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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그코크 님의 서재입니다.

인간입니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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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그코크
작품등록일 :
2023.05.11 21:42
최근연재일 :
2024.05.2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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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31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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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의 시간

DUMMY

지옥(地獄).

직역하면 감옥의 땅

보통은 죄를 지은 사람이 죽어서 가는 땅으로 인식하는 게 보통이다.

그럼, 그 죄의 기준은 뭘까, 그 죄는 누가 판별하는 걸까 그리고... 과연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은 존재하는 걸까.

애초에 지옥이라는 것 자체도 그 존재를 증명할 수단과 방법은 없다.

그럼에도 사람을 지옥을 두려워하고 또 가기 싫어한다.

근데 또 죄는 짓는 사람은 줄지를 않는다.

살려고 그러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고.

뭐, 그거까지는 이해하기 싫고 또 알 필요도 없다.

그거 외에도 세상에는 이해해야 할 건 많으니까.


“지옥이라... 확실히 지옥처럼 보이긴 하네.”


네인은 노인의 뒤를 따라 길을 걸으면서 변화하는 풍경을 구경했다.

흔히 지옥이라 하면 벌을 받는 장소. 그리고 네인이 생각하는 벌은 가장 심플한 생각으로 이루어졌다.

역지사지(易地思之).

이 사자성어는 생각이지만 그러면 벌이 안 된다.

그럼 직접 경험해보는 수밖에.


푹!


노인의 배에 창이 꽂혔다.

벌이 시작되었다.





노인은 지옥의 첫걸음을 내디뎠을 때 생각했다.


‘걷는 것 자체에는 문제가 없는 건가.’


두 걸음을 걸었을 때는 이렇게 생각했다.


‘너무 겁먹은 건가.’


그리고 세 걸음 때는 이렇게 생각했다.


‘... 지옥이다.’


세 걸음을 내디뎠을 때 땅은 피로 물들었고 숲은 불타는 마을로 변했으며 시체는 살려달라고 외치는 사람들로 변했다.

누가 보면 확실히 지옥이라 부를만한 풍경.

그런 지옥을 걸으면서 노인은 한가지 생각이 더 들었다.


‘내가 만든 지옥...’


그리고 노인은 깨달았다. 내가 받을 벌이 무엇인지.

어떤 병사의 창이 노인의 복부를 꿰뚫었다.

아는 얼굴이었다.

이곳에서 첫 전투... 학살을 한 어린 병사.

명령이라고 지시했지만, 끝끝내 이 병사는 이 학살 이후 자살을 했었다.

노인은 복부에 타오를 듯한 고통을 느꼈지만 쓰러지지 않았다. 무언가가 노인을 지탱했기 때문이다.

지탱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노인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노인은 네인의 충고에 따라 계속해서 걸었다.

창에 찔리고 한 걸음 걷자, 복부를 꿰뚫은 창. 뚫린 구멍은 원래 없었다는 듯이 사라졌다.

고통은 남아있었다.

그리고 또 이번엔 등 뒤에서 창에 꿰뚫렸다. 창끝은 가슴으로 튀어나왔고 이후 한 걸음 걷자 고통만을 남긴 채 창도 상처도 사라졌다.

한걸음, 한걸음.

계속해서 죽이기 위해 찾아오는 병사들을 보며 생각했다.


‘이게 내 죄구나.’


시체가 쌓이고 피가 고이고 또 흐른다.

불타 재가 되어가는 집은 무너지고 시체를 태우고 피를 마르게 한다.

그 과정에서 비명과 악취가 넘쳐나지만, 여전히 자신을 찌르는 창과 베는 검의 고통을 이겨내며 앞으로 향했다.

베이고 찔린 육체는 원래대로 돌아오나 고통만은 여전히 남아있기에 평범한 사람이라면 진즉에 기절했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이 상황에서 노인은 오롯이 정신력으로 이 상황을 견뎌내고 있었다.

과연 어떻게, 어떤 이유로 버텨내고 있을지 생각하면 나름대로 이해가 되지만 여기서는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하면 역시 보통이라는 단어는 안 어울리는 일이었다.


쿠웅..!


건물이 무너진다.

시체는 건물의 잔해에 파묻히고 건물을 태우는 불에 의해 더 타오른다.

비명은 이전보다 더 크고 광활하게 울리고 그에 따른 병사들의 움직임도 더 가속된다.

전쟁에는 광기라는 게 있다.

전쟁 중 인간이 살기 위해 신체에서 뿜어내는 도파민 덕분에 공포도 고통도 잊는 흥분 상태에 빠지는 것 때문에 이런 광기가 생기는 게 아닌가 싶다.

물론 네인은 잘 모른다. 그저 그런 지식으로 남은 기억이니까.

경험도, 기억도 없는 그저 글로 남은 지식.

‘개인의 기억’으로는 없다.

하지만 지금 거의 이지를 잃은 흥분상태의 군인들을 보면 딱히 틀린 정보는 아닌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살인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이들이 갑자기 자신이 살인을 한다고 생각하면 딱 저러긴 할 것 같다.

불행하게도 이건 ‘단체의 기억’으로는 많다.

단체의 기억으로 첫 살인에 대한 기억은 차고 넘쳐나니까.


‘그나저나 태연하시군. 상상 이상으로 정신력이 강해.’


상처는 없어진다고 해도 고통으로 몸이 삐그덕댈만한데 한 치 흐트러짐 없이 걷고 있다. 마치 늘 그래왔던 것처럼.

다리를 찔려도 몸통을 베여도 목을 찔려도 안면을 베여도.

그 걸음에는 한 치 흐트러짐이 없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존경심이 그리고 궁금증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과연 이 고통 속에서 저 노인을 걷게 만드는 원동력이 무엇인지.

그 근원의 시발점이 어디인지.

네인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주르륵...


네인의 눈에서 피눈물이 났다.

머릿속에서도 어떤 말이 들렸다.

네인은 피눈물을 지우고 관자놀이를 눌렀다.


‘심하네.’


최근 감정이 들쑥날쑥하고 머릿속에서 알 것 같은 말이 계속해서 들렸다.

사춘기는 아니다. 사춘기는 전생과 그 시기가 맞아떨어졌고 지금은 오히려 안정기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감정이 들쑥날쑥하고 머릿속에서 말이 들린다는 건 한가지 이유밖에 없었다.

네인이 그동안 받아들인 기억이 날뛰고 있다는 것.

이지를 갖고 날뛰는 것이 아닌 무언가에 억눌린 게 이제 터졌다고 해야 하는 게 옳을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제어가 안 된다는 사실은 정답이다.

사춘기에는 날뛰는 호르몬 덕에 잡생각이 많이 생각나고 그래서 이런 일이 안 일어난 것 같다.


‘죽여.. 죽여....’

‘내아이.. 내 가족...’

‘원수를 죽여..’

‘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


설마 전생에서 흑역사를 만든 사춘기의 덕을 볼 거라 생각하지 못했지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정신에 안정이 들 시기에 이런 상황은 충분히 버틸만하니까.


푹!


네인은 길가에 떨어진 창으로 가슴을 찔렀다.

찌른 이유는 단순했다.

버틸만한 조건에는 다소의 고통이 필요했으니까.

과연 5년 뒤에는 얼마만큼의 고통이 필요한지는 계산할 필요는 없다. 5년의 시간은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니까.

네인은 눈앞을 봤다.

노인은 피투성이가 된채 걸어가고 있다.

상처는 사라져도 상처가 생길 때 튀는 피는 사라지지 않았다.

옷도 너덜너덜해지고 피가 묻어 이제는 옷의 원형조차 거의 남지 않았다.

마을은 거의 재가 되었고 비명도 잦아들기 시작했다.

시체는 산처럼 쌓이고 불태워지고 있다.


‘생각보다 진행이 빠르네. 속도를 늦추는 편이 더 나았으려나?’


수천, 수만을 생각한 진행 속도였는데 역시 이 시대의 마을이라고 하면 기껏해야 수십, 수백이였다.

마을 하나가 아닐 거라는 생각도 있었지만, 지금의 진행 상황을 보면 그래도 수천까지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계산상 대략 마을 4~6개 규모의 학살.

죄책감에 비해 다소 작은 규모의 학살.

아닌가? 많은 편인가?

무릇 학살이라 하면 사람의 생명에 관심이 없거나 살인 그 자체를 즐기는 이들이 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에게 살인에 대한 죄책감이 있을 리가 없고 나중에는 티끌만큼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학살이 아닌 살인도 사람에 따라 죄책감의 크기가 다르니 비교하기가 너무 애매하다.


‘... 죄책감을 시각화한 정보가 없으니 큰지 작은지 판단이 안 되네.’


노인의 죄책감을 시각화한 네인의 눈에는 노인 외의 세상이 흑백으로 보였다.

멀리서 본적은 없으니, 규모에 대한 추측은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알 것 같다.

적어도 네인이 만든 이 가상 세계를 가득 채울 정도는 된다는 것.


푹!


네인은 가슴에 꽂힌 창을 뽑아 목에 다시 찔러넣었다.

네인은 생각한 것 미만으로 고통이 필요하단 것에 안도했다.

한창 몸에 기억을 집어넣었던 시절에는 산채로 분해하는 고통이 필요했는데 지금은 그저 몸에 크게 구멍만 내면 그만이니까.


‘... 맛이 갔구나? 나.’


이런 생각을 하고있는 것 자체가 이미 정상인의 범주를 벗어났다는 건 안다. 다만 새삼 되짚어보니 진심으로 정상은 아니었다.

근데 정상인 코스프레는 익숙하니까 상관없다.

저주도 있고 아슬아슬하지만 ‘제약’도 있다.

폭주의 가능성은 0에 가깝다.

자신에 대한 가늠은 여기까지.

마을은 거의 전소되었고 사람을 죽이는 군인은 사라지고 남은 건 노인을 죽이려는 존재들.

이제 하이라이트다.


딱!






걸으면서 반복되던 불타는 마을의 풍경이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해는 점점 지고 있고 밤이 되려고 하는 황혼의 시간.

마을에서 벗어난 시점에서 더는 노인을 찌르는 병사는 없었다.

집이 불타는 소리도, 살려달라는 비명도, 사람을 찌르고 베는 소리도 없었다.

마을을 벗어난 노인을 맞이하는 건 숲의 바람과 나뭇잎과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소리.

아까 전의 마을과는 확연히 비교되는 광경이었다.


“생각보다 잘 버티시네요?”


네인은 웃으면서 노인의 앞에 섰다.


“... 오랜만이군요.”

“그렇네요.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은 맞다. 무려 체감 시간은 일주일이나 지났으니까.


“배는 안 고프십니까?”

“다행히 안 고픕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오히려 가벼운 느낌마저 듭니다.”

“지나간 지옥에 대한 감상은 어떻습니까.”

“지옥이었습니까? 너무 편안해서 천국 같았습니다.”

“농담을 할정도로 여유가 있다는 대답으로 알겠습니다.”


네인은 노인을 흩어보았다.


옷은 이미 창칼에 조각나 사라졌고 전신이 피로 범벅이 되어있다.

몸은 여타 다를 것 없는 평범한 노인의 몸.

그리고 그 몸으로 한 번도 쓰러지지 않고 지옥을 지나 당당히 걸어 나왔다.

누군가는 감탄하고 누군가는 칭찬할 일이었지만 이는 네인에게 해당되는 말은 아니었다.


“충고하나 해도 될까요?”

“하게나.”

“넘어지셔도 됩니다. 어떻게든 걸으면 되니까요.”

“... 알겠네.”


노인은 네인을 지나 앞으로 나아갔다.

멀어지는 노인을 보며 네인은 또다시 피눈물을 흘렸다.


“아 진짜 감정 왜이래.”


부정적인 기억만을 얻어서 그런지 감정이라던가 몸의 반응은 안 좋은 쪽으로 계속해서 반응한다. 이 부분에 대한 조율은 차차 진행하면 될 것 같다.

그것보다 지금 문제는...


‘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

‘안돼안돼안돼안돼안돼안돼.’


노인을 죽이려는 사념과 그것을 반대하는 기억이 매우 강해 몸에도 영향이 간다는 것. 그로 인해 평소와 같은 사고방식은 제대로 못 한다는 점이다.


“근래의 사건은 당사자가 있으면 신체에 영향을 줄 정도로 기억이 날뛰는구나. 근데 인간이 아닌 기억도 있는데 미치겠네.”


워낙 욱여넣은 기억이 많다 보니 세세하게 기억하지 못하지만 어지간한 생물의 기억은 다 갖고 있다.

대부분 좋은 기억이 아니지만 그 기억 때문에 지금의 ‘나’가 있다.

물론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안다면 이 기억에 대한 내용물과 정체를 안다면 머리를 세게 내리쳐 기억 잃어버리게 하는 방법을 찾을 것이다.

그만큼 질나쁜 기억이니까.

아. 질나쁜 기억이라고 하면 그들에게 모욕이 될테니 이렇게 정정하겠다.

삶을 지옥으로 거닌 이들의 기억.

그리고 그런 이들의 최후는 대게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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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지옥도 23.12.22 8 0 11쪽
94 죄와 속죄 그리고 정의 23.12.15 8 0 12쪽
93 마피아 게임 23.12.07 10 0 13쪽
92 해야할 일 23.12.02 11 0 12쪽
91 테스트 23.11.26 12 0 13쪽
90 인간의 방향 23.11.20 10 0 17쪽
89 신과 인간 그 어딘가 23.11.08 15 0 16쪽
88 원점 23.10.24 9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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