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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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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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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32
추천수 :
431
글자수 :
916,352

작성
23.06.0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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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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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자
12쪽

그믐_버림받은 영혼

DUMMY

오두막 창문으로 새벽빛이 들어왔다.

‘아침이라···. 꽃수 열쇠가 얌전한 걸 보니 돌아갈 때가 아닌가 보다.’


침대에 누워 통나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가구라고는 침대와 작은 옷장뿐이라 작고 단출한데, 혼의 기운이 남아있었다. 누군가 사용하던 방이다.


나무 향기와 풀잎 향기가 은은하게 스며있었다. 반계라도 숨 쉬는데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중천보다 공기가 가벼웠다.


천계에서 보면 반계는 검은 구름에 가려진 시커먼 땅이다.

검고 두꺼운 구름이 꿈틀거리며 여기저기 번개가 빠직거렸다. 천인들 모두 보는 것도 꺼려했다.


하지만, 여기서 바라보는 하늘은 푸르고 맑았다. 대명천과 다름없었다.


지평선에는 검은 장벽이 꾸물대지만, 키 큰 대나무숲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배가 고파 더 누워있지 못하고 일어났다. 꼬르륵거리는 배를 쓰다듬으며 오두막을 둘러보았다.


깔끔하고 정갈한 실내, 향기로운 풀과 나무, 아늑한 온도.

혼이 지내기에 적당했다. 무거운 공기만 아니라면 대명천이라 해도 믿을 것이다.


예슬은 아직 자는지 조용했다. 또 다른 방문은 어제부터 굳게 닫혀있었다.

‘여기도 누가 쓰는 방 같은데···. 주인은 어디 갔지?’


예슬의 방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 엄마···.”

잠꼬대는 흐느끼는 소리로 이어졌다. 꿈을 꾸나.


‘나처럼 어머니를 잃었나···.’

방문을 바라보다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나무숲에 바람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대나무숲이 울창하면 죽순 요리가 빠질 수 없지. 텃밭에 마라도 피었던데, 꽃차도 만들 수 있고.


죽순 볶음에 나물을 곁들이면 풍성한 식탁이 될 것이다. 마라꽃잎을 넣어 우린 죽순차도 마음을 안정시킬 거고.


발목이 시큰거렸지만, 걸을 만했다. 천천히 다니며 텃밭을 지나 숲으로 들어갔다.


대나무 사이를 거닐며 죽순을 찾는데 가까이서 무언가 움직였다. 여러 마리 짐승이 몰려다니는 소리도 들렸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온몸의 신경을 소리에 집중했다.


“이번에는 병원에 간다. 거기가 힘의 원천이다.”

“난 도박장. 요즘 판이 커졌다.”

두런거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들이 내 앞에 나타났을 때 너무 놀라 숨을 멈추었다.

피천귀들이었다. 사람도 짐승도 아닌 해괴한 모습이었다.


사람처럼 걷지만 하나는 다리가 둘이고 다른 둘은 다리가 세 개씩이었다. 어떤 형상을 하고 있기는 한데, 어렴풋하게 보였다.


얼핏 보면 사람과 비슷한 형상이지만 검은 반죽 아무 데나 눈코입을 뚫어놓은 것 같았다. 머리 모양이 달린 것도 있고 몸통에 팔다리만 붙은 것도 있었다.


인간세에서는 투명한 공기 덩어리인데 여기서는 피천귀도 모양을 갖는구나. 사람에게서 나왔으니 그 사람의 욕망을 모양으로 바꾸겠지.


‘헉!’

숨소리를 내지 않으려 입술에 힘을 주었다.

‘중간자의 냄새가 날 텐데? 어쩌지?’


하지만, 그들은 내가 보이지 않는지 똑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한 마리가 오두막을 가리켰다.

“여기서 만드는 라온향, 무섭다.”

“맞다. 남존님이 좋아한다.”


“나윤이 만들어야 한다. 다른 혼은 안된다.”

그들이 내는 소리는 속 빈 나무통을 쇠 수저로 긁는 것 같았다. 피천귀들은 흐느적거리며 내 앞을 지나쳐갔다.


“우대는?”

“갔다. 장벽으로.”

“오래 있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할 말을 던지며 그들은 숲 저편으로 사라졌다.


“휴우. 다행이다.”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나를 못 보다니. 마고의 반지 때문일까.


피천귀들에게도 마고의 천력이 통하나? 인간세에서 시험해보지 않았으니 그건 모르겠고.


바구니에 죽순과 마라꽃을 담아 부엌으로 돌아왔다.

나갈 때는 발목이 시큰거렸는데, 그 사이 통증이 사라졌다. 힘껏 발을 디뎌도 아프지 않았다.


예슬이 부엌에서 물을 끓이고 있었다.

“사빈님? 어디 갔다 오세요?”

“요리를 하려고요. 이 앞에서 피천귀를 봤어요.”


“아, 귀사님들요?”

예슬은 대수롭지 않은 듯 방긋 웃었다.

“침입자가 있나 돌아보는 거예요. 필요한 게 있으면 귀사님을 부르면 돼요.”


“날 못 보던 데요?”

“라온향이 배어서 그래요. 계속 여기 있었잖아요.”

“향이 배다니?”


예슬은 작업공간에 쌓인 마른 풀을 집어 들었다. 향기를 맡고 나서 몇 가지 풀을 보여주었다.


뒤섞여 있을 때는 그저 좋은 향기였는데, 하나씩 맡으니 냄새가 달랐다. 달콤하면서도 약간 새콤한 향도 섞였고, 멀어지면 묵직하면서도 쌉싸름한 향도 풍겼다.


“이걸 잘 섞어서 라온향을 만들어요. 이게 있으면 귀사님이 우리를 보지도 듣지도 못해요. 그래서 꼭 큰 소리로 불러야 해요.”

“나윤이 만들어야 한다는 건 무슨 말이에요?”


예슬은 반가워하며 현관에서 가까운 방문을 가리켰다.

“와, 나윤도 아세요? 감여지에서 나윤이 라온향을 가장 잘 만들어요.”


그녀는 자랑스럽게 향낭을 들어 보였다.

“이루님이 좋아하는 향이에요. 그래서 이안남존님의 성도 라온성이고요.”


“나윤은 어디 갔어요?”

“모임에요. 우리가 만든 것하고 쌀이랑 먹을 거랑 바꿔와요. 모임에 가면 구경거리도 많고, 이야기도 많이 듣는데요.”


“예슬은 안 가요?”

“에에. 전 아직···.”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나윤이도 처음에는 그랬대요. 문밖에 나가지도 않고 말도 안 했대요. 저도 차츰 좋아질 거라 했어요.”


“그래요?”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깊기에···. 그래도 일부러 묻지 않았다.


예슬을 위해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야지. 따뜻하고 맛있는 음식이 마음을 녹여줄 것이다.


고샅공방에서 배운 대로 죽순 요리 몇 개와 오곡범벅이 완성되자 예슬은 놀란 눈으로 식탁을 바라보았다.


“우와, 우와. 이거 뭐예요?”

“고맙다는 인사예요. 할 줄 아는 게 이것뿐이라서요.”


예슬은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굉장히 예뻐요.”


그녀는 입맛을 다시며 숟가락을 들었다.

“음, 맛있어요.”


정신없이 젓가락을 움직이던 그녀의 손이 점차 느려졌다. 가만히 요리를 바라보다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훌쩍이기 시작했다.


“엄마가···, 차려준 것 같아요.”

눈물이 흐르더니 어깨도 가늘게 떨렸다.


“어엉, 엄마···. 엄마는 나 때문에 죽었어요.”

예슬은 눈물을 닦으며 가쁘게 숨을 들이마셨다. 서러운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어요. 사람들은 다 나를 욕했어요. 나중에는 우리 엄마한테까지 욕하고, 이런 나를 낳아서 수치스럽지 않냐고 했어요.”

예슬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내가 잘못했다고 했는데도 사람들은 안 들어줬어요. 엄마는 괴로워하다가 목을 맸어요. 난 욕을 한 적도, 나쁜 일을 한 적도 없어요. 그런데 왜 우리 엄마가 죽어야 해요?”


그녀의 말을 듣자 갑자기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요마전쟁 때였다. 사람이 사람을 마구 죽이고 베어버리던 그 살벌한 벌판에서 어머니는 나를 지키다가 칼에 맞았다.


어머니의 시신을 부여잡고 하염없이 울었다. 내 어깨에도 화살이 꽂혔다.

화살촉에서 독이 퍼져 손이 마비되어 갔지만, 어머니의 손을 꽉 잡고 놓지 않았다.


정신이 혼미해질 때까지 울면서 어머니를 불렀다. 싸늘하게 식어가던 어머니의 손···.


나는 애써 생각을 떨치고 예슬을 바라보았다.


“그런데도 내가 나쁘대요. 나 같은 건 살 가치가 없다고, 죽어야 한댔어요. 내가 죽는 모습을 영상으로 찍겠대요. 내 장례식도 찍겠대요.”


울음에 섞여 말이 뭉그러졌지만,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었다. 그믐 외출에서 비슷한 소식을 들은 적 있으니까.


“태어나서 처음으로 욕을 했어요. 울면서 강에 뛰어들었어요.”


나는 가만히 예슬의 손을 잡고 그녀의 울음이 그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는 어딘가를 흘러 다녔어요. 한참 헤매는데 누가 나를 불렀어요. 불쌍한 혼이라고, 도와주겠다고 했어요.”


예슬이 눈물을 닦았다.

“이안남존님이었어요.”


*


‘그렇게 헤매다가는 마물에 먹힐 거야.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 천사도 찾지 못해. 나를 따라오려무나.’

나는 이루님을 따라갔어요.


엄마처럼 다정한 분이었어요. 내 얘기를 들으시고는 머리를 쓰다듬어주셨어요.


‘네 잘못이 아니란다. 사람은 그래. 사랑하기도 짧은 시간을 미워하느라 허비하지.’


엄마의 혼은 천사가 데려갔다고 알려주셨어요.

‘네 어머니는 다행히 천사들이 찾아냈단다. 염라부로 무사히 들어갔으니 걱정 마라.’


나는 천사의 명부에 오르지 못한대요. 그래도 괜찮다고 하셨어요.

‘네 잘못이 아니야. 스스로 죽을 만한 일은 어디에도 없어.’


이루님은 사람이 어리석고 불쌍하다고 하셨어요.


‘나쁜 사람은 숨어서 말하지. 널 아프게 하던 이들은 이제 다른 사람을 사냥감으로 만들었어. 그들은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른단다. 나중에는 그들 자신이 사냥감이 되겠지.’


이루님은 안타까워하셨어요.

‘그렇게 자기 혼을 팔고, 마물을 키우면서···.’


*


“이루님은 다정하고 따뜻해요. 그런 분이 계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마음이 가라앉았는지 예슬은 밝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말에 나는 얼떨떨했다. 내가 알던 이안남존과는 전혀 다른데.

‘그래도···, 예슬을 언제까지 여기 놔둘 수는 없잖아?’


나는 손을 들어 예슬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예슬님, 천계로 가고 싶지 않아요? 영천옥에서 씻김 하면, 새로운 혼으로 태어날 수 있어요.”


예슬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여기가 제 집이에요. 여기서 사는 게 제일 좋아요.”


그녀는 웃고 있지만, 눈에는 물기가 촉촉이 젖어 들었다.


“저도 알아요. 천계에서는 좋은 일도 많이 하지만,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일만 고집한다고요. 세상이 생겼을 때 하던 대로만 하고, 그때 알았던 것이 전부라고 믿는대요.”


다섯 성천을 차례로 떠올렸다.

중앙황천, 북방흑천, 서방백천, 동방청천, 남방홍천. 모두 이 세계를 아끼고 사랑한다.


하지만, 역시···.

천사들도 못 찾는 혼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예슬처럼.


인간세에서도 순수하고 맑은 사람은 피천귀를 만들지 못한다. 피천귀를 만드는 사람들이 오히려 그들을 괴롭히고 상처를 준다.


더 빨리, 더 편리하게 바뀌면서 마음을 돌보지 않게 되었다. 인간세에서는 무엇을 하든 그림자가 생긴다. 아무리 좋은 의도로 만들었어도 끝내는 전쟁의 도구가 되어 버리니.


사람이 사람을 도구로만 생각하면, 그때는 정말 피천귀의 세상이 될 것이다.


예슬은 그릇을 치우면서 조곤조곤 이야기했다.

“그래도 마물에 먹히지 않아 다행이어요. 인간세에는 귀사님도 다니지만, 마물도 있대요.”


마물을 이야기하면서 예슬은 몸을 떨었다.

“힘이 엄청나게 세서 정령이나 영혼까지도 악마로 만든대요. 겉으로는 귀사님과 비슷해 속아 넘어간다고, 조심해야 한댔어요.”


‘마물? 다 피천귀가 아니었어?’

천선계에서는 모두 피천귀로 알고 있는데···. 상상계까지 만들어낸 사람들이니 마물도 쉽게 키우겠구나.


“물을 길어 올게요.”

예슬이 커다란 통 두 개를 들고 일어섰다.


문이 벌컥 열렸다.


“예슬! 나 왔지롱! 뭘 가져왔는지 봐봐!”

우렁찬 목소리가 오두막을 쩌렁쩌렁 울렸다.


여인이 들어서는데 모습이 동방청천의 능사들과 비슷했다. 키가 크고 몸집도 컸다.


그녀는 나를 보더니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눈빛이 날카롭게 바뀌며 칼을 품은 듯 번뜩였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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