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습(3)
" 대체 이게 무슨... "
자신의 천막에서 황급히 뛰쳐나온 파비앙이 난데없는 화재로 인해 아수라장이 된 광경을 발견하고서 아연실색한 눈빛으로 사방을 둘러봤다. 마침 벨리유 마을을 감싸고 있던 넓디넓은 밀밭들이 온통 화염에 휩싸여 있었고, 매캐한 연기가 온 사방을 가득 메워 숨을 쉬기조차 힘들기까지 했다.
" 아무래도 후방으로 몸을 피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마침 그의 호위 기사라 할 수 있는 알랭 드보아 경이 황급히 다가와 파비앙을 잡아끌었다. 이미 진짜 왕세자 악셀시오르는 근위 기사들에 의해 마차에 태워져 좀 더 먼 후방으로 이동한 상태였고, 왕국군의 수뇌부 역시 안전을 위해 후방으로 이동을 하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이 황망한 사태를 누군가는 나서서 수습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파비앙이 굳은 얼굴로 드보아 경을 바라봤다.
" 병사들을 챙겨야 합니다, 드보아 경! 병사들을 내버려두고 이대로 몸을 피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 병사들의 통제는 백부장들과 천인장들에게 맡겨도 충분한 일이니 아무 염려 마시고 저를 따라오십시오!"
알랭 드보아 경의 임무는 파비앙의 옆에 달라붙어 그가 왕세자 대역을 충실히 수행하는지를 감시하는 역할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렸을 적부터 봐왔던 파비앙에게 적지 않은 애정을 갖고 있던 드보아 경은 병력의 통제보다도 파비앙을 데리고 후방으로 피신할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이윽고 뜨거운 불길이 벨리유 마을의 농가에까지 번지게 되자, 푸른 십자성 기사단의 부단장인 마르몽 남작이 휘하의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려 인근 농가에 감금되어 있던 포로들 중 피르몬트 남작을 끌어내도록 했다. 자칫 잘못하다가 루돌슈타트 공작의 차남이 불에 타 죽거나 연기에 질식해 죽는 일은 없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벨리유 마을마저 뜨거운 화염에 휩싸이게 될 무렵, 정체불명의 존재들이 이들 벨지크 왕국군의 숙영지를 강타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바로 프란츠가 이끌던 홀슈타인 기병들이었다.
프란츠의 기병대가 벨리유 마을로 들이닥치던 순간, 오스발트 남작의 바르텐슈타인 기병대 역시 그 외곽에 자리잡고 있던 기샤르 남작의 만인대를 유린하고 있었다.
마침 그 주변이 온통 화염으로 휩싸여 난리법석인 가운데, 수백여 기의 기병들이 갑자기 들이닥치자 상황은 더욱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고, 왕국군 병사들이 서로 우왕좌왕하며 기병대에 대항해 싸우랴 불길을 피해 물자를 옮기랴 난장판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 마침 천막에서 나오던 병사들을 그 천막과 함께 송두리째 짓밟아 버린 오스발트 남작의 기병대가 이곳저곳을 돌진하며 왕국군의 숙영지 곳곳을 휘젓고 다니던 중이었다.
이 사실을 아신다면 아버님과 형님이 대경실색하시겠군...
이런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오스발트 남작은 영지에 있을 크로센 공작과 제바스티안 백작을 떠올리며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언제나 자신의 야심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크로센 공작은 정작 자신의 후계자로는 뛰어난 능력에다가 정도의 길을 걷고 있던 제바스티안 백작을 점찍어둔 상태였다. 그리고 공작은 자신의 성향과 쏙 빼닮은 오스발트 남작을 못마땅해하며 멀리하곤 했는데, 어쩌면 자신을 통해 거울을 보는 것만 같은 불쾌한 감정을 느꼈을 것이 분명하다고 오스발트 남작은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서라면 그깟 명예와 기사도 정신마저도 헌신짝 내버리듯이 내팽개칠 수 있는 것이 바로 나인데 말이다...
처음엔 못마땅하게만 느껴졌던 프란츠의 계책이 지금 와서는 은근 맘에 든다고 생각한 오스발트 남작이 마침 저 앞에 보급 물자들을 잔뜩 실은 수레들을 발견하고선 그쪽으로 기병대를 이끌고 돌진해 들어갔다. 수만여 명의 병력도 보급이 끊기면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쯤은 말단의 기병대원들조차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난장판이 되어버린 것은 벨리유 마을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침 프리츠 폰 자이들리츠 경이 이끄는 기병대원들이 마을 내에 감금되어 있던 포로들을 구출하기 위해 따로이 떨어져 나간 가운데, 프란츠가 이끄는 수백여 기의 기병대원들이 화염과 연기로 가득한 그곳을 돌파해 들어가며 경황이 없던 왕국군 병사들을 거침없이 짓밟고 나갔다.
신통하게도 보즈쿠르트 초원에서 태어나고 자란 군마들은 온 사방이 화염과 연기로 가득한 이곳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질주해 나갔고, 왕국군 숙영지 또한 거침없이 유린해버렸다. 더욱이 보즈쿠르트의 군마들이 돌진할 때마다 왕국군 병사들이 그 말발굽에 차이거나 튕겨져 나가는 일이 속출하는 것은 물론, 기병들이 내지르던 매서운 기병창은 방패를 엉거주춤 든 병사들을 통째로 박살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하지만 불꽃이 더욱 거세게 일렁거리며 그 주변을 샅샅이 녹여버리는 듯하자, 마침내 프란츠의 기병대도 그 이상을 근접하지 못한 채 주춤거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용감하고 드센 보즈쿠르트 초원의 군마라 해도 화염의 위력 앞엔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프란츠! 저기 저쪽에!"
그때 마침 라예르베크가 프란츠 곁으로 다가오더니 한쪽을 가리키며 큰소리로 외쳤다. 라예르베크가 가리킨 쪽엔 마침 벨지크 왕실의 문장이 새겨진 깃발 주위로 병력들이 집중되고 있었는데, 그 뒤로는 보급 물자를 잔뜩 실은 수레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어 공격 대상으로 삼기엔 알맞은 표적으로 보였다.
곧 프란츠가 고개를 끄떡이더니 수신호를 통해 기병들을 이끌고 그쪽 방향으로 돌격하기 시작했다. 그곳엔 이미 악셀시오르 왕세자를 보호하기 위해 몰려든 기사와 병사들이 기병들의 돌격에 대비하기 위해 몸을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 적입니다! 제국의 기병대가 기습을 해오고 있습니다!"
어디선가 헐레벌떡 달려온 상급 기사 하나가 파비앙에게 보고를 건네자, 마침 그 곁에 있던 드보아 경이 경악한 눈빛으로 기사를 바라보며 큰소리로 외쳤다.
" 그게 무슨 소리인가? 난데없이 불이 난 것도 모자라 적의 기습이라니!"
" 아무래도 이 부근에 불을 지른 것도 적들의 소행인 듯합니다! 어서 피하셔야 합니다, 왕세자 저하!"
이미 상당수의 병사들이 불길을 피해 왕국군 수뇌부를 따라 후방으로 이동해 있던 가운데, 여전히 많은 병사들이 보급 물자를 챙기느라 분주히 움직이다가 프란츠의 기병대에 의해 쓰러지는 모습이 파비앙의 눈에 들어왔다.
" 적의 숫자가 그리 많지는 않으니 이대로 병사들을 모아 적을 몰아내야만 합니다, 드보아 경!"
파비앙이 단호한 눈빛으로 소리치더니 갑자기 왕실 문장이 그려진 깃발을 들고선 주변의 병사들에게 목청껏 외치기 시작했다.
" 두려워하지 말라! 모두 용기를 내어 창과 방패를 들고서 적과 싸워야 한다! 이런 야비한 기습 정도는 충분히 물리칠 수 있는 것이니 나 '악셀시오르'를 믿고 따르라, 병사들이여!"
마침 그 모습을 지켜보던 기사들이 무모하다는 생각을 하며 파비앙을 말리려 했지만 이내 거짓말처럼 그 주변으로 병사들이 헐레벌떡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들에겐 용기가 없던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이끌어줄 지휘관이 필요했던 것이라 생각한 파비앙은 이내 왕실 문장기를 더욱 높이 들어 병사들에게 잘 보이게끔 흔들어댔다.
하지만 그런 그들을 향해 곧 프란츠가 이끄는 홀슈타인 기병대가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이내 곳곳에서 기병들의 돌격이 이루어지면서 온갖 비명소리가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터져 나온 가운데, 왕국군 병사들의 급조된 대형을 돌파해 들어가던 프란츠가 마침 왕실 문장기를 들고 있던 파비앙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화려한 은백색 판금갑옷에 기사들의 호위를 받고 있던 파비앙의 모습은 프란츠에게도 꽤나 범상치 않은 인물로 보였기에, 그들 뒤로 세워진 수송 수레들을 불태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치워버려야 할 방해꾼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곧 프란츠를 태운 지클론이 그 앞까지 달려가더니 그 앞을 막아 세운 기사들을 기마 충격으로 튕겨 보냈다. 이윽고 말에서 내린 프란츠가 그새 자신을 향해 돌격해오던 기사의 대검을 방패로 흘려보낸 뒤, 간결한 동작으로 대검을 휘둘러 기사의 목 언저리 부분을 찔러 쓰러뜨려 버렸다.
마침 프란츠를 따라 말위에서 내려온 라예르베크와 발터 경마저 프란츠와 기사들 간의 전투에 가세를 하게 되었는데, 특히 용맹한 발터 경은 그 큼지막한 전투용 도끼로 기사들을 무지막지하게 찍어내며 종횡무진 무력을 뽐내고 있었다.
" 뒤로 피하십시오. 싸움은 저희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드보아 경이 날카로운 기운을 뿜어내며 대검을 뽑아 들었다. 하지만 그들 앞에서 근위 기사들을 쓰러뜨리고 있던 이들이 보통 평범한 존재들로 보이지는 않았기에, 드보아 경은 내심 파비앙의 안위가 걱정스러워지기 시작했다.
" 저만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 드보아 경."
기사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파비앙이 두 눈을 빛내며 대검을 뽑아 들었다. 내심 저 앞에서 기사들을 쓰러뜨리고 있던 황금 투구의 기사에게 호승심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파비앙과 프란츠의 싸움은 결코 성사되지 못했다. 그들 사이를 바람처럼 등장한 푸른 십자성 기사단의 기사들이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 커억..."
마침 말 위에서 왕국군 병사들을 기병창으로 쓰러뜨리던 기병대원 하나가 말을 타고 돌진해오던 푸른 기사의 대검에 목이 잘려 고꾸라지고 말았다. 곧 여기저기에서 푸른 십자성 기사들이 전투에 난입하면서 프란츠의 기병들이 그 뒤로 밀려나 주춤거릴 수밖에 없었고, 프란츠 역시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황소 뿔 투구의 기사로 인해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 짐작컨대 귀하가 바로 로트링겐 공작의 차남이라는 프란츠 남작이겠군!"
마침 기사가 자신이 쓰고 있던 투구의 한쪽 뿔을 가리키며 서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예전에 프란츠가 자신도 모르게 베어냈던 뿔의 흔적이 기사의 투구 한쪽에 그대로 달려 있었는데, 영문을 모르던 프란츠는 마르몽 남작을 힐끗 쏘아보며 대검을 치켜세울 뿐이었다.
" 지난번 귀하가 휘두른 검은 제법 매서운 것이었소, 프란츠 남작. 설마 지금 와서 기억 못한다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
대뜸 대화를 나누려는 듯한 마르몽 남작으로 인해 프란츠가 내심 당황해하며 곁눈질로 주변의 상황을 살짝 훑어봤다. 마침 푸른 기사들의 난입으로 인해 전투가 점점 불리해져가고 있던 상황이었다.
"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
그 성향과 어울리지 않게 프란츠가 살짝 빈정거리더니 이내 마르몽 남작을 향해 달려들어 대검을 힘차게 내리쳤다. 그러자 마르몽 남작이 프란츠의 대검을 자신의 방패로 막아내려는 순간, 그 대검이 방패에 튕겨나가는 것을 시작으로 프란츠가 옆으로 몸을 날려 드보아 경의 대검을 자신의 대검으로 쳐내버렸다.
챙!
갑작스러운 기습에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한 드보아 경이 크게 당황한 가운데, 프란츠가 이내 그 반발력을 이용해 다시 한번 더 그 뒤에 있던 파비앙 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자 드보아 경이 프란츠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놀라 경악한 음성으로 소리치며 파비앙 쪽을 바라봤다.
" 왕세자 저하!"
뭣... 왕세자라고...?
그 소리에 흠칫 놀란 프란츠가 파비앙에게로 향하던 대검을 살짝 비틀며 파비앙과 함께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이내 바로 코앞에서 은빛 머리칼로 헝클어진 파비앙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프란츠가 재빨리 파비앙이 쥐고 있던 왕실 문장기를 빼앗더니 몸을 일으켜 그 자리를 피하려 했다.
뭐 저런 당돌한 녀석이 다 있지... 진짜 공작 아들 맞아...?
내심 황당한 표정의 마르몽 남작이 대검을 들고 프란츠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마침 그 앞을 황소와도 같은 발터 경이 가로막으며 도끼로 마르몽 남작의 방패를 힘차게 내리찍었다. 그 충격에 마르몽 남작이 잠시 뒤로 물러선 때를 놓치지 않고 프란츠가 발터 경과 함께 황급히 말 위에 오르더니 기병들과 함께 쏜살같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마침 시뻘건 화염이 그 자리에까지 미치려는 듯하자, 드보아 경이 황급히 파비앙을 일으켜 세우며 다친 곳이 없는지를 확인하려고 했다.
" 난 괜찮아요, 드보아 경. 그보다... 우리도 어서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야 합니다!"
파비앙의 말에 드보아 경이 고개를 끄떡이더니 이내 주변의 기사들과 병사들을 모아 보급 물자가 실린 수레들을 끌며 그 자리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도 활활 타오르는 화염의 불꽃 무리를 등지고 선 마르몽 남작이 기가 차다는 눈빛으로 저 멀리 도망치고 있던 프란츠와 그 기병 무리들을 뚫어지게 노려봤다. 기막히게도 발루아 왕국 제일의 기사라는 자신을 두 번이나 물먹인 존재를 기억 속에 각인시키며 내심 이를 갈던 마르몽 남작이었다.
로트링겐 공작의 차남이라... 다음번엔 귀족 체면이고 뭐고 간에 인정사정 봐주지 않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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