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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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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조회수 :
13,255
추천수 :
431
글자수 :
916,352

작성
23.06.19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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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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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자
11쪽

그믐_달숲의 작은 천사

DUMMY

가온의 소품샵에 앉아있으니 비스듬히 들어오는 오전 햇살도 맛나게 느껴졌다.

잔잔한 음악도 흐르고 평안했다. 아롱재에 앉아있는 기분이었다.


지난밤 옥상에서 보았던 마음숲이 눈앞에 펼쳐졌다. 따뜻하고 은은한 빛이 혼알방이며 개울과 샛강, 장터와 광장을 그려주었다.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자 가온이 내 어깨를 툭 쳤다.


커피향이 진하게 올라왔다. 그녀가 머그잔을 내밀었다.

“오히려 잘됐어. 묶여있지 않아도 되잖아?”


가온은 내 옆에 앉아 거리를 내다보았다.


나도 그녀를 따라 유리문 밖 거리를 바라보았다. 아직 점심 전이라 거리는 한산했다.

‘하긴, 이런 변두리 골목까지 찾아오는 손님도 없겠지.’


“어제는 놀랐지만, 생각해 보니 그게 더 낫더라고. 그믐에만 나오는 건 너무 답답하잖아?”

가온은 커피잔을 손바닥으로 감싸 들었다.


“천사직을 맡아도 되잖아? 천사의 피를 갖고 있으니. 아냐, 그보다 차원의 문지기가 낫겠다.”

가온이 내 손을 잡았다. 따뜻한 머그잔을 들고 있던 손이라 후끈거렸다.


“나랑 같이 차원의 문을 지키자. 여기 빈방도 있어. 너라면 언제나 환영이야.”

“고마워. 그런데, 아직 모르겠어. 지금은 다음 마고를 찾는 것이 먼저라서.”


“다음 마고가 인간세에 있다고?”

가온은 어젯밤 내가 들려준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인간세 실증계에 있는 것은 확실했다.

가온과 빌라 식구들에게 부탁한 이유는 그믐 외출에서 내 마음대로 장소를 선택할 수 없어서였다.

그믐에만 마음숲에서 나오는 데다, 다른 마고처럼 날아다니며 공간을 건너뛸 수도 없었다.


“실증계라···. 그것만으로 못 찾아.”

가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저기 함정이 있어서 시간도 뒤엉켜. 거기 빠지면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야. 꽃수 열쇠가 부르지 않았다면 나도 그때 미아가 되었을 거야.”


“마고도 힘든 일이네. 그래도! 찾아야지! 우리가 못 하면 누가 하겠어?”

가온이 씩씩하게 말해주니 힘이 났다.


그녀는 장난꾸러기에 엉뚱하기는 해도 약속은 반드시 지켰다. 다음 마고를 찾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도와줄 것이다.


“고마워.”

인사하는데 목이 콱 메었다. 나는 재빨리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커피를 다 마시고 멍하니 거리를 내다보는데, 두 사람이 가게 앞에 나타났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오로라가 독특해서 자연스레 눈이 갔다.


남자는 키가 크고 어깨가 넓어 양복이 잘 어울렸다. 여자는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운동화를 신어서 산책 나온 사람 같았다.


표정이나 동작을 보면 그다지 친한 사이는 아닌데, 둘의 기운이 어찌 저리 잘 어우러지는지.


여자가 가게 앞의 입간판을 가리키며 뭐라고 얘기하자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삼각대 모양의 입간판에는 달숲의 작은 천사라는 가게 이름만 적혀있었다.


가온도 그들을 보고 있었다.

“잘 봐. 내가 얼마나 장사를 잘하는지.”

그녀는 자신 있게 말했다.


그녀는 물건을 정리하는 척 진열대 앞을 서성였다. 여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어머, 연두여신! 오랜만이네요. 어서 와요.”

이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는 가온과 잘 아는 사이 같았다.


여자는 남자를 도와주고 있었다. 남자가 친구에게 선물을 해야 하는데 추천해주려고 왔다나.

그의 친구이자 그녀의 친구라는 사람 역시 가온의 단골 같았다.


가온은 생긋 웃으며 여러 나라의 공예품이 즐비한 진열대를 가리켰다.

“골라봐요. 꽃샘추위님 취향은 여기서만 찾을 수 있을걸요?”


연두여신이 물건을 돌아보는 사이에도 남자는 입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예리한 눈으로 가게 안을 둘러볼 뿐, 표정이 거의 없었다.


나는 두 사람의 기운이 신기해서 허공의 오로라를 계속 바라보았다.

‘여기가 차원의 문이라서 잘 보이는구나. 음···, 천사도 곁에 있으니.’


문지기들이 없다면 저 두 사람은 여기 들어오지 못했을 것이다. 차원의 문에 사람이 가까이 가기만 해도 녹아버리니까.

‘차원의 문도 은근히 재미있네.’


연두여신은 얼굴이 동글동글해서 어려 보여도, 눈빛이 깊었다. 큰 고생은 아니라도 사연이 있는 얼굴이었다.

‘이 혼은 바림창고에 유물을 남기지 않았구나. 어라?’


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안에 들어있는 혼은 언젠가 상생농장에서 도우미로 있던 혼이었다.


‘식물을 잘 돌보나? 연두여신이라···.’

상생농장의 기억이 조금은 남았나 보다. 마음숲 공방에 다니든 도우미로 있든, 대개는 그때 기억도 지워지는데.


‘그럼 저쪽은···.’

남자의 얼굴에는 묵직한 힘이 서려 있었다. 그냥 서 있는 데도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그래도 눈빛은 상처가 깊었다.


‘사람을 믿지 않는구나. 저 혼은 공방에 다녔을까나?’


두 사람 모두 수명환이 필요한 상태는 아니었다.

건강했고, 마음가짐도 나쁘지 않았다. 둘 다 상처가 있지만, 슬기롭게 대처할 만큼 강인해 보였다.


가온이 딱 소리 나게 손가락을 튕겼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또 무슨 일을 벌이려고?’


진귀한 구경이었다. 천사 가온이 인간세에서 장사를 하다니.

나는 손님용 의자에 앉아 그녀가 어떻게 물건을 파는지 살펴보았다.


“꽃샘추위님 것은 연두여신이 고를 테니, 손님도 하나 보시죠. 이거 어떠세요?”

가온은 남자에게 목걸이를 내밀었다.


‘뭐야? 가온이 왜 저래?’

나는 가온이 들고 있는 목걸이를 바라보았다. 새끼손가락 두 마디만 한 금문석에 글자를 새긴···.


‘바림창고의 유물!’

놀랄 틈도 없이 돌조각이 남자의 혼과 공명하기 시작했다.


정작 유물의 주인은 공명하면서도 그서이 무엇인지 모르는 눈치였다.


검새 공방에서 깎은 유물은 맞지만···.

유물은 주인의 삶에서 중요한 순간에 나타나는데? 지금 여기 왔다면···. 지금이 그에게 필요한 때라서?


남자는 목걸이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거절했다.

“아닙니다. 친구 선물이 필요해서 왔으니 이분이 고르는 걸로 사겠습니다.”


가온은 싱글거리며 금문석을 그의 눈앞으로 올려주었다.


금문석에 새겨진 글귀를 보자 남자의 눈빛이 달라졌다. 눈꺼풀이 가볍게 떨렸다.


가온은 목걸이를 손바닥으로 받쳐 들었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답니다. 옛날에 한 장사꾼이 있었는데, 능력이 뛰어나서 돈을 많이 벌었지요. 외모도 훌륭하고, 풍채도 좋고, 지혜로웠대요. 단 하나, 그가 갖지 못한 것이 있었어요.”


가온은 애틋한 눈으로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한 여인을 사모했는데, 여인은 그 마음을 몰랐어요. 그녀는 더 큰 명예와 부를 원했어요. 그만 다른 지방 부호에게 가버렸지요. 왕보다 돈이 많다는 부자였거든요. 여인을 잃고, 그는 진짜 사랑을 만나고 싶다는 일념으로 매일 밤 돌을 깎았답니다.”


말을 마치고 가온은 목걸이를 남자에게 건넸다.

이번에는 그가 목걸이를 받아들었다. 그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보세요. 글씨가 보이죠? 나는 믿는다. 구름처럼 바람처럼 이 또한 지나가나 언젠가 진짜 열매를 맺기를.”

가온은 남자를 흘끗거리며 목걸이를 가리켰다.


“이건 간절한 기도예요. 다음 생에라도 진짜 사랑을 찾고 싶다고요. 어떠세요? 마음에 안 들면 두고 가셔도 돼요.”

가온은 여전히 기분 좋게 생글거렸다. 아휴, 저 눈빛을 보고도 안 사면 사람이 아니지.


‘그런데 무슨 전생의 사랑?’

저건, 그때 그 혼···. 아, 이름은 잊었네.


어쨌든 그 혼이 너나들이 상인의 이야기를 듣고 쓴 것이다. 깨달음을 얻지 못해 괴로워하는 학자의 이야기였다. 장사꾼 얘기가 아니라.


‘가온의 말재주가 저렇게 좋았나? 하긴, 천사장도 꼼짝 못 했으니 장사 수완도 좋겠구나.’

점점 더 재미있어지는데?


“그건 뭐예요?”

여자가 목걸이를 보기 위해 남자에게 바짝 다가섰다.


금문석 목걸이를 함께 바라보는 두 사람의 기운이 하나로 맞아들어갔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기운은 색도 다르고, 결도 달랐지만, 둘이 함께 있으니 그 파장이 꼭 맞아들었다.


‘아, 유물이 지금 나타날 만도 하네.’

저 두 사람, 빨리 서로를 알아보면 좋을 텐데.


마고가 여기 있으니 유물도 빠르게 움직였구나. 어쨌든 바림창고의 유물이 제때 주인을 찾아가는 건 좋은 일이다.


“예. 이것도 주십시오.”

남자는 목걸이를 양복 안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천사의 설득이 아니라도 그는 금문석 목걸이를 갖게 되어있다. 유물은 반드시 주인을 찾아가니까.

이번에는 가온이 주선했으니, 목걸이값은 수수료가 되려나.


두 사람이 나가자 가온이 의기양양해서 내 옆에 앉았다.

“어때? 나 장사 잘하지?”


“제법인데? 물건 팔면서 인연까지 이어주고?”

인간세에서 그 정도 도움은 금기에 들지도 않겠구나. 말하자면 물건 파는 기술이니.


“식은 죽 먹기야. 여기 손님들은 대부분 사연이 있거든, 마고가 있어서 그런가 딱 하니 나타났네?”

“그런데, 이야기도 써? 그 문장은 사랑 이야기가 아니야.”

“뭐 어때? 마음의 상처를 읽은 것뿐이야. 거짓으로 지어냈다고 할 수는 없어.”


가온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여하튼 이런 쪽에 쑥맥인 사람이 꼭 있다니까. 누군가는 도와줘야 해.”

“그런 사람이 많아?”


“사람뿐이냐? 대명천에도 하나 있잖아. 어떤 쑥맥이.”

“누구?”

내가 물었지만, 가온은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있어. 그런 쑥맥이. 그보다···.”

가온이 눈을 반짝이며 나를 보았다.


이런! 조심해야 해. 저 눈빛은 천사 가온이 엉뚱한 생각을 한다는 표시니까.


“우리 협업하자. 얄리장터에서 팔다 남은 물건 있으면 넘겨. 상부상조하자고. 천계의 물건인 줄 아무도 모를걸?”


가온은 한숨을 쉬며 자신의 어깨를 주물렀다.

“나도 먹고 살아야지. 어쩔 수 없다니까. 천력도 부족하고···.”


그녀가 천력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었다.

천계의 심부름이 아니니 중간자인 나와 다를 게 없다. 그나마 차원의 문지기라 다른 힘이 있었다.


‘담아가 한 말이 정말이구나.’

인간세에서 지내더니 사람과 비슷해졌다고. 그래도 가온에게는 지금의 모습도 잘 어울렸다.


“그래.”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야.


“좋아, 동맹을 맺은 기념이다. 내일 새벽에는 거리를 돌아보자.”

“거리를?”


“응. 네가 봤다던 그 일.”

가온이 눈을 가늘게 뜨고 함빡 웃었다.


“그···, 그 배낭을 메고 쓰레기를 뒤지는··· 그거?”

나는 빼액 소리를 질렀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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