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버지가 죽었다. 오늘, 아니 어제. - 4
1.
비록 서로간의 약혼은 부모들의 상황 때문에 좋지 않게 끝났지만, 그녀가 자신에게 인간적인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는 건 아서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황실의 후계자들이 그런 사소한 감정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황제가 그의 절친한 친구인 자신의 아버지에게 한 행동이 그걸 증명하고 있었다.
“음, 전혀 믿지 않는다는 표정이네. 거짓말이 아닌데. 다만 남편으로서 필요한 게 아닌 부하로서 필요하다는 의미지만 말이야.”
“부하? 동부 총독이신 테레사님 밑에는 이미 유능한 인재들이 상당하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래, 유능한 인재들이 많긴 하지, 다만 유능한 기사나 군 사령관은 없지.”
“흠, 테레사님.”
아서의 진지한 얼굴에 테레사 역시 진지하게 그와 눈을 마주친 순간,
“죄송하지만 쿠데타를 위한 군대는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
“하! 썩 재미없는 농담이었어. 아서.”
“그렇습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그런 쪽으론 무지해서 말입니다.”
농담을 하는 척 그녀의 반응을 관찰했으나, 정말로 그녀는 쿠데타에 대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쉬운데. 내전만큼 발렌베르가 영광을 되찾기 좋은 기회도 없거늘.’
“확실히, 아버지와 제국의회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있어서는 발렌베르라는 가문의 힘이 별로 도움이 되지 않지. 하지만 우리 황위 계승자들에게 주어진 사명은 단순히 아버지와 귀족들에게 잘 보이는 것만 있는 건 아니야.”
책상 위에 놓인 지도를 가리키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황위 계승자들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의무는 자신이 다스리는 지역을 발전시키는 거야. 문제는 내가 다스리는 동부지역만 해도 바로 옆 갈리폴리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 그리고 동부 너머 서쪽 식민지에서도 심상치 않은 소식들이 전해져 오고 있어, 그리고 이 모든 문제들을 믿고 맡길 만한 집단은 검은 날개 기사단과 그들을 이끄는 아서 발렌베르 공작 밖에 없지.”
“그렇다 해도 아버지이신 황제폐하와 반목할 위험성 까지 얻을 필요는 없으실 텐데요. 저희들의 대체재 정도쯤이야 구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고요.”
“글쎄,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서 말이야. 더 많은 이야기는 한 배를 탄 후 생각하기로 하고, 그래서 내가 내민 제안을 받아들인 건가?”
“흠.”
그녀가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으나, 분명 제안 자체는 발렌베르에게 있어 매력적이었다.
가주의 목을 바치는 등 체면을 구기긴 했지만, 테레사를 가교 삼아 황제와의 신뢰관계를 다시 구축하는 동시에 위태로운 내부를 단속 할 수 있다면 그리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황제 역시, 제임스 발렌베르의 목을 통해 체면 치레를 하면서도 자식과의 약혼을 통해 동맹관계를 재확인 할 수 있으니 손해가 아닌 이득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갈리폴리의 반란을 정리하는 거야 검은 날개라면 어렵지 않게 마무리 될 터.
결과적으로 손해를 본 건 정치적 동맹을 얻을 기회를 놓친 테레사 뿐일텐데.
‘우리의 가치를 그 정도로 높게 쳤다고?’
“테레사님, 황제폐하를 설득하실 방법은 있는 겁니까?”
“물론이지. 내가 워낙 맡은 일을 잘 처리해서 말이야. 아버지한테 약조 받은 게 꽤 있단 말이지.”
“그렇다면, 좋습니다.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겠죠.”
그녀에겐 미안하지만, 당분간은 그녀를 방패삼아 황제와 다른 귀족들의 견제를 피해 내실을 다져야 할 때였다.
“다시 테레사 라니에의 약혼자가 된 걸 축하해. 공작.”
“참, 세상일은 모르는 거군요. 협의문에 대한 발표는 언제입니까?”
“갈리폴리에서 피어난 불꽃이 점점 심각해져서 말이야, 자세한 협의 조항을 작성한 후, 아버지의 허락이 떨어지는 즉시 갈리폴리로 가줘야 할 것 같아.”
‘갈리폴리 외각에서 대치중이라던 황제가 고용한 용병들이 박살났나 보군.’
발렌베르의 영향력을 축소시키겠다며 황제가 진행한 중앙군에 대한 개혁은 야심차게 시작했으나, 타국군은커녕 농민반란군에게 조차 대패하며 실패했다.
그 결과 가주가 미치며 사실상 주인을 잃어버렸음에도 발렌베르의 중요성이 더욱 커져만 갔던 거였고.
이런 상황이라면 좀 더 고자세로 나가도 나쁘지 않겠으나, 갈리폴리를 정리 한 후 황제가 건네줄 포상금을 생각해 그의 체면을 세워주기로 했다.
황제는 비열 할 지언즉, 칭찬에 대한 보상은 확실한 군주였으니.
2.
이후 실무자들이 포함된 합의문 작성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애초에 이번 사태가 발렌베르의 영향력이 너무 커지는 걸 염려한 황제가 벌인 사태였던 만큼, 합의문 역시 간단했다.
[발렌베르는 전대 가주가 저지른 죄에 대해 사과하고, 황제는 그 사과를 받아들여 다시 발렌베르에 은혜를 베푼다.]
아서와 테레사의 약혼은 둘 사이의 약속에 대한 보증일 뿐.
몇 시간에 걸친 합의문 작성에 피곤했는지, 테레사가 의자에서 기지개를 폈다.
“후, 이렇게 간단한 합의를 하지 못해 전쟁을 할 뻔 했다니. 참.”
“사소한 다툼이 큰 갈등으로 발전하는 법이죠.”
“나는 동부의 일이 바빠서 말이야. 먼저 가보지 공작.”
그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아서와 악수를 한 후,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곧바로 자신의 보좌관과 호위들을 이끌고 방에서 나갔다.
중앙의 귀족들이 그렇게 찾는 예의와 격식 따윈 던져버린 참으로 실용주의적인 모습에 월리엄경이 한참을 고민한 끝에 말을 꺼냈다.
“...초심 그대로인 모습이 참 보기 좋으시군요.”
“우리도 시간이 없습니다. 월리엄 경. 황제에 대한 건 해결했지만 갈리폴리라는 또 다른 문제와 기사단의 막대한 예산을 받쳐줄 자금줄을 찾아야 된다는 문제가 놓여 있으니까요. 본성에 사람을 보내 각 봉신들에게 소집령을 내린다고 알리세요.”
“예. 공작님.”
황제의 견제에서 벗어났으나, 가문에는 여전히 문제들이 산재해 있었다.
주저할 시간 따윈 존재하지 않는 아서 역시 곧바로 테레사가 나간 문을 열고 나간 회의장, 피곤한 얼굴의 고드프리 경만이 남아 한숨을 쉬었다.
“후, 요양이나 가야겠군..”
3.
테레사의 부관, 토머스는 자신의 상관의 결정을 납득 하지 못했다.
“테레사님, 정말로 저들이 그 정도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확실히 토머스가 보기엔 이해가 가질 않겠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버지에게서 반역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와 함께 귀중한 기회마저 날려가며 발렌베르를 얻을 합리적인 이유가 없으니까 말이야.”
그런 사람이 왜 그런 짓을 선택을 하신 거냐는 원망에 눈짓에 테레사가 웃음을 터트렸다.
“흐음, 이런 말을 하게 돼서 좀 그렇지만, 연이어 천재들을 배출해온 공작가의 자제들 중에서도 아서는 진짜 천재야. 그런 공작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무적의 기사들까지, 아서는 아버지와 대립을 하면서 까지 얻을 만한 존재야. 지금이야 저평가 되어 있지만 두고 보라고. 반년만 지나도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을 테니까.”
주인의 설명에도 토머스는 의심을 거둘 수 없었으나, 그는 주인을 믿기로 했다.
테레사님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으니까.
“우리 약혼자님이 갈리폴리에서 어떤 모습으로 출사표를 던질지 벌써 기대되는걸~?”
4.
테레사의 말대로 황제에게 전령을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황제의 대답이 되돌아왔다.
“갈리폴리의 반역자들을 제거하라, 라니.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저희보고 반역자라며 매도하더니 참 황제폐하도 뻔뻔하시군요.”
“그런 인간이니 중앙정계를 지배하고 황권을 유지하고 있는 거겠지요. 그래도 예상보다는 보상금이 후하니, 얼른 끝냅시다. 월리엄 경.”
가족조차 신뢰하지 않는 황제가 믿는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돈과 돈에 대한 사람들의 탐욕이었다.
확실히 이번 일은 황제의 오판 때문에 일어났던 만큼, 그도 우리 가문을 달래기 위한 당근으로 막대한 자금을 선택한 모양이었다.
“와, 그깟 반란 하나 진압한다고 기사단의 반년 치 봉급을 보내주다니, 심지어 선불이랍니다. 확실히 라니에 가문의 금고는 마를 날이 없다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돈으로 황좌를 차지 한 가문이니까요.”
단순히 위험하다는 사실만으로 가문을 벼랑 끝으로 몰아붙인 황제의 행동은 용서 할 순 없으나, 검은 날개 기사단원들이 자발적으로 봉급을 적게 받을 정도로 재정적으로 위태로운 상황에서 그가 보내준 금화들은 가뭄의 단비나 다름 없었다.
기사단원들이 보여준 마음은 고마웠으나, 이런 임금 체불이 지속되거나 반복되는 순간 기사들은 가문의 태도에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돈으로 충성을 살 순 없지만, 마음만으로도 충성을 유지 할 순 없는 법이고, 충성을 보인 만큼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게 장군으로서의 도리였다.
“지원 병력은 어디까지 도착했다고 합니까?”
“현재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각 영지에서 준비하던 기사들이 우선적으로 발렌베르 성에 집결한 후,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 합니다. 보급선등을 생각하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만, 저희 먼저 갈리폴리로 출발한 후 그곳에서 합류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자신만만한 태도의 부하 말에 아서는 고개를 저었다.
“적들이 아무리 나약해 보인다 한들, 방심해선 안 됩니다. 수많은 세력들이 우리가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서 우린 완벽한 전투를 펼쳐야 해요. 우선 경기병들과 세작을 풀어 정보부터 수집하고, 우리는 병참선을 비롯한 대전략부터 세우죠.”
“알겠습니다. 공작각하.”
자신이 공작이 된 후 겪는 첫 전쟁. 이번 전쟁을 어떻게 정리하느냐에 따라 우리 가문에 대한 평가가 갈릴 것이다.
절대 패배해서도, 멍청한 모습을 보여 권위를 깎아 내려선 안됐다.
아서가 이끄는 건 불패의 군대, 발렌베르의 검은 날개였으니까.
- 작가의말
농노의 삶은 쉽지가 않았다고 합니다.
오늘도 글을 읽어 수신 독자 분들에게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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