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멸렬(2)
" 적들이 우리 의도에 말려든 것 같습니다, 사령관 각하."
마침 벨지크 왕국군이 일제히 돌격해오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선 슈테틴 중령이 곁에 있던 술라 남작에게 입을 열어 말했다. 뭔가에 홀린 듯 성급하게 공격을 해오고 있던 왕국군을 바라보며 술라 남작 역시 고개를 끄떡이더니, 그 뒤에 서있던 전령들에게 각각 지시를 내리기에 이르렀다.
" 즉각 내 이름으로 각 군단장들에게 위치를 고수하며 왕국군의 공격을 저지하라고 전하라. 그리고 아군의 기병연대가 멀찍이 우회해 적 후방을 타격하는 즉시 반격에 나서야 한다는 것도 명심해야 한다고 전할 수 있도록!"
술라 남작은 프란츠 남작으로부터 적 진영에 벨지크 왕국의 왕세자가 머무르고 있다는 정보를 전해 듣고 기병대를 동원해 적의 중심부를 타격한다는 작전을 수립해 놓은 상태였다. 앞서 프란츠 남작에게 말했듯이 전쟁을 한시바삐 종결시키기 위해서는 속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술라 남작은, 이번 전투 역시 일찌감치 끝내버리기 위해 기병대를 대대적으로 동원해 적의 후방을 강타하는 작전을 세워놓고 있었다.
이윽고 우레와 같은 함성을 지으며 돌격해온 벨지크 왕국군 병사들이 제국군의 대형과 부딪히며 곳곳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마침 드넓은 리에주 평원을 가득 메운 병사들이 창검을 휘두르며 격렬한 움직임을 보일 때마다 가을 햇볕에 반사된 갑옷과 창검의 빛살이 멀리서 이를 관전하고 있던 프란츠와 오스발트 남작에게까지 목격될 정도로 전투는 그 치열함을 더해가고 있었다.
" 만약 이번 전투에서 승리를 한다 해도 사령관은 분명 우리를 다른 곳으로 파견 보낼 것이 틀림없소."
마침 전투를 관전하다 난데없이 뜻 모를 이야기를 중얼거린 오스발트 남작으로 인해, 그 곁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광경을 함께 주시하고 있던 프란츠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 다른 곳으로 파견 보낸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오스발트 남작님?"
" 프란츠 남작 그대도 지금쯤이면 눈치채고 있을 거 아니오? 황실과 군부에서 우리를 리에주 평원의 벨리유 마을에 떨어뜨려놓고 방관했던 이유를 말이오."
" 그것은... 제2군의 별동대로서 벨지크 왕국군의 지원군을 돈좌시키기 위해..."
선뜻 대답을 하려다 망설인 프란츠는 자신들에게 부여되었던 임무의 배경에 도사린 음모에 대해 내심 믿고 싶지 않은 듯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설마 상부에서 자신들의 죽음을 바라고 사지로 보내지는 않았을 거라는 믿음을 끝내 놓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잠시 말문을 멈춘 프란츠를 바라보고선 오스발트 남작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어 말했다.
" 설마 총사령부에서 우리에게 설명해준 임무의 '배경'을 아직도 믿고 있는 것이오, 친애하는 프란츠 남작? 그 임무 때문에 2400여 기의 기병 중 단 500여 기의 기병만이 살아남았는데도 말이오?"
황실과 군부의 음모를 확신하는 듯한 오스발트 남작의 이야기에 프란츠는 이곳 리에주 평원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자이들리츠 자작과 홀슈타인 기병들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내심 괴로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특히 소년이던 시절부터 자이들리츠 자작의 지도하에 기병 훈련을 받아왔던 프란츠로서는 그때의 일이 이미 빛바랜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는 사실에 비통한 심정 역시 감출 수 없었다.
" 정말... 우리가 이곳에서 죽기를 바란 자들이 있단 말입니까...?"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프란츠의 태도에 오스발트 남작이 작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평범한 이들이야 서로 다투다가도 화해를 할 순 있다고 하지만, 권력을 갖고 있는 자들이 서로 다툰다면 절대로 화해라는 것을 할 수가 없소이다, 프란츠 남작. 물론 적의를 숨긴 채 가식적인 얼굴로 서로를 대할 수는 있겠지만, 한번 생긴 앙금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 법! 더욱이 한번 권력에 맛을 들인 자들은 자신이 가진 힘에 만족하지 못한 채 더 큰 권력을 탐하는 것이 바로 이 바닥의 자연스러운 이치라 할 수 있지. 친애하는 프란츠 남작, 아무리 그대가 권력에 관심이 없다 해도 그대는 남부의 대영주이신 로트링겐 공작 전하의 친혈육이오. 그리고 이 권력 싸움에서 발을 빼고 싶다 해도 우리 남부에 적의를 갖고 있는 자들은 결코 그대를 포함한 그대 주변의 인물들을 절대로 가만 놔두지는 않을 거라는 것을 알아두었으면 좋겠소."
" 저는 그런 싸움엔 휘말리고 싶지 않습니다, 오스발트 남작님. 그리고... 저는 반드시 제 기병대를 이끌고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입니다. 오스발트 남작님께서 저를 어찌 생각하실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오히려 평범한 축에 속한다 할 수 있으니 그런 말씀은 말아주십시오."
역시 로트링겐의 혈통은 어디 가는 것이 아니었군...
권력 싸움에서 한발 물러선 로트링겐 공작을 생각하며 오스발트 남작이 재차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전투가 벌어지고 있던 현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찌 보면 프란츠를 철이 없거나 순진하다고 생각할 수 있었지만, 오스발트 남작은 권력에 연연하지 않는 프란츠의 모습에 새삼 자신이 속물처럼 느껴진다는 생각에 그만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 힘겨루기 양상으로 전투가 전개되는 듯했지만, 제국군의 후방에 머무르고 있던 두 개의 기병연대가 측면으로 크게 우회해 아라곤 왕국군의 배후와 측면을 강타하면서 전투의 양상이 순식간에 변하기 시작했다.
" 적 기병대입니다! 적들이 이곳으로 들이닥치고 있습니다!"
마침 측면의 지평선 너머에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제국의 기병대가 왕국군 후미에 위치한 수뇌부 쪽으로 돌격해 들어오자, 어느 근위 기사 하나가 악셀시오르 왕세자와 방데 남작에게 큰소리로 외치며 이를 알려왔다.
" 소란 떨지 마라! 우리 벨지크의 기병들이 적들을 견제할 것이다!"
벨지크 왕국군의 수장인 방데 남작이 소란스러워진 분위기를 진정시키려는 가운데, 낯빛이 창백해진 왕세자가 말고삐를 잡더니 자신을 호위하고 있던 자노 남작과 근위 기사들에게 후방으로 물러날 것을 재촉하고 나섰다.
" 뭐하는 것이오! 적들이 곧장 이곳으로 몰려오고 있는데 언제까지 나를 이렇게 무방비로 방치할 것이오!"
" 저... 저하, 진정하십시오! 적 기병들은 충분히 막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방데 남작이 두려움에 떨던 왕세자를 진정시키려는 가운데, 그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2400여 기에 달하는 제국군 기병들이 숫적 우세를 점한 상태에서 왕국군 기병들을 순식간에 집어삼키더니 이내 왕국군의 중심부를 치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 저... 저... 저리 비켜라!"
마침 왕세자의 호위 병력이 기병들에게 맞서기 위해 방어 대형을 구축하려던 찰나, 악셀시오르 왕세자가 기어코 두려움을 참지 못한 나머지 말머리를 돌려 후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 와... 왕세자 저하!"
순간 왕세자를 호위하던 자노 남작이 대경실색한 나머지 근위 기사들과 함께 왕세자를 뒤따라 달려 나갔고, 왕세자에게 호감을 품고 있던 푸른 십자성 기사단의 부단장인 마르몽 남작 역시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혹시라도 모를 추격을 막아내기 위해 기사들을 이끌고 왕세자의 뒤를 따라 달려 나갔다.
그렇게 왕세자가 달아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나마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던 방데 남작을 비롯한 왕국군 수뇌진들은 이 기막힌 사태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이 사태에 놀란 것은 왕국군 수뇌부뿐만이 아니었다.
그동안 병사들의 우상이자 희망과도 같았던 왕세자가 무책임하게 자리를 이탈하고 도망을 치게 되자, 마침 그 모습을 발견한 후미의 병사들 사이에서 어수선한 분위기가 흐르기 시작했고 이내 그 분위기는 앞열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있던 병사들에게까지 번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 왕세자 저하께서 도망치셨다!"
이내 왕국군의 후미를 유린하던 제국군 기병대로 인한 공포심이 전 부대로 번지고 있던 가운데, 왕세자의 도망 소식을 알게 된 왕국군 병사들이 서서히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마침 전의를 상실해가던 왕국군을 제국의 군단병들이 전진하면서 밀어붙이기 시작하자, 이내 승부의 추가 제국군 쪽으로 기울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 저것 보십시오! 좌측의 8군단이 적 대형을 돌파하고 있습니다!"
마침 술라 남작의 참모인 슈테틴 중령이 큰 목소리로 외치자, 제2군 사령관 술라 남작이 고개를 끄떡이더니 지휘봉으로 왕국군의 후미 쪽을 가리키며 외쳤다.
" 우리 측 기병대가 적 후미를 휘젓고 있으니 지금이야말로 적들을 일제히 밀어붙여야 하는 순간이다! 전 부대에게 돌격 신호를 알릴 수 있도록!"
술라 남작의 지시에 따라 제2군의 전 기수들이 공격 깃발을 펄럭이며 뿔고둥을 울리자, 총 3개 군단 병력이 방어 대형에서 일제히 공격 대형으로 전환하며 왕국군 병사들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이처럼 순식간에 전투의 양상이 급변하게 되자 이내 전의를 상실한 왕국군 병사들이 뒤로 물러서려는 모습이 속출되었고, 이 사태를 막기 위해 왕국군 총사령관인 방데 남작은 좌측의 만인대를 맡고 있던 기샤르 남작에게 전령을 보내어 후위 부대의 임무를 떠맡기려 했다.
" 뭣이? 내게 후위 부대의 임무를 맡긴다고?"
이 급박한 상황 속에서 방데 남작의 전령을 맞이한 기샤르 남작은 순간 이곳까지 오면서 내내 불편한 관계에 있었던 베르돈 남작의 얼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전투에서 먼저 밀리기 시작한 쪽은 제국군 8군단과 대치하고 있던 우측의 베르돈 남작의 부대였는데, 그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작자가 후퇴하는 것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부대가 후위 부대 역할을 떠맡아야 한다는 사실에 맹렬한 분노를 터뜨린 기샤르 남작이 이내 전령에게 자신의 의사를 밝히고 나섰다.
" 적들에게 먼저 밀리기 시작한 쪽은 분명 우측에 있던 베르돈 남작의 부대인데 그 뒤처리는 내가 맡으라는 것인가! 이런 부당한 명령은 절대 들을 수 없다고 사령관에게 가서 전하라!"
이내 당황한 기색의 전령이 그 자리를 떠나자, 사령관 방데 남작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기샤르 남작이 곧장 후퇴 명령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곧 왕국군 대형의 좌측에 있던 기샤르 남작의 부대가 전장의 후방 지역으로 이탈해 후퇴하려는 듯하자, 그 측면에 위치한 중앙의 왕국군 대형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마침 우측에 있던 베르돈 남작의 부대 역시 파트리크 야넬트 장군이 지휘하던 8군단의 맹공격에 의해 붕괴되면서 벨지크 왕국군 대형 전체가 무너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마침 뒤로 후퇴하기 시작하던 왕국군을 뒤쫓아 전과를 확대해가던 제국군을 지켜보며 술라 남작이 투구를 벗어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 기병들을 죄다 투입시킨 보람이 있었군, 때마침 적 진영에 왕세자 같은 거물까지 있었으니..."
"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사령관 각하. 벨지크 왕국의 가장 강력한 예비대라 할 수 있는 중앙군을 격파하게 되었으니, 이제 적국의 수도인 네벨레스까지는 아무런 방해 없이 진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슈테틴 중령이 축하의 말을 건네 오자, 술라 남작이 기묘한 빛을 띤 눈빛으로 전방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 아직 전투가 끝난 것이 아니라네, 슈테틴 중령. 일단 차후에 적이 활용할 수 있는 병력은 남김없이 소탕해야 마땅할 것이야."
하지만 이 드넓은 리에주 평원에서 두 발로 뛰어다니는 보병들은 결코 기병들의 추격을 따돌릴 수 없다는 생각에 그만 해맑은 미소를 지어 보인 '미친개' 술라 남작은, 문득 처치 곤란한 존재들이라 할 수 있는 홀슈타인 기병대와 바르텐슈타인 기병대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미소를 거둘 수밖에 없었다. 수만여 명의 적들을 상대하면서도 기어코 살아서 돌아온 그들을 생각하며 술라 남작은 그들의 처리를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의 고민을 하늘이 대신 풀어줄 모양이었는지, 마침 먼 곳에서 달려온 듯 먼지를 가득 뒤집어쓴 전령 하나가 달려와 슈테틴 중령에게 서신 하나를 건네 왔고 이내 중령이 그것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 4군단장 바이센베르거 장군이 보내온 서신입니다. 뵈르네의 중심인 '알루에뜨'를 점령했다 하는군요. 그리고..."
서신을 읽고 있던 슈테틴 중령이 갑자기 눈치를 보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자 술라 남작이 의구심을 품고서 그에게 물었다.
" 대체 무슨 일인가? 서신에 또 다른 내용이 있는 것인가?"
" 그것이... 연대 지휘관으로 있는 대령 하나가... "
말문을 멈춘 슈테틴 중령에게서 서신을 받아든 술라 남작이 그것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 이게 뭐야...? 동원연대 2개를 '강탈'해...?"
Commen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