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꾼(2)
하인츠 하르바르트 대위가 자신의 신분을 솔직하게 밝히자 저항 세력의 조직원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었다.
" 제국의 장교였다니! 함정입니다! 우리가 속았어요! 이제 곧 놈들이 이곳으로 몰려올 게 분명합니다, 아쿨라 님! "
" 잠시만 조용히 있게! "
그들의 수장인 아쿨라가 소란을 떨던 수하들을 조용히 시킨 뒤, 자신을 제국군 장교라 소개한 하르바르트를 다소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도대체 저 작자는 무슨 속셈으로 자신의 정체를 이리도 쉽게 드러낸 것인가...
아쿨라는 철창 가까이 바싹 다가서며 하르바르트를 노려봤다. 어쨌든 그가 제국군 장교로 밝혀진 이상 그는 이곳에서 살아나갈 수 없었다.
" 도대체 이유가 무엇인가? 데메드리오를 여기까지 데려오고... 그대의 정체를 우리에게 밝힌 이유 말이다! "
하르바르트는 지금 이 순간이 머리를 최대한 굴려야 하는 시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사기를 칠 때에도 상대방의 마음을 한차례 뒤흔들어 놓고 시작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하르바르트는 이렇게 자신의 진정한 신분을 밝힘으로써 아쿨라와 그 수하들의 마음이 혼란한 상태라는 것을 확인하자 일부러 태연한 모습을 가장한 채 입을 열었다.
" 데메드리오 씨에게 제 정체를 속인 점에 대해서는, 일단 그분에게 죄송하다는 말씀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제 신분을 정직하게 밝혔다면 데메드리오 씨는 분명 저를 의심했을 겁니다. 게다가 저 역시 모종의 임무를 띠고 이렇게 정체를 속인 채 여기까지 올 수밖에 없었으니, 부디 제 정체를 속인 점에 대해서 양해를 해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
" 모종의 임무라니... 그게 대체 무슨...? "
하르바르트는 사기를 치려면 최대한 거창하게 치는 것이 때로는 먹힐 때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 사실 저는 알메리아를 방어하는 제3군의 부사령관이자 튜튼 황실의 고귀한 혈통이신 '지기스문트 빌헬름' 황자 전하로부터 막중한 임무를 지시받아 이곳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
하르바르트가 당당하게 거짓말을 내뱉자 일순간 좌중이 조용해졌다. 난데없이 '황자'라는 거창한 존재가 하르바르트의 입에서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모두들 충격을 받고 크게 놀란 가운데, 그들의 수장인 아쿨라가 냉정을 되찾고 하르바르트에게 냉소를 날리며 말했다.
" 이제 보니 허풍쟁이였군... 그런 허튼소리를 우리가 믿어줄 거라 생각했는가...? "
" 허튼소리인지 진실인지는 여러분이 판단하시면 되는 겁니다. 다만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제 신분이 제국군 장교라는 것과 제가 직접 황자 전하로부터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았다는 겁니다. "
절반은 진실이고 절반은 거짓말인 하르바르트의 이야기에 아쿨라가 철창에 더욱 가까이 다가섰다. 하르바르트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얼굴을 가까이 대하며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 그대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겠나...? "
" 안타깝지만 제 말을 증명해줄 수 있는 수단은 이 자리에 없습니다. 황자 전하께서 내리신 임무가 워낙 비밀스러운 것이라 엄중한 보안을 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르바르트가 이렇게까지 말하자 아쿨라는 대체 그 임무란 것이 무엇인지 내심 궁금해졌다. 계속 두드리면 열린다는 말이 있듯이, 하르바르트가 쉴 새 없이 내뱉는 거짓말에 아쿨라를 비롯해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속아 넘어가기 직전의 상황이었던 것이다.
" 그럼 자네가 맡고 있는 임무란 게 대체 무엇인지 설명해줄 수 있겠나...? "
" 그 전에... 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당신의 신분에 대해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당신이 황자 전하의 전언을 들을만한 위치에 있는지 그것부터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
" 나는 알메리아 독립 사령부 휘하 아볼로니아 지역 해방군의 책임자인 아쿨라라고 하네. 이만하면 되었는가? "
하르바르트는 앞에 있는 사내가 의외의 거물이라는 사실에 놀라면서도 내심 이 상황을 빠져나갈 궁리를 했다. 지금 그는 완연히 오우거의 등에 올라 탄 신세나 다름없었다.
" 그럼 주위 사람들을 전부 물려주십시오. 황자 전하의 전언은 알메리아 독립 세력 중 결정권을 가진 최상위층만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
하르바르트의 거짓말이 먹혀들었기 때문일까...
아쿨라가 뒤에 있던 조직원들에게 잠시 나가 있으라 명을 내렸다. 그들 역시 하르바르트의 입에서 과연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궁금해했지만 어쩔 수 없이 건물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 이제 이 곳엔 우리 둘밖에 없으니 어서 말해보게나, 자네의 임무가 무엇인지를 말이야. "
경보병 중대의 정찰대원들이 전해온 보고를 받은 비다르가 전 대대에 출동을 명령했다. 그 명령에 따라 4개의 중장갑 보병중대 800여 명과 석궁중대 200여 명, 경보병 중대 200여 명을 포함한 대대 병력 전원이 일제히 바로고스 삼림 지대로 향했다.
비다르는 우선 속도가 느린 중장갑 보병들의 총괄 지휘를 수석 장교이자 1중대장인 한스 만스펠더 소령에게 맡긴 뒤, 자신이 직접 경보병 중대를 이끌고 바로고스 삼림 지대로 빠르게 이동했다. 그런 비다르를 호위 기사 아이두르 시구르드손과 용병대장 마르쿠스 구스타프슨이 좌우에서 수행하며 따라나섰다.
그렇게 쉴 틈 없이 이동한 그들이 바로고스 삼림 지대에 도착한 때는 막 저녁을 넘긴 시각이었다. 적의 본거지를 정찰하고 돌아온 정찰대원으로부터 저항 세력의 본거지 위치를 대강 전해 들은 비다르는 곧장 적의 본거지를 소탕할 작전을 계획하려 했지만, 그런 비다르에게 용병대장 구스타프슨이 적절히 조언을 하고 나섰다.
" 지금 같은 애매한 시간대에 움직이는 것보다는 동틀 무렵에 기습을 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입니다. 게다가 본대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니 새벽이 될 때까지 기다리며 휴식을 취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
비다르는 구스타프슨의 의견을 받아들여 부대원들에게 휴식을 명한 뒤, 정찰대원들에게 좀 더 명확한 정보를 가져오길 명했다. 특히 적진에 있는 하르바르트 대위를 무사히 구출해내야 했기에, 비다르는 특별히 자신의 호위 기사인 시구르드손에게 지시를 하기에 이르렀다.
" 적의 본거지 주변엔 분명 경계 병력이 깔려 있을 것이다. 그것을 뚫고 들어가 하르바르트 대위를 구출할 수 자신이 있나...? "
"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비다르 님! "
시구르드손이 노련미를 뽐내며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는 기사이기 이전부터 티롤-칼마르 지역에서 꽤나 유명한 용병이었고, 이런 은밀한 임무를 맡기에도 적당한 인사였다.
" 지기스문트 빌헬름 전하께서는 알메리아의 '자치'에 대해 논할 준비가 되어있다 특별히 말씀하셨습니다. "
하르바르트 대위는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거짓말을 술술 내뱉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아쿨라는 그런 하르바르트의 거짓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 '자치'라고 했는가? 우리 알메리아 독립군은 알메리아의 '자치'가 아니라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네! 고작 '자치'를 얻기 위해 우리가 이토록 피를 흘려가며 싸운 줄 아는가! "
하르바르트가 처음부터 '독립'이 아닌 '자치'라 말한 것은, 대뜸 '독립'이란 단어부터 꺼내면 오히려 의심을 살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르바르트는 아쿨라가 자신의 거짓말에 거의 넘어왔다는 것을 알아채고 더욱 뜸을 들였다.
" 물론 각자의 사정이 있기에, 당사자들이 직접 대면해 그것을 논의하자는 것이 지기스문트 황자 전하의 생각이십니다. 그것이 알메리아의 자치이든, 독립이든 간에 말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는 비밀리에 성사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이 황자 전하의 생각이십니다. "
" 비밀리에 성사되어야 한다니... 그럼 그것이 제국의 공식 입장이 아니란 말인가...? "
" 아직까지는 황자 전하의 생각일 뿐입니다. 그래서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제가 이렇게 직접 여러분과 접촉을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 하지만 황자의 생각은 그저 생각일 뿐! 대체 그에게 무슨 힘이 있다고 우리 알메리아의 자치를 논한다는 말인가! "
하르바르트는 사기를 치려면 아는 것도 많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다행히 그는 제국의 정세에 대해 평소에도 관심 있게 바라보던 사람 중 하나였기에, 지금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머릿속에서 끄집어내 풀어낼 수 있었다.
" 물론 지금의 지기스문트 황자 전하께 그럴만한 힘이 없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게다가 다음 제위의 승계 구도에서도 카를 루트비히 황자 전하에게 다소 밀려있는 상황이니 오죽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지기스문트 황자 전하께서는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반전시키기 위해, 이곳 알메리아 지역에 부사령관으로 부임하시어 공을 세우고 명성을 드높여 다음 제위에 오르는 것을 최대 목표로 삼고 계십니다. 하지만 귀하께서도 알다시피... 유감스럽게도 얼마 전에 황자 전하께서 안 좋은 일을 당하셨지요..."
2황자가 습격을 받아 부상을 입었다는 사실은 아쿨라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이번에 알메리아 전역에서 펼쳐졌던 대대적인 기습 작전의 시작점이 바로 2황자 습격 작전이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2황자에게 그런 결정권이 없다는 것은 여전히 사실이고, 지금의 상황이 절대로 변하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네! "
" '적'일수록 더욱 가까이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지금 같은 경우에 해당되는 적절한 말이라 생각되는군요... 그러니 일단은 황자 전하의 제안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만약 이 자리에 2황자가 있었다면 하르바르트의 거짓말에 분통을 터뜨리며 단칼에 하르바르트의 목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하르바르트는 지금 목숨을 걸고 사기를 치고 있는 중이었다.
" 그 제안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
이제는 냉철한 아쿨라마저도 하르바르트의 그럴듯한 거짓말에 넘어가 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알메리아의 독립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 그에게 지금 한줄기 서광과도 같은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르바르트는 잘 모르고 있었지만 얼마 전에 있었던 작전으로 인해 알메리아 독립군 전력의 상당한 인력과 물자가 소모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아쿨라로서는, 이제 더 이상 피를 흘리지 않아도 이처럼 일이 해결되려는 실마리가 보인다는 사실로 인해 이처럼 쉽사리 속아 넘어간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보게 마련이지...
" 일단 중요한 것은 알메리아가 안정되어, 그 공로를 인정받은 황자 전하께서 제위에 오르는 것이 제일 급선무입니다! 그 다음에야 황자 전하께서 힘을 갖고 알메리아의 자치든, 독립이든 허락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 우리 알메리아의 독립은 허락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네! "
" 물론 귀하의 생각을 존중하는 바입니다만 현실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여러분 스스로 제국에 맞서 독립을 쟁취할 가능성이 낮다는 것을 귀하께서도 잘 알고 계시잖습니까! 차라리 귀하를 포함한 알메리아 독립군 여러분께서 우리 황자 전하께 협력만 해 주신다면... 다소 시간은 걸리겠지만 알메리아의 자치 혹은 독립을 얻는 것이 그리 어렵지만은 않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쿨라는 하르바르트가 말하는 뜻이 무엇인지를 대충이나마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하르바르트가 말하고 있는 내용은 알메리아의 저항 세력이 2황자에게 은밀히 협력해 알메리아 전역의 안정화를 이루는데 도움을 준다면, 그것으로 황제의 신뢰를 얻은 2황자가 나중에 제위에 오르고 나서 알메리아의 독립이나 자치를 전적으로 승인해 주겠다는 일종의 '제안'이었던 것이다.
하르바르트의 이야기에 아쿨라는 한동안 침묵을 지킨 채 곰곰이 생각을 거듭했고, 그런 그를 바라보던 하르바르트는 속이 까맣게 탈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에 들어있던 잡다한 지식들을 끄집어내 그럴듯한 이야기를 꾸며내기는 했지만, 조금만 정신을 차리고 냉철함을 유지한다면 하르바르트의 거짓말에 빈틈이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기꾼의 속내를 까맣게 모른 채, 아쿨라는 하르바르트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이는 혼자서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은 독립군 지휘관 중 하나일 뿐이었고, 이런 협상은 알메리아 저항 세력의 수뇌부에서 나서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 일단... 그대가 해준 이야기를 우리 측 수뇌부에 전해 보기는 하겠네. 자네의 말이 진실이라면 자네 목숨은 부지할 수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당장 그 목을 베어 자네가 있던 부대로 보내버릴 테니 그리 알고 있게나! "
아쿨라가 복잡한 마음을 뒤로하고 건물 밖으로 나가자 하르바르트는 그제야 참았던 한숨을 뱉어낼 수 있었다. 다행히도 당분간 자신의 목숨을 걱정할 일은 없어 보였다.
그건 그렇고 이 녀석들은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지금 이 순간만큼은 평소에 티격태격하던 발타자르 대위의 모습이 간절한 하르바르트 대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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