼.. 자네는 기억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을 공유한다는 발상은 도대체 어떤 생각인지 아직도 공감할 수 없네. 솔직히 지금 당장 자네를 말리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

“그리하지 않으신 건 이해해 주셨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흑마법사는 네인이 가진 고질적인 문제를 이해했다. 하지만 여전히 공감하진 못했다.

얻는 것에 비해 잃는 게 너무나도 많은 일이니까.

그럼에도 네인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태연하다고 해야 하나.

그게 당연하다는 듯 아무렇지 않았다.


“도대체 얼마나 받아들일 것이냐.”

“모르겠습니다. 최대한 많이. 되도록 최소 제가 한번은 얻었던 기억만큼은 전부 이곳으로 모시고 싶긴 합니다.”

“미쳤군. 단단히 미쳤어.”

“감사합니다.”


칭찬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겠지만 너무 태연했다.

거릴낄 게 없는 것도 있을 것이다. 이 일이 잘못되어도 손해는 오로지 네인만이 얻는 일이니까.

죽음을 손해라 말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네인에게 죽음은 말 그대로 ‘손해’ 그 이상과 이하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어비스라고 했던가. 그 녀석이 알면 너는 일단 어딘가 갇혀 지내는 신세가 될 것 같군.”

“뭐.. 대충은 알걸요? 말 그대로 대충이지만.”

“안 말리나?”

“걔도 저니까요.”

“본체도 분신도 이해가 안 가는 것투성이군.”


본체나 분신이나 제정신이 아니었다.

세상을 뒤바꾸고 싶어 하며 바꿀 힘이 있으면서 그러지 않고 자신을 바꾸려는 어려운 길을 가는 본체나.

그런 본체를 잡아먹을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도와주기만 하는 분신이나.

어느 쪽이든 제정신이 아니었다.

애초에 본체가 제정신이 아니었으니 분신도 제정신이 아닌 건 인정한다.

다만 이건 그 궤를 달리했다.


“어떻게 그런 가치관이 생기는 거지?”

“살아온 환경이 그러다 보니.. 뭐. 그것보다 가장 큰 이유는 결국 이름이었죠.”

“전생이 이름이었나?”


바를 정(正)에 겸손할 겸(謙).

바르고 겸손해라 라는 뜻의 정겸.

이는 네인의 기억을 공유받은 흑마법사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네인의 가치관과 행동 근거가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이 바로 이름이었으니까.

물론 재미라는 영역이 네인의 행동의 가장 큰 동력이지만 그 근거는 어디까지나 네인의 전생의 이름에 있었다.


“이름이 사람을 대표한다고 하지만 자네만큼 이름에 묶이는 사람은 처음 보는군.”

“그런가요?”

“버릴 생각은 없는 건가?”

“.. 해봤죠. 근데 새장에 오래 갇힌 새의 말로가 어떤지 알고 계시는가요?”


해석하기에 따라 다르지만, 하늘을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새가 새장에 묶여 익숙해지며 이윽고 새장 밖으로 못 나간다는 얘기.


“못 버린다는 소리군.”


네인은 이미 자신의 의지로 이름을 버리지 않는 상황까지 오게 되었다.


“세상을 바꾼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

“올바르지 않으니까요.”


네인의 가장 큰 장애물이 이름인 이유는 다름 아닌 이놈의 정(正) 때문이었다.

올바름.


“대를 위해 소를 희생시키지 않겠다는 소리는 안 하는군.”

“소를 위해 대를 희생시키는 것도 이상하잖아요.”


대의라고 소수의 희생을 강요할 필요는 없으며 소수를 위한 다수의 희생 또한 의문만이 맴도는 상황.

네인의 올바름은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했다.


“겸손하군. 그만한 힘이 있다면 자신이 올바르다고 혹은 올바르게 만들면 그만일 텐데.”

“이게요? 이건 겸손이 아니라 오만이죠.”


이 순간 흑마법사는 깨달았다.

네인의 이름에서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지.


‘말해야 하나? 네인은 자각하지 못했다.’


시선을 끄는 큰 벽 때문에 바닥을 보지 못해 생긴 문제다.

알려준다면 지금 네인은 확실히 달라지겠지만 이후 문제는 한 가지 더 생긴다.

달라진 네인이 어떤 사고방식을 가지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욕심 없이 최고가 될 수는 없지만 욕심이 없다면 최저도 되지 않는다.

남들이 듣는다면 패배자 같은 말이라 하겠지만 네인은 주목적은 최고가 될 수가 없다가 아닌 최저가 되지 않는다.


‘... 이게 최선인가.’


흑마법사는 침묵을 선택했다.


“결정은 내리셨나요?”


네인은 웃으면서 흑마법사를 바라봤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나?”

“아니요? 잠깐 고민하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 자네는 타인의 생각을 읽는 걸 싫어했지.”


절대적 중립.

네인이 원하는 입장이며 또 어떤 부분에서는 절대로 거부하는 입장이다.

그게 모순이라 말하지만, 인간의 일생에 모순이 없던 적이 없다는 말로 일축해버리니 흑마법사 입장에서는 참 애매했다.


“... 말의 주제를 바꾸지.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냐. 이번 서임식 그 후의 축하연에서 큰일이 하나 더 터질 것 같은데.”


흑마법사는 밖의 상황을 모른다.

서임식에도 모르고 축하연이라는 것이 왜 열리는지 모른다.

다만 그곳에서 그저 큰일이 일어날 것에 대해 확신하고 있었다.

네인이 그걸 알고 있으니까.


“어떻게 할 거냐.”

“일단 지켜봐야죠. 개입할만한 사유가 있으면 하고 아니면 말고.”

“애매하다는 건가?”

“아직 확실하진 않지만, 이번 일에 에러의 개입 요소는 보이지 않으니까요.”


에러의 개입이면 충분히 나설만하지만, 과연 이번 일에 나설지는 의문이다.


“아직 확실한 거 아닌 거 아시죠?”

“알지. 그러니 묻는 거 아닌가? 이번 축하연에 큰일이 터지는 일은 아직 확정된 사항이 아니니까. 그 의중을 묻는 거네.”

“말씀드린 대로 에러의 개입이 확실하면 나설 것이고 아니면 방치할 생각입니다.”

“그렇군. 그럼, 그 큰일이 혈육과 관계된 것이라면 어떻게 할 건가?”


혈육이라는 단어에 네인은 걸음을 멈췄다.

혈육이라는 단어는 지금 네인의 현생에서 가장 낯선 그리고 생각하기 어려운 단어였다.

네인에게 지금 혈육은 가까울 필요도 없고 알아도 딱히 의미 없는 이들이니까.

하지만 피라는 게 그리 간단히 신경을 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직 확정 사항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들은 이미 너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느냐.”

“도대체 황족이라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혈육에 대해 신경 쓸까요? 찾아서 죽이려는 건가.”

“국외까지 찾는 수고를 들이는 걸 보면 아닐 가능성이 높겠지. 그쯤 되면 사망 처리하고 나타나면 죽이면 되니까.”


순수하게 잃어버린 동생을 찾는다는 이유는 믿을 수 없다. 황족의 삶은 간접적으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궁금하면 알아보면 되지 않나?”

“그 정도까지 수고를 들이고 싶지는 않거든요.”

“전지의 능력은 아직도 통제가 안 되나?”

“그쪽은 통제하면 좀 오만해질 것 같아서요.”

“낭비다.”

“알아요.”


모든 걸 알 수 있음에도 네인은 모르는 지식은 모른 채로 두었다.

애초에 모든 걸 안다는 건 개인적으로 인간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로 피곤한 성격이군.”

“성격.. 이랄까요?”

“물건이라면 성질이라고 해도 될 정도니까.”

“하하.”


변하지 않는다.

아니.. 변했다고 해야 할까.

눈앞의 네인은 마치 하나의 물질과도 같았다.

주어진 환경과 변화에 따라 성격을 천천히 바꾸어나갔다.

기틀은 바뀌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격이 추가되고 사라지기도 한다.

사람이란 게 늘 그렇지만 네인은 절대로 한 번의 큰 충격에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자신의 사망 이후에도 그렇고 한 번의 폭주 이후에도 그렇고 그 후 네인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돌이 바람에 풍화되듯 철이 부식되듯 그저 천천히 시간을 들여 네인은 자신을 바꾸어나갔다. 하지만 돌이 풍화되어도 돌이듯이, 철이 부식돼도 철이듯.

네인은 여전히 네인이었다.


‘그러니 이런 게 가능한 것이겠지.’


흑마법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는 해로 보이는 광원이 있으며 그 위에 구름이 있었다.

빛은 따스하지만 계속해서 열을 내뿜지는 않았다.

때때로는 한기를 내뿜기도 하고 가끔은 빛도 꺼진다.

보통은 구름이 빛의 열기를 조절하지만, 이곳의 구름은 다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슬슬 한 분 내려오실 때가 되었는데.”


네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구름에서 커다란 무언가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 드래곤이군.”

“같이 가시죠.”


쿠웅..!


저 멀리서 추락한 드래곤으로 인해 땅이 흔들렸다.

땅이 흔들린 여파로 인해 숲의 동식물들이 술렁였다.


“드래곤이 무겁긴 한가 보군.”

“하하.. 지구같이 행성으로 만든 땅이 아니다 보니..”

“그렇지. 여긴 어디까지나 네 정신세계니까.”

“고정을 하던가 행성처럼 만들던가 한번 해볼게요.”

“행성처럼 만드는 게 안정적이겠지.”


조금 더 걷자 텅 빈 공터 같은 곳에 검붉은 드래곤이 쓰러져 있었다.


“크군.”

“크죠. 드래곤이니까.”

“이 정도면 고대룡이라 불리던 존재 같은데. 알고 있는 게 있나?”

“그냥.. 좀 불쌍한 아저씨예요.”

“아저씨라..”


이 거대한 검붉은 드래곤을 아저씨라 말하는 건 이 세상에서 네인밖에 없을 것이다.


“깨어나는 데 시간이 걸리나?”

“조금은요. 그래도 드래곤이시니까 얼마 안 걸릴 겁니다.”


그순간 흑마법사는 단검을 들고 드래곤에게 다가갔다.


“.. 뭐하세요?”

“혈액채취. 전생에서 살아있는 드래곤의 피와 살은 채취하기 힘들었거든. 자존심이 센 종족이라 굴복할지언정 죽음을 택하는 이들이니까.”

“그거라면 제가...”

“이런 것도 한번 해봐야지.”


단검에 흑마법이 깃들고 드래곤의 비늘 사이를 가르려던 그때 드래곤의 눈이 떠졌다.

찰나의 순간 드래곤이 눈을 뜬 걸 확인한 흑마법사는 곧바로 흑마법을 거두고 단검을 숨겼다.


“깨어나셨네요.”

“이곳은...”


드래곤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네인을 발견했다.


“너로구나. 그 인간.”

“깨어나셨네요. 정신이 드세요?”

“오랜 시간 잠이 든 것 같은 기분이다.”

“그럴 거예요. 실제로도 그때의 일은 한참 전의 일이니까요.”

“레아의 기척이 없군.”

“따님은 거절하셨거든요.”

“... 그런가.”

“후회한 점 없다는 표정이라서 저도 설득을 포기했습니다.”

“그래.. 그거면 된 거지.”


드래곤과 네인 사이의 암울한 분위기에 흑마법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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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행동원리 24.03.13 10 0 11쪽
108 세계 24.03.07 8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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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불광불급 24.02.28 8 0 16쪽
105 네인 이야기(4) 24.02.21 8 0 12쪽
104 네인 이야기(3) 24.02.17 8 0 11쪽
103 네인 이야기(2) 24.02.15 9 0 11쪽
102 네인 이야기 24.02.10 12 0 11쪽
101 검은색 24.01.30 12 0 11쪽
100 침식 24.01.24 11 0 13쪽
99 폭주 전조 24.01.17 12 0 11쪽
98 실험 24.01.15 11 0 12쪽
97 방식과 방법 24.01.09 10 0 13쪽
96 인내의 시간 23.12.31 14 0 11쪽
95 지옥도 23.12.22 9 0 11쪽
94 죄와 속죄 그리고 정의 23.12.15 8 0 12쪽
93 마피아 게임 23.12.07 10 0 13쪽
92 해야할 일 23.12.02 11 0 12쪽
91 테스트 23.11.26 12 0 13쪽
90 인간의 방향 23.11.20 10 0 17쪽
89 신과 인간 그 어딘가 23.11.08 15 0 16쪽
88 원점 23.10.24 9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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