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전(4)
벨리유 마을을 점령한 홀슈타인 기병연대와 남부 연합 기병연대가 마을 주민들의 이탈을 허용하는 한편 마을 내의 가용 물자들을 징발하여 다음 전투를 대비하고 있었다.
그렇게 마을 주민들이 서둘러 짐을 꾸리고 마을을 떠나 서쪽으로 피난을 가게 되자,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던 라예르베크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곁에 있던 프란츠와 아데마이트 남작에게 질문을 건네기에 이르렀다.
" 어째서 저들이 마을을 떠나도록 허용하는 겁니까? 저자들이 후방으로 떠나 이 사실을 적들에게 알린다면, 우리 위치가 고스란히 발각이 되고 말 텐데요..."
" 저들 같은 비전투원을 데리고 있어 봤자 하등 쓸모가 없기 때문이지. 게다가 저들을 데리고 있으려면 감시하고 통제할 병력을 따로 떼어내야 하는데, 우리에겐 그럴 만한 병력의 여유가 없다는 것이 문제라고 할 수 있겠네. 그리고..."
아데마이트 남작이 잠시 말문을 멈추더니 두 눈을 빛내며 곁에 있던 프란츠에게 질문을 던졌다.
" 우리 위치가 발각되는 것을 무릅쓰고 저들을 내보낸 이유에 대해 프란츠 남작은 그 연유를 알고 계시오?"
갑작스러운 아데마이트 남작의 질문에 프란츠가 잠시 당혹스러워하더니 이내 목소리를 가다듬고 대답을 하기에 이르렀다.
" 그것이... 우리 위치가 이대로 발각된다면... 적들이 죄다 이곳으로 몰려올 게 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병대가 적의 영토 가장 깊숙이 들어와 있기 때문에, 적들의 시선이 가장 먼저 우리에게로 쏠릴 수밖에 없다는 점을 노려 저들을 풀어준 것입니다."
" 아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적들이 죄다 이곳으로 몰려오면 우린 어쩌라고...?"
라예르베크가 식겁한 표정으로 프란츠와 아데마이트 남작에게 물어오자, 아데마이트 남작이 피식 웃으며 추가로 설명을 해주었다.
" 프란츠 남작도 잘 아는 것을 라예르베크 경 그대는 아직도 모르는 것인가. 우리 임무는 이곳에서 적의 지원군을 기다리며 최대한 물고 늘어지는 것이라네. 즉, 우리 본대에 반격을 가하기 위해 파견된 적의 병력을 우리가 이곳에서 돈좌시킨다면 우리 본대에 가해지는 압력도 느슨해질 것이고, 결국 우리 제국군의 진격 속도도 더욱 빨라질 것이 뻔하다는 이야기라 할 수 있겠네."
" 그럼... 일부러 마을 주민들을 저렇게 풀어준다는 이야기입니까? 우리 위치를 일부러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요...?"
라예르베크가 아직도 뭔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짓자, 아데마이트 남작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해 주었다.
" 우리가 적의 대규모 지원군을 막아낼 수 있느냐의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이쪽으로 적들이 많이 몰려오면 몰려올수록 우리 의도는 성공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네. 우리가 맡은 역할은 일종의 '미끼'이자, 적의 진격을 물고 늘어질 '진창'이나 다름없으니 말이야."
그런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프란츠는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국의 주민이라 해도 저들 역시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소중한 생명들이었고, 행여나 전투에 휘말리게 되어 불행한 일을 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프란츠의 뇌리 속엔 어느샌가 적의 가슴을 향해 내지르던 자신을 기병창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도 그만의 삶이 있었고, 그를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었겠지...
극단의 배우였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프란츠에겐 감성적인 면이 있었다. 그리고 첫 전투의 여파는 그런 프란츠의 감성적인 부분을 건드리며 전쟁이라는 상황을 회의적인 시선으로 돌아보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전쟁은 모험이 아니라 '비극'이라는 사실을 이내 깨달았던 것이다.
그렇게 다시 손이 떨리는 것을 느낀 프란츠가 주먹을 꽉 쥐며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를 썼다. 하지만 그 마음속의 동요를 눈치챘는지, 아데마이트 남작이 프란츠의 어깨를 살짝 토닥여주며 입을 열어 말했다.
" 어제 프란츠 남작의 전투는 제법 훌륭한 것이었소. 하지만 앞으로의 전투는 좀 더 거칠고 험악해질 것이 분명하니, 다음 전투에서도 반드시 어제처럼 승리를 쟁취해야만 하오. 그래야 그대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 휘하에 있는 기병대원들이 전쟁에서 살아남아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갈 가능성도 높아지기 때문이지..."
지금은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전투에서의 승리와 부하들의 무사귀환만을 생각해야 한다...
새삼스레 그것을 깨달은 프란츠가 고마움이 담긴 눈빛으로 아데마이트 남작에게 고개를 끄떡여 주었다.
" 정찰기병으로부터 긴급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적의 기병대로 보이는 병력이 이곳으로 접근해 오고 있다는 연락입니다!"
" 적의 숫자는?"
"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대대 병력을 상회하는 병력이라 합니다, 자작님!"
부관 린트너가 건넨 보고에 헬무트 폰 자이들리츠 자작이 냉큼 장비를 챙기고선 휘하 제장들과 함께 지휘 막사 밖으로 향했다. 마침 그를 기다리고 있던 전령에게 자이들리츠 자작이 투구를 눌러쓰며 짤막한 지시를 내리기에 이르렀다.
" 괴를리츠 자작에게 전언을 전하게! 우리가 좌측에서, 그들이 우측에서 협공하는 식으로 전투를 개시하자고 내 뜻을 전하도록!"
곧 홀슈타인 기병대원들이 각자 장비를 챙기며 전투 준비에 나서기 시작했다. 홀슈타인 기병대의 좌측면을 담당하던 프란츠의 3대대 역시 전투 준비에 나선 가운데, 프란츠가 한결 홀가분한 마음으로 지클론의 말안장 위에 올라탔다.
" 적의 병력은 대략 5백에서 6백여 명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자이들리츠 자작님께서는 단 한 번의 돌격으로 적을 쪼갠 뒤, 분리된 적들을 각개격파해 섬멸하기를 원하십니다!"
마침 라예르베크가 그답지 않게 프란츠에게 존대를 하며 묵직한 기병창을 프란츠에게 전해주었다. 분명 첫 전투 이후 프란츠를 지휘관으로 인정하게 되었음이 분명한 라예르베크를 향해 프란츠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떡여 주었다.
곧 모두가 분주하게 움직인 끝에 전투 준비가 완료되자, 프란츠가 살짝 한숨을 내뱉으며 멀찍이 위치해 있던 1대대 쪽을 바라봤다. 1대대는 자이들리츠 자작과 그의 아들인 프리츠 폰 자이들리츠 경이 직접 지휘하던, 홀슈타인 기병연대의 본대나 다름없던 병력이었다.
곧 로트링겐 공작령의 깃발을 든 1대대의 기수가 붉은 깃발을 흔들며 출동 명령을 알리자, 프란츠가 수신호로 3대대 기병대원들의 진격을 명하기에 이르렀다.
벨지크 왕국의 기병대를 이끌던 루아 드 보두앵 남작은 리에주 평원 부근에 영지를 갖고 있던 일개 봉건영주라 할 수 있었다. 물론 그는 이 한적한 리에주 평원의 시골 영주에 불과한 존재였지만, 지금 같은 비상시엔 이처럼 인근의 영지들로부터 기병들을 인수받아 하나의 기병대를 편제하고 통솔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존재이기도 했다.
그렇게 500여 명이 살짝 넘는 기병대와 기사들을 대동한 보두앵 남작은 오늘 아침 전령을 통해 이곳 리에주 평원에 제국의 기병대가 침투해왔다는 소식을 듣고선 이렇게 기병대를 소집해 리에주 평원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인근 영지군에서 차출한 기사와 기병들로 편제된 그의 기병대는 사실 그 전력이 의심스러운 2선급 부대로 평가받고 있었기에, 보두앵 남작은 전방의 왈롱 강 전선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이곳 리에주 평원까지 진출한 제국의 기병대를 상대해야 한다는 사실에 내심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대체 저들은 무슨 수로 이곳까지 단숨에 달려온 것인가... 게다가 아직 왈롱 강 전선이 확실하게 무너진 상황도 아닌데...
마침 이곳까지 오다가 마주친 벨리유 마을의 피난민들을 통해 정체불명의 기병대 병력에 대한 정보를 전해 들은 보두앵 남작은 적에 대한 두려움 보다도 자신이 지휘하는 병력에 대한 의구심이 들어 한참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상 고즈넉한 시골 영지의 유지들이라 할 수 있는 기사들이 과연 그 전투력을 제대로 발휘해 줄 수 있을 것인지, 그리고 기병이 아닌 말 탄 '보병'이라 할 수 있는 그의 병사들은 과연 적의 정예 기병들을 제대로 상대할 수 있을 것인지, 적의 병력은 대체 얼마나 되는 것인지...
그렇게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했던 보두앵 남작은 뜻하지 않게 중대한 실수를 저지르고야 말았다. 적과의 충돌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제대로 된 척후 활동을 지시하지 않아 눈뜬장님 신세로 이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부주의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그와 그의 기병대가 감당해야 하는 것이었다.
" 남작님, 저기 좌측을 좀 봐주십시오!"
마침 보두앵 남작의 기사가 황급한 목소리로 좌측 측면 전방을 가리키자 남작이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침 그쪽 방향에서 누런 흙먼지를 풀풀 피우며 달려오던 대규모 기병들이 지평선을 가득 메우며 이쪽으로 접근해오고 있었다.
" 저... 저것은..."
한눈에 봐도 자신들보다 훨씬 많은 병력으로 보였기에 보두앵 남작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 깃발이 보이는가? 우리 왕국군인지 제국군인지 식별이 가능하냔 말이다!"
" 우리 쪽으로 돌격대형을 펼치며 달려오고 있습니다! 제국군임이 분명합니다, 남작님!"
기사의 외침에 보두앵 남작이 이를 악물며 휘하의 기병대원들에게 큰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 전원 전투 준비! 돌격 대형으로 적의 공격에 맞서야 한다! "
제자리에 선 기병들은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법인지라, 역시 그 점을 잘 알고 있던 보두앵 남작이 기병대원들에게 횡대 대형으로 갖추어 돌격을 개시하도록 명했다.
마침 그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던 기병대는 남부 연합 기병연대 1200여 명의 기병들이었다. 괴를리츠 자작의 지휘 하에 3열 횡대 대형으로 돌격을 해오던 그들은 이내 자신들을 맞상대하려던 보두앵 남작의 기병들과 충돌하며 그 대형을 돌파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크아아악!
제국의 기병대원이 정확히 내지른 기병창에 벨지크 왕국의 기사가 그 목을 관통당해 말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 충격으로 잠시 몸을 기우뚱거린 기병대원은 그 후미의 왕국군 기병을 발견하고선 다시 한번 더 기병창을 찔러 넣었다. 정확하면서도 묵직한 타격으로 인해 왕국군 기병 역시 몸을 관통당해 말에서 튕겨져 나갔다.
점차 전투의 양상은 남부 연합 기병연대의 무자비한 돌파로 인해 보두앵 남작의 기병대가 분해되다시피 한 결과를 낳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비극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용케 살아남은 보두앵 남작과 절반 정도 살아남은 벨지크 왕국 기병대를 향해 이번엔 우측 측면에서 달려온 홀슈타인 기병연대 병력이 기다렸다는 듯 일제히 돌격해 들어왔다.
안타깝게도 일제 돌격 대형으로 전진하려다 오히려 돌파당해 그 추진력을 잃어버린 보두앵 남작의 기병대는 홀슈타인 기병연대의 시간차 돌격에 갈가리 찢기며 흩어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미 전투의지를 상실해 뿔뿔이 흩어진 벨지크 왕국의 기병들을 제국의 기병들이 제각기 추격해 사냥에 나서며 그렇게 전투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벨지크 왕국군 기병대를 지휘하던 보두앵 남작 역시 어느 이름 모를 기병이 휘두른 검에 치명상을 입어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몸이 뒤틀린 채 벌벌 떨며 신음을 내뱉던 그는 자신의 최후를 짐작하고선 자신의 처지를 저주하려던 찰나, 마침 그 위를 덮친 제국군 기병대 군마의 말발굽에 그만 피곤죽이 되어 전사하고 말았다.
전투가 너무 쉬웠기 때문일까. 서전을 손쉬운 승리로 장식했다는 사실에 기분이 고양되었는지, 브라운슈타인 기병대를 지휘하던 피르몬트 라이바흐 폰 루돌슈타트 남작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을 몰아 오스발트 남작의 곁에 다가왔다.
" 전투가 매번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면 그다지 걱정할 일도 없을 것 같소이다, 하하!"
기고만장한 피르몬트 남작을 힐끗 바라본 오스발트 빌헬름 폰 크로센 남작이 살짝 한숨을 내쉬며 나지막이 입을 열어 말했다.
" 이건 전투랄 것도 없소이다, 피르몬트 남작. 고작 수백여 명의 기병대를 무찔렀다 해서 우리 전투가 끝난 것은 아니란 말이오."
" 흥! 그대는 너무 걱정만 태산인 것 같구려! 당연히 첫 전투의 승리는 길한 징조 아니겠소!"
" 이곳 리에주 평원의 서쪽 끝에 위치한 '니벨르'란 곳에 벨지크 왕국의 중앙군 5만여 명이 주둔하고 있소. 그대는 그 병력이 대체 어느 쪽으로 향하리라 생각하시오, 피르몬트 남작?"
오스발트 남작이 살기를 띤 눈빛으로 미소 짓자 피르몬트 남작의 얼굴이 금세 시퍼렇게 질려버렸다. 그리고 이내 시선을 돌려 리에주 평원 서쪽 끝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키던 피르몬트 남작이었다.
마침 벨지크 왕국군 병사들의 처참한 주검으로 가득한 이 대지 위의 지평선 너머로, 흉한 기운의 까마귀들이 울음소리를 내며 허공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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