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전(6)
샤또 빌레에 주둔 중이던 브루기아 공국군의 수장 굴베네르 자작이 연합 사령부의 작전 명령을 받자마자 곧장 만인대의 출동을 지시하기에 이르렀다.
그가 맡은 임무는 남부 지방 뵈르네를 돌파해 들어온 제국군 부대의 측면을 공격해 제국의 침공군을 돈좌시키는 것이었는데, 평소의 한가한 임무에서 벗어나 이처럼 중차대한 역할을 떠맡게 되자 굴베네르 자작은 잔뜩 신이 난 모습으로 부대를 선두 지휘하게 되었다.
" 이 지긋지긋한 곳을 떠나 드디어 제대로 된 역할을 맡게 되는군, 하하!"
부대의 선두자리에서 말을 몰아 길을 나선 굴베네르 자작이 잔뜩 흥분한 기색으로 입을 열자, 그 곁에 있던 지휘관 오세르 남작이 말위에서 지도를 훑어보며 입을 열어 말했다.
" 사령부의 전령이 전해준 정보에 의하면, 제국군의 공세가 총 3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합니다. 북부의 메헬렌 지방과 중앙의 리에주 평원, 그리고 바로 이곳 남부 뵈르네 지방에서 말입니다. 이것은 마치..."
벨지크 왕국 전체를 포위하려는 전술 같다는 이야기를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오세르 남작에게 굴베네르 자작이 코웃음을 치며 제국군을 성토하고 나섰다.
" 미친 야만인 놈들!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공세의 갈래를 세 방향으로 나눠 진행할 생각을 하다니!"
"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겠지요. 아무튼 연합 사령부에서 보내온 전언을 살펴보게 되면, 이미 왈롱 강 유역의 아군들은 대부분 분쇄되었음이 분명합니다. 아무래도 너무 갑작스럽게 기습을 당한 것이 분명한 일인지라..."
" 크흠. 보나 마나 앙투안 대공 전하께서 부재중인 이 때를 노리고 쳐들어온 것이 아니겠나! 비겁한 놈들, 내 이번에 그놈들에게 제대로 본때를 보여줄 생각이네, 오세르 남작!"
유명한 기사 가문 출신인 굴베네르 자작이 너무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이자, 오세르 남작이 불안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어 말했다.
" 그만큼 저쪽에서 준비를 많이 했다는 것이겠지요. 그나저나 걱정입니다, 적의 측면을 쳐서 그 공세를 꺾어야만 하는데 우린 아직 적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갖고 있지 못하기에..."
" 일단 연합 사령부에서 내려온 명령문에 의하면 '알루에뜨 시(市)' 방향으로 전진하라 나와 있으니 그곳은 아직 무사한 것이 분명하네. 그럼 그곳을 공략할 제국군의 옆구리를 그대로 들이받으면 그만인데 무엇이 그리 걱정인가! 누가 뭐래도 알루에뜨는 바로 이곳 뵈르네 지방의 중심이니 말일세!"
그렇게 한참을 이동하던 브루기아 공국군 앞에 일단의 무리가 짐보따리를 든 채 허겁지겁 마주 다가오고 있었다. 그 행색을 보아하니 이 근방에 살고 있는 농부들로 보였다.
" 가서 저자들이 누구인지 그 신상을 파악하고 오라!"
오세르 남작이 굴베네르 자작을 대신하여 휘하의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고, 곧이어 이들이 가져온 소식은 뜬금없지만 충격적인 것이었다.
" 저자들은 인근 마을에 살고 있는 주민들인데, 그 마을에 정체불명의 무장 병력들이 말을 타고 침범해 들어와 난장판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남작님!"
" 뭣이? 그럼 이곳 샤또 빌레 부근에 벌써 제국군이 당도했다는 것인가!"
굴베네르 자작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 고함을 지르자, 오세르 남작이 그에게 단호한 눈빛으로 명령을 청했다.
" 그자들이 제국군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뭔가 심상치 않은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러니 병력을 보내어 적을 격퇴하고 상황을 수습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자작님!"
" 하지만... 우리는 한시바삐 알루에뜨로 향해야 하건만..."
굴베네르 자작이 마뜩잖은 표정으로 주저하자 오세르 남작이 단호한 음성으로 그의 결단을 요구하고 나섰다.
" 그들을 놔두고 이대로 진격하게 되면 적에게 발목을 잡히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일단은 기사단에 명을 내려 적들을 격퇴하라는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굴베네르 자작의 가문에 속한 기사단은 그가 이끄는 만인대의 유일한 기동력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소중한 전력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전력을 보내야만 한다는 사실에 속이 쓰렸던 굴베네르 자작은 이내 마지못해 그 청을 수락했고, 곧이어 100여 명이 넘는 기사들이 일제히 말을 타고 피난민들이 가리킨 방향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을 수습하고 다시 대형을 정비해 알루에뜨로 출발하려던 브루기아 공국군이었지만 기이한 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곧 그들의 후미 방향에서 전신에 피칠갑을 한 기수가 말을 타고 달려와 브루기아 공국군 대열을 따라잡더니, 이내 굴베네르 자작에게 경악할 만한 소식을 전해왔던 것이다. 그는 샤또 빌레에 남겨두고 온 소수의 지원병력 중 하나였다.
" 샤또 빌레가 점령당했습니다, 자작님! 수백여 기에 달하는 제국군 기병대가 난데없이 나타나 저희가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갑자기 들이닥치는 바람에 샤또 빌레가 그만... 크윽..."
" 뭐... 뭣이...! 이게 대체 무슨..."
샤또 빌레는 플람스 지역 최남단에 위치한 작은 행정구역으로, 남쪽으로는 동맹국인 비토리오 왕국과 접해 있어 전략적인 가치가 사실상 전무한 곳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브루기아 공국의 파견대가 바로 이곳 샤또 빌레를 본거지로 삼고 있는 상황 속에서, 난데없이 제국의 기병대가 나타나 그들의 본거지를 휩쓸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굴베네르 자작이 크게 놀라 당황해한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었다.
" 제국의 기병대가 대체 무슨 이유로 그곳을..."
굴베네르 자작이 머리를 굴려 생각을 해봤지만, 아무리 봐도 제국군이 샤또 빌레를 점령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병력을 최대한 집중해 뵈르네 지방 최대 도시인 알루에뜨를 점령하는 것이 급선무일 텐데, 뜬금없이 이런 촌구석으로 병력을 보내어 병력 낭비를 한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자작님! 제게 병력을 떼어주신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샤또 빌레로 향해 적 기병대를 물리쳐 보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본거지라 할 수 있는 그곳이 제국군에게 점령당한다면 오히려 우리가 앞뒤로 포위당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에 노출되고 맙니다!"
" 그래,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여전히 알루에뜨를 향한 진격에 미련을 못 버린 듯한 굴베네르 자작이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오세르 남작에게 명령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 아무리 적의 기병대가 수백여 기에 불과하다 해도, 기동성을 갖춘 기병대를 상대하려면 좀 더 많은 병력이 필요할 것이야. 게다가 적병력이 더 있을 수 있으니... 내 지금 당장 그대에게 5개의 천인대 병력을 떼어주겠네. 그러니 지금 즉시 샤또 빌레로 가서 적을 몰아내고 그곳을 되찾아 오도록 하게!"
" 알겠습니다, 자작님!"
곧 오세르 남작이 브루기아 공국군 병력의 절반이라 할 수 있는 5천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샤또 빌레를 되찾기 위해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 샤또 빌레에서 철군하겠다는 뮐러 중령님의 전언입니다!"
전령이 전해준 소식을 듣고 고멜 라시드 대위가 고개를 끄떡여주었다. 그는 지금 전투가 벌어질 현장의 후방에서 본부중대와 함께 각 부대의 전개 상황을 점검하고 있었다. 그의 상관인 비다르는 이미 전 연대 병력을 이끌고선 브루기아 공국군의 측면을 치기 위해 이동 중에 있었다.
사실 이곳에 오기 직전까지 급하게 작전을 구상해야 했던 라시드 대위는 골머리를 앓을 수밖에 없었다. 이번 임무는 제국의 주력 부대들이 뵈르네 지방을 무사히 돌파할 수 있도록, 그 측면을 위협할 수 있는 세력을 제거하는 사실상의 조공(助攻)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마침 이번 임무를 전해 들은 하르바르트 대위가 말하길, 힘은 무지하게 드는데 생색은 전혀 안나는 임무라 표현한 것처럼 그들은 전쟁의 중심에서 벗어난 지역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를 예정이었다.
하지만 굴베네르 자작의 만인대가 제아무리 2선급 부대로 평가받는다 해도 비다르의 73연대가 가진 병력의 2배가 넘는 인원을 지니고 있었기에, 그 병력의 차이를 감안한 작전을 구상해야 했던 라시드 대위는 뭔가 좋은 수가 없을까 고민을 하던 중 우연치 않게 하르바르트 대위의 조언을 건네받을 수 있게 되었다.
" 뭘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생각하는 겁니까, 라시드 대위? 그냥 단순하게 생각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여기저기 얼룩이 묻은 하르바르트 대위의 갑주를 노려보며 그 얼룩을 닦아주고 싶다는 욕구를 살짝 느낀 라시드 대위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선 하르바르트 대위에게 반문을 하기에 이르렀다.
" 단순하게 생각하다뇨...? 혹시 괜찮은 방안이라도 갖고 계신 겁니까?"
" 적의 숫자가 많으면 당연히 적의 병력이 집중되지 않도록 쪼개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다음에는 당연히 분리된 적의 부대를 각개격파하면 그만이겠지요!"
" 하지만 적의 병력을 작은 단위로 쪼개기 위해서는 마땅히 이를 유도해야 할... 아! 마침 우리에게도 기동력을 갖춘 부대가 있었군요!"
마침 라시드 대위가 뮐러 중령의 제1독립기병대대와 붉은 수염 용병대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묘안을 생각해내기 이르렀다. 이 두 집단은 전원 군마를 갖춘 무장 병력이었기에, 그 기동성을 적절히 이용한다면 적의 병력을 분리하는 데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고 생각한 라시드 대위가 곧장 멀뚱이 서있던 하르바르트 대위를 내버려두고 비다르에게로 바삐 향했다.
결국 브루기아 공국군의 이동경로 중간 지점에 있던 마을들을 치고 빠지는 역할은 용병대장 탄크레디가 이끄는 붉은 수염 용병대가, 그리고 샤또 빌레를 치고 빠지는 역할은 뮐러 중령의 주정뱅이 기병대가 담당하게 되면서 작전의 토대가 마련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의 예측대로 굴베네르 자작의 기사단과 5천여 명의 적군이 양쪽으로 분리되어 빠지게 되자, 비다르의 73연대 본대가 상대해야 할 적은 나머지 5천여 명의 본대를 거느린 굴베네르 자작의 병력뿐이었다.
그렇게 라시드 대위는 수시로 전령들에게 임무를 맡기며 상황 파악에 온 힘을 기울였다. 이제 전투의 승리는 적의 분리된 전력을 각개격파하면서 아군의 병력이 얼마나 유기적으로 움직이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73연대 3대대 1중대를 지휘하게 된 하랄트 몰록 대위는 지금 본대를 따라 브루기아 공국군이 있는 방향을 향해 이동 중에 있었다.
알루에뜨로 향하던 공국군이 도중에 제국군의 습격 소식을 듣고선 양쪽으로 병력을 분리해 파견한 가운데, 그 본대는 현재 길목 중간에서 휴식을 취하며 상황이 수습되기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 공국군을 습격하기 위해 지금 비다르의 73연대 병력이 발소리를 최대한 죽인 채 은밀히 이동하고 있었고, 하랄트 몰록 대위는 난생처음 겪어보게 될 전투를 상상하며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대체 난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상부에서는 이런 상황을 제대로 알고 있긴 한 것인가...
중앙정보국에서 연락책으로 파견한 몰록 대위는 비다르의 심술(?)로 인해 이렇게 1중대를 지휘하는 중대장 자리에 덜컥 앉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가 군 전술에 무식한 위인이라는 것이었고, 결국 1중대 선임 장교인 에밀 슐츠 중위의 도움을 바라야만 했다.
" 이번 작전의 핵심은 우리 위치를 최대한 들키지 않고 가까이 접근해 벼락같은 기습을 가하는 것입니다, 중대장님."
작전에 들어가기 이전, 에밀 슐츠 중위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몰록 대위를 바라보며 작전에 대해 재차 설명해 준 일이 있었다. 슐츠 중위는 몰록 대위를 처음 본 순간 그가 사령부에서 근무하던 '책상물림'이라는 사실을 대번에 눈치챌 정도로 노련한 장교라 할 수 있었고, 결국 몰록 대위가 중대장 임무를 제대로 완수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어느 정도 도움을 줘야 한다는 사실 또한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몰록 대위의 정체가 중앙정보국 요원이라는 사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기에, 슐츠 중위는 말단 소위를 가르친다는 마음으로 몰록 대위에게 수시로 조언을 건네기에 이르렀다.
결국 이런 망신스러운 상황이 거듭될수록 몰록 대위는 자신을 이곳으로 파견 보낸 상부를 원망할 수밖에 없었고, 자신을 이런 용도(?)로 쓰고 있는 비다르에게도 야속한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마침 바로 그때, 73연대 휘하 12개 중장갑 보병 중대와 3개 경보병 중대, 3개 석궁 중대가 이동을 멈추고선 그 자리에서 대형을 점검하기에 이르렀다. 바로 앞에 있는 작은 야산 너머에 브루기아 공국군이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곧 비다르가 휘하의 대대장들에게 전령을 보내어 전투 구역을 설정해주려던 찰나, 그의 호위 기사 시구르드손이 지금 막 도착한 전령의 소식을 전해주기에 이르렀다.
" 라시드 대위로부터 도착한 전언입니다. 샤또 빌레에 적 병력이 도착했다고 합니다, 적의 기사단 역시 붉은 수염 용병대가 점령한 마을로 진입, 교전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 교전? 용병들이 말인가...?"
비다르가 내린 명령은 그저 인근 마을을 점령한 뒤 적병력이 들이닥치면 곧장 후퇴하라는 것이었는데, 아무래도 용병대장 탄크레디가 그 명령을 확대 해석한 모양이라고 비다르는 생각했다.
" 아무래도 기사들을 상대할 자신이 있으니 전투를 결심한 것 아니겠습니까, 비다르 님."
" 뭐, 적의 병력을 묶어두기만 하면 그만이니 내가 그것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비다르는 과연 같은 고향 출신인 티롤 용병들이 기사들을 얼마나 잘 상대할 수 있을 것인지 그것이 궁금해졌다. 특히 강렬한 붉은 수염이 인상적인 용병대장을 떠올리며 비다르는 시구르드손에게 명령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 곧 작전을 개시하겠다. 우선 경보병 3개 중대 병력을 가장 최측면에 배치시킨 다음, 좌측의 1대대와 우측의 2대대는 야산의 측면으로, 그리고 중앙의 3대대가 저 야산을 오르고 나면 붉은 깃발을 신호로 전원 공격을 개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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