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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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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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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29
추천수 :
431
글자수 :
916,352

작성
23.06.02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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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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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자
12쪽

그믐_동굴 속의 그림

DUMMY

하늘이 검푸른 빛이었다. 그믐의 다른 날에 비해 조금 더 늦은 시간이었다.

주위에 아름드리나무가 늘어서 있고 잡목과 풀이 우거졌다. 숲속에 들어와 있었다.


나는 그대로 서서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선명하고 맑은 공기가 가슴 속으로 들어왔다. 지금까지의 인간세와는 너무나 달랐다. 오염되기 전의 대기였다.


‘파라다이스 빌라를 기대했는데···. 여긴 어디람?’

나는 허리에 매달린 노리개를 툭 쳤다.

‘중천에 갈 때는 내 마음이 네 마음이더니, 이번에는 아니야?’


숨을 고르며 대기가 품은 지식을 읽어나갔다. 바람도 여기가 어디인지 알려주고 지나갔다.


‘그러니까···, 삼천 년 전···?’

과거로 왔다고?


불길한 예감이 머리부터 등을 타고 발끝까지 이어졌다. 공기가 후끈한데도 소름이 돋았다. 시간의 층으로 잘못 들어온 것이다.


현재의 다른 겹을 달려본 적은 있어도 이렇게까지 거슬러 온 적은 없는데.


혹시나 하는 기대로 휘파람을 불었다.

“영감! 영감들 혹시 있나?”


아무리 둘러봐도 대답이 없었다.

영감이나 바람잡이는 현재에만 존재한다. 그것을 알면서도 휘파람을 멈출 수 없었다.


대신 메아리가 대답했다.

메아리는 멀리, 그리고 깊이 퍼져나갔다. 이곳의 협곡이 얼마나 깊은지 알려주었다.

‘바람잡이가 없으면 이 산을 걸어야 하는데···.’


눈으로 보는 것 말고도 밤새 소리, 물소리, 바람에 나뭇잎이 사각거리는 소리가 산의 형상을 알려주었다.


바람이 가리키는 대로 방향을 잡았다.

얼마나 가야 할지 모르니 최대한 힘을 아껴야 한다. 꽃수 열쇠가 부를 때까지, 어쩌면 닷새 내내 걸을 수도 있다.


“어쩌다 시간의 층에 빠졌지?”

바스락거리는 발소리에 바짝 귀를 세웠다.

‘그게 이렇게 쉬운 일이었냐고!’


예사달 할머니가 들려준 그대로였다.

‘어리화를 품고 다니면 지금과는 다를 거다. 전혀 다른 곳으로 닿을 수도 있어. 현재의 겹과 시간의 층이 만든 미로란다.’


할머니는 알고 계셨던 거야. 언젠가 내가 시간의 층에 걸릴 거라는 걸.

그리고 또 무슨 말을 하셨더라?


‘반계의 양존이 어디에 덫을 엮었는지 모르지. 층과 겹이라도 반계의 함정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단다.’


남방홍천과 동방청천에서 미처 손대지 못한 시간의 층일까, 아니면 이것도 반계의 함정?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입술이 바짝 타들어 갔다.


반계의 남북양존에 대해 이야기는 가끔 들었지만, 그들의 초상화도 본 적 없다.


내가 아는 것은 반계의 양존도 처음에는 천계의 신제였다는 것, 두 번째 대혼란인 미틈오름 시기가 끝나고 반계를 세웠다는 것 정도였다.


천계와의 싸움에서 승리해 불천수까지 영역을 넓힌 역사도 배웠다.

원래 반계는 천계와 우주의 변두리, 비좁은 허공의 섬이었는데, 지금은 인간세 만큼 넓을 것이다.


그들의 신력이 다른 세 신제보다 월등히 뛰어나다고 했다. 그런 그들이 왜 시간과 공간에 덫을 만들었을까.

‘어리화가 핀 걸 알아냈나?’


선대 마고인 아란의 경고가 떠올랐다.

‘조심해. 마고가 바뀌는 시기에 마음숲은 가장 약해지니까. 기운이 흔들리고 구멍이 생겨. 어떤 일이 생길지, 무엇을 잃을지 알 수 없어.’


반계에서 그걸 알았다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언제, 어떻게 공격해 올지 모른다.


‘그래도 어쩌겠어? 오늘은 오늘의 일을 해야지.’

마음숲에는 상산대가 있고, 대명천에도 차사들이 있다. 그들이 마음숲을 지킬 것이다.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짙은 어둠 속에 오솔길이 보였다. 짐승들이 다니며 다져진 길이었다.


‘일단 내려가는 방향으로.’

나는 경사면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걸음을 옮기는데 어디선가 바스락 소리가 들렸다. 네발짐승의 묵직한 발소리.

숨을 죽이고 기다리니 씩씩거리는 콧소리도 들렸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멀리 수풀 속에 번뜩이는 두 눈이 보였다.

그 옆으로 하나 더, 하나 더, 대여섯 마리는 되어 보였다. 늑대도 아닌 것이, 호랑이도 아닌 것이.


‘언제부터 따라온 거야?’

뒤도 돌아보지 않고 풀숲으로 뛰어들었다. 거대한 몸집으로는 빽빽한 잡목 사이를 쉽게 빠져 나오지 못할 테지.


쫓아오는 발소리가 빨라졌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짐승들은 이리저리 나무를 피해 달려왔다.

쉭쉭거리는 소리가 점점 좁혀졌다.


‘아우, 정말! 왜 인간세에서는 날 수 없냐고!’

중간자 신세를 탓해봐야 소용없지만, 어김없이 넋두리가 나왔다.

여기서 죽을 수는 없어!


있는 힘껏 발을 내딛었다. 순간 바닥이 푹 꺼졌다.


훅 바람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나무뿌리를 잡으려고 허우적거렸지만, 손에 잡히는 것이 없었다.


미끄러지면서도 주먹을 움켜쥐었다. 마른 나뭇잎 몇 장이 손에 잡혔다.

아픔을 느낄 사이도 없이 떨어지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털썩!

소리와 함께 겨우 바닥에 닿았다. 흙과 나뭇잎이 두툼하게 쌓여 걱정만큼 아프지는 않았다.


“아우, 엉덩이야. 그래도 마고의 반지가 있어 다행이다.”

끙끙 신음을 내며 간신히 일어섰다.


소리는 멀리 가지 않았다. 벽에 부딪혀 곧장 내게 돌아왔다. 손을 더듬으니 바로 벽이었다.


“아, 아!”

내 목소리는 좁고 길게 퍼져나갔다.


아늑한 동굴이었다. 오래 묵은 풀냄새, 포슬포슬한 흙냄새가 가득했다.

빛이 들어오지 않아도 군데군데 빛나는 돌이 은은하게 빛을 내뿜었다.


나는 바람이 지나가는 방향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한 손으로 벽을 짚고 벽을 따라 걸었다. 투박하지만 규칙적으로 깎아낸 흔적이 있었다.

‘사람이 파낸 동굴이네?’


갑자기 온몸의 근육이 쿨렁거렸다. 동굴 속 공기가 꿈틀대며 눈앞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시간이 건너뛰고 있어!”

나는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섣불리 움직였다간 시간의 미아가 될 것이다.

‘과거의 층에 걸린 것도 모자라 시간이 날뛰네.’


공기가 물컹거리며 내 몸을 훑고 지나갔다.

때로는 바람처럼 때로는 주먹질처럼 몸을 두드렸다. 어지럽고 메스꺼웠다.


얼마나 지났을까.

냄새가 달라졌다. 풀냄새가 짙어지고 바람도 달랐다.


나는 슬며시 눈을 떴다.


바닥에 쌓인 흙이 두꺼워지고, 이끼와 먼지가 점점 쌓여갔다. 거미줄이 여기저기 쳐졌다가 사라지고 나뭇잎이 날아와 빠르게 썩어갔다.


과거를 넘어 현재로 온 것이다. 동굴 속의 공기가 지금이 현재라고 알려주었다.


‘이번 그믐은 왜 이래? 무슨 일을 내려고?’

어쨌든 동굴 속에서 나가야 하는 건 삼천 년 전이나 현재나 마찬가지이다.


몇 걸음 옮기니 손끝에 무언가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벽에 팬 자국은 어떤 모양이었다.

‘조각 같은데?’


나는 동굴 벽을 마주하고 섰다. 천장의 구멍을 통해 희미한 새벽빛이 들어왔다.


빛이 스며들자, 동굴 벽을 가득 메운 그림이 보였다. 일부는 돌에 새긴 다음 그려 넣었고, 일부는 표면에 염료로 그림만 그려놓았다.


그림은 내가 서 있는 곳에서 동굴 저편까지 이어졌다. 지금까지 걸어 나온 곳은 그리다 만 것이고, 앞쪽은 선명했다.

‘저쪽이 나가는 길이구나.’


그림 속에 강과 언덕이 있고, 집과 마을이 있었다. 거대한 매머드를 둘러싸고 사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단순한 선에 색깔도 네댓 종류지만 열매를 따는 사람, 가죽을 손질하는 사람, 바느질하는 사람도 보였다.

한가운데 불을 피우고 둘러서서 춤을 추는 모습도 있었다.


제사를 지내고, 음식을 나누는 그림 속 마을은 평화로웠다.

‘이 시대 사람들의 이상향인가?’


수많은 사람이 그려져 있지만, 어느 가족의 모습이 눈에 확 들어왔다.

부부로 보이는 두 사람이 움막집 앞에 앉아있었다. 남자는 고기를 굽고, 여자는 갓난아기를 안고 있었다.


너무나 평화롭고 아늑해 보여 갓난아기 그림에 손을 얹었다. 순간 손끝이 뭉클거렸다.

‘혼? 사람의 혼?’


깜짝 놀라 손을 뗐다. 설마···, 이 혼이 나를 부른 거야?

그가 불렀든 아니든 내가 여기 온 건 인연이기 때문이다. 마고가 만나야 할 혼이다.


‘넌 누구지?’

가족의 그림에 다시 손을 얹었다.


‘당신은 누구죠?’

남자의 목소리는 그림 속도, 동굴 벽도 아닌 중간 어디쯤에서 나왔다.


‘나는 마음숲의 마고, 사빈이야. 너는 왜 여기 있니?’

‘여기가 어디죠?’

이런. 자기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니.


‘거기는 어떤 곳이야?’

‘따뜻하고 행복해요. 배고프지도 아프지도 않아요. 아이도 방긋거리고, 사람들은 늘 웃으며 춤을 춰요. 사냥할 짐승도 많고, 물고기와 열매가 떨어지는 날이 없어요.’

그가 말하는 곳은 그림 속 세상이었다.


나는 한 걸음 떨어져서 그림을 바라보았다.

혼은 실증계의 사람이었을 텐데, 지금 있는 곳은 그림 속 세상이라.


담아가 말한 세계가 이거구나.

파라다이스 빌라에 상상계에서 온 용병이 있다고 했지. 가온과 같이 일한다고.


‘빌라 식구들도 재미있어. 용병도 있더라고. 상상계에서 넘어온 사념체인데, 지금은 사람의 몸을 빌려 쓰고 있어.’


‘이때부터 상상계가 있었어?’

내가 인간세에 태어나기 훨씬 전에도 상상계가 있었다니.


불쌍하게도 혼은 실증계와 상상계,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끼어있었다. 그대로 봉인되어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실증계든 상상계든 지금은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이 혼을 어떻게 빼내지?’


“넌 이름이 뭐야?”

‘이름? 이름이 있나요?’

“너무 오래되어서 잊었구나. 그럼 널 유리라고 부를게. 너와 얘기하고 싶어.”


어떻게 하면 유리의 혼을 중천으로 보낼까.

그러려면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알려주어야 한다.


이미 오래전에 죽었다는 것, 그곳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 혼에게는 갈 곳이 따로 있다는 것들 말이다.


‘넌 어떻게 거기 들어갔어?’

‘모르겠어요. 언제 들어왔나요?’

유리는 꿈을 꾸듯 몽롱한 소리로 물었다.


자신이 끼인 존재인 줄도 모르니 그 이전의 일은 당연히 기억 못 하겠지.

그래도 곧 잠에서 깨어날 것이다.

마고의 반지가 좋은 기운을 전해주니까. 그 기운은 강렬하면서도 안심이 된다고 했다.


‘제가 왜 여기 있죠?’

잠자코 있던 유리가 먼저 물었다.


‘이제 됐어.’

나는 벽에 손을 대고 유리의 혼을 찾았다.


혼을 찾으려는 나의 의지 때문인지, 유리가 조금씩 자각해서인지 처음보다 더 강하게 느껴졌다.

유리가 상상계에서 조금 더 이쪽으로 나온 것이다.


‘어? 이 기운, 어디서 느꼈는데···.’

가만히 손을 대고 유리의 혼을 읽었다. 확실히 어디선가 만난 기운이었다.


“바림창고···?”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래! 주인을 찾아달라던 그 그림!”

주인이 공명을 잃어 연결점이 끊어졌다고 했지. 유리가 그 그림의 주인?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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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천계_예사달의 조언 23.06.12 89 2 13쪽
49 천계_귀물씨앗이 들어오다 23.06.11 91 2 12쪽
48 천계_또 다른 비밀 23.06.11 91 2 11쪽
47 천계_숨은 혼을 찾아서 23.06.10 92 2 11쪽
46 천계_새로운 동료 바나 23.06.09 95 2 13쪽
45 천계_한요재의 초대 23.06.08 95 2 12쪽
44 천계_마음숲 키움차사들 23.06.08 92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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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그믐_현재의 겹 23.06.03 104 2 12쪽
35 그믐_그림의 주인 23.06.02 102 2 10쪽
» 그믐_동굴 속의 그림 23.06.02 100 2 12쪽
33 천계_얄리장터의 등불 23.06.01 105 2 13쪽
32 천계_알 수 없는 일들 23.06.01 105 2 12쪽
31 천계_대부와 대자 23.05.31 102 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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