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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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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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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66
추천수 :
431
글자수 :
916,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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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5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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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그믐_라온향낭

DUMMY

“생각하기도 싫어요. 진저리나요.”

나윤이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녀는 일어나 시렁에서 작은 광주리를 꺼내왔다. 여러 가지 천 조각이 가득 담겨있었다.


“하지만, 마눙님을 만난 얘기는 해드릴게요.”

조각천을 이리저리 맞추던 나윤이 천을 내려놓았다.


“나윤은 마눙님을 무척 좋아해요. 세상에서 제일 멋지대요.”

예슬이 생글거리며 내게 속삭였다.


“오랫동안 이귀로 떠다녔거든요. 천사도 안 오더라고요. 쳇.”

나윤이 짧게 혓소리를 냈다.


이귀라···. 몸을 잃고 제때 천사에게 인도받지 못한 혼이다.


보통은 죽는 순간 천사가 혼을 데리러 가는데, 가끔 숨이 엇갈려 못 찾을 수도 있다.

그런 경우 혼자 떠돌다 길을 잃기도 한다.


천사를 피해 도망 다니는 혼도 있다. 남보다 많은 것을 누려 인간세에 미련이 많은 혼이거나, 원한에 싸여 복수심만 남은 혼이 그런 경우였다.


“사람으로 살게 한 세상이 원망스러웠어요. 아, 사빈 언니도 알아요? 인간세에 마물이 사는 거요.”

“예슬에게 들었어요. 겉모습은 피천···, 귀사와 비슷한데, 정령까지 악마로 만든다고요.”


예슬이 온몸을 떨었다.

“정말 끔찍해요. 백 마리가 넘는대요. 썩은 나무에 깃들거나, 흙탕물 속에 있어서 아무도 못 찾는대요.”


“그날은 장맛비가 엄청 내렸어요. 하수도에서 물이 넘치는데, 갑자기 시커먼 구정물이 치솟는 거예요. 구정물이 살아있는 벌레처럼 꿈틀거리다가 저한테 달려들었어요.”

나윤은 진저리치며 양팔을 쓰다듬었다.


“이제는 끝이구나 싶었는데, 눈앞이 번쩍거렸어요. 눈을 뜨니 여기였어요.”

그녀의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마눙님이 절 구해주신 거예요. 마물에 먹혀 악마가 되는 것보다 여기 사는 게 나을 거라고 하셨어요.”


나윤이 천 조각을 대보며 어깨를 으쓱 올렸다.

“어쨌든 세상에서 마눙님이 제일 멋져요.”


“아니야, 이루님이 가장 위대해.”

“네가 마눙님을 못 봐서 그래. 얼마나 잘 생겼다고.”

나윤과 예슬이 입을 삐죽거리며 고갯짓했다.


그런 둘의 모습을 보니 다정한 자매 같았다. 투닥거리면서도 손으로는 천 조각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다.


마물이 피천귀와 얼마나 다른지 궁금해졌다.

천선계에서는 마물이니 악마에 대해 듣지 못했다. 거기서는 모두 피천귀였다.


“마물은 어쩌다 생긴 거예요?”

“우와, 그런 중요한 걸 모르다니!”

나윤이 두 주먹으로 탁자를 탕탕 두드렸다.


그녀가 가슴을 활짝 펴고 턱을 치켜올렸다.

“원래 감여지에는 악귀들이 모여 살았대요. 그때는 지금처럼 좋은 땅이 아니라 붉은 황무지였고요.”


‘그 붉은 황무지가 허공의 섬이겠지? 불천수 전투가 일어나기 전.’

나는 나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중에서 가장 악랄하고, 힘센 정귀가 세 마리 있었는데, 마눙님과 이루님이 그놈들을 처단했어요!”

나윤은 손을 비스듬히 세워 허공을 갈랐다.

손을 움직일 때마다 이얏, 이얏 소리를 냈다.


“정귀를 물리치고, 감여지를 세우셨어요. 마눙님이 다스리니 살기 좋은 땅이 되었어요.”

“이루님도.”

예슬이 빠지지 않고 한 마디 끼워 넣었다.


“그런데, 이놈들이 완전히 소멸하지 않고 조각이 남은 거예요. 그 조각이 인간세로 떨어져 기생한대요. 나무나 모래, 물에 붙어서. 그리고는 사람들의 나쁜 생각을 먹고 힘을 키운대요.”


‘역시, 피천귀잖아? 그들보다 조금 더 강할 뿐.’

나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정령을 조종해서 악마로 만든대요. 사람을 괴롭히면서 더 큰 힘을 얻는 거죠.”

“원래 여기 살던 다른 악귀는?”

내가 질문하자 나윤과 예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웅, 마눙님과 이루님이 귀사님으로 만드셨겠죠? 정귀에게 조종당하던 거니까요.”

“아, 감여지에 사는 귀사님들은 중귀라고 그랬어요.”

“중귀?”


“예. 인간세에서 막 태어나면 초귀이고요, 더 자라면 반귀가 돼요. 그때가 되어야 감여지로 들어올 힘이 생긴대요. 반귀는 인간세와 감여지를 왔다갔다 한대요.”


나윤은 나를 보며 알겠냐는 듯 고갯짓 했다.

“감여지에서 우리를 돕는 귀사님들은 다 중귀예요. 일종의 계급이죠.”


나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너무 많은 이름이 나와 혼란스러웠다.

‘뭐가 이리 복잡해? 피천귀면 다 피천귀지, 마물에, 악마에, 초귀, 반귀, 중귀까지···.’


사람과 섞여 살지 않아도 인간세의 기운을 빨아들일 수 있게 되면 반계에 머무는구나. 반계를 지키며 천계를 넘보며.


반계는 원래 우주의 가장자리 별밭과 인간세에 끼어 보이지 않는 허공의 섬이었다. 그것이 지금은 중앙황천보다 넓어졌다.


“복잡하네요.”

“뭘요. 아, 사빈님, 인간세에는 사념체도 있어요.”

이번에는 예슬이 눈을 빛냈다. 내게 알려주는 일이 즐거운가 보다.


“에에? 다 이귀가 아니고?”

“상상계에서 넘어온 생각 덩어리예요. 난 본 적 없지만, 다른 이귀한테 들었어요.”


“아휴, 너무 많아서 다 못 외우겠어요.”

내가 한숨을 쉬자 나윤과 예슬이 까르르 소리높여 웃었다.


“마눙님과 이루님이 데려온 다른 혼도 많나요?”

“예. 저 숲 너머로 계속 이어져 있어요. 이 안에 또 다른 공간을 만드신대요. 무한히 넓힐 수 있으니 아무리 많아도 괜찮아요.”

예슬이 안심하라는 듯 눈을 깜빡였다.


“사빈 언니는 갈 데 있어요? 길 잃은 거면 같이 살아요. 빈방도 있어요. 여기서 사는 게 제일 좋아요. 인간세는 가지 말아요.”

나윤의 말에 예슬도 맞장구쳤다.

“거기는 끔찍해요.”


“난··· 가야 해요. 갑자기 온 것처럼 갑자기 떠나요. 내일 아침이면 여기 없을 지도 몰라요.”

말하면서도 마음이 따끔거렸다.


처음 예슬을 볼 때는 이런 마음이 아니었는데···.

“미리 인사하는 것이 좋겠어요.”


나윤은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커다란 손으로 마른 잎과 가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예슬도 조용히 바느질을 시작했다.


한동안 풀썩거리는 소리만 오두막을 채웠다. 마른 풀잎을 뒤적일 때마다 향기가 더 진해졌다.


두 혼을 보고 있으니 데리고 나가겠다는 생각은 말끔히 사라졌다.

‘여기에서 행복하다면 그것도 좋잖아?’


씻김도 못 하고, 다시 태어나지 못해도, 다시는 상처받지 않겠지. 여기서 지내다가 소멸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그들이 여기 얼마나 머물지 모른다. 앞으로 사백 년이 될지, 오백 년이 될지.

언젠가는 반계에서 중천으로 혼을 보낼지도 모르고.


예슬이 안감까지 꼼꼼하게 바느질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조그맣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노랫가락이 짜임새 있고 소리가 좋았다.


주먹 크기의 복주머니가 완성되자 예슬은 그것을 나윤에게 건넸다.

나윤은 주머니에 마른 풀과 꽃잎을 넣고 끈을 당겨 입구를 잘 막았다.


“여기 온 기념이에요. 라온향낭이에요.”

나윤이 내게 향기 주머니를 건넸다.


“사빈님, 인간세를 다닐 때는 조심하세요. 마눙님과 이루님도 놓치는 혼이 있대요.”

예슬은 눈꼬리를 내리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보았다.


“이게 라온향이에요?”

“예.”

나윤이 내 옆에 앉았다.


“이 향을 갖고 있으면 귀사님들이 공격하지 않을 거예요. 사빈 언니를 침입자로 여기면 큰일이잖아요?”


향낭을 받아들고 냄새를 맡았다. 바닥에 어지러이 쌓인 풀잎과는 조금 달랐다.

머리가 맑아지고 기분이 좋아졌다. 반계의 무거운 대기를 버티게 하는 힘이 있었다.


“저기서 나는 냄새랑은 다르네요.”

“몇 가지 약초를 섞는데, 비율이 중요해요.”

나윤이 말하자 예슬도 의자를 당겨 앉았다.


“나윤이 만드는 향이 제일 좋대요. 귀사님들도 무서워해요.”

“그거 우대가 가르쳐준 거야.”

나윤은 예슬을 보았다가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우대는 이루님을 굉장히 좋아했어요. 이루님을 위해 오랫동안 라온향만 연구했어요. 어떻게 하면 향기를 더 강하게, 더 오래 가게 할까 하고.”


나윤은 서로 다른 나뭇잎과 꽃잎을 가져왔다. 씨앗도 몇 개 가져왔다.


“라온나무가 6할, 애기별꽃잎이랑 산뫼, 용발이 같은 비율로 4할 들어가요. 라온나무는 나뭇잎이 7할, 꽃잎이 3할이어야 해요.”

“아휴, 너무 복잡해요.”


“그 정도야···. 아, 향이 날아가지 않게 잘 말리는 것도 중요해요. 나무집이 제일 좋대요. 나무 향이랑 섞이는 거예요. 바람도 세지 않아야 하고, 빛도 강하면 안 되고, 온도도 뭉근해야 해요. 그래서 이 집이 딱 맞아요.”


“우대가 정말 많이 고민했군요.”

“그럼요. 이루님을 위한 일인데. 아, 그리고 산뫼랑 용발은 인간세의 신성한 땅에서 자라는 것이 가장 약효가 좋아요.”


“거기까지 내려가요?”

“그게 가장 좋지만, 씨앗도 있어요. 웬만하면 신성한 땅에서 가져와야죠.”


나는 향낭의 냄새를 맡으며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인간세에서 그걸 어떻게 구해요?”

“귀사님과 친한 장사꾼이 있대요. 아, 씨앗 좀 드릴까요?”


나윤이 쪼가리 천에 몇 개의 씨앗을 나눠 담았다.

“애기별꽃은 아무 때나 심어도 잘 나는데요, 산뫼랑 용발은 묵혀야 해요. 심을 때가 되면 검게 변하니까 알 수 있어요.”


“라온나무가 없으면 소용없잖아?”

예슬이 씨앗을 들여다보았다.


“응. 라온나무는 감여지에서만 자라요. 다른 데서는 안 자란대요.”

“이루님이 계시는 곳에서만 자라는 거야.”

예슬이 생긋 미소 지었다.


“그래도 향을 즐기는 데는 쓸만해.”

나윤이 쪼가리 천을 갈무리해 내게 건넸다.


“고마워요. 나는 줄 게 없는데···.”

아날빛숨의 차와 과자를 가져다주고 싶지만,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지만 마고로서 해줄 수 있는 일이 있다.

‘너무 아픈 기억은 지워줄게. 다시는 아프지 않게.’


나는 마고의 반지를 쓰다듬었다.

마고의 기운이 투명한 덩어리가 되었다. 그 덩어리에 힘을 싣고 혀끝으로 주문을 외웠다.


‘너무 아픈 일은 잊어요. 이미 지나갔으니 조금만 아파하고, 지금 여기의 삶을 즐겨요. 좋은 기억을 더 많이 만들어요.’

내가 가진 대명천의 숨을 넣었으니 맑고 선명한 기운이 힘을 북돋아 줄 것이다.


나윤과 예슬은 보이지 않는 기운을 느끼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 갑자기 시원한데?”

“응. 속이 개운해. 신기하다.”


나는 일어나 아궁이로 다가갔다.

“오늘은 다른 요리를 해줄게요. 보답하고 싶어요.”


“와, 우리 같이 버섯 따러 가요.”

나윤이 벌떡 일어났다. 커다란 몸집이 움직이니 의자가 기우뚱거리다 뒤로 넘어졌다.


“샛강에도 가요.”

예슬도 일어나 종종거리며 빈 물통을 들었다.


나도 바구니와 물통을 받아들었다. 단아루의 동생들과 지내는 것 같았다.

‘반계가 이런 곳이었나···.’


*


아침이 되기도 전에 꽃수 열쇠의 신호가 느껴졌다. 닷새째 아침이었다.


향낭과 씨앗 주머니가 잘 있는지 소매를 만져보았다. 모든 것이 제 자리에 있었다.


이번에도 수명환을 건넬 사람은 보지 못했다. 다음 마고에 대한 단서도 찾지 못했다. 아리 인형을 갖고도 천사 가온에게 닿지 못했고.


그래도 나윤과 예슬을 만나 즐거웠다. 다시 만나면 좋겠는데···.


‘이번 그믐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겠어.’

마음숲의 식구들 모두 궁금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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