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살인
제국의 수도 쾨니히스베르크는 수백만의 인구가 모여 살고 있는, 아마시아 대륙 제일의 대도시였기에 단 하루라도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 날이 없었다. 더욱이 도시가 그 주변 지역을 잠식해가며 영역을 넓혀 나갈수록 인구의 유입도 많아질 수밖에 없었기에, 각종 범죄 사고가 증가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러한 상황을 방지하고 예방하기 위해 존재하는 정부 조직인 '제국 치안청'은 제국의 관공서 중에서도 제일 바쁘고 유난스러운 행정기관이라 할 수 있었다.
루터 자이스 경사(警査)는 제국 치안청 수사 5과에 소속된 고참 수사관이었다. 제국 황실령 리보니아 태생으로, 평범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리보니아 지방 치안대에 지원을 하게 되면서 그 인생이 180도 달라지게 되었다.
어쩌면 평범한 농부가 되어 한적한 삶을 살아갈 수도 있었지만, 루터 자이스는 자신의 운명은 스스로 개척한다는 정신으로 자신의 길을 걸어갔고, 다행히 치안대 임무가 적성에 맞았는지 몇 가지 실적을 올리며 진급을 거듭한 끝에 결국 제국의 수도 쾨니히스베르크에 위치한 제국 치안청 수사관으로 부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밤 쾨니히스베르크의 대표적인 유흥가라 할 수 있는 크로이네 지역에서, 폭력 조직 간에 다툼이 벌어져 밤늦게까지 이를 수습해야 했던 자이스 경사는 지금 이렇게 때늦은 출근을 즐기며 치안청사로 향하는 중이었다. 곧 점심시간이었기 때문에 거리에는 때 이른 점심 식사를 하러 나온 관료들로 붐비고 있었지만, 자이스 경사는 느긋하게 휘파람을 불어대며 거리의 인파를 요리조리 피해 걷더니 이내 치안청사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렇게 치안청사 입구로 막 들어서려던 자이스 경사는 마침 안에서 급히 뛰어나오던 후배 수사관 욀스 경장과 몸을 부딪히고 말았다.
" 어이쿠! 이봐, 욀스! 조심 좀 하면서 다니라구, 이 친구야! "
" 죄송합니다, 선배님! 지금 좀 바빠서 그만... 그런데 지금 출근하시는 겁니까? "
" 그래, 어젯밤에 일이 좀 많았잖나! 그래서 이렇게 쉬엄쉬엄 오는 길이지... 그런데 자네 지금 무슨 일로 그리 바삐 나가는 건가? "
지각한 주제에 꽤나 뻔뻔한 태도로 나온 자이스 경사였지만, 욀스 경장은 그런 것엔 전혀 신경 쓸 틈이 없을 정도로 바빠 보였다.
"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는 것 외에는 저도 아는 게 별로 없습니다. 과장님은 이미 출발하셨구요. "
" 아니, 헤르만 과장이 직접...? 도대체 누가 죽었길래 지체 높으신 수사과장님께서 직접 움직이셨나...? "
" 쾨슬린 폰 슈바이드니츠 경입니다. 아일라우 자작의 셋째 아들이죠. "
" 젠장... 아침부터 제대로 똥 밟았군... "
살인 사건의 피해자는 바로 귀족가의 자제였다. 귀족들이 범죄사건의 피해자나 피의자가 되는 경우, 수사관들이 사건 조사를 위해 움직이려 해도 상부에서 각종 제약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대개 이런 사건을 파헤치다 보면 귀족들의 사생활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결국 수사관들은 아무것도 조사해보지 못한 채 그저 사건이 흐지부지되는 것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고, 대개 이런 사건이 터지는 경우 자조적인 자세로 임할 수밖에 없었다.
수도 쾨니히스베르크를 관통하는 아펜첼 강의 북쪽 강변에는 귀족들의 고급 별장이 유난히도 많았다. 도시의 북쪽 외곽에 우뚝 솟아있는 아이젠그라트와 어울린 아펜첼 강변의 경치가 무척이나 아름다웠기 때문인데, 수도 쾨니히스베르크에 저택이 없는 지방 귀족이라 해도 이곳 아펜첼 북쪽 강변에는 따로이 별장을 두는 경우가 많았다.
이처럼 아펜첼 북쪽 강변의 경치는 지방 귀족들마저도 그 입지를 탐낼 정도로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아름다운 경치와는 어울리지 않는 어수선한 분위기가 이곳에 흐르고 있었는데, 귀족들이 모여 사는 지역 특유의 고요한 분위기를 어지럽히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바로 슈바이드니츠 자작의 별장 건물 주변을 서성이며 조사를 하고 있던 치안청 수사관들이었다.
문제의 사건 현장이라 할 수 있는 별장의 주인은 바로 란도프 폰 슈바이드니츠 자작이었다. 슈바이드니츠는 제국 제일 최남단의 루돌슈타트 공작령 브라운슈타인 주(州)에 위치한 봉건 영지 아일라우를 통치하는 자작 가문이었는데, 황실과 대립하는 남부 귀족 특성상 수도 쾨니히스베르크에 따로이 저택을 두고 있지는 않았지만 이 곳 아펜첼 북쪽 강변에는 별도로 이렇게 가문의 별장을 두고 있었다.
사건의 심각성 때문이었을까. 일반적인 범죄 현장과는 달리 유독 다양한 부서의 수사관들이 모여 있었기에, 이게 뭔 일인지 어리둥절해하던 자이스 경사와 욀스 경장은 그 혼란한 분위기 속에서도 수사 5과의 헤르만 과장을 용케 찾아낼 수 있었다.
" 어서 오게, 루터! 욀스! 점심은 먹고 온건가? "
" 점심이라뇨! 과장님께서 이렇게 고생하고 계신데 저희가 어떻게 식사를 할 수 있겠습니까, 하하! 그런데... 이게 다 뭔 난리랍니까...? "
넉살 좋은 자이스 경사의 질문에 헤르만 과장이 손수건을 꺼내 자신의 벗겨진 정수리 머리를 닦아내며 주위를 둘러봤다.
" 치안청의 '특수 수사과'와 '보안과'에서 죄다 몰려왔네! 다른 때 같았으면 얼굴 보기도 힘든 친구들이 말이야! 여기서 얻어먹을 게 뭐가 있다고 이런 형사사건에 기웃거리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단 말일세...! "
" 저 친구들은 그저 일반적인 형사사건으로는 안보는 모양입니다... "
자이스 경사가 특수 수사과와 보안과 수사관들을 넌지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치안청 특수 수사과는 치안청창의 특별 지시를 받아 움직이는 정예 조직으로, 제국에서 벌어지는 중차대한 사건사고를 담당하는 부서였다. 그에 비해 보안과는 치안청 소속의 방첩 조직으로, 치안청 특유의 정보 수집 능력을 바탕으로 각종 보안 사건을 담당하는 조직이었다. 제국의 또 다른 방첩기관인 '제국 보안청'과는 그 기능이 중첩되었기에, 양 조직 사이의 알력은 은근히 상당하다고 할 수 있었다.
" 혹시... 저 친구들은 이번 사건이 '스틸레토' 와 관계있다고 생각하는 거 아닙니까? "
" 스틸레토...? 그 빌어먹을 테러조직이 관계되어 있다면 보안청 '까마귀'들이 일찌감치 나섰겠지! "
스틸레토(stiletto)는 비토리오 왕국에서 한때 유행했던 단검의 일종이었는데, 가늘고 끝이 뾰족한 검신에 은닉하기 쉬운 크기로 암살자들이 주로 애용하던 무기였다. 그리고 같은 공화주의자들조차 무정부주의자라고 꺼리던 극렬 아나키스트들이 이 단검을 사용해 평민을 착취하는 귀족들을 암살하면서, 세간에는 마땅한 이름이 없던 그들 조직을 '스틸레토'라 부르게 되었다.
우습게도 전장에서 그 '의미' 를 잃어가던 기사들의 존재가 이 스틸레토의 준동으로 다시금 부각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귀족가의 호위 문제를 용병이나 일반 병사가 감당하기엔 힘든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 하긴, 스틸레토가 최근엔 좀 잠잠한 편이긴 하죠. 그럼 이번 사건의 피해자인 쾨슬린 폰 슈바이드니츠는 어떤 인물입니까? "
루터 자이스 경사가 넉살 좋게 헤르만 과장에게 물어왔다. 원래대로라면 자이스 경사가 먼저 사건 현장에 도착해 현장을 수습하고 상급자인 헤르만 과장에게 사건 보고를 해야 하는 것이 정상이었지만, 다들 정신이 없는 와중이었기에 헤르만 과장은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해주었다.
" 아일라우의 자작 슈바이드니츠 가문의 셋째 아들이네. 이제 갓 성년을 넘긴 나이이지. 저택의 2층 발코니에서 목이 부러진 채 죽어있던 걸 그날 밤 같이 있었던 매춘부가 발견한 모양이야. "
" 매춘부요...? "
루터 자이스 경사가 내심 놀라워하며 반문했다.
이제 갓 성년이 된 귀족가의 자제가 가문의 별장에서 매춘부를 데리고 놀다니...
세상 참 말세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보안과에 있는 친구 녀석이 이야기해준 귀족가의 각종 추문들을 생각해 본다면 있을 법한 일이라 자이스 경사는 생각했다. 그런데 헤르만 과장이 더욱 놀라운 사실을 이야기해 주었다.
" 더 기가 막힌 이야기를 해줄까? 쾨슬린 폰 슈바이드니츠는 황립 사관학교의 생도라네. "
" ......! "
이들이 놀라워하는 이유는 별다른 게 아니었다. 과거 튜튼 왕국 시절엔 군부의 장교 인력을 기사와 귀족들이 독점했었지만, 오늘날 튜튼 제국의 군부는 두 가지 경로를 통해 장교의 숫자를 충당해오고 있었다. 군부는 먼저 황립 사관학교를 통해 최정예 장교를 육성하는 한편, 일반 병사와 하사관 중에서 능력 있는 자원을 뽑아 간부사관으로 임관케 하는 방법을 통해 충분한 숫자의 장교 인력을 공급받았던 것이다. 이것은 전대의 황제 하인리히 루트비히 6세가 시행한 평민 등용 정책의 일환으로 고안해낸 방법이기도 했다.
오늘날 머리 좋은 평민 계급 청년들이 출세하기 위해서는 황립 대학에 들어가 우수한 학업 성적을 거두어 교수 추천을 받아 정부 관료가 되거나, 아니면 황립 사관학교에 입학해 장교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황립 사관학교 생도의 대부분은 평민 계급 출신이었다.
물론 귀족가의 자제가 굳이 원한다면 황립 사관학교에 입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가문에서 내다버린 자식이라는 것을 스스로 귀족 사회에 광고하는 것과 다름없었는데, 평민들이나 다니는 교육 기관에 들어가 체통도 잊은 채 평민들과 부대끼며 생활한다는 것 자체를 귀족들이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귀족들 입장에서 이는 위신이 서지 않는 일이었고, 귀족 가문의 자제가 굳이 병사들을 지휘하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 가문의 영지군을 통솔하면 그만이라는 것이 귀족 사회의 통념이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황립 사관학교의 생도 신분인 쾨슬린 폰 슈바이드니츠의 존재는 평민인 헤르만 과장과 자이스 경사가 보기에도 기이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 가문에서 어지간히 '꼴통'으로 생각했나 보군요. 하긴... 가문의 별장에서 창녀를 데리고 놀다가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안 봐도 훤하지요. 그럼 그 창녀는 어찌 되었습니까? "
자이스 경사가 혀를 내두르며 헤르만 과장에게 물었다.
" 그 매춘부가 쾨슬린 경의 죽음을 확인한 건 오늘 새벽이었네. 그런데 신고는 아침에 들어왔지... 자네는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짐작할 수 있겠나...? "
" 그야 뭐... 쾨슬린 경의 호위 기사들이 현장에서 매춘부를 의심하고 닦달이라도 했나 보지요... "
자이스 경사가 심드렁하게 대답하자 헤르만 과장이 고개를 끄떡였다.
" 자네가 맞았네. 호위 대상을 허무하게 잃은 기사들의 심정이야 안 봐도 뻔한 거 아니겠나! 아무튼... 그 매춘부는 지금 인근 치료소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네. 쾨슬린 경의 죽음을 확인한 기사들이 한순간에 눈이 돌아갔던 모양인지... 어지간히 고문을 했던 모양이야... "
" 나쁜 놈들... 창녀라 해도 여성이건만..."
자이스 경사가 분통을 터뜨리며 중얼거렸다.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벌어지는 각종 사건사고를 담당하면서 자이스 경사는 적지 않은 매춘부를 만날 수 있었다. 도시에서 벌어지는 강력 범죄의 상당수가 유흥 시설이 밀집된 지역에서 벌어지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유흥가에 고용된 여자들을 적지 않게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보통 이런 대도시의 유흥가에 고용된 여자들은 지방에서 돈을 벌러 온, 이른바 시골 처녀들이 대다수였다. 그 직업에 얽힌 편향된 시각에서 벗어나 보게 되면, 그녀들 대부분이 꽃다운 나이에 순박한 심성을 가진 여자들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 기사도라는 것도 이젠 옛말이 된 지 오래라는 것을 자네도 잘 알고 있잖나! 사실상 높으신 나으리들의 경호원에 불과한 존재들이 융통성까지 없으면 이런 꼴을 보기 십상이지... "
헤르만 과장이 혀를 내두르며 자이스 경사와 욀스를 데리고 사건 현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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