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점
황실 승전연 다음날, 아발론 상회의 지부장 존 스미스를 만나기 위해 저택을 나서려던 베른하르트 백작은 마침 저택을 나서고 있던 프란츠를 발견하고선 미소를 지어 보였다.
" 어딜 그리 가려는 것이냐, 프란츠?"
" 아, 형님! 저기 그게... 잠시 만날 사람이 있어서요..."
그렇게 우물쭈물거리던 프란츠를 바라보며 베른하르트 백작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 설마 어제 만났다던 그 에리카란 아가씨를 만나러 나가는 길이더냐?"
" 앗... 그걸 어떻게..."
역시나 베른하르트 백작의 감시(?)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여긴 프란츠가 체념한 표정을 짓던 도중, 베른하르트 백작의 좌우에 기립한 12명의 기사들을 발견하고선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백작에게 물었다.
" 그런 형님께서는 어딜 가시는 길입니까? 그것도 이렇게 가문의 기사들을 대거 이끌고 말입니다..."
" 나 역시 만나봐야 할 사람이 있다. 그런데 꽤나 위험한 자라 할 수 있어 이처럼 만반의 준비를 해놓아야 안심이 되는구나."
" 아니, 대체 어떤 자를 만나시길래..."
프란츠는 완전무장한 기사들을 훑어보며 제국의 황도 쾨니히스베르크에서 기사들을 대동하고 만나야 할 정도로 위험스러운 존재가 실재하고 있는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하지만 저 무도한 암흑가의 폭력단마저도 기사 하나를 당해내지 못할 거라 생각하던 프란츠에게 베른하르트 백작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리며 입을 열어 말했다.
" 이 일은 알고 있는 사람이 적을수록 유익하다 할 수 있으니 그리 알려고 하지 말거라. 그리고..."
잠시 말문을 멈춘 베른하르트 백작이 프란츠를 유심히 지켜보더니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 혹시라도 내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아버님과 지크프리트를 부탁하도록 하마."
"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갑자기 이 무슨..."
" 혹시라도 벌어질 수 있는 예기치 못한 변수에 대비하라는 말이다. 세상엔 완벽한 인간이 없듯이, 나 역시 종종 실수를 저지르는 때가 있거든."
황실 안보수석 슈테판 하이드리히 남작의 부름을 받고 황궁 '쇤부른'을 방문하려던 비다르는 근위병들이 지키고 있던 황궁 출입문 앞에 서서 잠시 그 일대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마침 아마시아 대륙의 패권국이라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위엄 가득한 황궁의 전경은 비다르에게 색다른 감정을 선사해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마치 철의 장막과도 같은, 절대 정복될 것 같지 않은 황궁의 전경은 비다르의 정복욕을 자극하는 것이었고, 그 모습 하나하나를 절대 잊지 않겠다는 듯 뚫어지게 노려보던 비다르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채 드디어 정문 안으로 들어서기에 이르렀다.
마침 비다르의 신분을 확인한 근위병들이 정중하게 군례를 취하며 비다르를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새로 하사 받은 남작의 신분과 함께 군부의 장성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금빛 계급장과 금빛 망토는 금세 근위병들의 태도를 공손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이드리히 남작을 만나기 위해 황궁 안으로 들어선 비다르는 오늘 만나게 될 존재에 관해 생각을 해보기 시작했다. '이야기꾼' 기슬러의 설명대로라면 황제의 핵심 참모직을 수행 중인 그가 이렇게 비다르를 따로이 만나려는 이유는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고, 비다르 역시 자신에게 떨어질지도 모를 모종의 임무에 대해 생각하며 부디 하이드리히 남작과의 만남이 자신에게 유익한 시간이 되길 기대하기에 이르렀다.
" 어제 있었던 귀하의 작위 수여식은 참으로 인상적인 것이었소, 비다르 남작."
그렇게 비다르와 마주하자마자 이 첫마디를 꺼내 든 하이드리히 남작이 비다르의 무심해 보이는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물론 그 첫마디가 의례적인 인사치레로도 볼 수 있었지만, 어제 있었던 승전연에서 비다르가 보여주었던 의연하면서도 패기 넘치는 모습을 기억하고 있던 하이드리히 남작은 과연 그가 황실의 유용한 장기말이 될만한 존재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그 인물됨을 파악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비다르가 무심한 표정에 어울리는 무뚝뚝한 음성으로 입을 열어 대답했다.
" 저에게 있어선 최고의 영광이었던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혹여나 제가 실수라도 저지른 것은 아닌지..."
" 아, 별 걱정을 다 하는군. 어제 귀하의 행동거지는 완벽한 것이었소, 과연 제국의 장성다운 당당한 모습이라 할 수 있었지..."
하지만 하이드리히 남작은 나이도 어린 데다가 황궁 방문이 처음인 귀족 청년이 제국의 내노라하는 귀족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작위를 받고서도 조금도 주눅들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하며 뭔가 마음속에 불안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어제 이자가 보인 모습은 분명 풋내기의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황궁을 제 안방마냥 생각하는 듯한 모습이었지... 패기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건방지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자신의 계획을 위해서라도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비다르가 반드시 필요했던 하이드리히 남작이 곧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물었다.
" 내가 지금 이 자리에 귀하를 부른 까닭을 설명하기 전에... 혹시라도 작위를 수여받으면서 봉토를 하사 받지 못한 점에 대해 궁금하지는 않은지 귀하에게 한번 묻고 싶소이다, 비다르 남작."
" 궁금하긴 합니다만, 그것을 굳이 애써 알고 싶지는 않습니다, 남작님."
" 뜻밖이로군. 모름지기 작위를 받게 된다면 그에 합당한 영지를 받는 것이 정상적인 상황이라 할 수 있지 않겠소? 그런데 오히려 그런 비정상적인 상황이 벌어지게 된 까닭을 알고 싶지 않다고...?"
그렇게 하이드리히 남작이 비다르의 답변을 듣고 의아해했지만, 사실 비다르는 기슬러가 해준 이야기를 통해 자신에게 따로이 영지와 새로운 성씨가 하사되지 않은 이유를 대충이나마 짐작하고 있었다.
이제 곧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게 될 경우, 요른 폰 아렌달 백작을 제거하고서 '브렌즈달'을 차지해 영지로 삼으라는 말을 꺼내려하겠지...
그렇게 하이드리히 남작이 자신에게 부여할 임무와 그에 따른 보상이 무엇인지를 짐작하고 있던 비다르는 짐짓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시치미를 뚝 떼며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 영지에 대한 욕심보다는, 군부에서 제 경력을 쌓아 올리는 데에 더 관심이 많을 뿐입니다."
" 군인으로서의 경력이라... 귀하는 참으로 독특한 위인이로군, 비다르 남작."
이내 뜻 모를 미소를 지은 하이드리히 남작이 곧 벽면에 붙어있던 제국 전도(全圖)를 가리키며 비다르에게 말했다.
" 그럼 군인으로서의 경력을 중요시하는 귀하에게 한 가지 임무를 전할까 하오. 이것은 군부대신께서 황제 폐하의 재가를 받아 귀하에게 내린 임무이니만큼 한 치의 소홀함도 없이 확실하게 수행해야 할 것이오."
"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곧 고개를 끄떡인 하이드리히 남작이 제국 북부, 정확히 말하자면 티롤-칼마르와 에버스발데의 사정에 대해 비다르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티롤-칼마르의 유력 귀족이자 브렌즈달의 대영주인 요른 폰 아렌달 백작의 불순한 움직임에서부터 시작해 프레데리카 황녀의 통제에서 벗어나려는 에버스발데의 토착 귀족들 문제까지, 그렇게 하나도 빠짐없이 북부의 사정을 설명하던 하이드리히 남작이 이내 비다르에게 그 임무를 하달하기 시작했다.
" 귀하는 곧 7군단장의 보직에 임명될 것이오. 그리고 알렌슈타인의 브리센에 주둔하고 있는 7군단 병력 전체를 에버스발데의 주도(州都) 스카스가드로 이동시키는 것을 기점으로 귀하의 임무가 시작될 터이오."
그렇게 임무를 주지시키면서도 하이드리히 남작은 비다르의 표정 하나하나를 빠짐없이 관찰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던 비다르에게서 그 어떤 특이점도 발견할 수 없었던 하이드리히 남작이 살짝 한숨을 내쉬며 설명을 계속 이어 나갔다.
" 에버스발데에 주둔하게 될 7군단을 통해 그 지역 일대의 상황을 진정시키도록 하시오. 비록 프레데리카 황녀의 통제에 반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는 하지만 에버스발데의 귀족들 역시 우리 제국의 정통 귀족들이니만큼 되도록이면 무력을 쓰지 않는 쪽으로 해결되어야 할 것이오."
" 단순히 겁을 주는 선에서 해결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의외로 나이도 적고 경험도 부족하리라 여겨진 비다르가 재빨리 그 말하고자 하는 뜻을 알아채자, 하이드리히 남작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 그렇소. 다행히도 북부의 에버스발데는 제국의 다른 권역들보다도 낙후된 지역이니만큼, 귀족들의 힘을 다 합친다 해도 1개 군단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은 갖고 있지를 않소. 그러니 그 일은 비다르 남작 귀하의 재량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하고... 문제는 바로 귀하의 고향인 티롤-칼마르라 할 수 있는데 말이오..."
그렇게 잠시 말문을 멈춘 하이드리히 남작의 눈빛이 더욱 깊어지더니 비다르를 뚫어지도록 응시하기 시작했다. 마치 과거에 반란을 일으킨 전적이 있던 티롤-칼마르의 귀족들을 다시 제압하는 일에 티롤-칼마르 출신의 귀족 군인을 등용하여 그 일을 맡기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인가를 따져보는 듯 했다.
하지만 그런 하이드리히 남작의 생각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비다르가 지도에 나와있는 브렌즈달을 유심히 살펴보며 자신의 생각을 밝히기 시작했다.
" 티롤-칼마르의 상황을 진정시키려면 진짜 무력을 써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물론 브렌즈달의 아렌달 백작을 없애버리는 것으로 마무리가 된다면 상황을 조기에 진정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 나는 아직 아렌달 백작을 없애버리라는 말은 꺼내지도 않았소, 비다르 남작."
" 과거의 교훈을 망각하는 것도 모자라 경거망동하여 황제 폐하께 대항하려는 자들은 그 뿌리부터 없애버려야 합니다. 다행히 아직 황제 폐하께 충성하는 티롤-칼마르의 귀족들도 있을 수 있으니 그들을 잘 가려내어 솎아내는 것도 중요하다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비다르는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황제의 사냥개 역할에 자신이 적임자라는 것을 각인시킬 목적으로 황제를 향한 충성심을 드러내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전히 표정의 변화가 없던 비다르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며 하이드리히 남작은 그런 비다르의 태도에서 살짝 의심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토록 나이가 젊은데도 감정을 보이지 않다니... 혹시 자신을 본심을 숨기려는 것인가...
" 그들을 잘 가려내어 솎아내야 한다라... 귀하의 본가인 트롬스 가문이 걱정되기라도 하는 모양이구려, 비다르 남작."
어쩌면 트롬스 가문 역시 반역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꺼내며 하이드리히 남작이 비다르를 더욱 유심히 살피자, 이번엔 오히려 비다르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어 대답했다.
" 이번 작위 수여식에서 제게 새로운 성씨와 영지가 주어지지 않은 것을 봤을 때... 결국엔 이 모든 상황을 가정하여 내려진 결정 아니겠습니까?"
만약 트롬스 가문이 반역을 저지른다 해도 이를 제압하고 자신이 그 성씨와 영지를 이어받으면 그만이라는 비다르의 암시에 하이드리히 남작이 기어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하하, 정말 무서운 생각이구려, 비다르 남작. 혹여나 그런 일이 생긴다 해도 정말 그런 식으로 일을 해결할 생각이시오?"
" 사관학교 시절부터 황제 폐하를 위해 복무하며 제국의 적을 무찌르자는 일념 하나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런 제게 그깟 일이 뭐라고 꺼려지겠습니까?"
진정 황제 폐하를 향한 충성심인지, 아니면 그것을 가장한 음흉한 수작인 것인지... 이자가 과연 사냥개인지 늑대인지는 시간이 지나봐야 알 수 있는 일이란 말인가...
노회한 하이드리히 남작은 그런 비다르를 바라보며 뭔가 불안한 감정이 들긴 했지만, 이제 와서 이번 일을 뒤로 물릴 수 없다는 것은 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계획이 성사되기에 앞서 북부 지역의 안정화가 시급했기 때문에, 하이드리히 남작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울리고 있던 위험 신호를 억누르며 비다르에게 임무의 마지막 부분을 전하려고 했다.
" 그렇다면 다행이오, 비다르 남작. 그럼 티롤-칼마르에서의 임무를 귀하에게 전할까 하오..."
마침 하이드리히 남작의 노회한 눈빛을 마주한 비다르의 눈빛이 곧 칠흑 같은 어둠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여전히 부족하긴 하지만 드디어 '기회'를 갖게 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 요른 폰 아렌달 백작을 제압하시오. 그리고 티롤-칼마르를 안정시키고 황제 폐하께 반하는 무리들을 완벽하게 섬멸시키도록 하시오. 그 임무를 성공시킨다면 아렌달 백작의 영지인 '브렌즈달'의 주인은 바로 비다르 남작 귀하가 될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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