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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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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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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6,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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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1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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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천계_얄리장터의 등불

DUMMY

모든 초롱과 등롱에 불이 켜졌다. 놀뫼마당에서 이즈막광장을 거쳐 얄리장터까지.


하늘 높이 이어진 등불은 달과 별처럼 은은하게 마음숲을 비추었다. 섬세한 장식과 조각이 더해져 빛이 모양을 갖고 노래하듯 반짝였다.

은은한 빛 속에 섞여 있으니, 꿈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저기 빛나는 돌 좀 봐.”

사빈은 담아의 손을 잡아끌었다. 검새공방에서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이었다.


빛나는 돌을 얇게 깎아 꽃과 새, 나무와 풍경을 조각했다. 모양에 맞춰 구멍을 뚫었기에 은은한 배경 사이로 빛이 새어 나왔다.


“소명원보다 훨씬 좋다.”

담아는 기둥과 벽을 따라 높이 걸린 불빛을 바라보느라 문득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천인들이 만든 것도 화려하고 아름답긴 한데, 이런 느낌은 없거든.”

“천계는 아쉬운 게 없어서 그래. 사람의 혼은 서러움과 간절함을 새기니까 애틋하고 애절해. 느낌이 달라.”


사빈은 화려한 불빛 사이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열림날에는 더 멋있었어. 다음에는 불꽃놀이를 해볼까? 별가루를 쓰면 될 거야.”


아무리 장터 열림날이라고 해도 축제의 왁자지껄하고 들뜬 분위기를 따라갈 수는 없었다. 어딘가 아쉬움이 남았다.


‘다음 축제는 가시버시날이지? 그때도 재미있는 걸 찾아봐야지.’

다음을 생각하니 사빈의 가슴이 한껏 부풀었다.


광장을 다니는 혼들은 저마다 색다른 옷을 입고 있었다.

인간세의 모든 역사가 한 자리에 펼쳐진 것처럼 모양도, 빛깔도 달랐다. 옷으로 만든 거대한 꽃밭이었다.


“못 보던 옷이 많네. 보듬공방에서 내놓은 거지?”

담아가 지나가는 혼들을 둘러보았다.


“지나실님이 인간세 옷에 관심이 많아.”

“그믐 외출이 닷새밖에 안 되는데 그 사이 사람의 옷도 살핀다고?”


“응. 집은 그대로여도 옷은 자주 바뀌더라. 그믐마다 나가면 거기서 거기인 것 같은데, 지나보면 많이 바뀌었어.”


“으음.”

담아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얼굴로 입술을 찡그렸다.


“중간자라서 그런 것까지 보이나 보다. 천사에게는 그런 거 안 보여. 사람은 그냥 사람이지. 태어나고 죽는 건 똑같으니까. 싸우고 빼앗고 다치고 죽고. 아마 지나실님도 막상 인간세에 가면 못 알아볼걸? 네가 전해주니까 아는 거지.”


담아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천사의 모습을 새긴 등불을 빤히 바라보았다.


얇은 나무판에 꽃과 비를 뿌리는 천사를 새겼다. 불빛이 환해서 치마의 주름과 날개옷까지 드러나 보였다.

위에서 아래까지 천사가 조각된 등롱이 이어져서 천사들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듯 보였다.


“예쁘다. 가온도 좋아할 텐데.”

등불을 바라보며 황홀해하던 담아의 눈빛이 쓸쓸하게 바뀌었다.


“사빈, 가온에게 꼭 가봐.”

“차원의 문을 지킨다고 했지?”

사빈은 눈썹을 찡그리며 지난 기억을 찾으려 애썼다.


“그믐마다 내려갔지만, 차원의 문은 못 봤는데···.”

“인간세도 넓으니까. 차원의 문은 감춰져 있고. 그렇게 쉽게 보이면 차원의 문이겠어?”


갑자기 담아의 웃음소리가 바뀌었다.

“거기 빌라 식구들도 재미있더라. 정령의 딸도 있고, 다른 차원에서 건너온 문지기도 있어. 아! 얼마 전에 보니 용병도 있더라.”


“용병?”

“상상계에서 넘어온 사념체인데, 사람의 몸을 빌려 쓰고 있어. 무슨 벌을 받느라 피천귀를 잡으러 다니더라고.”


“상상계? 그런 건 못 들어봤는데?”

처음 듣는 말에 사빈은 귀를 쫑긋거렸다.


“사람은 엄청난 존재야. 상상계도 만들어 내고.”

담아가 감탄하며 숨을 내쉬었다.


“피천귀를 만들고 키우는 것도 대단한데. 어쩌면 다른 세계가 또 있을지 몰라. 천계에서는 인간세를 속속들이 볼 수 없으니.”


“인간세가 실증계와 존재계로 나뉜 것은 알고 있지만, 또 다른 세계가 있었구나.”

사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믐에 존재계로는 간 적 없어?”

“응. 거긴 갈 수 없어.”

“왜?”


“인간세 태초의 모습 그대로라며? 사람이 없는 세상이잖아. 수명환을 건넬 사람이 없으니 마고는 갈 수 없지.”

“아하, 얘기가 그렇게 되나?”


“그래도 존재계는 꼭 가보고 싶어.”

그곳은 태초의 생명을 품은 곳이었다. 모든 것이 스스로 순환하며, 있는 그대로 생명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세계였다.


“거기가 존재계인지는 모르겠는데···.”

담아는 광장 한가운데 마련된 긴 의자에 앉았다.


“동명님의 신령수 결계가 거기인 것 같아. 가온이 쓰러졌을 때 찾으러 간 적 있거든. 그 결계 속이 딱 그랬어. 공기도 신선하고, 엄청난 생명력이 느껴져. 처음 세상이 생길 때 그랬을 거야. 원시의 근원이 느껴진달까.”


담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 또 가고 싶다.”


사빈도 같은 마음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고도 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물끄러미 등불을 바라보는데, 백하가 다가와 조심스레 다가왔다.


늘 입는 하얀색 일상복이지만 어딘가 달라 보였다.

색색의 등불이 반사되어 하얀 옷 위에서 여러 빛깔이 일렁였다. 빛 그림자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백하는 어떻게 말을 시작할지 몰라 잠시 망설였다.

천인과 혼들 틈에서 사빈을 발견하고 서둘러 부르기는 했으나 막상 그녀를 보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늘도 무척 아름답구려.”

백하는 자신의 말에 흠칫 놀라 다른 말을 덧붙였다.

“등불이 참 아름답소.”


“대감도 애써주셨어요.”

사빈은 소매 아래 손을 모으고 무릎을 살짝 굽혔다.


백하는 손을 폈다 쥐었다하며 숨을 골랐다.

사빈에게서 등불로, 다시 사빈에게로 눈길을 돌리는데 그때서야 담아가 눈에 들어왔다.


담아는 눈을 빛내며 생글거렸다. 장난기 어린 눈으로 무슨 말이 나올지 기대하고 있었다.


“담아님도 잘 오셨소.”

“오랜만에 뵙네요.”

담아와 백하는 일 때문에 몇 번 만난 적은 있지만 친하게 지낼 기회는 없었다. 오래 마주할 만한 시간도 없었다.


“전 지나가는 길이에요.”

담아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비켜섰다.


백하는 사빈을 향해 돌아섰다.

“잠깐 걸을 수 있겠소?”

그는 놀뫼마당 남쪽을 가리켰다. 한요재가 있는 방향이었다.


“일행이 있어서···.”

사빈은 고개를 돌려 담아를 찾았다. 조금 전까지 옆에 서 있던 담아가 보이지 않았다.


담아는 벌써 몇 걸음 떨어져 등불을 보는 척 뒤돌아 서 있었다.

흘끗 사빈을 돌아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이내 고개를 돌렸다. 입술을 앙다물고 애써 웃음을 참았다.


사빈은 어깨를 늘어뜨리고 백하에게 다가갔다.

“예. 잠깐이면 괜찮아요.”


“많이 힘들겠소. 사빈님이 애쓰는 만큼 마음숲이 빛나지만.”

백하는 손을 뒤로 모으고 느긋하게 걸었다. 등불을 바라보다가 놀뫼마당을 돌아다니는 혼들도 살펴보았다.


“사빈님이 마고로 있으니 좋소. 오래도록 여기 있으면 좋겠소.”

백하는 등불 아래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사빈과 눈을 마주치기 위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낙원으로 가도 상관없소. 어디든 갈 수 있으니.”


“예? 어디 가시려고요?”

“아니, 그러려면 아직 멀었지만.”

백하가 환하게 웃자 흰 눈썹이 둥글어지며 덩달아 움직였다.


“만약에 말이오. 사빈님이 어딘가로 간다면.”

백하는 웃으며 말했지만, 사빈은 하마터면 발을 헛디딜 뻔했다.


‘상산대감이 눈치챘나?’

사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어리화에 대해 알았다면 이렇게 태연할 리 없지.’


사빈의 머릿속이 마구 헝클어졌다.

‘갑자기 무슨 얘기지? 어디로 간다니? 상산대는 어떻게 하고?’


상산대는 이전 마고들과도 사이가 좋았다. 마고와 함께 마음숲을 지키니 당연했다.

선대 마고인 아란도 백하를 많이 칭찬했다. 판단이 날카롭고 일 처리가 깔끔하다고.


사빈이 처음 마고 일을 시작할 때도 상산대원들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유독 상산대감만은 매섭고 까칠해 두려웠지만.


‘대감이 조금 달라졌다 싶더니, 이상한 말을 다 하네.’

사빈은 언제부터인가 달라진 백하의 모습을 하나씩 되짚었다.


가끔 무슨 뜻인지 모를 애매한 말을 하고, 헛기침하거나 갑자기 귓불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상산대원이나 혼알방의 혼들을 대할 때는 그렇지 않은데, 왜 그럴까?


골똘히 생각하던 사빈이 손뼉을 딱 쳤다.

‘틀림없어. 어디가 아픈 거야. 천인들이 아프면 어떻게 하더라?’


‘따뜻한 차? 천력이 깃든 물?’

아날빛숨의 차를 떠올리니 덩달아 용희가 생각났다.


백하를 보기만 해도 행복해하는 도우미였다. 생명의 은인이라면서 백하에게 차를 대접하는 것이 제일 기쁘다고 했다.


“아날빛숨에 들렀다 가실래요? 용희가 따뜻한 차를 내줄 텐데요.”

“오늘은 이 정도로 괜찮소.”

백하는 진지한 얼굴로 사빈을 보았다. 뜨겁게 바라보았으나 사빈은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백하는 한숨을 뱉으며 돌아섰다.

“시간은 끝이 없으니 앞으로도 영원처럼 이어지지 않겠소?”

“예? 예. 그렇지요.”


“다행이오. 그럼.”

백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성큼성큼 한요재를 향해 걸어갔다.


사빈은 백하의 뒷모습을 보면서 맞잡은 두 손을 꾹꾹 눌렀다.

‘무슨 병이기에 저런대? 겉은 멀쩡해 보이는데···.’


“쯧쯧. 불쌍하네.”

담아가 소리 없이 사빈의 옆으로 바짝 다가갔다.


“소문이 그저 소문인 줄 알았더니 사실이었어.”

“무슨 말이야?”


“상산대감 말이야. 완전히 얼음이었잖아? 얼음칼을 만드는 것도 최고 수준이지. 순식간에 대기를 얼려버리는···.”

담아는 손을 들어 허공에 원을 만들었다. 백하가 빙천술을 펼칠 때의 손 모양을 흉내 내며 공기 덩어리를 키웠다.


“사람도, 피천귀도 단숨에 얼려버리는 차사로만 알았는데, 마음은 엄청 따뜻하네.”

“상산대감이야 고마운 분이지.”

“고마운? 그게 끝이야?”

담아가 사빈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마음이 따뜻하다고! 어느 누구에게만 따뜻하다고!”

“응?”

사빈은 흔들리면서도 담아의 말을 알아들으려 애썼다.


“허어, 이래서야 어디 마고라 할 수 있나.”

담아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그녀의 심각한 표정은 오래 가지 않았다.


“호오, 어쩌면 그편이 더 재미있을지도?”

담아는 팔짱을 끼고 사빈을 바라보았다.

“좋아. 어떻게 될지 두고 보겠어.”


아날빛숨 앞에 다다르자 담아는 걸음을 멈추고 사빈의 손을 잡았다.

“한동안 여기 못 올 거야. 정말 아쉬워. 다음 진도를 보고 싶은데.”

“응. 다음 장날에도 색다른 등불을 걸 거야. 끝나면 꼭 들려.”


사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담아는 큰 소리로 웃었다.

“아하하! 그, 그게 진도?”

그녀는 웃느라 눈물을 찔끔거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숨을 가다듬었다.


“그래. 모르는 게 나을 수도 있어.”

담아는 양손으로 사빈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손을 흔들었다.


배웅문이 있는 하늘 위로 날아오르면서도 담아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사빈은 멀어지는 천사의 모습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즐거웠나?’

딱히 대단한 일은 없었지만, 어쨌든 다행이다. 담아가 즐거웠다니.


*


아롱재의 천장에는 숨꼭지들이 영롱하게 빛났다. 순백초 향기가 방 안에 가득 차 은은한 빛과 잘 어울렸다.


사빈이 손을 들어 숨꼭지를 부르니 작은 빛이 뭉게뭉게 일어나 달라붙기 시작했다. 일천팔십 개의 숨꼭지가 순백초와 섞여 둥글게 뭉쳐졌다.


둥근 덩어리는 작게, 또 작게 줄어들어 홍매색 수명환 한 알이 되었다.


사빈은 수명환 세 개를 작은 옥함에 옮겨 넣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쓰이면 좋겠는데···.’


사빈은 꽃수 열쇠를 손에 쥐고 주문을 외우듯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파라다이스빌라로.’


천사 가온이 있고, 차원의 문이 있는 곳.

가온의 장난기 어린 얼굴을 생각하니 병아리 인형이 생각났다.


엉성한 바느질에, 짝짝이 눈, 비뚤어진 부리. 앙증맞고 묘하게 정이 가는 인형이었다. 사빈은 아리 인형을 소매에 넣었다.


‘좋아, 수명환도 준비했고!’

이번에는 인간세로 간다. 수명환의 주인도 찾고 다음 마고의 단서도 찾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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