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즈쿠르트 초원(3)
다시 길을 떠난 자이들리츠 자작 일행은 마침내 보즈쿠르트 초원에 위치한 교역도시 '에프탈'에 다다를 수 있었다.
초원 위의 도시 '에프탈'은 교역도시라는 이름이 무색하리 만큼 유목민들이 '유르트'라 부르는 허름한 천막과 간이식 건물 수십여 채만이 들어서있는, 사실상 도시라고 불리기에는 상당히 손색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튜튼 제국과 보즈쿠르트 유목민들의 공식적인 무역은 오직 이곳, 교역도시 에프탈을 통해서만 가능했기 때문에 이곳의 중요성은 상당하다 할 수 있었고, 그런 이유로 인해 이곳 에프탈에는 모룽겐에 배치된 제1기병군단 소속 1개 기병대대가 순환 배치되어 상시 주둔 중에 있었다. 어찌 보면 도시의 규모보다도 제국군의 주둔지 규모가 더 크다고 할 수 있었다.
어쨌든 저 멀리 초원 너머, 교역도시 에프탈의 모습이 점점 가까워지자 자이들리츠 자작 일행은 한시름 놓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더 이상 야영 생활을 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태어나고 나서 처음 겪어보는 야영 생활로 인해 상당히 지쳐있던 프란츠는 지붕과 외벽이 있는 실내 생활이 간절하던 참이었다.
그렇게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교역도시 에프탈로 인해 모두의 기분이 한껏 고양된 가운데, 저 멀리 에프탈을 지긋이 응시하던 자이들리츠 자작이 옆에서 나란히 말을 타고 가던 프란츠에게 갑작스레 질문을 던졌다.
" 프란츠 경은 혹시 이번에 만나게 될 토비아스 오펠만 경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으시오...? "
자이들리츠 자작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프란츠가 기억을 더듬어 베른하르트 백작이 설명해준 간단한 정보를 기억해내 대답했다.
" 중앙정보국 부국장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과... 웬만한 귀족 정도는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게 할 수 있는 권력을 갖고 있다는 것 정도요... 혹시 제가 따로 알아둬야 할 주의 사항이라도 있나요, 자작님? "
순간 자이들리츠 자작은 이번에 만나야 할 문제의 인물에 대해 프란츠에게 어떻게 설명을 해줘야 할지 잠시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작은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소년이 제국 정계의 숨은 실력자에 대한 이야기를 이해하기엔 무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자작은 이내 소년의 이복형제인 베른하르트 백작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백작은 평소에도 자신의 이복동생을 알뜰히 챙겨 왔고, 또한 그런 프란츠의 잠재력을 알아봤기 때문인지 자이들리츠 자작에게 소년을 부탁하기까지 했다.
자이들리츠 자작은 평소에도 베른하르트 백작의 능력을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백작의 안목을 믿어보기로 작정했다. 자작은 소년을 과소평가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고 제대로 설명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 토비아스 오펠만 경은 프란츠 경도 알고 있다시피 중앙정보국 부국장으로 있는 인물이오. 하지만 중앙정보국의 실질적인 수장이나 다름없는 인물이기도 하지, 지금 중앙정보국의 국장으로 있는 인물은 허울뿐인 존재에 불과하거든. 아무튼 토비아스 오펠만 경이 우리에게 왜 중요하냐면... 그가 황제 폐하의 권신이자 황실 안보수석인 슈테판 하이드리히 남작의 오른팔과도 같은 인물이기 때문이오..."
순간 프란츠는 예전에 베른하르트 백작이 해준 이야기가 다시금 머릿속에 떠올랐다. 황실 안보수석인 슈테판 하이드리히 남작은 그 출중한 능력을 인정받아 평민 출신으로는 드물게 관직과 작위까지 받은 입지전적인 인물이었기에, 황실의 주요 인물 중 가장 주의해야 할 존재라는 것이 베른하르트 백작의 설명이었다.
슈테판 하이드리히 남작은 황제에게 직접 조언을 건넬 정도로 황제의 현자(賢者) 역할을 하는, 황실의 두뇌와도 같은 존재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황제와 대립하는 남부의 공작들에겐 눈엣가시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그런 사람의 오른팔 같은 존재를 만나야 하는 것이기에 프란츠의 가슴이 두근거린 것은 당연했다.
" 오펠만 경은 아직 젊지만 장차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이면 슈테판 하이드리히 남작의 뒤를 이어 황실의 두뇌가 될 사내라오. 우리는 그런 그를 통해 황실과의 연계를 이어나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것이 이번 임무의 핵심이라 할 수 있소이다. 사실 이번 협상의 책임자로 검이나 휘두를 줄 아는 나보다는 영지의 수석 행정관인 알트하우젠 경이 더욱 적합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오만, 베른하르트 백작께서는 이상하게도 나를 이번 협상의 책임자로 선택하셨소. 아직까지도 내 그 연유를 알 길이 없어 의아하긴 하지만, 그래도 내게 주어진 임무이니만큼 확실하게 완수를 해야겠지... "
수석 행정관인 알트하우젠 경이라면 중앙정부에서 은퇴한 행정 관료 출신으로 로트링겐 공작의 초빙을 받아들여 홀슈타인 영지의 수석 행정관으로 부임한 인물이었다. 프란츠는 황실과 로트링겐 공작가 사이의 연계가 바로 이 알트하우젠과 토비아스 오펠만이라는 존재로 인해 가능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이내 눈치챌 수 있었다.
" 그럼... 알트하우젠 경이 그저 단순히 우리 공작령의 행정 업무를 보기 위해서 초빙된 것만은 아니군요...! "
" 그렇소이다. 결국 그런 목적으로 알트하우젠 경을 초빙한 것은 정확히는 요제프 에른스트 폰 로트링겐 공작 전하의 뜻이 아니라 베른하르트 백작의 뜻이었소. 백작은 황실과 남부의 공작들 사이에서 어느 한쪽의 편을 들기보다는, 그 사이에서 얻어낼 수 있는 이득을 최대한 많이 얻어내야 한다는 생각 같소이다마는... 솔직히 베른하르트 백작의 심계(心計)가 어디까지 내다보고 있는 것인지는 나조차도 헤아릴 수 없는 것이라오... "
애초에 오펠만 경을 상대할 책임자는 알트하우젠 경이었지만, 베른하르트 백작은 이렇게 알트하우젠 경을 대신해서 자이들리츠 자작을 파견하게 되었다.
이렇게 체스판에서 체스말이 바뀌게 된다면, 계산되고 예측된 상황 역시 변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쩌면 베른하르트 백작 또한 이런 상황을 기대하고 천생 기사이자 군인인 자이들리츠 자작을 이번 협상에 파견한 것이 아닐까라는 게 프란츠의 생각이었다.
베른하르트 백작은 최고의 전략 전술이란 변수를 최소화하는 것이라고 프란츠에게 종종 이야기해 주었다. 그런 백작이 이번엔 스스로 변수를 만들어내어 상대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프란츠의 가슴이 더욱더 세차게 뛰었다.
교역도시 에프탈에서 곧 한 필의 말을 탄 기수가 달려나와 자이들리츠 자작 일행을 맞이해 주었다. 스스로를 제국군 제1기병군단 소속 5기병대대의 기병장교라 밝힌 그는 자이들리츠 자작 일행을 환영하며 교역도시 에프탈로 안내를 하기 시작했다.
살짝 긴장을 내려놓은 자이들리츠 자작이 그 기병장교에게 묵직한 목소리로 질문을 건넸다.
" 중앙 정부에서 동방으로 파견한 사절단은 이미 도착을 했는가? "
자이들리츠 자작이 질문한 '사절단'이란, 임무차 아르사케스 제국으로 향하던 중앙정보국 부국장 토비아스 오펠만을 뜻했다.
" 사절단은 저녁 이전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사절단이 도착하게 되면 저희가 자작님께 따로 연락을 드릴 테니, 여러분께서는 미리 마련된 숙소에서 여독(旅毒)을 푸시고 휴식을 취하시기만 하면 됩니다. 자, 저를 따라오시지요! "
기병장교가 우아한 몸짓으로 말을 몰아 일행을 이끌고 교역도시 에프탈로 들어섰다.
에프탈로 들어선 일행은 기병장교가 이끄는 대로 이동하면서도 도시 곳곳을 살펴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도시 곳곳엔 제국의 교역 상인들과 그들을 호위하는 용병들, 그리고 말을 탄 채 이동 중인 유목민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물론 도시의 주요 요충지에는 제국의 군단병들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삼엄한 경비를 서면서 혹시라도 생길 사고나 불상사에 대비하고 있었다.
뭔가 도시의 삭막한 분위기가 프란츠의 마음마저 가라앉게 만들던 참에, 허름한 건물들 사이의 골목길 주변에서 한 무리의 유목민 아이들이 뛰어다니며 노는 모습이 프란츠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렇게 줄줄이 뛰어다니며 놀던 아이들이 이내 골목길 안쪽으로 사라지자, 그 모습을 바라보던 프란츠의 입가에도 아련한 미소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프란츠가 지금의 로트링겐 성씨를 물려받기 직전까지, 프란츠에게도 저처럼 마을 아이들과 뛰놀며 놀던 소중한 추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 이봐, 저들을 보라구... "
바로 그때 옆에 있던 라예르베크가 프란츠에게 몸을 기울여 속삭이며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말을 탄 한 무리의 유목민들이 저편에서부터 자이들리츠 자작 일행 쪽으로 마주 다가오고 있었다.
" 유목민 전사들이다. "
앞서 가고 있던 자이들리츠 자작의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날이 휘어진 곡도(曲刀)를 허리에 차고 등 뒤의 화살통에 화살을 잔뜩 꽂은 채 당당한 자세로 말을 탄 유목민 전사들이 곧 자이들리츠 자작 일행을 스쳐 지나갔다.
프란츠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들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는데, 그런 소년을 뒤돌아보며 자이들리츠 자작이 조언을 해주었다.
" 친제국 성향의 유목민 부족들이 제국 기병대대의 보조 전력으로 활용되고 있소이다, 프란츠 경! 경기병 전력으로는 무척이나 훌륭한 자원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전사들이지. "
자이들리츠 자작의 이야기에 라예르베크가 평소의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 그래봤자 유목민들이잖아요! 우리 제국의 중장기병에겐 상대가 안될 거라구요. "
라예르베크의 자신감 넘치는 소리에 자이들리츠 자작이 두 눈을 부라리며 자신의 손자를 힐책했다.
" 한심한 놈! 네놈처럼 방심하고 상대를 과소평가했다간 전장에 나가는 족족 패하고 말 것이다! 저 유목민 전사들의 진정한 무서움을 알려면 전장터에서 직접 맞상대해봐야 알 수 있는 것을 네놈이 뭘 안다고 그리 지껄여! "
자이들리츠 자작의 거친 꾸짖음에 라예르베크가 속으로 투덜거리며 못마땅해했지만 딱히 뭐라 대꾸하지는 못했다. 사실 라예르베크도 전투에 대해 잘 모르기는 프란츠와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런 라예르베크와 프란츠를 바라보며 자이들리츠 자작이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 초원의 사내들은 어린 시절부터 말을 타고 생활하기 때문에 마상 기술이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빼어난 이들이오! 게다가 이 초원에서 살아가려면 사냥 기술은 필수이기 때문에, 저들의 마상 궁술은 쉽게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니지! 만약 저들이 빠르게 접근해 활을 쏘며 치고 빠지는 전술을 구사한다면, 제대로 된 대응 전술을 갖추지 못한 군대는 필시 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오! "
자이들리츠 자작의 무시무시한 설명에 프란츠와 라예르베크는 유목민 전사들을 새삼스레 다시 보게 되었다. 하지만 허름한 가죽 갑옷과 너저분한 장비들을 주렁주렁 매단 채 말을 타고 가던 유목민들의 모습이 성에 차지 않았는지, 라예르베크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중얼거렸다.
" 아무리 봐도 안 세보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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