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헬르 공방전(2)
'모흐몽'에 매복해있던 232동원연대의 지휘관은 예비역 대령인 헬무트 하인리히 대령이었다. 겉모습부터가 평범한 외양을 갖고 있던 그는 간부사관 제도를 통해 장교로 임관했다가 용케도 대령까지 진급하고서 퇴역한 인물이라 할 수 있었는데, 은퇴 후엔 그동안 모아둔 봉급으로 장만한 땅을 가꾸며 가족과 함께 오손도손 행복하게 살아가던 평범한 존재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존재가 지금은 이렇게 동원령이 선포되면서 23동원군단의 연대장으로 소환되어 전투에까지 참여하기에 이르렀다. 란데스후트에서 소집된 23동원군단은 총 6개의 동원연대 3만여 명의 병력으로 편성된 부대로, 그 부대원의 구성이 전원 퇴역 장교와 하사관, 그리고 징집병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특징이 있었다. 특히 이 징집병들은 란데스후트에서 소집된 병력자원으로, 평소에는 생업에 종사하면서도 간간이 훈련을 받다가 이처럼 유사시에는 동원령에 의해 소집되는 병사들을 뜻했다.
" 한스 녀석, 지금쯤 늦잠이라도 자는 것은 아닌가 모르겠군..."
귀밑머리가 희끗한 헬무트 하인리히 예비역 대령이 마침 고향에 있을 막둥이 아들을 생각하며 자신의 휘하에 배속된 4천여 명의 징집병들을 훑어보던 중이었다. 지금 병사들은 주둔지 곳곳에서 거친 흑빵과 치즈 한 덩이를 통해 간단히 식사를 하면서 곧 벌어질 전투에 대해 생각을 하는지 다들 심란한 표정들이었다.
사실 하인리히 대령은 자신의 232연대가 점령지 안정화 작업에만 투입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직접 전투에까지 참여하게 되자 내심 근심 어린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게다가 정교한 포위 기동을 해야 하는 입장이었기에, 그는 부디 아라곤 왕국군이 정예 병력이 아니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젊은 시절엔 그 역시 혈기왕성한 장교로서 이런 전투 상황을 반겼을 것이 틀림없었겠지만, 이렇게 퇴역하고 나서 한적한 삶에 익숙해져 있던 하인리히 대령으로서는 이런 위험한 일을 떠맡기엔 그저 나긋한 노신사에 불과한 신세였다.
실제로 그의 232연대는 비헬르 성채에 주둔하고 있을 73연대가 아라곤 왕국군의 공격을 버텨내는 동안, 곧장 북쪽의 231연대와 함께 구릉지대를 우회해 왕국군의 배후지역으로 기동하여 포위망을 구축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나마 적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아내야 했던 73연대보다는 훨씬 나은 상황이라고 자위하던 하인리히 대령에게 마침 그의 부관이 헐레벌떡 달려오더니 급작스러운 적의 출현을 알리기에 이르렀다.
" 연대장님, 큰일났습니다! 전방의 경계병력으로부터 긴급 전령입니다! 지금 적 병력 수천여 명이 이쪽으로 들이닥치고 있다고 합니다!"
" 아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비헬르 성채로 향해야 할 적이 대체 이곳엔 왜..."
알루에뜨를 구원하기 위해 곧장 비헬르로 향해야 할 아라곤 왕국군이 굳이 방향을 돌려 이곳 모흐몽 같은 외딴 지역에 들릴 이유가 없었기에 하인리히 대령이 아연실색한 얼굴로 되물었다.
" 어서 빨리 전투 대형을 갖추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곳에 있는 것을 저 데이곤 놈들이 알아챈다면 전투가 벌어질 것이 틀림없으니 어서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데이곤(dagon)은 바다에 산다는 전설 속의 바다괴물로, 바다를 항해하는 선원들에겐 역겨운 악취로 널리 알려진 존재였다. 해상왕국 웨식스와 더불어 해양무역의 선두주자라 할 수 있는 아라곤 왕국의 군인들을 향해 제국의 군인들이 붙여준 이 별명은, 몸을 씻지 않아 악취가 나곤 했던 아라곤 사람들을 빗대어 붙여준 별칭이라 할 수 있었다.
" 어서 뿔고둥을 울려라! 지금 당장 전투대형을 갖추어야 한다!"
마침 비헬르 성채의 배후에 주둔 중이던 43연대 역시 비다르의 73연대에서 보내온 전령으로 인해 발칵 뒤집어진 상태였다.
" 이건 또 뭔가? 아라곤 왕국군이 보샹과 모흐몽의 아군 위치를 알아내 공격을 가해오고 있다고...?"
검은 안대를 찬 애꾸눈의 사내 페터 레바테인 대령이 하나 남은 눈동자를 굴리며 73연대의 전령을 맹렬히 노려봤다.
" 그렇습니다! 어찌 알아챘는지는 모르겠지만 매복해있던 231연대와 232연대를 아라곤 왕국군이 찾아내 공격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비다르 대령님께서 직접 73연대를 이끌고선 아군을 구원하기 위해 출동하실 예정이니, 부디 43연대가 비헬르 성채를 인수하기를 원한다 전하셨습니다!"
" 뭣이...? 우리 43연대가 비헬르 성채를...?"
순간 레바테인 대령은 이번 작전의 첫걸음부터가 어긋나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이들 43연대의 임무는 73연대가 지키고 있는 비헬르 성채 배후에 예비대로 주둔하고 있다가, 아라곤 왕국군을 향한 포위망이 형성되면 그때서야 부대를 움직여 포위된 왕국군을 강타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변수'가 터져 나와 43연대가 73연대를 대신해 비헬르 성채를 지켜내야만 하는 입장이 되어버리는 순간이었다.
" 비다르 대령께서 진정 73연대 병력 전체를 움직인다 하셨는가? 전체 병력을?"
" 그렇습니다. 북쪽의 231연대와 남쪽의 232연대를 동시에 구원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병력을 둘로 나눠야 하는 처지인지라..."
"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알았다! 곧장 우리 연대를 이끌고 비헬르 성채를 인수할 테니 걱정 말라고 내 말을 전해주도록!"
그렇게 전령을 떠나보낸 레바테인 대령이 이내 43연대의 이동을 황급히 지시하던 바로 그 순간, 문득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는지 잠시 자리에 앉은 레바테인 대령이 지금의 상황을 곰곰이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대체 아라곤 왕국군이 어떻게 해서 아군의 매복 지점을 정확히 찾아낸 것일까... 그것도 두 군데 모두 다 말이다...
더욱이 비다르가 그 사실을 알아채고서 병력을 움직인 것 또한 이상하리만큼 신속하다는 생각이 든 레바테인 대령은 이 불가사의한 일에 어림짐작조차 할 수가 없어 표정을 한없이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곧 비다르가 완전무장을 한 채 철퇴와 단검 '베오볼프'를 챙기며 막사 밖으로 나왔다. 마침 호위 기사 시구르드손 역시 판금갑옷을 착용한 채 비다르의 무장을 손수 직접 챙겨주려 하고 있었다.
" 굳이 이렇게 직접 나서지 않아도 되지 않습니까, 비다르 님?"
비다르의 흉갑과 완갑의 이음새를 점검해주던 시구르드손이 살짝 속삭이며 전투에 나서는 것을 말리려는 듯하자, 비다르가 형형히 빛나는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입을 열어 말했다.
" 전투 현장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서다, 시구르드손 경. 그리고 걱정하지 마라, 내가 일찌감치 죽을 '운명'이었다면 핌불베르트 산맥에서 이미 죽었을 테니깐."
비다르와 하얀 늑대의 일화를 모르고 있던 시구르드손으로서는 짐작조차 하지 못할 이야기였지만, 비다르는 자신의 숙명이 고작 이런 전쟁터에서 죽을 운명은 아니라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다.
" 1대대와 2대대 모두 출동 준비를 끝마쳤습니다, 연대장님!"
마침 비헬르의 남쪽에 위치한 모흐몽의 232연대를 구원하기 위해 게델 카리우스 중령과 틸로 슈만 중령이 제각기 대대 병력을 정비한 채 대기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향해 비다르가 고개를 끄덕여주며 그 출동 명령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 적 병력을 섬멸하는 즉시 232연대의 잔존 병력을 이끌고서 비헬르 회랑으로 이동해 우리와 합류해야 한다. 도망가는 적병은 신경 쓸 필요 없이 '속도'에 유념해야 할 것이다, 알았나?"
" 명심하겠습니다, 연대장님!"
게델 카리우스 중령이 그 특유의 뱀눈을 굴리며 당차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신속한 작전 전개를 위해서는 난폭하지만 거침이 없는 성향의 카리우스 중령이 남쪽 병력을 총괄하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이 들어 비다르가 그를 책임자로 임명한 상태였다. 물론 유들유들한 성향의 틸로 슈만 중령이 카리우스 중령의 부족한 부분을 잘 채워주리라 생각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결국 그 반대편 북부의 '보샹'으로 향할 3대대와 뮐러 중령의 기병대, 그리고 붉은 수염 용병대를 합한 병력은 비다르가 직접 지휘할 생각이었기에, 곧 그 주위로 한스 만스펠더 중령과 뮐러 폰 다르케멘 중령, 그리고 용병대장 마르쿠스 구스타프슨과 탄크레디가 모여들기에 이르렀다.
" 아라곤 왕국군과 아군 병력이 전투를 치르고 있을 것이 분명하니만큼 양쪽 모두 정신이 없는 상황일 것이다. 우리는 그런 상황을 이용해 벼락같은 기습으로 적 대형의 측면을 치고 들어갈 것이다. 다만 이것만은 명심하도록 하라. 본격적인 전투는 아라곤 왕국군의 본대를 포위하면서부터 시작될 예정이니 그 점을 염두에 두고 병력을 운용해야 할 것이다."
비다르가 형형히 빛나는 눈빛으로 작전을 설명해주자 모두들 고개를 끄떡이며 긴장감이 역력한 모습으로 비다르를 바라봤다. 물론 단 한 명을 제외하고서 말이다.
" 적 기사단은 보샹에 없는 것이오, 비다르 경?"
유독 아라곤 왕국군의 나바라 기사단에 집착하던 뮐러 중령이 입맛을 다시며 비다르에게 물었다. 그런 뮐러 중령을 비다르가 냉랭한 눈초리로 쏘아보며 입을 열어 말했다.
" 적 기사단은 신경 쓰지 않는다, 뮐러 중령. 그대의 기병대는 아군의 첨병 역할을 수행하며 우리의 눈과 귀가 되어야 하니 말이다."
" 결국 개고생은 우리더라 하라는 말이로군. 실적과 명성은 그대가 차지하고 말이오."
뮐러 중령이 살짝 비아냥거리는 듯하자, 그때까지만 해도 표정의 변화가 없던 비다르가 이내 살짝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 그 '개고생'마저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면 각오를 단단히 하는 것이 좋을 거다, 뮐러 중령."
아라곤 왕국군의 수장 바잔 백작이 곧 레예스 남작과 이글레시아스 남작에게 각각 3천의 병사들을 주어 '보샹'과 '모흐몽'으로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어느 정체 모를 존재가 건넨 정보를 신뢰할 수는 없었지만 무시하고 지나치기에는 부담일 수밖에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바잔 백작은 병력을 파견해 두 지역에 매복해있을지도 모를 적들을 탐색하도록 했다.
물론 알루에뜨로 바삐 향해야 했던 바잔 백작은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선 비헬르 가도를 따라 계속 이동해야만 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비다르가 꾸민 계략대로 보샹과 모흐몽의 제국군 연대들이 아라곤 왕국군과 우발적인 충돌을 일으킨 끝에 곧 격렬한 전투를 치르기 시작했다. 처음엔 설마 하는 마음에 구릉지대를 넘어 보샹과 모흐몽으로 들이닥쳤던 아라곤 왕국군은 이내 그곳에 매복해있던 제국군 부대를 발견하고선 이내 치열한 전투를 벌이게 된 것이다.
마침 모흐몽 지역의 232연대가 이글레시아스 남작이 이끌던 3천여 명의 병사들과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격렬한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점심 식사를 하고 있던 와중에 들이닥친 왕국군 병사들로 인해 황급하게 대형을 꾸려야 했던 제국군은 초반엔 왕국군의 정예 병력을 맞아 불리한 전투를 치를 수밖에 없었지만, 아무리 징집병이라 해도 살기 위해 싸우는 것만큼 고군분투할 수 있게 만드는 요소는 없었기에 곧 비등비등한 전투의 양상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 예비대를 적의 측면으로 투입하라!"
마침 232연대장 하인리히 예비역 대령이 곁에 있던 부관에게 명령을 내리자, 부관이 아군 대형을 가리키며 큰소리로 외쳤다.
" 보십시오! 오히려 우리 쪽 측면이 뚫리고 있습니다!"
" 그럼 그쪽으로 예비대를 보내도록!"
이내 초조한 감정을 느꼈는지 하인리히 대령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전투가 벌어지고 있던 광경을 후방의 숲 속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양쪽의 숫자가 얼핏 비슷해 보이긴 했지만 징집병들로 구성된 동원부대라는 한계로 인해 각 대대 병력들이 유기적인 움직임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어 하인리히 대령은 내심 무승부를 거두어도 성공이라는 생각을 갖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바로 그때, 아라곤 왕국군 측면에 난데없이 등장한 정체불명의 병력이 왕국군의 허리를 강타하면서 전투의 양상이 급작스럽게 변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양쪽으로 적을 맞이하게 된 아라곤 왕국군은 파국을 막기 위해 병력을 둘로 나눠 양쪽의 적을 상대하려 했지만, 끝내 그 대형이 흐트러지면서 와해되다시피 하는 결과를 낳고야 말았다.
" 저 깃발은... 7군단입니다, 연대장님!"
" 7군단...? 설마... 비헬르에 있어야 할 73연대를 말하는 것인가!"
하인리히 대령이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저 멀리 있던 구원군의 깃발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그럼 지금 비헬르를 지키고 있는 것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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