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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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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조회수 :
13,216
추천수 :
431
글자수 :
916,352

작성
23.06.03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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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자
12쪽

그믐_현재의 겹

DUMMY

소용돌이가 휘돌며 주변을 에워쌌다. 발아래 까마득히 깊은 곳부터 머리 위 끝없는 하늘까지 바람벽이 둥글게 이어졌다.


그 속에 서 있는 데도 바람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둥근 바람벽만 빠르게 맴돌았다.


바람벽 위로 무수한 장면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수천수만 사람의 모습이 지나갔다. 지금의 인간세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이거···, 현재의 겹?’


수많은 현재가 겹친 갈림길이었다. 현재의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넘어간 적은 있지만 이런 회오리 벽은 처음이었다.


‘이게 진짜 덫이구나. 유리의 동굴로 보낸 건 덫이 아니었어.’


휙휙 스치는 장면을 알아보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아무리 빨라도 그중에 하나는 알아보겠지.


빠르게 지나가는 모습에 초점을 맞추려니 어지러웠다. 속이 메슥거렸다. 눈을 깜빡이며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찰나에 지나가는 수많은 장면을 노려보는데 갑자기 손목이 따끔거렸다. 어리화가 반응한 것이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드디어 다음 마고를 찾아냈어!

‘누구야? 어디서 온 거야?’


신호가 어디서 나왔는지 찾으려 했지만 허사였다. 모든 장면이 너무나 빠르게 지나갔고, 그 중 어디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화끈거리던 손목의 느낌도 사라졌다. 손을 내밀어 벽을 잡으려 했지만, 바람은 잡히지 않았다.


‘어라? 이대로 놓치는 거야?’

바람벽을 따라 손을 뻗으며 아래에서 위까지 둘러보았지만, 어리화는 잠잠했다.

나의 애타는 마음을 외면하다니.


‘그래도 단서를 찾았어! 다음 마고는 현재의 인간세에 있어.’

마고가 가까이 있을 때 어리화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도 알아냈다. 이 정도라도 큰 수확이다.


마음이 차분해지자 바람벽이 도는 속도도 느려졌다. 그림도 천천히 휘돌았다.


이제는 손바닥만 한 작은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내 마음이 평온하면 바람도 느려지는구나. 보려고 생각하면 더 잘 보이고.’


수많은 그림이 벽 위에 빼곡히 채워져 마치 거울의 방 같았다.


몇백 년 전인가, 인간세에 내려갔을 때 거울의 방에 갇힌 적 있다.

바닥과 벽, 천장까지 작은 거울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때처럼 수만 가지 현재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속도에 익숙해지자 더 많은 것이 보였다. 그림 속 풍경과 그 안에서 꼬물거리는 사람들도 보였다.


넓은 도로를 메우며 사람들이 몰려다녔다. 대도시의 출근길이구나.

그 옆으로 농장이 지나갔다. 뙤약볕 아래 열매를 따는 사람들이 보였다.


다음 그림은 어두운 방에서 바느질하는 소녀들이었다. 손끝이 부르트고 피가 나는데도 눈을 비비며 바느질에 몰두하고 있었다.


수술대 위에 누운 소년의 모습도 보였다. 열 살이나 되었을까, 두려움에 젖은 눈은 이내 감겼다.


무대 위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배우들의 모습도 보였다. 뮤지컬의 앙상블이었다.

가쁜 숨을 내쉬며 땀 흘리지만, 스포트라이트는 다른 이를 비추느라 그들을 위한 조명은 밝지 않았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과 그를 따르는 피천귀가 보였다. 까맣고 투명한 덩어리가 그와 닮았으니 그에게서 생겨난 피천귀일 것이다.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으니까 자기가 피천귀를 만든 것도, 자신에게서 기운을 받으며 자라는 것도 모를 것이다.


몽둥이를 들고 패싸움하는 사람들도 지나갔다. 쓰러지고 다치고, 피를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니 몹시 안타까웠다.


‘그만! 저러다 죽겠어.’


싸움에 집중하니 다음 장면은 전쟁터였다.

여기저기서 폭탄이 터지고 수많은 사람이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었다.


‘담아가 간다던 전쟁터가 저기인가?’

그럴 리 없지. 담아는 혼을 건지러 간 것이 아니니까.


사람이 죽으면 천사가 삼도천까지 혼을 안내한다. 전쟁터에 천사가 왔다면 혼을 데리러 온 것이지만, 담아는 달랐다.


그녀는 다른 천사와 다른 역할이었다.

생각을 바꿔 전쟁을 끝내게 하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마치 자신들이 결정한 것처럼 이끌었다.


전쟁터에 던져진 이는 힘없는 병사들이다. 전쟁을 일으킨 주범은 권력자들이니, 담아는 그곳에 있을 것이다.

전쟁터에서 되도록 멀고, 안전하며, 적어도 그들만은 편히 지내는 곳.


사람이 잘 따라주면 일찍 끝나지만, 변수가 있기 마련이다. 욕심과 아집이 얽히고설켜서 쉽게 풀어지지 않는다.


담아는 수십 번씩 계획을 바꾸는데, 이번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천계로 돌아오려면 시간이 한참 걸릴지도.


‘아리 인형도 가져왔는데. 혹시 가온 천사도 보이려나?’

나는 소매 속의 병아리 인형을 건드렸다.


가온을 생각하니 바람벽에 한 여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천계에 있을 때와는 조금 달랐지만, 알아볼 수 있었다. 천사 가온이었다.


“가온! 가온 천사!”

반가운 마음에 큰 소리로 불렀는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목까지 나온 소리가 내 귀에도 들리지 않았다. 여기는 모든 소리를 삼키는구나.


가온은 배낭을 메고 뒷골목에 앉아 쓰레기 더미를 뒤적거렸다. 새벽인지 하늘은 희끄무레했고, 주위는 어두웠다.


‘뭐 하는 거야?’

나는 황망히 가온 천사를 바라보았다.


재활용 쓰레기를 뒤적이던 가온이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장갑 낀 손으로 그것을 문질렀다. 자연스럽게 배낭을 내리고 그 안에 물건을 집어넣었다.


가온 천사다운 모습이었다.

엉뚱한 데다 장난도 잘 쳐서 천사장과 바론 대천사가 혀를 내두를 정도이니 저런 모습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뿐인가. 빛나는 사람을 찾는다고 돌아다니고, 치유의 알에 들어갔다가 기억을 잃기도 했다.


‘빛나는 사람을 찾았다고? 기억도 찾았으려나?’

목에 남은 칼자국은 치유의 알에서도 사라지지 않던데, 그것도 나았을까.


‘저기로 들어가면 가온을 만날 지도 몰라.’

여기가 진짜 갈림길이라면 곧장 파라다이스 빌라로 갈 것이다.


가온이 있는 그림 속으로 뛰어들려고 발돋움했다.

발이 공중에 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바람벽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는 지름길이 아니었다.


눈앞의 장면은 이내 다른 곳으로 바뀌었다.


‘황제님과 흑제님?’

다움성의 온새미실에 중앙황제님과 북방흑제님이 앉아있었다. 천사장님을 생각해서 장면이 여기로 이어졌구나.


두 신제 모두 심각했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 들리지 않았다. 벽 속의 공간은 내 소리를 먹는 것처럼 저쪽 편의 소리도 전하지 않았다.


‘다움성? 그러면 예사당이 있는 곳?’

예상한 대로 예사당이 보였다.

마고가 되기 전, 다움성에 올 때마다 예사달 할머니와 함께 머물던 곳이다.


예사달 할머니가 보일 거라 기대했는데, 대청마루에는 다훤 아저씨와 한 소년이 앉아있었다. 마주 앉아 차를 마시는데, 무척 친해 보였다.


‘새로운 시동인가? 언제 시동을 들이셨지?’

처음 보는 소년이었다. 앳되고 맑은 눈이 아주 선량해 보였다.


할머니의 시동이면 외롭겠구나. 예사달 할머니는 워낙 여기저기 떠돌아다녀서 예사당에 계실 때가 거의 없거든.


동녘뜰에서도 그랬다. 내가 중간자가 되고 처음 머물렀던 곳.


참, 나 말고도 천계에 중간자가 또 있었지.

‘한얼.’


한얼을 생각하니 가슴이 화끈거렸다. 심장이 뜨거워지며 따끔거렸다.

‘왜 이러지? 같은 중간자라서 그런가?’


소용돌이 벽은 상냥하게도 한얼의 모습도 보여주었다.

그는 삼도천 바닷가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그의 손에서 뿌연 덩어리가 뭉클거렸다.


‘저건 뭐야?’

어디 인지 자세히 보니 삼도천의 끝, 불천수 강가였다. 그것도 해날품곡 근처였다.


‘다훤 아저씨가 해날품곡에 가지 말라고 하셨다며? 왜 저기까지 간 거야?’

중천에서 나오면서 한얼 자신이 말하지 않았나. 삼도천 끝에 이르렀을 때.


‘스승님이 불천수 가까이 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인지는 말씀 안 하시고요.’


이유는 몰라도 다훤 아저씨가 가지 말라면 가지 말아야지, 거긴 반계와의 경계잖아?

‘응? 반계···.’


이 바람벽은 내가 생각하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나는 한 가지 생각에 매달렸다.


정신을 집중하고, 숨을 가다듬었다. 바람은 아까보다 훨씬 더 천천히 돌았다.


‘마백북존 마눙과 이안남존 이루가 머무는 곳, 피천귀들이 모여있는 곳.’


바람벽에 여리여리하고 키가 큰 천인이 보였다. 백록색의 긴 머리카락이 나풀거려 마치 꽃잎이 흩날리는 것 같았다.

그의 앞과 옆에 피천귀들이 조용히 엎드려있었다.


‘마백북존 마눙이구나.’

남방홍천의 위사들과 비슷했다. 초상화가 없어 얼굴도 몰랐는데. 이렇게 볼 줄이야.


그의 가슴에는 구멍이 뚫려있었다. 주먹을 집어넣을 수 있을 만큼 커다란 구멍이었다. 옷을 입었는 데도 내게는 그 구멍이 보였다.


저 정도면 신력으로 메울 수 있을 텐데 왜 놔뒀지.


‘그렇다면···, 이안남존 이루는?’

천계의 비밀을 보게 되다니! 즐겁고, 흥분되었다.


눈앞에 다른 신제가 나타났다. 그녀가 이루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태초에 동방청제였으니 몸집이 우람했다.

크고 힘세 보이는 모습은 어딘지 중앙황제 현원님과 비슷했다. 동방청제의 대리자인 태우에게 비하면 귀여운 편이지만.


이루는 한쪽 팔이 없었다. 왼쪽 팔이 있어야 할 곳에 소매만 펄럭였다.

아직도 새 팔을 만들지 않다니. 누구보다 신력이 강하다고 했는데···.


‘황제님도 그러시구나.’

중앙황제 현원의 한쪽 눈은 진짜 눈이 아니라 색이 비슷한 보석이었다.


예사달 할머니를 따라 처음 다움성에 들어갔을 때, 나도 모르게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현원이 웃으며 말해 주었다.

‘내 눈이 이상하니? 대혼란 시기에 얻은 상처는 신력으로도 메울 수 없단다.’


그렇다면 마눙과 이루의 상처도 대혼란 시기에 생긴 것이다. 미틈오름은 우주가 뒤집힐 정도였다고 했다.


두 번째 대혼란에서 현원은 한쪽 눈을 잃었고, 서방백제 영제는 날개를 잃었다.

북방흑제 전욱만 상처가 없구나. 특별히 천사장이라 그런가.


‘남북양존이 보인다면···.’

반계의 다른 모습도 보일 거야.

그럼 차사들에게 알려줄 수 있어. 만약 반계가 또 싸움을 걸어온다면 도움이 될 거야.


‘반계를 물리칠 수 있어.’

반계의 안쪽까지 들여다보자.


그렇게 결심하는 순간 바람이 솟구쳤다.

빠르게 소용돌이치면서 지금까지 지나간 모든 장면이 하나로 뒤엉켜버렸다.


수많은 장면이 와르르 무너졌고, 한데 뒤섞이고 휘저어지더니 어지러운 회오리만 남았다. 성난 바람이 내 얼굴과 몸으로 달려들었다.


갑자기 빨라진 소용돌이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차갑고 날카로운 바람에 몸이 찢기는 것 같았다.


공중에 떠 있던 몸이 바닥을 잃고 훅 떨어졌다.


하늘 높이 떠 있는 줄 알았는데, 이내 땅바닥이었다.

털썩 흙먼지가 일어나나 싶었는데···.


“끼악!”

젊은 여인의 비명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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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그믐_피천귀 사냥 23.06.15 83 2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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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천계_예사달의 조언 23.06.12 88 2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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