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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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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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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
글자수 :
916,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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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0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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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그믐_하륜 선위의 충고

DUMMY

카페 미루안은 조용하다 못해 적막했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서너 시간은 손님이 없다더니, 가온의 말 그대로였다. 이때가 하륜 선위가 명상하기 알맞은 시간이라나.


‘아니 그럼, 명상하도록 놔둬야지, 왜 지금 가냐고!’

나는 카페 유리문 앞을 서성였다.


가온의 부탁을 모른 척할 수도 없고.

‘복원할 물건이 밀려서···. 오늘 꼭 끝내야 하거든. 내일은 주말이라 일찌감치 진열해야 한다고.’


핑계는 거창해도 요점은 간단했다.

배가 고프니 간식 좀 가져다 달라는 것이었다.


‘왜 하필 지금? 그것도 바느질 잘하다가 갑자기?’

나는 발로 땅바닥을 힘껏 구르며 용기를 냈다.


카페 문을 열자마자 하륜 선위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지?’

돌아보니 유리벽을 통해 밖이 훤히 내다보였다. 밖에서는 실내가 안 보였는데.


“드디어 들어왔네요. 사빈님?”

하륜은 은은하게 웃으며 카운터 앞의 의자를 가리켰다.


“예. 가온은 복원할 물건이 많대요.”

“마침 잘 되었네요. 사빈님한테 할 말이 있거든요.”


“무슨···.”

나는 긴장해서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그 유명한 하륜 선위가 무슨 말을 하려고.


그는 온화하고 부드럽지만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웠다. 겁이 난다고 할까, 선력에 기가 눌린다고 할까.


“상상계를 봤다고 했죠?”

하륜은 내게 질문하면서도 손은 과일과 채소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싱싱한 사과, 토마토, 피망과 양파까지 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무엇인지 알겠다.

가온에게 갖다줄 간식이구나.


“예. 동굴 벽화였어요. 혼이 끼어있었는데, 그 혼을 꺼내려다가 잠깐 보았어요.”

그곳은 유리가 살고 싶어 하던 그림 속 세상이었다.


구불구불한 선이 산이 되고, 움막이 되고 사냥터가 되었다. 행복해하던 유리의 모습도 떠올랐다.


여기서는 그림이라도 상상계에서는 생생하게 살아있는 세상이었다.

사냥해 온 고기를 둘러싸고 춤추는 사람들, 작은 마을과 웅장한 산. 뛰어노는 짐승들, 널려있는 열매들.


“이상하지 않아요?”

하륜의 물음에 내 상상은 카페로 돌아왔다.


“뭐가요?”

“상상계는 천인도, 선인도, 그것을 만든 사람조차 볼 수 없어요. 천선계에서는 그 존재도 몰랐죠.”


하륜이 칼질을 멈추고 나를 보았다.

“사람은 자신의 상상에 갇혀 진짜 상상계는 보지 못해요. 그런데 사빈님은 그 세계를 봤어요. 무슨 뜻일까요?”


그의 말은 질문이 아니었다. 무언가 뜻이 있다는 확신이었다.


‘전혀 모르겠는데요···.’

유리의 혼을 통해 본 것이지 내 힘으로 본 것은 아니다. 보려고 해서 본 것도 아니고 우연히 엿본 것뿐이니까.


재료 손질을 다 끝내자 하륜이 야채즙을 한 잔 따라주었다.

“삽살이와 참새의 말도 들었죠?”

“예. 그런데 소리로 들린 것은 아니고 머릿속으로 들렸어요. 공명으로요.”


“우리는 묘수의 차원에 가야만 그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요. 그 아이들에게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죠.”

하륜은 말을 마치고 유리벽 너머 거리를 바라보았다.


그를 따라 나도 돌아봤지만,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그 벽 너머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어리화가 이렇게 일찍 핀 것도 이상해요.”

하륜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야채즙을 마시다 말고 잔을 내려놓았다.


그런 생각은 안 해봤는데.

하륜 선위가 그렇게 말한다면 진짜 이상한 일이겠지만···.


빨리 찾아야 한다고, 자리를 넘겨주고 예전처럼 예사달 할머니와 동녘뜰에서 살고 싶다고, 그렇게만 생각했다.


하륜은 잔잔하게 미소 지었다.

“지금까지 마고는 오랫동안 마음숲을 지켰어요. 이천 년 만에 바뀌는 건, 마음숲이 생긴 이래 처음이죠. 분명 무슨 이유가 있어요.”


“제가 중간자라서가 아닐까요? 천력이 부족하거든요. 인간세에서는 날지도 못하고, 싸움도 못 하고, 꼭 어딘가 다치고. 쉽게 지치거든요.”


“중간자···.”

하륜이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이 점점 밝아졌다. 굳어있던 얼굴에 환한 웃음이 지어졌다.

“그렇군요. 중간자.”


하륜은 우유식빵을 토스트기에 밀어 넣었다.

“중간자라서 보고 듣는 거군요. 천인과 선인은 너무 멀리 보고, 사람은 너무 가까이 보죠. 그사이에 있는 수많은 비밀을 중간자는 볼 수 있는 거예요.”


나는 조용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의 말을 들으라고 꽃수 열쇠가 여기로 보낸 걸까.


“중간자는 나타나기도 어려워요. 다른 여러 힘이 그 순간 함께 있어야 하고요. 사빈님도 누군가의 혼 조각을 받았을 거예요.”


“다훤 아저씨가 만들어주었는데요?”

“그분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해요. 사빈님이 중간자가 된 것도, 중간자가 마고가 된 것도 이유가 있을 거예요.”


하륜이 말을 멈추자 고소한 빵 냄새가 몰려들었다. 입에 침이 고였다. 이런 중요한 순간에···.


“혹시 신령수 동명님을 아세요?”

“아, 이름은 들어봤어요.”

워낙 유명한 선위이니 당연히 알고 있다.

지금은 신령수 결계 속에 있는데, 그곳이 바로 존재계일 거라고.


“저의 스승님이죠.”

그것도 알지만, 나는 잠자코 그의 말을 기다렸다.


“사빈님을 만나고 싶어하세요. 기다린다고 하셨어요.”

“예에? 저를요?”

입안에 고인 침을 꿀꺽 삼켰다. 신령수 동명님이 나를 왜?


‘그분이라면 이 어려운 문제를 풀어주시려나? 짠하고 답을 알려주실까?’


“그렇지는 않을 거고, 보고 싶다고만 하셨어요.”

하륜은 내 생각을 읽고 생긋 웃었다. 속마음을 들키자 얼굴이 달아올랐다.


하륜은 내 표정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예사달님도, 다훤님도 답을 알려주는 분이 아니죠.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기다리는 분들이라···. 나도 그러고 싶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군요.”


그는 나를 향해 똑바로 섰다.

“피천귀와 영혼수집가들이 갑자기 늘어났어요. 반계에 무슨 변화가 있구나 짐작했는데, 때맞춰 어리화가 피었다니 시기가 너무 교묘하네요.”


“반계에 일어날 변화···.”

공간의 덫에서 보았던 반계를 떠올렸다. 그것이 현재라면 그다지 문제는 없어 보였다.

피천귀들은 얌전히 엎드려있었고, 이루도 위엄있는 모습이었다.


그들이 과거에 무엇이었고, 지금 무엇인지보다 내 마음이 아픈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마눙의 가슴에 뚫린 구멍과 이루의 흐느적거리는 빈 소매.


갑자기 예슬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이루님이 좋아하는 향이에요. 라온향이죠. 남존님이 머무는 성도 라온성이예요.’


“하륜님, 혹시 라온향에 대해 아세요?”

“라온향?”

나는 허리띠에 매단 향낭을 풀어 카운터에 올려놓았다.


향이 많이 약해졌다. 귀물씨앗에 먹혔던 혼에게도 쓰고, 계속 달고 다녔더니 주머니를 열어야만 향기가 났다.


이 정도로는 피천귀가 피해 가지 않을 것이다. 더 많은 라온향이 필요했다.


“이루님이 있는 곳에서만 자란대요. 거기 말고 어디서 자라는지 다훤 아저씨도 모르세요. 혹시 인간세에서 자라지 않을까요? 인간세에도 신성한 땅이 있잖아요?”


향낭을 내밀자 하륜은 주머니를 열고 냄새를 맡았다. 달콤하고 쌉싸름한 향이 솔솔 풍겼다.


“이 라온향은 어디서 구한 거죠?”

“어, 저기···.”

나는 잠깐 망설였다.


말해도 괜찮을까? 그는 서방백천의 선사니까 반계를 싫어한다 해도 차사들만큼은 아닐 것이다.


“불천수 대나무숲이요.”

내 대답을 듣자 하륜은 가만히 주머니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니까···. 반계에 들어가서 갖고 왔군요.”

“예. 공간의 덫에 걸렸거든요. 그 얘기를 했더니 다훤 아저씨도 알아볼 것이 있다면서 떠나셨어요.”


“그분은 벌써 깨달으셨군요. 예사달님도 떠나셨겠죠?”

“예.”


“천인이나 선인이 반계에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지 알죠?”

“경계에 서기만 해도 온몸이 찢겨나간다고요. 사람은 타죽거나 가루가 되고.”


“그럼 그것도 추가하세요.”

“뭘요?”

“해답을 찾는 단서에.”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다훤 아저씨나 예사달 할머니처럼 하륜 선위도 이상한 말을 하는구나. 음···, 다훤 아저씨가 또 무슨 말을 했더라?


‘다음 마고를 찾는 일 말고도 네가 할 일이 또 있는 것 같구나.’

하륜도 그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다음 마고를 찾는 일 말고도 할 일이 있다는 말씀인가요?”

“맞아요.”

하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뭘까요?”

“이건 확실해요. 사빈님만이 할 수 있는 것.”

하륜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요.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간자이면서 마고라서 인가. 한얼도 중간자인데···.


‘그래, 중천에 갔을 때! 고사목이 하는 말을 들었어. 같은 중간자인데 한얼은 못 들었지.’


내가 골똘히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하륜은 샌드위치를 바구니에 담았다.

붉은빛이 도는 투명한 물을 병에 담아 그것도 바구니에 넣었다.


멀뚱멀뚱 계속 생각했지만,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생각할수록 이상하네? 대체 뭐지?’


나만이 보고 들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 해도···, 어디 있는데? 찾아서 뭘 하려고?


“신령수 동명님에게는 어떻게 가죠? 그믐에도 갈 곳을 못 고르거든요. 결계가 어딘지도 모르고.”

고개를 갸웃거리니 하륜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싱글거렸다.


“그래도 이곳에 왔잖아요? 파라다이스 빌라에.”

“그러네요. 가온을 만나고 싶다고 간절히 바랐거든요. 꽃수 열쇠도 간절함이 통하나···?”

나는 허리띠에 매달린 헝겊꽃을 만지작거렸다.


“지금은 휴가라 생각하고 편하게 지내요. 수리마루 정명님의 설계라면 아무리 고민해도 알 수 없어요. 주어진 시간에 충실할 수밖에요. 언젠가 답이 나오겠죠.”

하륜은 아이를 가르치듯 차분히 설명을 이어갔다.


“아하, 가온 때문에 생각할 여유도 없겠네요. 그믐 외출이 언제까지죠?”

“곧 떠날 거예. 꽃수 열쇠가 언제 부를지 저도 몰라요.”


닷새를 채우기도 하고, 나흘 만에 돌아가기도 하니까.

돌아갈 때는 바나도 함께 가야 하는데? 여기 오고 나서는 바나를 보지도 못했다.

“아, 바나.”


“강아지는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죠.”

“그러게요. 삽살이와 참새랑 일찌감치 사라졌어요. 대체 뭘 하는지.”


“걱정 말아요. 좋은 공부가 될 거예요. 여기서 배운 것들이 앞으로 사빈님께 도움이 될 거고요.”

하륜의 말은 마치 예언처럼 묵직하게 들렸다.


*


하륜 선위의 말을 듣고 나니 커다란 숙제를 떠안은 기분이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모르겠다, 모르겠어.’


간식 바구니를 들고 소품샵으로 돌아오니 빌라의 다른 식구가 앉아있었다. 빌라 이 층에 사는 정령의 후예 은서였다.


“사빈님! 얼마나 기다렸다고요.”

은서는 벌떡 일어나 바구니를 건네받았다.


“제가 알바하는 가게도 보여주려고요.”

“가게요? 아, 짱짱 만화방요?”


“공짜로 쳐 드릴게요. 어서 가요.”

은서는 내 팔에 손을 끼고 나를 잡아끌었다.


가온은 어느새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다.

“웅, 조아, 가바.”

한입을 가득 베어 물고는 웅얼거렸다.


가온은 음료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제대로 말했다.

“오늘 복원을 끝내야 내일 새벽에 산책하러 나가지. 지내늬도 거기 있을 거야.”


“아니, 저기.”

이게 아닌데···. 난 지금 무척 심난하다고. 생각할 게 많다고.


그러나 은서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만화를 우습게 보면 안 돼요. 다 피가 되고 살이 된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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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그믐_배낭 메고 새벽 산책 23.06.21 69 2 10쪽
59 그믐_짱짱 만화방 23.06.20 70 2 14쪽
» 그믐_하륜 선위의 충고 23.06.20 69 2 12쪽
57 그믐_달숲의 작은 천사 23.06.19 70 2 11쪽
56 그믐_그믐밤의 모임 23.06.18 71 2 13쪽
55 그믐_가온의 손님이 되다 23.06.17 73 2 14쪽
54 그믐_파라다이스 빌라 23.06.16 80 2 11쪽
53 그믐_피천귀 사냥 23.06.15 83 2 13쪽
52 천계_다훤 아저씨 23.06.14 83 2 12쪽
51 천계_차미의 의심 23.06.13 87 2 13쪽
50 천계_예사달의 조언 23.06.12 88 2 13쪽
49 천계_귀물씨앗이 들어오다 23.06.11 88 2 12쪽
48 천계_또 다른 비밀 23.06.11 91 2 11쪽
47 천계_숨은 혼을 찾아서 23.06.10 91 2 11쪽
46 천계_새로운 동료 바나 23.06.09 92 2 13쪽
45 천계_한요재의 초대 23.06.08 91 2 12쪽
44 천계_마음숲 키움차사들 23.06.08 92 2 12쪽
43 천계_공방의 고민거리 23.06.07 91 2 11쪽
42 천계_돋움다로차 23.06.06 98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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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그믐_버림받은 영혼 23.06.04 97 2 12쪽
37 그믐_불천수 대나무숲 23.06.03 98 2 13쪽
36 그믐_현재의 겹 23.06.03 100 2 12쪽
35 그믐_그림의 주인 23.06.02 98 2 10쪽
34 그믐_동굴 속의 그림 23.06.02 99 2 12쪽
33 천계_얄리장터의 등불 23.06.01 102 2 13쪽
32 천계_알 수 없는 일들 23.06.01 101 2 12쪽
31 천계_대부와 대자 23.05.31 100 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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