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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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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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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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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
글자수 :
916,352

작성
23.06.14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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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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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자
12쪽

천계_다훤 아저씨

DUMMY

사빈은 빈 물통을 들고 혼알판 사이를 걸었다.

강아지 바나도 사뿐사뿐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새놀산 맑은샘으로 가는 길이었다.


돋움다로차는 바래강 돋움샘에서 나는 물로 만들지만, 샛바람물은 새놀산 맑은샘에서 나오는 물이어야 했다.

샘물로 정화수를 만들어 다른 약재와 섞으면 향기로운 차가 된다.


바나가 사빈을 올려다보았다.

“왈, 주인님, 왜 날아가지 않어라?”

“걷고 싶어서. 오늘은 생각할 것이 많아.”


사빈은 귀물씨앗 때문에 소멸한 혼이 생각나 마음이 아팠다. 피천귀가 된 혼을 잡는 과정에서 세 개나 소멸했다.


가슴이 답답해 물을 떠 온다는 핑계로 나온 것이다.

혼알방도 둘러보고 샛강을 따라 유유히 떠가는 휘나래도 구경하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싶었다.


“주인님이 부르면 쟁반도 막 날아가더라. 물은 왜 안 부르셔라?”

바나가 꼬리를 흔들었다.


마고가 부르면 필요한 만큼의 샘물도 아날빛숨 지하로 옮겨온다. 보통 때는 부르지만, 강물이나 샘을 살펴보고 싶을 때는 직접 그곳까지 찾아간다.


‘근원부터 해결해야 해. 마고의 힘이 바로 서면 귀물씨앗도 녹아버리겠지. 빨리 찾아야 할 텐데···.’


사빈은 놀뫼마당 근처 개울을 바라보며 멈춰 섰다.

허리띠에 매단 향낭을 들어보았다. 처음 받았을 때보다 향이 많이 줄어들었다.


아직 남아있을지 모를 귀물씨앗 때문에 매일 차고 다니니 향도 함께 날아갔다.


‘만약을 대비해 라온향을 더 구해야 해.’

천계에 어딘가에 라온나무가 있지 않을까?


라온향이 지나가도 혼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다른 향과 마찬가지였다.

상산대원들은 라온나무가 사라진 다음에 태어났기에, 라온꽃 향기를 알지 못했다.


반계에서 가져온 향기인 줄 알면 당장 사빈을 추궁할 것이다.

그래도 향의 효능을 알았으니 없앨 수도, 그렇다고 반길 수도 없을 것이다.


‘이루님이 동방청제였으니 청천에 라온나무가 있지 않을까? 어떻게 동방청천에 가보지?’


마고는 그믐 외출이 아니면 마음숲을 떠날 수 없었다. 마고가 혼알방을 오래 비우면 혼들의 공명에 문제가 생긴다.


신제의 부름이라면 어디든 갈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가까운 대명천만 다녀올 수 있다. 마음숲이 대명천의 일부라서 가능했다.


사빈이 조그맣게 한숨을 쉬는데 누군가 그녀의 소매를 건드렸다.

“마고님!”


사빈이 놀라 돌아보니 이사묵이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이사묵? 오랜만이에요. 벌써 떠날 때가 되었어요?”


“에이, 아니요. 공방에서 불러서요. 소소에 가는 길이에요.”

이사묵은 손을 들어 소소공방이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다시 나가기로 했어요?”

“어쩔 수 없어요. 조각을 부탁한 위사들이 많은데, 손이 모자란대요.”


“이사묵의 실력을 인정받은 거죠.”

사빈의 칭찬에 그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마음을 정했어요?”

“아직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할 수 없죠. 제가 없으면 안 된다니···.”


“잘하려는 생각은 내려놓고 하고 싶은 대로 해요. 마음이 담겨야 좋은 기운이 스며들거든요. 천계에서는 오로지 정성을 보니까요.”


이사묵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실실 웃었다.

“계속 방에만 있었더니, 몸이 굳는 것 같아요. 돌덩이가 되는 줄 알았어요. 아무래도 공방 체질인가 봐요.”


“이사묵은 할 수 있어요. 마음껏 즐기는 거예요. 하고 싶은 일,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이사묵은 기분이 좋은지 헤헤 소리 내어 웃었다. 웃다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는지 사빈의 소매를 잡았다.


“아, 온천에서 보니까, 못 보던 천인이 와 있던데요?”

“천인이요?”


“차사는 아니었어요. 머리카락이 푸른색도 아니고 흰색도 아니라서 신기하더라고요. 얼굴은 갸름하고 귀는 커요. 작고 말랐으니 분명히 차사는 아니죠. 위사도, 능사도 아니고···.”

이사묵은 다섯 성천의 천인들을 하나씩 떠올리며 눈을 깜빡였다.


사빈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다훤 아저씨가 오셨구나.’

북방흑천에 다녀온다고 하더니 이제야 돌아오셨어.


“알았어요. 나도 거기 가는 길이에요.”

사빈이 빈 물통을 흔들었다.

“새놀산 맑은샘이 온천 근처에 있거든요.”


이사묵은 허리를 푹 숙여 인사하고는 소소공방을 향해 가볍게 날아갔다.


‘이사묵도 곧 외길이나 산돌처럼 소문난 재주꾼이 되겠구나.’

사빈은 기분이 좋아져 이사묵의 모습이 안 보일 때까지 지켜보았다. 우울했던 기분도 어느새 맑아졌다.


‘그래! 나도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야.’

다훤 아저씨에게 여쭤봐야지. 아저씨는 알고 있을 거야. 라온향을 어디에서 구할지.


사빈의 걸음이 씩씩해졌다. 바나도 그런 사빈을 따라 깡충깡충 뜀뛰듯 걸었다.


*


모로매 온천은 은근한 열기 때문에 구름이 둘러선 것 같았다.


호수 전체가 온천이다 보니 건너편은 보이지도 않았다. 한긋장벽에서 구름 뭉치를 떼어다 막아놓은 것 같았다.


멀리서 보면 기암괴석이 솟은 듯 보이지만, 가까이 가면 언덕만큼이나 큰 바위들이었다.


바위마다 작은 정자도 있어 그곳에서 쉬는 혼도 있었다.

혼들은 뗏목에 앉아 흘러 다니기도 하고 낮은 곳에서는 헤엄을 치기도 했다.


다훤은 온천의 북쪽, 새놀산에 가까운 정자에 앉아 있었다.


언제나처럼 편한 차림이었다. 상아색 저고리에 짙은 재색 바지, 검은 허리띠였다. 오늘은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어, 늘어진 머리카락이 파란 빗자루처럼 보였다.


다훤을 발견하자 사빈의 걸음이 빨라졌다.

“아저씨! 언제 돌아오셨어요? 미리 알았으면 차를 가져왔을 텐데.”

“사빈이구나. 어서 오너라.”


다훤은 사빈이 앉기를 기다렸다. 사빈이 앉자 바나도 그녀의 치맛자락 위에 앉았다.


“허! 부랴부랴 왔더니 또 어디 가고 없구나.”

“누구요?”

“누구긴. 네 할머니 말이다.”


“이계의 요물을 알아보러 가셨어요. 우주의 가장자리를 찾아다니실 걸요? 빛나는 알을 다시 만나고 싶다고요.”


“말도 없이 가다니. 몹시 서운하구나.”

다훤은 뭉게뭉게 엷은 김을 내뿜는 호수를 내려다보았다.


사빈은 바나를 쓰다듬으며 온천을 즐기는 혼들을 바라보았다.


“그 아인 뭐냐?”

다훤이 묻자 바나가 벌떡 일어나 그 앞에 섰다.

“왕왕, 바나여라. 사빈님이 주인님이어라.”


다훤이 바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흠, 한얼에, 백하까지 가담했구나. 대단한 녀석일세.”


바나는 자신을 칭찬하는 줄 알고 고개를 좌우로 까딱였다. 다훤의 무릎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


“혼 찌꺼기를 모으느라 불천수까지 갔었대요. 삼도천에서는 남은 것이 거의 없어서요.”

“저런. 가까이 가지 말라고 했거늘.”

다훤은 쯧쯧 혀를 차면서도 바나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놔둬라. 할 수 없지. 그것이 운명이라면.”

다훤은 두 손을 모아 소매로 덮었다.


“네 할머니가 없다면 나도 여기 남을 필요 없지. 나만 손해 볼 수는 없잖느냐.”

“아저씨도 가시려고요?”

사빈이 울상을 지었다.


“나도 다닐 곳이 많거든.”

“그냥 여기 계시면 좋은데···.”

사빈은 중얼거리면서도 말릴 수 없었다.


‘좀 더 계실 줄 알았는데···.’

사빈은 동녘뜰에서 살던 때를 생각했다. 사빈재에서도 혼자 있는 시간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나 곧 생각을 바꾸었다.

‘아쉬워할 때가 아니야. 더 큰 숙제가 있잖아.’


“아저씨, 라온향이 필요한데, 어디서 구해요?”

“라온향? 그건 왜?”


사빈은 그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귀물씨앗이 마음숲에 들어와 혼이 피천귀로 바뀌었다는 것, 그들을 정화하는데 라온향이 쓰였다는 사실을.


“귀물씨앗이 들어오나 봐요. 중천에도 많이 떠다닌다고 했거든요. 상산대가 천기공의 결계를 다시 쳤지만, 얄리장터는 계속 열어야 하니까요. 만약을 대비해야죠.”


“라온나무는 이루가 있는 곳에서만 자란단다.”

다훤의 대답은 사빈이 예상한 말이었다.


“감여지요?”

나윤과 예슬을 생각하다가 감여지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아차 싶어 재빨리 말을 바꾸었다.

“반계 말씀이시죠?”


다훤은 고개를 돌려 사빈을 똑바로 보았다.

“네가 감여지를 어떻게 아느냐? 반계에서 쓰는 말인데?”

“지나는 길에 들었어요.”


사빈은 허리띠에 매달았던 향낭을 꺼내 다훤에게 보여주었다. 주머니를 여니 향기가 진하게 올라왔다.


“이건 어디에서 났니?”

“아···.”

상산대원과 다른 차사들에게는 인간세에서 가져왔다고 말했지만, 다훤에게까지 거짓말하고 싶지 않았다.


“지난 그믐에 불천수 대나무숲에 갔었어요. 거기 사는 나윤과 예슬이 만들어줬어요.”

“반계에 들어갔다고?”

다훤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사빈이 흠칫 놀라 어깨를 뒤로 뺐다.

“그믐 외출로 나가다가요. 덫에 걸려서 그만···.”


다훤은 눈을 감고 깊이 생각에 잠겼다.

“그렇구나. 피천귀가 만든 함정이 오히려 입구가 되었단 말이지.”


사빈은 다훤이 움직일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사빈은 몸이 굳어 어깨와 허리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바나는 벌써 새근새근 잠들었다.


움직이는 기척 때문인지 다훤이 눈을 떴다.

“라온나무가 어디서 자라는지는 모른다. 반계는 천인이 갈 수 없는 곳이니까. 경계에 서기만 해도 갈기갈기 찢기고 말 거다. 사람도 그렇지. 타죽거나 가루가 되지. 그런데 너는···.”


다훤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중간자라서인가···. 이상하긴 했다. 중간자가 마고가 된 것도, 너무 빨리 어리화가 나타난 것도.”

그는 먼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검푸른 낯빛이 더욱 검어졌다.


“또 무엇을 보았는지 말해보렴.”

“바람벽에서 마백북존과 이안남존을 보았어요. 그리고 여러 다른 장면도 보았고, 그중의 하나에서 어리화가 반응했어요. 어디인지는 모르지만요.”


“그분들을 보았다고?”

다훤이 씨익 웃었다.

“네가 본 것일까, 그들이 보여준 것일까?”


잠시 후 다훤은 웃으며 사빈의 손을 잡았다. 그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네가 할 일이 또 있는 것 같구나.”

“아저씨, 뭔가 아시는 거죠? 무슨 일이 일어날지 보인 거죠?”


“앞날이 다 보이면 내가 나일 수 있겠느냐?”

다훤은 소맷자락을 펄럭여 뒷짐을 졌다.


“어디서 찾을지, 찾을 수나 있는지 모르나, 손 놓고 기다릴 수는 없지.”

“무슨 말씀이세요?”


“네 일은 네가 알아서 할 테니, 나는 다른 일을 알아보겠다. 다음 이야기는 다음에 들으마.”


다훤은 사빈의 손등을 토닥였다.

“넌 잘할 거다. 선택받은 아이니까.”


인사를 끝으로 다훤은 그대로 사라졌다.


그 자리를 바라보던 사빈은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냈다.

‘제대로 하고 있어야지. 할머니와 아저씨가 돌아오실 때까지.’


*


다시 그믐이 되었다.

한 쌍의 꽃수 열쇠 중 한쪽이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아롱재 한가운데 멈추었다.


수명환도 준비했고, 아리 인형과 향낭도 허리띠에 잘 걸었다.

‘이번에는 천사 가온을 만나려나? 아니면 다음 마고를 찾으려나?’


바나도 바짝 긴장하여 사빈의 다리에 몸을 딱 붙이고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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