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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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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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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
글자수 :
916,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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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5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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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그믐_반계의 다른 모습

DUMMY

“나윤, 이분은···.”

예슬이 달려가 나윤의 팔을 잡았지만, 나윤은 나를 노려보며 씩씩거렸다.


“누구야? 누군데 막 들어와?”

주먹을 휘두를 듯 성큼성큼 다가왔다.


나는 주춤 뒤로 물러섰다.

이 빈약한 몸으로는 싸울 수 없고, 마고의 술법을 쓰려면 누군가의 소망이 필요하다.


예슬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나윤을 붙잡고 싸우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럼, 예슬의 바람에 따라···.’


예슬은 나윤의 팔을 꼭 잡고 발을 동동 굴렀다.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졌어. 덫에 걸려서 길을 잃었대.”


“그게 더 수상해. 왜 덫에 걸리냐고!”

나윤이 꽥 소리쳤다.


그녀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콧김을 내뿜느라 얼굴도 달아올랐다.

눈과 입이 크고 몸집만큼이나 주먹도 컸다. 혼빛에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화를 내고 있지만 두려워하고 있었다. 나를 칠 듯 다가오다가 몇 걸음 앞두고 걸음이 느려졌다.


나는 손가락으로 마고의 반지를 쓰다듬었다. 반지에서 따뜻한 기운이 나와 공기를 타고 흘러갔다.


따뜻한 기운이 나윤의 가슴 앞에서 밝게 빛났다.

평온의 빛은 그녀의 숨을 따라 온몸 구석구석 스며들었다.


나윤이 멈춰 섰다. 손을 펴고 손바닥과 손등을 뒤집어보았다.

손끝까지 온기가 전해졌으니 잠시 후면 마음도 평안해질 것이다.


나는 때를 맞추어 간곡한 목소리와 애절한 눈빛을 꾸며냈다.

“미안해요. 삼도천을 헤매다가 소용돌이에 휩쓸렸어요.”


그믐 외출에서 가장 많이 짓는 표정이다. 싸움을 못 하니 이런 기술을 습득할 수밖에.

인간세에서는 제법 통하지만, 이런 일이 아예 안 일어나면 더 좋겠는데.


“삼도천이라면 사람은 아니군요.”

나윤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사람만 아니면 돼요.”


“요리가 남았는데 먹어볼래요? 예슬님이 구해주셔서 감사의 뜻으로 만들었어요.”

나는 나윤을 위해 자리를 비켜주었다.


예슬이 재빨리 접시와 숟가락을 들고 왔다.

“그래, 나윤아, 정말 맛있어. 정말로, 진짜.”


예슬은 해맑게 웃으며 나윤의 맞은편에 앉았다. 나윤도 그런 예슬을 보며 피식 웃었다.


나윤은 천천히 숟가락에 국물을 담아 맛을 보았다. 그녀의 눈과 입이 스르르 벌어졌다.


한 수저 가득 건더기와 국물을 떠올리니 예슬이 까르르 웃었다.

“그치? 정말 맛있지?”


나윤의 눈빛도 달라졌다. 표독스러운 빛이 사라지고 경계가 풀어졌다.


이제 안심이다. 적어도 꽃수 열쇠가 부를 때까지 여기 있을 수 있어.

“마라꽃차도 줄게요. 꽃잎과 죽순을 쪄서 만드는데 지금쯤 식었을 거예요.”


나는 예슬과 나윤을 등지고 서서 꽃잎과 죽순으로 차를 우렸다.


등 뒤에서 둘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부산스러운 손짓도 느껴졌다.

“뭔 일이래? 왜케 맛나?”


“그치? 이름이 사빈이래.”

예슬의 말이 끝나자 나윤이 걸걸하게 소리쳤다.


“사빈 언니! 갈 데 있어요? 방도 비었는데 같이 살아요.”

나윤의 말투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당당했다.


예슬도 손뼉을 쳤다.

“와, 그럼 좋겠다.”


나는 마라꽃차 석 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마라꽃차예요. 마음을 아늑하게 해주죠.”


“이게 밭에 있는 그 꽃잎이라고요?”

예슬과 나윤은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눈을 감고 맛을 음미했다.


나도 차를 맛보았다.

시간이 더 있으면 잘 말려서 우릴 텐데. 그럼 더 그윽한 향이 날 것이다.


‘예슬과 나윤도 아날빛숨의 차를 좋아하겠지···.’

나윤도 반계에서 계속 산다고 하려나? 아니, 여기서는 감여지랬지.


“아, 좋다.”

나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저 방에 살던 혼이 우대인가요?”

나는 지난밤 내가 묵었던 방을 가리켰다.


“어? 우대를 알아요?”

“피천···, 아니 귀사님이 하는 말을 들었어요.”


“우와, 벌써 귀사님도 만나고!”

나윤이 활짝 웃었다.


“맞아요. 예슬이 오기 전에 같이 살았어요. 여기서 오백 년이나 살았대요.”

“어디 갔어요?”


“감여지의 보호막이 되었어요.”

“예?”

무슨 말인지 몰라 되물었다. 반계의 보호막이라면 그 검은 장벽인가?


“사백 년 정도 지나면 모습을 갖기 힘들어진대요. 몸도 아프고, 생각도 가끔 사라지고, 길도 못 찾고요. 나중에는 움직이지도 못하게 돼요. 그때 들어가는 거예요.”


“보호막으로요?”

내가 놀라 묻자 나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여지에서 살던 혼이 우리를 지켜주며 함께 사는 거예요.”

이번에는 예슬이 설명했다.


‘아···.’

깊은 탄식이 나왔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반계에 들어선 혼은 씻김도, 회생도 할 수 없으니 소멸하는 것이다. 그것을 보호막이 된다고 하는구나.


“그럼, 인간세에 다시 태어날 방법은 없어요?”

“무슨!”

나윤이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절대로 싫어요. 나도 여기서 지내다가 감여지의 보호막이 될 거예요.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지 않아요. 다시는!”

나윤의 단호한 태도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사람이었을 때는 어땠어요? 무슨 사연이 있나요?”

“아니! 사연이랄 것도 없어요.”

나윤이 벌떡 일어섰다.


“모임에서 가져온 거나 구경하자. 이번에도 향낭 주문을 많이 받았어.”

나윤이 문 앞에 던져놓은 보따리를 가져왔다.


쌀이나 잡곡 같은 식량부터 옷감과 장식용 구슬, 알록달록한 실이 들어있었다.

나윤은 말린 고기를 꺼내 들었다.


“네가 좋아하는 거. 말린 생선도 있어.”

“응. 고마워. 오늘은 뭘 만들지?”


“육전을 만들어도 맛날 거예요.”

나도 일어나 보따리의 물건을 바라보았다.


인간세에서 온 물건이지만, 오래전 유행한 양식이었다.

피천귀들은 이런 물건을 어떻게 구했을까. 훔치거나 빼앗아 오나? 아니면 천사 가온처럼 재활용 쓰레기를 뒤적거릴까?


가온을 생각하니 바람벽에서 본 모습이 생각났다. 새벽빛 아래 뒷골목을 뒤적거리는 천사라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사빈님, 치맛단이···.”

예슬이 놀라 쪼그려 앉았다. 치맛단이 뜯어져 실이 올올이 풀려있었다.

“꿰매야겠어요.”


예슬이 실과 바늘을 건네주었지만, 내 손에서 바늘이 제대로 움직일 리 없었다.


마음숲에서 요리는 곧잘 배웠는데, 바느질은 아무리 배워도 안 되었다. 삐뚤빼뚤해지거나 꿰맨 자리가 다시 터져버렸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주름치마에 다시 주름이 잡히다니 이게 무슨 일인가.


보듬공방 지나실 선생의 한숨이 들리는 것 같았다.

‘어머, 어머. 사빈아, 너 대체 바느질을 손으로 하는 거니, 발로 하는 거니?’


지나실님이야 키움차사라서 수천 년 동안 실력을 쌓았으니, 아무리 잘해도 눈에 찰 리 없지.


이걸 보면 삐죽 나온 수염을 수건으로 가리고 손을 휘젓겠지.

‘됐다, 됐어. 앓느니 죽지. 상산대감이 훨씬 낫다. 백하한테 가서 좀 배워.’


나는 바느질하다 말고 웃음인지 한숨인지 숨을 내뱉었다.


“사빈님, 내가 해줄게요.”

예슬이 내 옆에 앉아 치맛단을 살짝 들어 올렸다. 긴 치맛자락이 이불처럼 그녀와 내 무릎을 덮었다.


그녀의 손놀림은 발목에 붕대를 감쌀 때처럼 빠르고 꼼꼼했다. 선을 그어놓은 것처럼 실이 반듯하게 나갔다.


“바느질을 참 잘하네요.”

내가 칭찬하자 예슬은 얼굴을 붉혔다.


“이렇게 있으니까 단아루에 있는 것 같아요.”

문득 인간세에서 살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까맣게 잊었던 기억 속 한 장면이 또렷이 생각났다.


“그때는 노래랑 춤, 기예를 선보이는 예인단에 있었어요. 전수소와 놀뫼무대가 함께 있었는데, 그곳 이름이 단아루였죠.”


“사빈님도 노래했어요?”

“난 춤을 추는 무희였어요.”


나윤이 정리하던 짐을 던져두고 탁자로 다가왔다.

“와싸, 사빈 언니가 춤을? 그래서요?”


단아루가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함께 공부하던 언니와 동생들, 도우미 아주머니와 아저씨들이 지나갔다.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슴푸레하게 떠올랐다.


“나랑 엄마는 전수소 바로 옆에 살았어요. 아는 아저씨가 선생님께 부탁해주셨거든요.”

다훤 아저씨는 선생님도 찾아주고, 집도 구해주셨다.


처음에는 하은빛 선생님이 우리를 알아보고 찾아온 줄 알았다. 내가 강가에서 춤추는 모습을 보았다고 해서 그런 줄로만 알았다.


엄마가 너무나 아버지를 그리워해서 강가에 모시고 나간 날이었다.

저녁노을이 지고 있었고, 강물도 붉게 물들어 느릿느릿 흘러갔다.


새들도 마지막 물질을 하느라 첨벙거렸다. 새들이 여기저기서 빼액거리고, 바람도 온갖 소리로 장단을 맞춰주었다.

나와 엄마는 노을이 사라질 때까지 아버지가 좋아하던 춤을 추었다.


하은빛 선생님이 그때 그곳에 가도록 이끈 이가 다훤 아저씨였다. 어떻게 데려갔는지는 천력을 얻고 나서야 알았지만.


“그럼 무대에도 서고요?”

나윤이 손으로 턱을 괴고 아련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그럼요. 열두 살 때부터 열여섯 살까지 수없이 춤을 췄어요.”

“우와, 멋지다.”

나윤이 손을 높이 들고 마구 흔들었다.


“무대에서 춤추는 거 어땠어요?”

“처음 무대에 서는 날은 너무 떨려서 정신 없었어요. 다리가 후들거리는데, 그 꼬마 덕분에 용기를 얻었죠.”


“꼬마요?”

예슬이 실 끝에 매듭을 짓고 실을 잘랐다. 치맛단을 가지런히 내려주었다.


“이름은 모르고 별사탕이라고 불렀어요. 여덟 살이었는데, 그 애도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어요.”

“어머, 이거 완전 연애소설이네요.”


“하하, 연애는 무슨···. 막내동생이죠.”

웃음이 나오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 한쪽이 아팠다.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별사탕은 낮 공연이 있는 날이면 자주 왔었다. 가족이 모두 다른 지방으로 옮겨간 후에도 가끔 찾아왔다.


선생님이 억울하게 옥살이를 할 때도 약을 챙겨주고 위로해주었다.

‘그때는 열두 살밖에 안 되는데 애늙은이 같았어.’


그러고 보니 요마전쟁 때 언뜻 얼굴을 본 것도 같고···. 벌써 영천옥을 지나 인간세로 내려갔겠구나.


“단아루에서는 몇 년 못 있었어요. 선생님이 누명을 쓰는 바람에···.”

“누명? 어떤 누명인데요?”

예슬이 반짇고리를 닫았다.


“최고 춤꾼을 뽑는다고 했을 때, 선생님을 시기한 다른 전수소에서 거짓 소문을 퍼뜨렸죠.”

“무슨 소문요?”

나윤과 예슬이 동시에 물었다.


“밀매도 하고, 도적을 숨겨주었다고요. 창고에서 문서가 나왔는데, 모조리 가짜였어요. 하지만, 아무도 우리말을 듣지 않았어요.”


“어, 어떻게 그런 일이···?”

“관리들이 뒷돈을 받은 걸 그때는 몰랐어요.”


“그때는 사또, 아니 뭐 그런 게 없었어요?”

나윤이 이를 부드득 갈며 눈을 부릅떴다.


“선생님은 옥살이하느라 무릎이 망가졌어요. 다시는 춤을 추지 못하셨죠. 그리고 얼마 후에 요마전쟁이 일어났어요. 선생님도, 엄마도 그때 돌아가셨고요. 나도 거기서···.”


“사빈님도 그때 죽었군요.”

예슬이 슬픈 눈으로 나를 보았다. 곧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윤도, 누명을 쓰고···.”


“쓰읍!”

나윤이 이빨 사이로 소리를 냈다.

그녀가 눈짓하자 예슬은 입술을 안쪽으로 오므리고 눈만 깜빡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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