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전(11)
" 지금 각 대대에 보급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 73연대의 피해 상황은... "
고멜 라시드 대위가 각 부대의 피해 상황을 보고하는 동안 비다르가 묵묵히 그것을 들으며 단검 '베오볼프'의 날을 매만졌다. 신기하게도 하얀 늑대의 피를 머금은 단검의 날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불구하고 그 날카로움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비다르의 모습을 지켜보며 라시드 대위는 보고를 하고 있던 와중에도 단검의 날카로운 예기 만큼이나 예리하게 느껴지던 비다르의 기세에 식은땀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연대장이라는 중요한 직책에 앉아있음에도 적을 향해 철퇴를 휘두르며 돌격했던 비다르의 이야기는 이미 전 연대에 널리 퍼져 있었다. 기존의 3대대 장병들이야 이미 어느 정도 비다르란 존재를 겪어봤기에 잘 알고 있었지만, 새로이 비다르를 최고 지휘관으로 모시게 된 1대대와 2대대 장병들은 기존의 소문과 더불어 이번 전투로 인해 자신들의 연대장이 뭔가 범상치 않은 존재라는 사실을 확실히 깨닫기에 이른 것이다.
물론 어떤 이는 귀족가의 새파란 도련님이 만용을 부린 것이라 비웃었고, 또 어떤 이는 적 대형을 돌파해 적의 수장을 포획한 그의 용기에 찬사를 보내기도 했지만, 그런 평가들은 결코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라시드 대위는 내심 생각했다.
문제의 존재를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던 라시드 대위는 비다르의 그런 행동이 철저히 계산된 것이라는 사실을 내심 눈치채고 있었고, 갓 부임한 지휘관이 병사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때론 그런 과감한 모습도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더욱이 그는 비다르가 발타자르 대위가 만들어낸 돌파구를 통해 적의 종심부까지 돌격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심 비다르가 더욱 무서운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 ...그리고 이제 곧 나머지 5천여 명의 브루기아 공국군 병사들이 우리 앞에 당도하게 될 것입니다, 연대장님. 이에 대한 대처를 어찌해야 할 것인지 제게 따로이 알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라시드 대위가 추후의 일을 어떻게 진행시킬 것인지 비다르에게 묻는 듯하자, 비다르가 냉랭한 시선으로 라시드 대위를 바라보며 오히려 그에게 질문을 건넸다.
" 당연히 전투를 치르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적의 수장인 굴베네르 자작이라는 자가 우리 수중에 있으니 뭔가 다른 수도 있을 것 같군. 이쯤에서 라시드 대위 그대가 생각하는 최악의 경우는 어떤 것인지 한번 말해보겠는가?"
비다르가 묻고자 하는 뜻을 재빨리 알아챈 라시드 대위가 곧장 생각을 정리한 뒤 비다르에게 그것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 저희가 기대할 수 있는 최상의 경우는 적병력이 우리에게 그대로 항복을 하는 것입니다. 마침 우리 수중에 브루기아 공국군의 수장인 조르쥬 드 굴베네르 자작이 잡혀있으니, 잘만 하면 적의 나머지 병력에게 항복을 받아내는 것도 그리 어렵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쪽 병력을 이끄는 지휘관의 성향을 잘 모르고 있으니... 여기서 생각해볼 수 있는 최악의 경우는 굴베네르 자작의 안위는 생각지 않고 저쪽에서 싸움을 걸어오는 경우라 할 수 있겠습니다."
최악의 경우 전투가 벌어지게 되리라는 라시드 대위의 설명에, 비다르가 뭔가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라시드 대위에게 재차 질문을 던졌다.
" 그럼 그대가 적군의 지휘관이라 가정한다면 어찌할 거라 생각하는가?"
" 제가 적군의 지휘관이라면... 이대로 샤또 빌레로 후퇴한 뒤 상황을 살필 것입니다. 이대로 항복하자면 5천의 병사를 데리고 아무것도 못해봤다는 비판을 들을 수 있으니 망설일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렇다고 우리에게 대항해 전투를 치르기엔 굴베네르 자작의 안위가 염려스럽기에 감히 그런 결정을 내리지도 못할 것입니다. 결국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본거지라 할 수 있는 샤또 빌레로 잠시 후퇴해 상황의 전개를 살피며 기회가 생기기만을 노릴 것입니다."
" 그럼 그런 상황을 전제로 우리는 어찌해야 한다고 보는가, 라시드 대위?"
비다르의 거듭된 질문에 라시드 대위가 침을 꿀꺽 삼키며 이내 대답을 하기에 이르렀다.
" 우선 적 병력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엔 기병대 병력을 동원해 한두 차례 기병 돌격을 감행한 뒤 전 병력을 동원하여 압박을 가한다면, 적의 입장에선 최소한의 전투를 치른 셈이니 적의 지휘관도 전투 없이 항복을 했다는 비난은 걱정하지 않고 우리에게 기꺼이 항복을 하게 될 것입니다."
" 그렇게만 된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 그럼 적 병력을 움직이지 못하게 할 방법은 있는 것인가?"
" 저기 그것이... 죄송합니다만 그 문제는 좀 더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라시드 대위가 우물쭈물거리며 확답을 하지 못하자, 비다르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단검 '베오볼프'를 들어 보였다.
" 그건 내가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지. 비교적 간단한 방법으로 말이야."
" 네? 간단한 방법이라뇨..."
" 항복을 요구하는 문서와 함께 '물건' 하나를 보내 적의 지휘관을 협박한다면... 감히 병력을 움직일 생각은 하지 못 할 것이다. 이를테면..."
라시드 대위를 바라보던 비다르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 굴베네르 자작의 손가락 하나를 잘라서 보내는 것은 어떨까."
곧 오세르 남작의 부대가 비다르의 73연대 부근에 당도한 가운데, 항복을 요구하는 기수가 말을 타고 그들에게로 향하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1대대장 게델 카리우스 중령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곁에 있던 2대대장 틸로 슈만 중령에게 말을 건넸다.
" 이래도 되는 건지 모르겠군. 항복을 요구하는 거야 당연한 일이겠지만... 굴베네르 자작의 손가락을 잘라 함께 보내다니..."
난폭하고 잔인한 성향의 카리우스 중령마저 비다르의 독하고 모진 처사에 혀를 내두르는 듯하자, 슈만 중령이 자신의 두툼한 배를 손으로 매만지며 미소를 지었다.
"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모든 책임은 연대장님께서 지는 것이니, 우리는 그저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는 것이 좋을 듯하네."
" 하긴... 아직 전쟁이 끝난 것도 아닌데 이런 곳에서 병력을 허비할 이유는 없겠지."
그런 두 사람이 잠자코 브루기아 공국군 주둔지를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마침 3대대장 한스 만스펠더 중령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 마침 여기들 계셨군요. 항복을 요구하는 전령이 떠난 것을 보고 계신 겁니까?"
" 뭐, 별일도 없기에 이렇게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지. 아! 마침 저기 돌아오는군."
슈만 중령의 말처럼 항복 문서와 굴베네르 자작의 손가락이 든 목합을 전달한 기수가 말을 탄 채 서둘러 복귀하고 있었다.
" 그러고 보니 연대장님께서 그대의 3대대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신 듯하더군. 지난번 르와예 성채에 대동하고 들어간 병력도 그대의 3대대였고, 이번 전투의 중앙도 3대대가 맡았으니 말이야."
카리우스 중령이 그 특유의 뱀눈을 굴리며 만스펠더 중령에게 빈정거리는 듯하자, 만스펠더 중령이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 아무래도 저희 3대대에 계셨던 분이니 직접 지휘하시기에 어색하지 않은 부분이 있어 그런 것이겠지요. 하지만 일처리엔 공정하신 분이니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갓 중령으로 진급한 대대장이 전투 보고서에 기록될 '공적'에 대한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를 해주자, 슈만 중령이 실실 웃으며 만스펠더 중령에게 질문을 건넸다.
" 한동안 자네가 모셨던 상관이니 자네 말이 맞긴 하겠지. 그런데 말이야, 만스펠더 중령. 내 그대에게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겠나? "
" 무엇이든 물어보십시오, 슈만 중령님."
" 그게 말이야... 연대장님께서 직접 전투에 참여하신 것이 좀 놀라워서 말일세. 원래 연대장님께서 그렇게 직접 선두에 서시는 것을 선호하시는 것인지 내 궁금해서 이렇게 자네에게 물어보는 것이네."
슈만 중령의 질문이 뜻하는 것은, 비다르가 여느 귀족 장교들과 다름없이 자만심 넘치는 인물인가를 묻고 있는 것이었다. 보통 귀족 계급의 장교들은 자만심과 허세로 가득 찬 나머지 전투 현장에서 객기와 만용을 부리다 전사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는데, 이런 점을 염려하고 있던 슈만 중령이 만스펠더 중령에게 그 점을 묻고 있었던 것이다.
" 글쎄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 역시 그런 모습은 처음입니다."
사실 지난 알메리아에서 비다르가 그 애용하는 철퇴와 단검을 휘두른 적은 한밤 중에 은밀히 습격을 가해 온 자객들을 처치했을 때뿐이었다. 그 뒤로 두 번의 전투, 즉 바로고스 숲에서의 전투와 비토리오 왕국군과의 전투 당시엔 그저 후방에 머물며 전투의 경과를 지켜보기만 했던 비다르였다.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만스펠더 중령이 알메리아에서 있었던 두 번의 전투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자, 슈만 중령이 그 두툼한 턱살을 손끝으로 매만지며 놀랍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 자네 이야기가 맞다면... 연대장님께서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무서운 분이신 듯하군..."
" 그게 무슨 말인가, 슈만 중령...?"
카리우스 중령이 궁금하다는 듯 뱀눈을 굴리며 묻자, 슈만 중령이 한숨을 내쉬며 이야기해주었다.
" 연대장님께서 직접 전투에 나서신 것은 단순하게 생각하자면 자신감 넘치는 귀족 젊은이의 객기로도 볼 수 있겠지만... 만스펠더 중령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연대장님께서 단순히 용기를 자랑하기 위해 그리 행동하신 것은 아니란 말일세. 더욱이 상급 지휘관이 나름 대담한 행동을 하는 데엔 신중함과 계산이 따라야 하는 것인데, 굳이 승기를 잡은 상황임에도 연대장님께서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은..."
" 나름 목적이 있었다는 이야기로군요..."
만스펠더 중령이 나름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카리우스 중령 역시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 당시 발타자르 대위 그 친구의 활약으로 적의 대형에 돌출부가 형성되었었네. 그리고 그 돌출부를 통해 연대장님께서 직접 군단병들을 이끌고 돌격해 굴베네르 자작을 사로잡아 전투를 끝내버렸지. 그럼 그것이 나름 계산된 행동이라는 이야기란 말인가?"
" 마침 연대장님께선 군부의 주목을 받고 계신 상황이지. 그리고 이번 전투의 결과 보고가 총사령부에 전해진다면 분명 그에 대한 이야기가 분분할 수밖에 없을 것이야. 그것이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말일세. 다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이야기를 잠시 멈춘 슈만 중령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 연대장님께선 지금보다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계신 듯하다는 이야기지. 그 행동은 결코 전공에 대한 욕심이 아니라... 마치 야심을 이루려는 행동으로 보여지거든..."
" 쳇... "
잠자코 웅크리고 있던 브루기아 공국군을 향해 전투 대형을 갖춘 뮐러 중령의 기병대가 돌격 준비를 갖추자, 뮐러 중령이 그 곁에 말을 탄 채 툴툴거리던 호위 기사 파벨 바우만 경을 힐끔 쏘아봤다.
" 이봐, 파벨! 아까부터 왜 그렇게 불만인 거야?"
" 그냥 뭐... 아무것도 아닙니다."
떨떠름한 표정의 파벨을 바라보던 뮐러 중령이 혀를 차며 말했다.
" 뭐가 아무것도 아니야? 연대장의 당번병한테 까여서 아까부터 계속 불만인 거 아니야?"
재밌게도 자신의 종자로 삼으려 했던 비다르의 당번병 발리안으로부터 정중히 거절당한 파벨은 그 자존심이 상했는지 아까부터 계속 못마땅한 표정으로 투덜대고 있었다. 그런 파벨을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본 뮐러 중령이 코웃음을 치며 입을 열었다.
" 아버님께서 자넬 보시면 정말 기가 막혀하실 거야. 우리 다르케멘 가문의 기사가 종자 하나 못 구해서 그리 빌빌대면 쓰겠어?"
" 정말 아쉬워서 이러는 거란 말입니다, 뮐러 님. 그런 눈치 빠르고 영리한 녀석을 어디 가서 구할 수 있다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 그 소년은 연대장의 호위 기사인 시구르드손이란 기사가 종자로 삼으려는 눈치이니, 그냥 이쯤에서 자네가 깨끗하게 포기하고 물러나라구."
뮐러 중령이 말을 마치고선 투구를 꾹 눌러썼다. 마침 기병대의 기수가 다르케멘 가문의 상징인 '튤립'이 그려진 깃발을 들어 뮐러 중령의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국군의 정식 편제된 부대를 자신의 '기사단'쯤으로 생각하고 있던 뮐러 중령이 부대의 깃발마저 가문의 상징물로 채우는 만행을 저지른 것은 기행을 일삼는 뮐러 중령에 대한 수많은 이야깃거리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뮐러 중령이 말을 타고 앞으로 나서더니 기병대원들에게 큰소리로 외쳤다.
" 이제 기병대답게 돌격할 시간이 왔다! 모두들 사내답게 돌격하고 복귀해, 한바탕 거하게 취해보자, 제군들!"
곧 뮐러 중령을 선두로 '오크통의 기사들'이 제각기 기병창을 움켜쥔 채 거친 돌격에 돌입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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