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단(5)
크로센 공작의 밀명을 받든 마이어 폰 아르투어 남작이 오랜 여정 끝에 마침내 제국 북부에 위치한 스카스가드 시(市)에 도착할 수 있었다.
스카스가드는 제국 북부의 대권역인 에버스발데의 주도(州都)이자 테오발트 에베르트 폰 아이제나흐 공작의 본거지이기도 했는데, 대륙 북부에 속한 지역이라 한겨울이 아닌데도 쌀쌀한 냉기를 느낄 수 있어, 남부의 따뜻한 날씨에 익숙한 아르투어 남작으로서는 원체 이곳이 맘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군주인 크로센 공작의 밀명을 받아 이곳까지 오게 된 그는 곧 아이제나흐 공작이 기거하던 공작성을 방문할 수 있었다.
아이제나흐 공작은 황제의 맏딸인 프레데리카 도로테아 황녀와 결혼하여 얼마 전에 아들을 보는 기쁨을 맛봤다. 그와 더불어 황제의 배려(?)로 가문의 숙원이었던 공작의 작위에까지 오른 그는, 자신감의 발로였는지 아니면 자기애착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들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과 똑같은 '테오발트'라 이름지었다.
하지만 이곳까지 오면서 에버스발데의 사정을 두루 살펴본 아르투어 남작은 그 모든 것이 헛된 것이라는 사실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이곳 에버스발데 지역은 대륙 최북단의 만년설 산맥과 빙원 지대에 맞닿아있어 사람이 살기엔 척박한 지역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현재 광산 투자로 쏠쏠한 재미를 보고 있다고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사람이 부족했고 식량의 자체적인 생산도 부족했기에, 아르투어 남작은 아이제나흐 공작령의 발전 가능성이 한없이 낮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갖고 있는 것이라곤 척박한 산악지대와 광산밖에 없는 이곳에 황제가 자신의 고귀한 딸을 보낸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던 아르투어 남작은 일단 자신의 임무만을 생각하기로 했다. 그가 우선적으로 풀어야 할 문제가 바로 광산에서 나오는 철광석의 통제였기 때문이다.
이곳 에버스발데 지역은 여러 가지 광물이 나오는 광산 지대로 유명했고, 그 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광석은 바로 철광석이었다. 이곳의 질 좋은 철광석은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쓰임을 받고 있었는데, 특히 전쟁에 쓰이는 무기와 방어 도구를 제작하는 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자원이기도 했다.
남부 귀족들의 수장인 크로센 공작은 혹시라도 닥칠 위기에 대비하기 위해, 대륙 최고의 상업 집단이라는 고틀리프 종합 상회를 통해 꾸준히 북부의 철광석을 매입해오고 있었다. 크로센 공작 휘하의 바르텐슈타인 영지군의 무장은 물론 비상시에 동원될 동원군단의 무장 역시 철저히 준비해둬야 했기 때문이다.
만약 황제의 군단과 전투를 치러야 할 상황이 닥치게 된다면 웬만한 무장으로는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크로센 공작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크로센 공작은 대량의 북부산 철광석을 절실히 필요로 했는데 최근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 북부 광산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아이제나흐 공작이 전면에 나서서 광물의 매매를 통제하고 나선 것이다.
문제의 아이제나흐 공작은 다소 허약한 체격에 음침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였다. 젊은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기력이 빠진 노인의 그것과도 비슷하다는 느낌을 줄 정도였다.
아이제나흐 공작은 뭔가 귀찮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에게 예를 표하던 아르투어 남작에게 신경질적인 음성으로 물었다.
" 저 멀리 남부에서 무슨 연유로 이곳을 방문한 것인가?
" 바르텐슈타인 지역을 관할하고 통치하시는 막시밀리안 빌헬름 폰 크로센 공작 전하의 지엄하신 명을 받고 제가 이곳을 방문하게 된 이유는... "
" 그만 그만! 그리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지 말고 간략하게 말하라, 아르투어 남작! "
아르투어 남작의 말을 끊은 아이제나흐 공작이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신경질을 부렸다. 마치 지금 이 시간이 한없이 지겹고 쓸모없다는 듯, 공작은 아르투어 남작에게 핵심만 말할 것을 재촉하고 있었다.
" 죄... 죄송합니다, 아이제나흐 공작 전하... 제가 크로센 공작 전하의 뜻을 받들어 여기까지 오게 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크로센 공작 전하께서 북부의 철광석 매입이 어렵게 된 이유에 대해 궁금해하시어 이렇게 직접 저를 보내신 겁니다... "
" 철광석...? "
그제야 크로센 공작의 수하가 이곳까지 오게 된 이유를 알게 된 아이제나흐 공작이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 이보게, 아르투어 남작! 북부의 광산은 오롯이 우리 가문의 소유이고 광산에서 나오는 광물 또한 우리 가문의 소유이네. 자네도 그런 것쯤은 잘 알고 있겠지? "
" 무... 물론입니다. 다만 크로센 공작 전하께서 걱정하시는 건... "
" 북부 광산에서 나오는 광물을 사고파는 권리는 전적으로 우리 아이제나흐 가문, 나 아이제나흐 공작이 소유하고 있다! 내 소유물인 광물을 팔아치우든 땅에 묻든 그것은 오로지 나의 고유 권리란 말이다! 그런데 감히 그대가 대체 무엇이기에 이곳까지 와서 그것을 내게 따진단 말인가! "
아이제나흐 공작의 역정에 아르투어 남작은 곤혹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남부의 크로센 공작이 갖고 있던 위세가 이곳 머나먼 북부 지역에 위치한 에버스발데에서는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크로센 공작의 사절이라 할 수 있는 자신을 이렇게 몰아붙이는 것을 보니, 아이제나흐 공작은 크로센 공작과 척을 져도 딱히 상관없다는 듯이 보였다.
그렇게 아르투어 남작이 곤혹해하는 가운데, 아이제나흐 공작의 집무실 문이 열리더니 곧 한 여인이 들어왔다. 여인은 바로 아이제나흐 공작의 부인이자 공작령의 안주인인 프레데리카 도로테아 황녀였다.
프레데리카 황녀가 집무실로 들어오자 기이하게도 아이제나흐 공작의 태도가 금세 돌변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성난 기색이 역력했던 공작이 쩔쩔매는 표정으로 황녀를 반겼던 것이다.
" 부... 부인, 여기까진 어인 일이오...? "
" 숙부의 신하가 찾아왔다길래 대체 어떤 사람인지 보러 왔지요, 공작 전하. "
프레데리카 황녀는 꽤 아름다운 여자였다. 다만 살기마저 느껴지는 날카로운 눈빛과 그녀를 감싸고도는 괴소문으로 인해 그녀가 가진 가치가 많이 깎인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황실의 고귀한 황녀가 이런 척박한 곳에 시집 올 이유가 그 어디에 있겠는가.
그렇게 프레데리카 황녀를 마주하게 된 아르투어 남작은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나더니 그녀에게 정중히 예를 표했다.
" 그동안 강녕하셨습니까, 황녀 마마! 그동안 마마의 외숙부 되시는 크로센 공작 전하께서 항상 황녀 마마에 대한 걱정으로... "
" 그대는 그 매끄러운 혀로 인해 그 자리에까지 오른 것 같군요, 아르투어 남작... "
갑자기 프레데리카 황녀의 잡아먹을 듯한 기세가 아르투어 남작을 엄습하자 아르투어 남작의 숨이 턱 막혀왔다. 놀랍게도 황녀의 날카로운 시선이 닿을 때마다 아르투어 남작은 자신의 온몸이 알 수 없는 힘에 속박되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이... 이게 무슨...
그렇게 황녀가 뿜어대는 미증유의 기세에 벌벌 떨던 남작은 그제서야 황녀에 대한 항간의 소문을 간신히 기억해낼 수 있었다. 젊은 사람의 피를 취해 힘을 얻고 마법을 부린다는 황궁의 '마녀'에 관한 소문을 말이다.
그렇게 몸을 벌벌 떨며 최대한 몸을 낮춘 아르투어 남작을 향해 프레데리카 황녀가 살짝 기세를 죽이며 질문을 던졌다.
" 그대는 내 오라버니에 관한 소식을 들어 알고 있나요...? "
프레데리카 황녀의 오라버니라면 2황자 지기스문트 빌헬름을 뜻했다. 현재 2황자는 알메리아의 3군 부사령관으로 부임해 알메리아의 안정화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게다가 숙부인 크로센 공작과는 사실상 절연할 상태나 다름없었기에 아르투어 남작으로서는 2황자의 소식을 알 길이 전혀 없었다.
" 소... 송구합니다, 황녀 마마...! 2황자 전하와는 왕래가 끊기어 전하의 근황이 어찌 되는지는 저로서도 알 길이 없기에... "
" 결국 그렇게 되었군요... 역시 모든 일이 예정대로 잘 흘러가고 있어요, 남작... "
프레데리카 황녀가 맘에 든다는 듯 요염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아르투어 남작으로서는 지금 황녀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모든 일이 예정대로 흘러가다니...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게 어리둥절해하던 아르투어 남작을 향해 황녀가 다시 고혹적인 미소를 흘려보냈다. 그리고 황녀의 눈빛과 그 미소를 마주 대한 아르투어 남작은 다시 온몸이 감전된 듯 벌벌 떨기 시작했다. 미증유의 기세가 황녀에게서 흘러나왔고 남작은 이를 받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 저 하늘의 보름달이 무어라 하는지 들어보세요, 남작... 저 하늘의 까마귀가 울어대는 소리도 들어보세요, 남작... 그대는 저것이 들리지 않나요...? 어서 들어봐요... 저들이 부르짖는 소리를 말이에요... "
아르투어 남작은 벌벌 떨며 황녀의 두 눈을 바라보지 않기 위해 애썼다. 황녀가 어렸을 적부터 점술과 마법에 빠져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실상을 마주해보니 전혀 과장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지금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 이 세상 모든 만물이 부르짖고 있어요... 이제 곧 늑대의 왕께서 오실 거라 말이에요... 사람의 탈을 두루 쓰고 이 세상을 정화시키기 위해... 곧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보이실 거라고 저들이 외치는 소리가 남작의 귀엔 들리지 않나요...? "
이 여자는 미쳤다! 황녀는 미쳤어!
아르투어 남작은 벌벌 떨면서도 곁눈질로 아이제나흐 공작을 힐끔 바라봤다. 아이제나흐 공작 역시 소리 없이 흐느끼며 그 자리에 엎드려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프레데리카 황녀가 아르투어 남작을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 숙부에게 가서 전하세요... 쓸데없는 권력욕은 집어던지고 남은 여생이나 충분히 즐기시라구요... "
프레데리카 황녀의 축객령에 아르투어 남작이 황급히 일어나더니 그 자리를 허둥지둥 쏜살같이 빠져나갔다. 그런 남작에게 관심 없다는 듯 황녀의 두 눈이 한없이 작아진 아이제나흐 공작을 내려다봤다.
마치 포획물을 바라보는 듯한 포식자의 분위기를 풀풀 풍기면서 말이다.
튜튼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레오폴트 5세가 오랜만에 '대공의 정원'을 찾았다. 푸른빛이 일렁이는 연못의 풍경을 감상하면서 황제는 뒤에 서있던 슈테판 하이드리히 남작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 나도 이제 나이가 들어서인지... 많이 우유부단해진 것 같네... "
" 폐하께서는 아직 정정하십니다... "
" 젊은 시절의 결단력이 이렇게 아쉬울 줄이야. 종양은 일찍 제거할수록 좋은 법인데 여태까지 질질 끌고 왔군 그래... "
슈테판 하이드리히 남작은 지금 황제가 2황자에 대한 미련으로 인해 결심을 미루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알메리아의 총독에게서 꾸준히 올라오고 있는 보고에 의하면 2황자는 열정적인 태도로 3군 부사령관직의 책무를 수행해오고 있었는데, 알메리아 저항 세력이 노린 몇 번의 암살 시도를 물리치고 알메리아의 안정에 심혈을 기울이던 2황자의 모습은 무사태평한 1황자와도 자연스럽게 비교될 수밖에 없었다.
남부의 종양 덩어리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는 전략을 취해야만 하는데... 정작 황제는 그 결심을 계속해서 미루고 있으니...
내심 그 결단력을 아쉬워하던 하이드리히 남작에게 황제가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며 물었다.
" '까마귀'와는 계속 연락을 취하고 있는 건가...?"
" '그'는 여전히 폐하의 결심이 서는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폐하. "
황제가 말한 '까마귀'라는 존재는, 항상 음침한 검은 제복을 입고 다녀 세간에 까마귀라 불리던 제국 보안청 수사관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황제가 남부의 귀족들을 제거하기 위해 준비해 둔 최후의 '패'라 할 수 있는 그의 존재를 아는 이는 사실상 여기 있는 황제와 하이드리히 남작, 그리고 황제를 근접 호위하는 할버슈타트 백작밖에 없었다.
하이드리히 남작은 뒷짐 지고 서있던 황제에게 넌지시 이야기를 꺼냈다.
" 곧 오펠만 부국장이 좋은 소식을 갖고 올 겁니다. 남부의 종양을 옭아맬 선물을 말입니다... "
" 하지만 막다른 구석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무는 법이네. 자칫 잘못하다간 오히려 우리가 당할 수도 있어... "
" 그렇다 해도 명분에서 뒤지는 그들에겐 승산 없는 싸움이 될 게 뻔하지요... 우리는 그 명분만 잡고 있으면 됩니다, 폐하... "
" 명분이라...허허! 하이드리히 남작... 자네는 정말 내가 아끼는 친구이긴 하지만, 가히 자네 같은 '악당'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네... "
악당이 뭐가 대수인가...! 스스로의 신념을 위해서라면 더한 짓도 할 수 있다 생각하던 하이드리히 남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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