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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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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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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
글자수 :
916,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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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3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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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그믐_불천수 대나무숲

DUMMY

목소리가 어딘지 이상했다. 날카로운 비명이 아니라 가늘면서도 울림이 많은 메아리 같았다.

나는 땅바닥에 엎드린 채 고개를 들었다.


젊은 여인이 두 손을 움켜쥐고 덜덜 떨고 있었다. 긴 저고리와 치마를 입고 있지만, 사람은 아니었다.

‘혼?’


일어날 생각도 못 하고 여자만 올려다보았다.

‘혼이 사람처럼 다니는 건 중천과 마음숲 뿐인데?’


중천에서는 미련을 못 버리기에 인간세의 모습과 혼빛에 어울리는 모습이 겹쳐있다. 염라부로 가면서 그 모습마저 버리고 뿌연 혼 덩어리가 된다.


영천옥에서 씻김을 마치고 마음숲에 들어서야 진짜 혼빛에 어울리는 모습을 갖고, 천인과 비슷하게 지낸다.


그런데 여기는 중천도, 마음숲도 아니다. 공기부터 다르다.

‘그믐 외출 나왔잖아? 인간세에 숨겨진 땅이 있었나?’


일어서려니 허리와 엉덩이에 통증이 밀려왔다.

“아야야.”

조금 있으니 어깨도 얼얼했다.


울상이 되어 앉아있으니 여자가 내 팔을 잡았다.

“괜찮아요? 안 다쳤어요?”


그녀의 손에서 따뜻한 기운이 넘어왔다. 체온이 아니라 혼이 가진 다정함이었다.


키가 작고 동글동글했다. 눈코입도 올망졸망하여 상당히 귀여웠다.

큰 눈에 작고 오똑한 코가 살구빛 피부와 잘 어울렸다. 그녀의 혼빛에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통나무로 만든 작은 오두막과 대나무숲도 보였다. 대나무숲이 오두막을 병풍처럼 빼곡하게 둘러섰다.

남의 집 마당에 떨어진 것이다.


동굴로 들어갈 때도 떨어지더니, 이번에는 마당으로 떨어지고. 엉덩이가 남아나지 않겠어.


‘여기가 어디야?’

나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일단 대기를 통해 읽어봐야지.


무겁고 텁텁하기는 해도, 인간세 만큼 매콤하고 따끔거리지 않았다. 천계에 속한 공간도 아닌데···.


내 몸을 내려다보았다. 천계에서 입던 주름치마와 긴 저고리가 그대로였다. 확실히 현재의 인간세는 아니다.


팔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크게 다친 곳도 없는 것 같고. 이 정도로 다치면 마고가 아니지.


그러나, 그것은 커다란 착각이었다.

그녀의 부축을 받으며 걸음을 내딛는데 갑자기 왼쪽 발목이 시큰거렸다.


‘아얏!’

발목을 삐었나. 걸으려고 힘을 주니 찢어질 듯 아팠다.


“들어오세요. 찜질할 수 있어요. 약도 있고요.”

여자는 내 팔을 어깨에 걸치고 오두막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힘겹게 발을 옮기면서도 뭔가 이상했다.

‘이상하다? 심하게 떨어지지 않았는데···. 엉덩이가 먼저 닿았잖아? 그런데 발목을 삐다니?’


한쪽 발로 뒤뚱뒤뚱 걸으면서도 대기에 집중했다. 아무리 따져봐도 내가 모르는 곳이었다.


‘혹시 존재계?’

그건 더더욱 아니다. 존재계에는 사람이 살지 않으니 사람의 혼도 있을 수 없지.


대나무숲이 친절하게 여인의 하루하루를 알려주었다. 그녀의 일상은 마음숲의 혼과 비슷했다.


보듬공방이나 고샅공방에 다니는 여느 혼과 같았다. 옷이나 가리개를 만들고, 주머니를 만들고, 천에 자수를 놓는 것은 보듬공방과 같았다.


약초를 캐고 텃밭도 일구고 요리하는 것은 고샅공방과 비슷했다. 한 마디로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었다.


통나무집으로 들어가니 실내는 소박하고 깔끔했다. 딱 필요한 것들만 갖춰져 있었다.

마음숲과 다른 것이 있다면 조금 더 인간세와 비슷한 정도일까.


가운데 아궁이와 넓은 공간이 있었다. 부엌도 되고, 손님도 앉고, 일도 하는 곳이었다.

그 둘레로 문이 세 개 있었다. 밖에서 본 모양대로라면 그 문은 세 개의 방일 것이다.


작업공간에는 옷감과 실이 잔뜩 쌓여있었다.

한쪽에는 마른 풀이 가득했는데, 그 때문인지 오두막 전체가 향기로웠다.


몇 종류의 풀잎과 자잘한 나무토막이 섞여 있는데 향이 따로 느껴지지 않고 하나인 듯 무척 잘 어울렸다.


여인이 내 발목에 약을 바르고 천으로 감아주었다. 손놀림이 꼼꼼하고 솜씨가 좋았다.


“여기가 어디예요?”

“여기요? 불천수 강가예요.”


“부··· 불천수?”

아니···. 그럼 여기가 반계?


반계의 장막에 천선인이 닿기만 해도 갈기갈기 찢긴다고 했다. 사람은 그 자리에서 타죽는다고!


‘나···, 나 죽은 거야?’

서둘러 내 몸을 만져보았다. 온기가 느껴지는 살갗, 움직이는 근육, 중간자의 몸 그대로였다.


‘반계에는 피천귀뿐이라고 했는데···. 설마 여기에 다음 마고가 있나?’

소매를 걷어 어리화 무늬를 살펴보았다. 반응이 없었다.


“삼도천 끝에 있는 그 불천수 말인가요?”

“예. 언니는 어디서 오셨어요?”


“전 사빈이에요. 마음···.”

마음숲의 마고임을 알리려다 그만두었다. 여기가 정말 반계라면 마고가 들어온 것이 심각한 문제일 테니까.


“전 예슬이에요. 얼마 전에 여기 왔어요.”

예슬은 치맛자락을 가지런히 쓸어내리며 내 옆에 앉았다.


“혹시 덫에 걸렸어요? 감여지를 공격하는 악당들 때문에 만들었대요.”

“악당요?”


“귀사님들이 그랬어요. 우리 세계를 지키려면 더 많은 덫이 필요하다고요.”

“시간과 공간을 뒤섞어 만든 덫 말인가요?”


예슬은 겁에 질린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있는 것도 아닌데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게 어깨를 숙이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은 겉과 속이 다르대요. 겉으로는 깨끗하고 맑은 척하지만, 나약하고 겁이 많다고요. 그래서 정작 할 일은 하지 않고, 주변만 맴돈대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악당은 누구고, 겉과 속이 다른 족속이 누구야? 인간세의 사람을 말하나?


“그런데, 귀사님이라니, 귀사가 누구예요?”

“우리를 지켜주는 분들이에요. 아주 친절하세요. 무섭고, 이상하게 생겼지만요.”

예슬은 생글생글 웃으며 일어섰다.


그녀는 부엌으로 가더니 달그락거리며 주전자에 물을 끓였다.

“귀사님은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대요.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씨앗이 나오는데, 나중에는 귀사님이 사람들의 소원도 들어주고 많이 도와준 대요.”


‘엥? 귀사가 피천귀였어?’

불천수 강가에 데려다 놓고 피천귀가 보살피는 혼이라면···.

‘이 혼을 영혼수집가로 만들려고?’


해맑게 웃는 예슬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찻주전자와 찻잔을 쟁반에 담고 있었다. 저렇게 맑고 여린 영혼을 데려오다니!


‘빨리 탈출시켜야 해. 수집가가 되게 내버려 둘 수 없어.’

반계의 남북양존이 이토록 냉정하고 잔인할 줄 몰랐다.


그들도 신제였으니, 적어도 천계의 질서는 알 거라 믿었는데. 미틈오름 전에는 그들이 남방홍제와 동방청제이지 않았나.


‘으흠, 반계가 그만큼 어려워졌다는 증거일 수도···.’

피천귀에게는 한계가 있다.

사람이 있어야만 존재한다. 사람이 내뿜는 욕망과 집착에서 생겨나고 힘을 키우니까.


온전한 혼을 가져가면 귀력을 더 빨리, 더 강하게 쓸 수 있다.

영혼 수집가가 많을수록 반계는 굳건해질 테니, 마눙과 이루는 온전한 혼을 더 좋아하겠지.


예슬이 내 앞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복잡한 내 마음과는 달리 그녀는 평온해 보였다.

느닷없이 나타난 손님에게 반가움을 감추지 않았다. 여기에서의 생활도 아주 만족스러워 보였다.


피천귀에게 최면이나 세뇌를 당했다면 내 말을 믿지 못할 것이다.

‘어떻게 한다?’


갑자기 발목이 욱신거렸다. 얼굴을 찡그리며 발목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래도 걷는 건 무리예요. 여기서 신세 져도 될까요?”


“당연하죠. 함부로 다니면 상처가 덧나요.”

“삼도천 근처를 헤매다가 갑자기 회오리를 만났어요. 그게 덫이었을까요?”


예슬은 잠시 생각하더니 빙긋 웃었다.

“그럴 거예요. 현재랑 과거, 다른 세계도 마구 섞어놓았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나가면 안 된대요.”


“여기 갇혀있는 거죠?”

나는 곧바로 되물었다.


예슬은 깜짝 놀라며 고개를 세게 흔들었다.

“예? 절대 아니에요. 이루님이 절 구해주신걸요.”

“이안남존님이요?”


“어머, 남존님을 아세요?”

예슬은 기뻐하며 손뼉을 쳤다.


상황이 복잡해졌다. 그냥 잡혀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안남존 이루를 직접 만났구나. 그 정도 신력이라면 예슬의 어린 혼은 생각이 마비되었을 거야.’


예슬은 말없이 창밖을 내다보았다. 하늘빛이 꺾인 것을 보니 벌써 오후 한때를 넘긴 시각이었다.


대나무숲이 바람에 사각거리며 노래하듯 흔들렸다. 때로는 크게, 때로는 작게, 멈추었다가 이어지며 청아한 소리를 만들었다.


‘바람벽에서 얼마나 있었을까? 반나절? 아니면 하루?’

닷새의 시간 중에 얼마나 남았을까.


‘여하튼 예슬을 데리고 삼도천을 건너야 해. 그것이 이번 그믐의 과제일 거야.’


예슬은 일어나 바구니를 챙겨 들었다.

“저녁 준비해야죠. 감자 좀 가져올게요.”


그녀가 나가고 나는 창가 자리로 옮겨 앉았다.

오두막 옆에 작은 텃밭이 있었다. 예슬은 그곳에 쪼그려 앉아 흙을 뒤적였다.


대나무숲이 오두막과 마당, 텃밭을 빼곡히 감싸고 있었다. 숲 가운데로 오솔길이 하나 나 있었다.


“저게 결계일 거고.”

결계라면 강한 기운이 공간을 휘어잡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바라보아도 다른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대나무숲이었다. 초록의 대나무가 스스로 뿜어내는 생명의 기운뿐.


절뚝거리며 창문이란 창문을 다 둘러봤지만, 결계의 흔적은 없었다.

‘결계가 아니라면 쉽게 나갈 수 있지. 피천귀도 없으니 이번 일은 쉽게 끝나겠어.’


가뿐한 마음으로 대나무숲을 바라보았다. 그 너머 다른 오두막이 언뜻 보였다.

‘예슬과 같은 혼이 또 있어?’


불천수 경계를 따라 혼이 잡혀있는 것이다. 얼마나 잡아 온 거야? 저들은 또 어떻게 구해내지?


“대접할 것이 없어 미안해요. 저녁은 찐 감자예요.”

예슬은 미안해하며 정성스럽게 감자 껍질을 벗겼다.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나도 옆에 앉아 감자를 손질했다.


바닥에 앉아 감자를 깎다 보니 마음이 들떠 올랐다.

어머니와 함께 저녁을 준비하는 기분이었다. 평안하고 아늑했다. 사람이었을 때 꼭 이랬을 거야.


‘위즐증가에서 배운 실력을 보여줄까?’

기분이 좋아져 칼을 꺼내 들었다.


부엌에 남아있는 약간의 채소를 섞어 탕과 찜을 만들었다.

발목은 불편해도 손은 자유로웠다. 고샅공방과 위즐증가에서 배운 기술이 있으니 맛은 충분할 테고.


예슬은 맛있다며 열심히 숟가락을 움직였다.

가만히 그녀를 보고 있다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반계에서 왜 혼을 잡아가는지 알아요?”

“반계? 그건 어디예요?”


“여기가 반계예요. 천계도 선계도 아닌, 수리마루 정명님에게 반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세계.”

“아니에요. 여긴 감여지예요. 달콤한 땅이라는 뜻이지요.”

예슬은 순진한 웃음을 지으며 감자를 한입 크게 물었다.


“그래요. 감여지. 피천귀들이 사람의 혼을 잡아다가 영혼 수집가로 만든대요. 알아요?”

“그런 얘기는 못 들었어요.”

예슬은 숟가락을 내려놓고 내 손을 잡았다. 오히려 나를 위로하는 눈빛이었다.


“귀사님이 무서워서 그러죠? 저도 처음에는 굉장히 무서웠어요.”

예슬은 심각한 이야기를 전혀 심각하지 않게 들었다. 여전히 맑은 웃음을 지으며 큰 눈을 반짝거렸다.


“그래도, 가장 무서운 건 사람이에요.”

그녀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사람들이 엄마도 죽였고, 나도 죽였어요.”


나는 할 말을 못 찾아 가만히 있었다.

‘슬픈 사연이 있구나. 피천귀들이 그 사연을 이용하나?’


피천귀는 사람의 아픔을 건드린다. 외로움, 소외감을 분노로 바꾸어 힘을 키운다. 살면서 상처 없는 사람은 없으니까.

‘어느 정도까지 물들었을까?’


그녀는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사빈님, 술도 있는데 한 잔 드릴까요?”

“에에? 술?”

“귀사님이 인간세에서 구해다 줬어요. 집이 그리울 때 마시라고요.”


인간세의 술이라···. 피천귀치고는 꽤 감각 있는걸?

‘가만, 집이 그리울 때?’


반계에서 그 정도까지 챙긴다고? 영혼 수집가 하나 만들려고 이렇게 정성을 들여?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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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천계_귀물씨앗이 들어오다 23.06.11 88 2 12쪽
48 천계_또 다른 비밀 23.06.11 91 2 11쪽
47 천계_숨은 혼을 찾아서 23.06.10 91 2 11쪽
46 천계_새로운 동료 바나 23.06.09 92 2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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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천계_마음숲 키움차사들 23.06.08 92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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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믐_불천수 대나무숲 23.06.03 98 2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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