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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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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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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63
추천수 :
431
글자수 :
916,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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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31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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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천계_대부와 대자

DUMMY

시끌벅적한 얄리장터와는 달리 상산대원이 머무는 한요재는 조용하고 한산했다.


이즈막광장과 놀뫼마당의 서쪽 구석에 자리 잡아 장터와는 거리가 멀었고, 대원들이 모두 나가 장터와 혼알방을 돌아보고 있으니 한요재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고요했다.


집무실에는 두 차사가 있지만, 문밖으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아는 대부와 대자가 그 자리에 있었다.


대차사 해담은 백하의 집무실을 돌아보았다.


깔끔하고 장식 없이 하얀 벽. 서가에는 책과 두루마리뿐이었다. 다른 천인과 달리 꽃이나 장식품은 놓지 않았다. 얼음대감 다운 집무실이었다.


‘마음이 녹은 줄 알았는데···.’

해담은 뒷짐을 지고 서가의 책을 둘러보았다.


짧은 콧수염에 비해 턱수염은 길어 넓은 어깨와 어우러졌다. 수염과 머리카락이 온통 잿빛인 데다 눈가의 주름까지 더해져 위엄을 갖추었다.


그는 중앙황천의 여덟 대차사 중 대명천을 맡았다.

대명천을 둘러싼 하늘과 땅, 시간과 공간의 결과 겹, 현재의 층을 두루 살펴야 하니 마음숲과 상산대도 그의 지휘 아래 있었다.


백하가 차를 따르자 해담은 의자에 앉았다.

“차사들 사이에 소문이 자자하더군. 자네가 누군가를 연모한다고?”


해담이 껄껄 웃자 백하는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전 단지···.”


“단지?”

“마음숲의 마고가 아닙니까? 당연히 지켜야죠. 저도 상산대니까요.”

백하는 손바닥으로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아, 그런가···. 난 기대했는데?”

해담은 찻잔을 들지도 않고 눈을 가늘게 떴다.


백하의 소문을 듣고 기뻐하던 중앙황제 현원의 모습이 떠올랐다.

‘백하, 그 아이는 얼음대감으로 유명했잖나. 늘 차갑고, 칼 같았지. 복수심이 지금까지 그 아이를 이끈 힘이나, 벗어날 때가 되지 않았나.’


현원은 내심 상산대감 백하와 마고 사빈이 서로 받아들이기를 바랐다.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얼음칼처럼 감정이 없는 줄 알았는데 정이 남아있다니. 사빈도 아주 마음에 들고.’


사빈이 마고가 아니라 평범한 중간자였더라도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사빈에게 애틋했다.


사실, 해담도 중앙황제 현원과 같은 마음이었다.

‘천계에서는 어떤 일도 분노로 해결할 수 없어. 분노가 사랑보다 강한 건 인간세에서나 가능한 일이니···.’


한요재 담장 넘어 혼들의 웃음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해담은 태연하게 찻잔을 바라보았다.

“탐탁지 않아 하더니···. 다행이군. 마음숲을 위해서라도 말이야.”


백하가 고개를 들어 창밖을 내다보았다.

광장을 지나 얄리장터에 이르면 사빈이 천막 사이를 종종거리고 있을 것이다.


“그때는 제가 어리석었죠.”

그의 연회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


오래전, 아란이 다음 마고라며 사빈을 데려왔을 때는 적잖이 충격이었다.

다른 마고에 비해 너무 작고 비쩍 말랐다. 거기다 중간자라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어리화의 선택은 틀림없어요. 사빈은 잘 해낼 거예요.”

아란은 마음이 들떠서 사빈을 추켜세웠다.


한요재 창밖으로 엉거주춤 걷는 사빈이 보였다. 그녀는 초연 차사를 따라다니며 마음숲에 대해 듣고 있었다.

걷는 모습조차 위태로워 보였다. 바람이 불면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 같았다.


백하가 굳은 얼굴로 외면하자 아란은 생글생글 웃었다.

“대감, 사빈은 아주 특별한 아이예요. 다훤님이 중간자로 만드셨답니다. 예사달님의 제자이고요.”


“그런 건 중요하지 않소. 마음숲을 잘 지키고, 마고의 임무를 빈틈없이 수행하면 그뿐이오.”

“그러니까 대감이 도와주셔야죠.”

“게다가 반인반천이던데···.”


“아···.”

아란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백하가 반계를 혐오하는 만큼 인간세도 싫어한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영천옥에서 씻김을 마치고 마음숲으로 들어오는 혼은 기꺼이 지키나 인간세에서 때를 잔뜩 묻히고 오는 혼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런 이유로 그는 중천에는 가지 않았다.


“그래도 어리화가 선택한 아이입니다. 예사달님을 봐서라도 잘 이끌어주십시오.”

아란은 간곡히 부탁했다.


예상대로 사빈은 무슨 일이든 어설펐다.


첫 번째 장날을 준비할 때는 가관이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이곳저곳을 쫓아다니기는 하나 실수가 잇달았고, 모로매 온천으로 가는 길을 잃고 혼알방을 헤매기 일쑤였다.


백하는 예의 바르게 대하면서도 새로운 마고가 탐탁지 않았다.


마음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세 번째로 얄리장터를 준비하던 날이었다.


그날도 사빈은 잔뜩 긴장해서 종종거렸다.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니 나름 재미있었다.

백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럼 그렇지. 중간자가 뭘 하겠나?’


중간자는 한계가 너무 많았다.

아무리 예사달의 제자라 해도 차사에 비하면 천력이 거의 없었다. 마고의 반지가 없으면 꽃수 열쇠의 힘도 못 버틸 것이다.


게다가 너무 작고 여렸다. 손에 쥐면 부러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날은 어딘가 달랐다.

긴장한 표정은 똑같은데 여유가 있었다. 이제는 웃으며 수련생들과 너나들이를 도왔다.


사빈이 간식을 맛보고 환호를 지르자, 고샅공방의 수련생이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장터를 둘러보던 그녀의 시선이 광장 한쪽에 앉아있는 백하와 마주쳤다.


사빈이 손수건을 내밀며 속삭이자 수련생은 웃으며 과자를 싸주었다. 그녀는 손수건을 가지런히 묶은 뒤 백하가 앉은 자리로 뛰어왔다.


백하는 점점 가까워지는 사빈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가슴이 쿵쾅거리며 빠르게 뛰었다.


사빈이 눈앞에 이르렀을 때야 겨우 시선을 돌렸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대감, 새로 개발한 과자래요. 엄청 맛있어요.”

사빈은 백하 옆에 나란히 앉았다.


그녀는 손수건을 풀어 과자를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혼자 외롭지 않으세요? 저쪽이 더 재미있어요.’

사빈은 과자를 내밀면서 활짝 웃었다.


눈초리가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밤하늘에 은은하게 빛나는 달, 따뜻하면서도 아늑한 달빛이었다.


그 순간, 얼어붙은 백하의 마음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는 당황하여 소리쳤다.

“됐소. 마고의 일에나 전념하시오.”


사빈은 놀란 것 같았으나 곧 담담하게 웃었다. 과자가 담긴 손수건을 옆에 내려놓았다.

“그럼, 가볼게요. 꼭 드세요. 정말 맛있어요.”


그녀는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다른 공방의 천막으로 사뿐히 날아갔다.

백하는 사빈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 후로도 사빈과 마주칠 때마다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 때문에 단단한 마음이 풀어지는 것이 싫었다. 자신이 약해지는 것만 같았다.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잃는 것이 두려웠다.


사빈이 대천사 반열의 딸이라는 것은 그 후에 알게 되었다. 중앙황제 현원이 사빈을 도와주라며 부탁한 것도 그다음이었다.


북방흑제 전욱도 사빈을 지켜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들의 부탁이 아니어도 그의 마음은 이미 사빈에게 기울고 있었다.


‘반계와 피천귀를 상대하려면 난 더 강해져야 한다. 이렇게 느슨해지면 안 돼.’

자신을 몰아세울수록 사빈에게는 더욱 냉정해졌다.


*


“그래서 그렇게 냉랭했구만. 안쓰러울 정도였어.”

해담이 옛날 일을 떠올리며 긴 수염을 쓸어내렸다.


“사빈은 앞으로 오랫동안 마고로 있을 겁니다. 시간은 아주 천천히 흘러갈 거고요.”

백하가 자신 있는 얼굴로 대부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왜 갑자기 소문이 퍼졌는가?”

“그것이···.”


백하는 마음숲 곳곳에서 보았던 사빈의 모습을 떠올렸다.

차를 우리고, 상생농장에서 흙을 일구는 모습이며, 혼알방의 혼들을 다정하게 대하는 모습도 지나갔다.


위즐증가에서 요리하고, 모로매 온천을 청소하는 모습이 다른 마고와는 많이 달랐다. 이전의 마고들은 위엄 있고 강한 기운이라면 사빈은 아늑한 어머니 같은 느낌이었다.


‘어머니가 살아계셨으면 그 모습일까.’

백하는 쓸쓸하게 웃었다.


“언제부터인가 그녀에게서 빛이 났습니다. 갈수록 밝아지고 넓어지니 마음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말하다 말고 백하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숨이 거칠어졌다.


그가 갑자기 씩씩거리자 해담도 잔을 내려놓았다.

“왜 그러나? 어차피 사빈은 마음숲에 머무를 텐데?”


“그 인도자 때문입니다.”

“뭐? 인도자? 한얼 말인가?”

해담이 놀라 물었다.


“천천히 다가가려 했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함께할 거라 여겼는데, 느닷없이 그자가 나타난 겁니다. 마치 태초부터 정해진 것처럼 당당하게!”


백하의 하얀 얼굴이 발그레 달아오르자 해담은 웃음을 터뜨렸다.


해담의 웃음은 쉽게 그치지 않았다. 그럴수록 백하의 얼굴은 더욱 붉어졌다.

“하하, 미안하네. 생각도 못 한 일이라···. 중앙황천의 상산대감이 그런 말을 할 줄이야. 아하하.”


해담은 애써 웃음을 참으며 손을 들어 지그시 허공을 눌렀다.

“맞아. 자네가 처음에는 마고라 부르다가 언제부터인가 사빈이라고 불렀지. 지금은 사빈님이라 부르고. 그런데 말일세. 정작 사빈은 모르는 것 같던데?”


“예. 제 마음도 모르고, 한얼의 눈빛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허어, 천선계에 소문이 날 정도로 달라졌는데 그걸 모른다고?”

해담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떻게 할 생각인가?”

“고백할 겁니다. 깨닫지 못한다면 알려줘야지요.”

“고백이라···. 좋지. 적이 나서기 전에 선수를 치는 것도 방법이지. 허나···.”


해담은 허리를 펴고 똑바로 앉았다.

“마음숲을 지키는 게 먼저지.”

“예. 알고 있습니다.”


“마음숲 결계 말고도 삼도천과 숲센장벽까지 살펴보게. 아무래도 반계의 기운이 심상치 않으니.”

해담은 마른 입술을 차 한 모금으로 적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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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천계_새로운 동료 바나 23.06.09 92 2 13쪽
45 천계_한요재의 초대 23.06.08 91 2 12쪽
44 천계_마음숲 키움차사들 23.06.08 92 2 12쪽
43 천계_공방의 고민거리 23.06.07 91 2 11쪽
42 천계_돋움다로차 23.06.06 98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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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계_대부와 대자 23.05.31 101 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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