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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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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조회수 :
13,202
추천수 :
431
글자수 :
916,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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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6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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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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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자
11쪽

그믐_파라다이스 빌라

DUMMY

고속도로를 지나는 사이 날이 밝았다. 아파트와 빌딩이 가득한 도시로 들어섰을 때는 이른 아침이었다.


우리가 들어선 곳은 한적한 주택가였다. 올망졸망한 빌라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지새늬는 아담한 카페 옆에 차를 세웠다.

빌라 일 층이 카페였는데 ‘미루안’이라는 간판도 꺼져있고, 실내도 캄캄했다.


그녀는 빌라 뒷문을 들여다보더니 생긋 웃었다.

“집에 계시네요. 다행이에요.”


나도 그녀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빌라 뒤쪽으로 들어가는 쪽문이 보였다.


“여기서 기다리면 돼요.”

지새늬는 문 열림 버튼을 누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리라는 건가···?’

문을 열자 바나가 먼저 뛰어내렸다.


“왕왕, 좋은 기운이 넘쳐라.”

바나는 펄쩍펄쩍 뛰어 쪽문으로 들어갔다. 좁은 뒷마당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킁킁거렸다.


“여기 인간세 맞어라?”

신나게 뛰어다니던 바나가 갑자기 멈춰 섰다.


이 층 계단에서 커다란 삽살개가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등에 참새가 앉아있는데, 크기가 비둘기만했다.

자세히 보니 삽살개도 개가 아니었다.


‘뭔가 이상한데?’

주위에 지박령 영감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인간세 실증계도 맞고, 현재도 맞는데?

‘기운이 아주 강해. 인간세의 기운도, 천계의 기운도 아닌···. 뭐지?’


“전 가볼게요. 오늘 일정이 빠듯해서.”

지새늬는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이내 핸들을 돌렸다.


‘아니, 저, 저···.’

손을 뻗었지만, 그녀는 유유히 사라졌다.


멀어지는 자동차를 언제까지 바라볼 수도 없고. 나도 쪽문으로 들어갔다.


바나와 삽살개는 바닥에 주저앉아 앞발을 흔들며 서로 장난쳤다. 참새도 날개를 펄럭였다.

“왕, 묘수의 차원에서 왔다고라?”


‘넌 내 말을 알아듣는구나.’

‘짹, 이름이 뭐야?’

삽살개는 왈왈거리고, 참새는 짹짹였지만,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은 공명으로 말하고 있었다.


‘묘수의 차원? 그럼, 여기가 차원의 문?’

그렇다면···, 천사 가온이 사는 곳이잖아!


심장이 콩닥콩닥 빨리 뛰었다. 가슴이 부풀었다.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던가!

‘드디어 왔어! 파라다이스 빌라에!’


마음이 들떠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폴짝폴짝 뛰며 꽃수 열쇠에 입을 맞추었다.


아리 인형을 꺼내 들고 빌라 일 층부터 삼 층까지 올려다보았다.

‘가온은 어디 있지?’


“난 바나. 저기 우리 주인님이어라.”

바나가 소개하자 삽살개는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킁킁 냄새를 맡았다. 잠시 후, 등을 돌려 안쪽으로 걸어갔다.


일 층에는 작은 문이 두 개 있었다. 건물 구조를 보니 하나는 카페와 이어진 것이고, 안쪽 문은 그 옆의 다른 가게에 딸린 문이었다.


삽살개는 우르릉 목을 가다듬고 문을 두드렸다.

‘천사님, 손님이에요.’


낡은 문이 삐거덕 소리를 내며 열렸다. 한 여자가 빼꼼 문을 열었다.

부스스한 머리카락에 졸린 눈이지만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가온!”

나는 뛰어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갸름한 얼굴에 맑은 회색 눈동자, 날씬하고 단단한 몸, 어깨를 견주면 나와 같은 키까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어도 틀림없는 천사 가온이었다.


“사빈?”

가온의 눈이 두 배로 커졌다. 그녀도 나를 힘껏 끌어안았다.


“이게 얼마 만이야?”

가온은 내가 숨을 헥헥거리며 팔을 두드릴 때까지 손을 놓지 않았다.


‘우리도 가자!’

삽살개가 앞장섰다.


“왈, 주인님은···?”

‘천사님이 있는데 무슨 걱정?’

참새가 짹짹거렸다.


바나는 신이 나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참새는 훌쩍 날아 지붕 위로 사라졌다.


*


가온의 방은 별다른 가구 없이 깨끗했다. 침대 하나, 앉은뱅이 책상 하나, 작은 옷장 하나가 전부였다.


북방흑천 천사국만큼이나 단출했다. 그믐 외출 때면 빈집에서 머물 때가 많은데, 그런 빈집이나 다를 바 없었다.


“담아에게 들었어. 너 기다리다 눈이 빠지는 줄 알았어.”

“지난 그믐에 오려고 했는데, 현재의 덫에 걸리는 바람에···.”


가온의 얼굴을 보니 예전과는 뭔가 달라졌다.

천계의 기운을 감춰야 하기에 기운도 약하고 모습도 사람처럼 바뀌었지만, 그것 말고도 어딘가 달랐다.


예전에는 통통 튀는 장난꾸러기였다면, 우아하고 성숙해진 느낌이었다. 편안해 보이고···.


“어? 목에 흉터, 없어졌네?”

치유의 알에서도 사라지지 않던 상처였다. 인간세에서 사람을 돕다가 칼에 맞았다고 했는데.


“아, 이거···.”

가온은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빛의 사람을 찾았거든.”


얄리장터 열림날, 담아가 해준 말이 생각났다.

‘찾았지. 지금 같은 빌라에 살아. 하하, 가서 봐. 깜짝 놀랄걸?’


그날 담아는 빛의 사람에 대해 끝까지 알려주지 않았다.


나는 가온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그게 누구야?”


“사람은 아니었어. 인간세에 사는 건 맞지만.”

“누구냐니까? 응?”

가온은 장난치듯 눈을 빛냈다. 여전히 장난꾸러기 천사 가온이었다.


“하륜 선위.”

“엥?”


본 적은 없지만 이름은 많이 들었다. 그는 서방백제 영랑이 아끼는 선인이었다.

선위 동명의 제자로 일찌감치 선위의 자리에 올랐다.


동명님은 신령수에 깃들어 다음 세상을 준비한다고 했다. 담아의 말대로라면 그 결계가 인간세의 존재계일 텐데.


서방백천에서 존경과 사랑을 받던 선인이 차원의 문지기가 된다고 했을 때, 서방백제 영랑이 몹시 서운해했다.


내가 마고가 되기 전의 일이므로 자세히는 모르지만, 하륜은 대선사가 되고도 남을 선위라고 들었다.


다움성 연회에서 봤을 때도 영랑님은 무척 속상해했다.

‘스승이나 제자나 왜 대선사를 마다해? 왜 나를 돕지 않냐고!’


샛바람물을 술처럼 들이키며 찻잔을 탕 내려놓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가온은 나를 보고 눈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나도 차원의 문지기로 남기로 했어. 하륜은 카페를 하고, 나는 소품샵을 맡고.”

“보기 좋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살다니.”


“사빈, 너도 기회는 많아. 널 사모하는 차사가 있을지 모르잖아?”

가온이 반짝반짝 눈을 빛냈다.

“거기에 경쟁자도 나타났다고?”


나는 순간 움찔했다.

그녀와 다닌 경험에 의하면, 저런 반짝임은 조심해야 한다. 또 무슨 일을 꾸밀지 모르니까.


“차사? 에이, 그럴 리가.”

가온의 눈이 더 반짝이기 전에 다른 이야기를 꺼내야지.

언제 어느 방향으로 튈지 모른다. 엉뚱하기로는 그녀를 따른 천인이 없을 것이다.


“참, 담아는 전쟁터로 갔어. 만났어?”

“응. 네가 올 거라고 알려줬다니까.”

가온은 책상 위의 물병에서 물을 따라 주었다. 옅은 푸른 빛이 도는 맑은 물이었다.


한 모금 마시니 무거워진 몸에 생기가 돌았다.


인간세에 내려오면 탁한 공기에 눌려 기운이 빠지는데, 그 물을 마시니 핏줄을 따라 온몸에 맑은 기운이 돌았다.

이 정도 힘을 가진 물이라면···.


‘으음, 선계의 물이구나.’

가온을 위해 선위 하륜이 선계의 물을 떠다 주다니. 오호호.


가온은 사뭇 진지한 표정이었다. 담아를 생각하나?

“인간세에서는 전쟁이 끊이지 않아. 존재계가 없다면 어땠을지 상상도 못 할 정도야.”


상념에 빠져있던 가온이 고개를 들었다.

“천사장님은 잘 계시지?”

“아, 북방흑천님? 여전하시지. 부리부리한 눈에 검은 수염도, 불그스레한 얼굴도 그대로야.”


“하하, 사빈, 아직도 북방흑천님이라고 하는 거야? 너도 그냥 천사장님이라고 불러. 아버지가 대천사 반열님이니 그래도 되잖아?”


“그게 잘 안돼.”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아버지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아릿했다.

내게는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었고, 비바람을 막아주는 지붕이었다.


왜 아버지가 죽었는지 이유도 몰랐고,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았다. 그때 나는 열한 살의 어린 나이였으니까.

마고가 된 지금은 아버지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지만, 그리운 건 마찬가지였다.


“지난 장날에는 바론 대천사님과 선아 대천사님도 오셨어.”

“흐응, 바론님은 내가 없어서 좋아하시겠지? 골칫덩이가 없어졌다고.”

“아마도?”

내 대답에 가온은 손뼉을 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천사 가온이라고 하면 다섯 성천에서 모르는 이가 없으니까. 아! 그러고 보니.”

공간의 회오리에 갇혔을 때, 소용돌이 바람벽에서 가온을 보지 않았던가.


“뭘 하고 다니는 거야?”

“응? 무슨 말이야?”

“현재의 덫에서 봤어. 수많은 장면이 스쳐 갔지만, 넌 한눈에 알아봤지. 배낭을 메고 쓰레기를 뒤지던데?”


“헉!”

가온이 숨을 삼키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팔을 치며 소리 내어 웃었다.


“어머나, 뭘 그런 걸 보고 그래? 아하하.”

그녀의 웃음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무슨 사정이 있기에 말을 못 하지?


“에휴, 인간세에 살려니 어쩔 수 없어.”

가온은 한숨을 내쉬었다. 소매 끝으로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냈다.


“길 잃은 물건에게 주인을 찾아주는 거야. 마음을 잃은 사람에게는 필요한 물건을 찾아주고.”

“그래서 쓰레기를 뒤진다고?”


“어허! 좋게 말해야지. 거리를 헤매는 불쌍한 물건이야.”

가온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천사도 인간세에서 살려면 많이 힘들구나.’

측은해하는 눈빛을 읽었는지 가온의 눈꼬리가 아래로 축 처졌다.


“그것뿐이면 좋게? 차원의 문도 지켜야지, 일해서 먹고 살아야지, 세금도 내야지, 사람처럼 다녀야 하니 천력은 전혀 못 쓰지, 그믐의 손님도 찾아내서 소원을 들어줘야 한다고.”

“그런 일까지 해?”


아무리 천사라도 천계의 심부름이 아니면 천력을 갖지 못하니···.

천사들은 사람을 도와주려는 습성이 있어서 천력이 있으면 위험해진다.


차사나 위사, 능사는 인간세에 냉정한 편인데, 아무래도 천사와 선사는 인간세를 자주 다니다 보니 더 정이 가나 보다.


“그렇다니까! 게다가 차원의 문지기 하나가 요양을 떠나서 후계자도 찾아야 해. 어때? 내가 마고보다 일 많지?”

가온은 눈을 찡긋거리며 장난스레 내 볼을 잡아당겼다.


후계자···. 나도 후계자를 찾으러 왔는데.

이 부탁을 하러 왔다. 같이 다음 마고를 찾아보자고, 나는 곧 마음숲을 떠난다고.


“저기, 가온.”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거꾸로 내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아점 먹으러 가자. 카페에서 브런치도 팔거든.”


가온은 머리를 대충 묶고 얇은 겉옷을 걸쳤다.

“하륜 선위가 만든 요리를 먹을 기회야. 아주 놀랄걸? 너무 맛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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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그믐_짱짱 만화방 23.06.20 69 2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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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그믐_그믐밤의 모임 23.06.18 70 2 13쪽
55 그믐_가온의 손님이 되다 23.06.17 73 2 14쪽
» 그믐_파라다이스 빌라 23.06.16 80 2 11쪽
53 그믐_피천귀 사냥 23.06.15 83 2 13쪽
52 천계_다훤 아저씨 23.06.14 82 2 12쪽
51 천계_차미의 의심 23.06.13 87 2 13쪽
50 천계_예사달의 조언 23.06.12 88 2 13쪽
49 천계_귀물씨앗이 들어오다 23.06.11 88 2 12쪽
48 천계_또 다른 비밀 23.06.11 90 2 11쪽
47 천계_숨은 혼을 찾아서 23.06.10 90 2 11쪽
46 천계_새로운 동료 바나 23.06.09 92 2 13쪽
45 천계_한요재의 초대 23.06.08 91 2 12쪽
44 천계_마음숲 키움차사들 23.06.08 91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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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그믐_불천수 대나무숲 23.06.03 97 2 13쪽
36 그믐_현재의 겹 23.06.03 99 2 12쪽
35 그믐_그림의 주인 23.06.02 98 2 10쪽
34 그믐_동굴 속의 그림 23.06.02 99 2 12쪽
33 천계_얄리장터의 등불 23.06.01 101 2 13쪽
32 천계_알 수 없는 일들 23.06.01 101 2 12쪽
31 천계_대부와 대자 23.05.31 100 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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