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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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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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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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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
글자수 :
916,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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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6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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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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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자
12쪽

천계_돋움다로차

DUMMY

아날빛숨 아롱재는 빛으로 가득 찼다. 숨꼭지들도 사그락거리며 마고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다.


사빈은 눈을 떴으나 일어나려니 몸이 너무 무거웠다. 바닥에 달라붙은 듯 무겁고 답답했다.


천장의 숨꼭지가 뿌옇게 보였다. 빛을 받아 자그락대는 것은 알겠으나, 안개 속에서 꼬물거리는 것처럼 흐릿했다.


‘어리화 때문인가?’

사빈은 손목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호흡에 집중하니 몸속의 텁텁한 공기가 돌아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반계의 공기가 아주 무거웠구나. 거기서는 몰랐는데.’

반계에서 삼킨 숨이 다 빠져나가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손에 힘이 들어가자 사빈은 머리맡에 놓은 향낭을 집어 들었다.


예슬이 수놓은 여섯 송이 꽃이 활짝 피어있었다.

떠나기 전날 밤, 수놓은 천을 향낭에 덧대주었다.


다섯 송이는 각각 오방색으로 채워져 있고, 한 송이는 꽃잎마다 다른 색으로 오방색을 이루었다.

아래쪽에 앙증맞은 짐승이 한 마리 있고, 꽃잎 위에 날개를 펼친 무언가가 있었다.


*


“이 다섯 송이는 다섯 성천이고, 이건 감여지예요.”

“다섯 성천은 어떻게 알았어요? 사람들은 모르던데?”


사람은 천계와 선계에 대해 잘 모른다. 그저 하늘 어딘가 천국이 있고, 땅 어딘가 지옥이 있다고 믿는다.


“이루님께 들었어요. 감여지는 다섯 성천을 아우르는 힘이 있다고요. 그래서 우주를 지킨다고요. 그러니까 사빈님도 지켜줄 거예요.”


사빈은 대답할 수 없었다.

반계가 그 정도로 힘이 있었나? 사실인지, 희망인지는 몰라도 다섯 성천을 아우르다니···.


사빈은 꽃잎 아래 진회색과 연회색으로 채워진 짐승을 가리켰다. 고양이인지 거북이인지 알 수 없는 모양이었다.


“이건 뭐예요?”

”사빈님을 지켜주는 강아지예요. 수호 동물이죠.“

”강아지였군요!“


”여기 날개는 봉황?“

사빈이 묻자 예슬은 얼굴을 붉혔다.


”그냥 새라고 할게요. 주작을 수놓고 싶었는데···.“

예슬이 작은 새를 쓰다듬었다.

”어쨌든 날개 달린 신물이에요. 어디로든 날아갈 수 있죠.“


사빈은 예슬이 그랬던 것처럼 강아지와 날개를 쓰다듬었다.


*


사빈은 향낭을 머리맡에 내려놓았다.

‘아날빛숨의 차를 나눠주고 싶었는데···.’


그녀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반계에 또 갈 수 있을까?’


다시 들어간다고 해도 불천수 강가의 그 오두막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현재의 덫이 그곳으로 데려다줄 것 같지도 않고.


코끝에 라온향이 진하게 머물렀다. 향기 때문인지 꽃과 강아지, 날개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앞일은 모르잖아. 만날 거라 믿으면 만날 수 있어.’

할 수 있을 거야. 아직은 내가 마고니까.


갑자기 엄청난 배고픔이 몰려왔다. 그믐 외출에서 돌아오면 거의 사흘 내리 자는데, 지난 때와는 깊이가 다른 허기였다.


‘아우, 배가 고파서 누워있을 수가 없네.’

배를 쓰다듬자 꼬르륵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사빈은 참지 못하고 이불을 걷어찼다.


*


아날빛숨에서는 초연과 지나실이 사빈이 깨어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지나실은 얇은 손수건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있었다. 손수건은 삐죽 나온 수염도 가리고, 굵은 손가락도 가리고 땀도 닦는 여러 용도로 쓰였다.


천과 옷, 자수를 담당하는 보듬공방의 키움차사답게 나올 때마다 다른 옷을 입고, 손수건도 매번 바뀌었다.


바람과 흙, 나무와 돌 같은 재료들이 그의 손에서 옷이 되었다가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그렇게 돌다가 또 다른 모양의 옷이 되었다.


지나실은 아날빛숨의 천장을 올려다보며 손가락으로 쉬지 않고 무릎을 두드렸다.


초연이 혀끝으로 쯧쯧 소리 내며 그의 손을 건드렸다.

“때가 되면 일어나겠지. 왜 매일 와서 이래?”


“어머, 벌써 닷새째야. 원래는 사흘만 누워있었다고. 걱정도 안 돼?”

지나실이 입술을 실룩이자 짧게 다듬은 수염이 도드라져 보였다.


“궁금해서 기다릴 수가 있어야지.”

“지나실, 궁금한 게 사빈의 상태야, 아니면 이번 그믐에 갔던 곳이야?”


“어? 뭐···.”

지나실은 입을 삐죽거리다가 혀를 내밀었다.

“그게 그거지.”


“지나실님, 오셨어요?”

사빈의 목소리가 들리자 초연과 지나실이 동시에 일어났다.


“진짜 너, 걱정 좀 시키지 마라. 무슨 잠을 닷새나 내리 자?”

“예? 닷새나 잠들었다고요?”


“그래. 걱정돼서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지.”

지나실은 사빈에게 다가가 팔짱을 꼈다. 팔을 끼고 주방 앞까지 이끌었다.


초연도 사빈의 주위를 돌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펴보았다.

다친 곳은 없으나 엉덩이 쪽에 멍의 기운이 이 느껴졌다. 다른 때에 비하면 상처도 아니었다.

‘저 정도면 며칠 만에 깨끗해질 테고.’


“그래. 이번에는 어디 다녀왔니?”

지나실이 눈을 빛내며 사빈 옆에 바짝 다가앉았다.


사빈은 그의 눈을 피해 주방을 바라보았다. 반계에 갔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반계를 싫어하는 천인이 얼마나 많은데···.’


상산대감 백하에게는 절대로 들키지 말아야 한다. 사빈은 백하의 날카롭고 서늘한 눈초리를 떠올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딘지 모르는 곳을 계속 헤맸어요. 소용돌이에 갇혔다가 간신히 나왔어요.”

“소용돌이?”


“바람벽에 수많은 장면이 나타났다 사라졌어요. 인간세도 보였는데 소리도 안 나고, 저 말고는 아무도 없었어요.”


지나실이 헉 숨을 삼켰다.

“그거, 반계에서 만든 덫인가 보다, 얘.”


“마고도 피천귀의 덫에 걸린다고?”

초연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기운을 빨아들였나? 닷새 동안 깨지 못하다니.”


“별일 없었지요?”

“일은 무슨. 천계에서 일어나는 일이야 뻔하지. 재미없어.”

지나실은 손수건으로 입술 주변을 두드리다가 생각난 듯 손수건을 털었다.


“요즘 공방에 고민거리가 많아. 지난 장날에는 완전 바닥이었어.”

“다른 때와 비슷했는데요?”


“그 손님들이 죄다 그냥 갔다고. 솜씨 좋은 혼이 빠져나갔잖아.”

지나실이 콧소리를 내자 초연도 한숨을 쉬며 차를 따랐다.


“석보도 애쓰더라. 검새공방에서 산돌이 떠났잖아. 검새도 어렵지.”

“검새만 그런가? 소소공방도 그래.”


지나실이 사빈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목예는 요즘 무슨 고민이 그리 깊은지, 꼭 위화님처럼 군다니까. 그 친구도 참 예민해.”


“소소공방. 누구였더라? 음···.”

초연이 관자놀이를 두드리다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아! 외길! 그 혼이 만든 것들 참 좋았는데.”


“다 그런 과정을 거치는 거야. 지금 수련생도 열심히 따라주니까 잠깐이면 될 거야. 그렇지?”

초연이 지나실에게 눈짓하자 그도 그럼, 그럼 고개를 끄덕였다.


주방 안쪽에서 용희가 사빈을 향해 손짓했다.

가리개와 벽 사이에 숨어 조심스럽게 손끝을 움직였다. 낯빛이 창백하니 큰일이 생긴 것 같았다.


사빈은 용희에게 고갯짓으로 알았다고 신호를 보냈다.


“저, 너무 배가 고파서요. 뭐라도 먹고 시작할게요.”

“그래. 닷새나 굶었으니 오죽하겠니.”

초연이 일어나 먼저 주방으로 들어갔다.


“히잉, 이번에는 그믐 얘기를 못 듣는구나. 새로운 유행이 궁금했는데.”

“지나실님, 다음 그믐에는 꼭 인간세에 다녀올게요.”


“어쩔 수 없지. 사빈아, 고생 많았다.”

지나실은 치마인지 바지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옷을 살짝 걷어 올리며 가볍게 걸어 나갔다.


지나실을 배웅하고 사빈은 서둘러 주방으로 들어갔다.

“왜? 무슨 일이야?”


“마고님. 세련수가 이상해요.”

용희는 손을 모아 잡고 발을 동동 굴렀다.


초연은 벌써 항아리의 세련수를 살펴보고 있었다.

사빈도 가까이 다가갔다. 항아리의 삼 분의 일 정도 남은 세련수에서 시큼한 냄새가 올라왔다.


“상했나 봐요. 아까워서 어쩌죠? 내내 잘 있었는데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어요.”

용희는 살짝만 건드려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울상이었다.


“아니다. 삭은 거야.”

초연이 냄새를 맡아보고 숟가락으로 떠서 맛을 보았다.

“이건 이거대로 약으로 쓸 수 있어. 정신을 맑게 하고 눈을 밝게 한다던가. 뭐 그랬던 것 같아.”


“어떻게 하면 되나요?”

“생각 좀 해보자. 예전에 어떤 마고가 알려줬는데···. 하도 오래되어서···.”

초연은 손가락으로 이마를 꾹꾹 눌렀다.


“아란···은 아니고 하늬? 그래! 하늬가 알려줬어. 세련수를 삭혀서 무슨 차를 만든댔어. 어떤 약초를 넣는지는 잊어버렸네.”


초연이 항아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동안에는 세련수를 삭힐 만큼 많이 못 만들었거든. 그거 만들려면 손도 많이 가고.”


“방법을 알 수 있을까요?”

사빈은 그 차를 꼭 만들고 싶었다.


세련수가 아깝기도 하고, 약효가 있다니 어떤지 알고 싶었다. 마고가 된 이후 처음 듣는 이름이라 더 흥미로웠다.


“가만 보자. 하늬가 기록을 남겼을 텐데···.”

초연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사빈도 그녀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선대 마고가 남긴 기록이라···. 아롱재 어딘가에 있을 거야.’


안내서를 찾아보려는 의지와는 상관없이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초연과 용희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


사빈은 아롱재 한가운데 서서 방을 둘러보았다.

‘하늬님은 안내서를 어디에 두셨을까?’


살림이 없어 뒤적거릴 물건도 없었다. 침대와 탁자 하나, 의자 하나, 작은 옷장이 전부였다. 바림창고 문도 굳건히 닫혀있었다.

‘바림창고···는 아니고.’


선대 마고 아란이 건네준 충고가 생각났다.

‘혹시 모르는 일이 있으면 기록을 찾아봐. 보이지 않는 곳에 두었으니 꺼내 읽으면 돼.’


그리고 이런 말도 했다.

‘다음 마고를 찾아 가르칠 시간이 있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기록으로 남겨놓으렴. 보는 방법만 알면 충분하니까.’


사빈은 눈을 감았다.

‘보이지 않는 곳.’


눈을 감은 채 아롱재를 둘러보았다.

‘선대 마고 하늬가 남긴 기록이 필요해. 돋움다로차를 만드는 법.’


사방이 깜깜했으나 눈꺼풀 안쪽이 차츰 밝아졌다.


희끄무레한 어둠 속에서 무언가 둥실 떠올랐다. 손을 내미니 공기 덩어리가 만져졌다. 사빈은 그것을 손에 쥐고 눈을 떴다.


그 순간, 공기 덩어리는 두루마리가 되었다. 두루마리를 펼치니 그림과 글이 적혀있었다.

‘찾았다. 돋움다로차 한 잔을 만드는 방법.’


“바래강물 5할, 삭힌 세련수 2할, 다로즙 2할, 홍옥즙 1할에 어스름주 두 방울.”

거기까지는 힘들지 않았다.

세련수를 삭히는 과정이 어렵지, 이미 삭힌 세련수가 있으니까. 다른 것은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사빈은 두루마리를 더 펼쳤다.

“바래강물은 반드시 돋움샘에서 나오는 물이어야 한다. 세련수는 새콤한 맛이 날 정도로만 삭힌다. 다로즙과 홍옥즙은 상생농장에서 갓 딴 열매를 갈아 만든다.”


사빈은 한숨을 쉬었다.

“왜 손이 많이 가는지 알겠네. 돋움샘에서 나오는 물이어야 한다 이거지.”

다로와 홍옥은 상생농장의 돌봄차사인 구추에게 부탁하면 되고, 어스름주도 넉넉했다.


사빈은 아날빛숨으로 내려갔다.

세련수가 더 이상 삭지 않도록 뚜껑을 잘 덮고 물통을 찾았다.


‘바래강에만 다녀오면 되는 구나.’

물통을 들고 나서는데 우당탕탕 요란하게 아날빛숨의 현관문이 열렸다.


누군가 뛰어 들어왔다. 그것도 아주 씩씩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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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천계_마음숲 키움차사들 23.06.08 91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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